반세기, 기록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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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24) 하남 동사지(桐寺址) 오층석탑

    (124) 하남 동사지(桐寺址) 오층석탑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한 큰 절이 석탑만 남기고 모습을 감췄다. 이 절에 관한 문헌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1988년에 동국대학교 조사단이 경기 하남시 춘궁동에 위치한 오층석탑 지역을 발굴하면서 ‘동사(桐寺)’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나오기 전까지 이곳이 절터인 줄 아무도 몰랐다. 함께 발견된 주춧돌들 배열로 미루어 당대 최대 규모의 사찰인 것만 추정됐다.기와에 찍혀 있는 ‘동사(桐寺)’는 ‘불국사(佛國寺)’, ‘갑사(甲寺)’ 같은 절 이름으로 동사가 위치했던 하남은 한강 유역을 차지하려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전략적 요충지다. 지금은 고속도로 방음벽에 시야가 막혀 절터가 보이지 않지만 한강을 띠처럼 두른 명당자리다. 조선 왕의 유사시 피난처인 남한산성도 근처에 있다. 가상의 역사를 써본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고립된 왕을 구하기 위해 동사의 승병들이 전투를 벌였지만 패하고 청나라 군대가 불을 질러 석탑만 남기고 절이 전소, 그 흔적조차 사라졌다...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23) 수원 화성 서장대

    (123) 수원 화성 서장대

    두 사진은 경기 수원에 있는 화성(華城) 서장대(西將臺)의 1971년과 2024년의 모습이다. 화성은 당대의 지식과 기술이 집약된 한국 최고의 성으로, 정조(正祖)가 1794년 쌓기 시작하여 2년반 만에 완성하였다. 정조는 경기 양주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명당으로 알려진 수원 읍치 인근으로 이장하면서, 화성이라는 유례없는 계획도시를 만들어 수원 관아를 이전하고 주민들을 이주시켰다. 화성은 정조의 지극한 효심이 낳은 산물이라 할 수 있다.수도 남쪽을 지키는 국방 요새이기도 했던 화성은 해발 146m의 팔달산에 의지하여 쌓았으며, 둘레는 6㎞에 약간 못 미친다. 서장대는 화성의 가장 높은 부분인 팔달산 정상에 군사지휘소로 사용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화성에는 2곳의 장대(將臺)가 있다. 동쪽에 있는 동장대(東將臺)는 군사지휘소이자 군인들이 무예를 수련하는 장소여서 연무대(鍊武臺)라고도 하였다.서장대가 세워진 팔달산은 높지 않으나, ...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22) 강화도 용흥궁

    (122) 강화도 용흥궁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의 후손은 대대로 조선의 왕위에 올랐다. 아들인 정조, 손자인 순조, 고손인 헌종이 그들이다. 헌종이 후사 없이 23세에 사망함에 따라 정조계 왕통이 단절되었다. 순조 때 권력을 장악한 안동김씨 세도정치는, 김조순의 딸이자 대왕대비인 순원왕후의 주도로 왕실 종친을 샅샅이 뒤져 강화도에서 농부로 살던 이원범을 찾아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위를 잇게 하니 그가 바로 조선 제25대 국왕 철종이다. 영조가 숙종의 서자이고, 사도세자가 영조의 서자인데, 철종은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서자인 전계군의 서자이므로, 5대 서자로서 왕위에 오른 것이다. 철종은 할아버지와 이복형이 역모 등으로 사사되는 것을 목격했기에, 강화도에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행렬이 왔을 때 산속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함께 도망치던 형 이욱은 다리가 부러졌다고 한다.철종이 왕이 된 후 강화도에 있던 그의 집은 용흥궁(龍興宮)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었는데, 사진 속의 집이...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21) 유달산 ‘이난영 노래비’

    (121) 유달산 ‘이난영 노래비’

    “옥례야! 너, 가수해도 되겠다.” 일제강점기, 제주도에서 극장을 운영하던 일본인이 식모살이하는 조선인 소녀가 흥얼거리는 노래를 듣고 가수가 되는 방법까지 알려줬다. “영화필름을 실은 배가 제주도에 시간 맞춰 오지 않으면 극장에서 영화 상영을 못해, 그때 너를 무대에 세울게.” 제주바다에 풍랑이 심하게 치던 날, 제주도 극장에서 영화 상영 대신 유랑극단 공연이 펼쳐졌고 무대가 바뀌는 막간마다 노래하는 막간가수로 이옥례가 데뷔했다. 그 후, 이름이 점점 알려지면서 가수지망생들이 그토록 원하던 ‘히트’의 여신이 이옥례에게 손짓을 했다.당대 최고의 가수인 고복수, 남인수 등이 소속된 오케레코드사가 있었다. 현재로 치면 SM, 하이브 같은 메이저 기획사였다. 이 회사가 1935년에 공모한 ‘제1회 향토노래 현상모집’에서 ‘목포의 사랑’ 가사가 당선됐다. 오케레코드사는 일제에 수탈당하는 조선인들의 서러움을 건드려서 레코드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노래 제목을 ...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20) 삼각지로터리

    (120) 삼각지로터리

    같은 장소를 촬영한 사진이지만, 사진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기 어렵다. 1971년 흑백사진에는 둥글게 도는 고가도로가 보이는데, 가까운 쪽의 도로로는 지면과 연결된 육교를 통해 사람들이 오르내리고 있고 먼 쪽 도로에는 차들이 달리고 있다. 그리고 지상의 넓은 도로에는 버스가 지나고 있다. 2024년 사진에선 신호등이 설치된 넓은 네거리를 사람들이 건너고 있고, 왼쪽으로는 높은 아파트도 보인다. 두 사진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1가에 있는 삼각지로터리를 북쪽으로 바라보고 찍은 것이다.로터리란 차량이 교차하는 지점을 원형으로 만들어 신호등 없이 통행할 수 있도록 한 교차로를 말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에는 신촌, 청량리, 영등포 등의 부도심에 로터리가 조성돼 있었다. 로터리는 차량이 정차하지 않고 원형 교차로를 돌면서 직진, 우회전과 좌회전, 유턴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교통량이 많아지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다. 이 때문에 서울의...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19) 고려대 호랑이상

    (119) 고려대 호랑이상

    4월18일은 1960년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고려대 4·18 시위가 일어난 날이다.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대한 규탄은 각지의 자연발생적 시위로 폭발했는데, 특히 마산이 가장 격렬했다. 경찰의 폭력 진압과 발포로 9명이 사망하고 8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특히 4월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참혹한 모습의 마산상고 합격생 김주열의 시신이 바다에 떠오르자 국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보기 위한 동공 대신, 생각키 위한 슬기로운 두뇌 대신, 포탄이 들어 박힌 중량을 아시는가?”(유치환, ‘안공에 포탄을 꽂은 꽃’)이런 국민적 저항의 흐름이 4·18로 이어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4·18을 이해하려면 사진 속 호랑이를 상징으로 하는 고려대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고려대는 1905년 우리나라 사람이 설립한 최초의 민간 고등교육기관인 보성전문학교로 시작되었다. 경성제국대학으로 시작된 서울대나, 선교사가 설립한 연세대, 이...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18) 신문사 윤전기

    (118) 신문사 윤전기

    종이신문 전성기가 있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한국인 최초로 양정모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했을 때 신문사는 ‘호외(號外)’를 발행했다. 호외는 나라를 뒤흔든 사건·사고 발생 시 그 소식을 빠르게 전하려 발행하는 신문 형태의 인쇄물이다. 신문배달원들이 거리에서 “호외요!” 하고 호외 신문지 뭉치를 하늘 위로 뿌리면 뉴스속보가 삐라처럼 내려왔다. “사회에서 일어난 사건을 신속히 전달한다”는 신문 본연의 임무 외에 종이신문은 재래식 변소(화장실) 휴지, 가난한 집의 도배지, 학생들 교과서 책 표지 그리고 땡볕을 막아주는 모자로도 변신했다. 그뿐만 아니라 종이신문을 모아놓은 신문스크랩은 정보의 보고(寶庫)였다.열혈 신문 구독자 헤겔은 “조간신문을 읽는 것은 현실주의자의 아침기도”라고 했다. 앞날을 점치기 어려운 인간이 신에게 기도로 매달리는 것보다 신문을 펼쳐 세상 이치를 알아나가는 게 낫다는 말이다. 부르주아들이 정보를 독점하던 시절, 민중도 저렴한 ...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17) 용문사 은행나무

    (117) 용문사 은행나무

    1971년 사진은 푸른 잎을 달고 있는, 그리고 2022년 사진은 노랗게 물든 잎을 달고 있는 은행나무의 모습을 담고 있다. 1971년 사진의 나무 아래 서 있는 사람들과 2022년 사진의 나무 아래 오른쪽에 살짝 보이는 건물로, 이 나무가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 있다. 이 은행나무는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에 있는 신라시대 고찰인 용문사(龍門寺) 앞을 지키고 서 있다.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 은행나무는 최근에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이 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검사한 결과, 키는 38.8m, 둘레는 11.0m, 무게는 97.9t으로 측정되었고, 나이는 1018살로 추정되었다. 아파트 17층 정도의 높이이며, 중형승용차 69대에 맞먹는 무게다. 한국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의 실체가 밝혀진 것이다.이 나무의 기원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전설이 있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에 ...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16) 인사동

    (116) 인사동

    탑골공원 길 건너편에서 안국동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0.7㎞의 길을 인사동길이라 부른다. 인사동길은 원래 안국동천을 복개해서 1920년대에 만들어졌다. 지금의 돌길 형태의 길은 건축가 김진애의 설계로 2000년에 재조성된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어 양반들이 벼슬에 못 오르자 북촌에 거주하던 양반계층이 붕괴되었다. 그리하여 양반들이 소유하던 고서화, 도자기 등 골동품이 흘러나오게 되었다. 1926년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가 건립되자, 가까운 거리에 있던 인사동은 일본인들이 한국의 골동품을 수집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인사동은 골동품 상점으로 유명했지만, 가짜 고서화 사건 등으로 권위가 실추되자 1960~1970년대에 화랑이나 표구, 필방, 공예품 등 미술 관련 상점이 많이 들어서게 되었다. 미술 관련 상점들이 늘자 미술 전시장들도 늘어나게 되었고, 그리하여 작가, 예술인 등이 모여들다 보니 전통찻집, 토속음식점 등이 생겨...
  • [반세기, 기록의 기억] (115) 김포가도

    (115) 김포가도

    1인당 국민소득 250불이던 1971년에 촬영한 김포가도 사진은 전혀 한국 같지 않은 모습이다. 논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고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있고 중앙분리대에는 분수대도 늘어서 있다. 목가적인 풍경이다. 평소 이 분수대는 가동하지 않다가 한국을 방문한 외국 대통령이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진입하면 환영 세리머니로 물줄기를 뿜어 올렸다.대통령 박정희의 해외순방 시에도 분수대는 환송의 물을 뿜어냈다. 서울의 서쪽 끝, 양화대교 남단에서 김포공항에 이르는 김포가도는 1963년 완공되었다. 당시 한국에서 가장 긴 7.1㎞ 콘크리트 포장도로로 ‘공항로’가 원래 도로명이었지만 남진의 노래 ‘김포가도’가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은 ‘김포가도’라 불렀다.해외여행이 금지된 시절, 외국에 가는 박정희를 포함한 권력자들에게 김포가도는 꽃길이었다. 하지만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출국할 수 있는 민중에게는 불안과 슬픔이 교차하는 도로였다. 휴전선으로 북쪽이 막혀 있어 국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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