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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우이동의 옛 그린파크호텔 입구
1971년과 2023년 사진은 같은 장소를 찍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멀리 산이 보이고 길 양옆에 숲이 있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숲의 모습도 많이 달라져 뒤로 보이는 두 개의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만 두 사진이 동일한 곳에서 촬영된 사실을 입증한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두 바위 봉우리가 북한산의 최고봉인 백운대와 인수봉임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두 봉우리가 사진처럼 보이는 곳은 어디일까?먼저 1971년 사진에는 정면에 ‘백운문(白雲門)’이라는 현판을 단 전통 양식의 웅장한 대문이 보이고, 문 뒤 오른편 숲속에 현대식 건물이 살짝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문을 향해 미니스커트 차림의 여성들이 오르막길을 가고 있다. 2023년 사진에는 큰 대문이 사라지고, 대신 경비실로 추정되는 작은 구조물 좌우로 차량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다. 길 양편의 숲도 새로 조성되었으며, 오른쪽으로는 지은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북한산의 모... -
(113) 강화 초지진
강화 초지진(草芝鎭)은 바다에서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한 해안 진지다. 초지진은 주변 평지보다 조금 높게 평평한 요새로 조성되었는데, 이것을 돈대(墩臺)라 부른다. 초지진은 원래 안산의 초지량(현재의 초지동)에 있던 것을 옮겨오면서 이름까지 따라온 것이다. 조선 효종 7년(1656년)에 처음 구축했고, 1679년 숙종 때 성으로 완성했다고 한다. 1971년 사적 제225호로 지정되었다.강화는 한강 입구이므로, 강화가 뚫리면 한양을 막을 수 없어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강화 초지진은 지어진 지 200년이 넘은 고종 때가 되어 역사에 기록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해군,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의 해병대가 이곳을 점령했고, 1875년 일본의 운요호에 의해 파괴되었다. 운요호와의 교전은 다음해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로 귀착되었고, ‘문호 개방’으로 초지진은 할 일이 없어져 파괴된 상태 그대로 방치되었다.사진은 초지진의 출입문 쪽... -
(112) 진주성 3·1독립운동 기념비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맞서 조선인들은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서울 종로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서 조선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그런데 시위를 주동할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조선민족대표 33인은 한 명도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대신 탑골공원에서 300m 떨어진 태화관 술집에서 그들끼리 행사를 했다. 이 시각, 조선인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탑골공원을 나섰다. 세계 제국주의 역사상 가장 가혹한 일본 헌병과 기마부대를 상대해야 했다. 유혈충돌이 발생했고 ‘대한독립만세’ 함성은 증폭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탑골공원 시위 이후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 뇌관은 진주에서 터졌다. 많은 사람이 자연스럽게 모일 수 있는 장소에서 시위를 벌여야 했기에 시위 장소는 진주, 오일(五日) 장터로 정해졌다. 3월18일 진주헌병대는 조선총독부에 전화로 보고했다. “진주장터에서 조선인들 소요가 발생했습니다. 폭동분자들 중엔 ... -
(111) 군산 내항 뜬다리 부두
두 장의 사진은 전라북도 군산시 장미동에 있는 1971년과 2024년의 군산 내항 모습이다. 두 사진 모두 배들을 육지에 바로 접안시키지 않고, ‘뜬다리 부두’라는 육지에서 바다 쪽으로 연결한 다리 모양의 구조물에 대어 놓았다. 이 구조물은 부잔교(浮棧橋)라고도 한다.뜬다리 부두는 커다란 조차를 극복하기 위한 시설이다. 조차는 달과 태양의 인력에 의해 발생하는 썰물과 밀물 때 해수면의 수직적 차이다. 우리 서해안은 조차가 세계적이다. 서해가 동중국해를 향해 넓게 열려 있는 바다인 데다 수심이 얕기 때문이다. 조차는 아산만이 8.5m로 가장 크며, 이곳에서 북쪽과 남쪽으로 갈수록 감소하는데, 군산은 6.2m 정도이다.뜬다리 부두는 육지와 다리로 연결된 폰툰이라는 상자형 구조물에 배를 대어 여객 승하선과 화물 하역을 할 수 있게 한 시설로, 폰툰은 조차에 따라 아래위로 움직인다. 뜬다리 부두는 서해안 여러 항구에 설치되어 있지만, 유독 군산 내... -
(110) 서울역 고가도로
인구 55%가 ‘민족 대이동’에 나섰다는 설연휴가 끝났다. 상당수가 서울역을 오고 갔을 것이다. 1900년 경인선 종점으로 영업을 개시한 남대문역은 1923년 경성역으로 개명되었고, 1947년 서울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사진 왼쪽에 보이는 경성역사가 완공된 시기는 1925년이다. 도쿄역에 이어 동양 제2의 규모였다. 그러나 KTX 운행에 맞춰 2003년에 지금의 민자역사가 지어지면서 사진 속 구 서울역사는 폐쇄되었고, ‘문화역서울 284’란 이름의 전시용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했다. 1993년에 지어진 24층의 연세재단세브란스빌딩 등이 1971년 사진에는 보이지 않고, 자동차도로 확장으로 서울역 광장이 크게 축소된 것도 눈에 띈다.수많은 애환을 담은 서울역 광장 풍경이지만, 1971년 조성봉 선생이 찍으려 한 것은 서울역이 아닐 수도 있다. 사진의 전면에 걸쳐진 다리는 만리동과 회현동을 잇는 서울역고가도로인데, 사진 촬영 1년 전인 1970년 8월15일... -
(109) 강화대교
1971년에 촬영된 강화대교(구 대교) 사진과 동일한 구도의 현재 모습을 담아내기 위해 강화대교에 도착했다. 육지와 섬(강화도)을 연결하는 강화대교는 1969년 2차선 도로로 완공되었다가 늘어나는 차량을 감당하기 어려워 폐쇄됐다. 현재는 사람과 자전거만 다닐 수 있고 구 대교라 부른다. 2024년 사진을 보면 오른쪽이 구 대교이고 왼쪽이 신 대교다.사진을 찍으려 구 대교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찾다가 ‘갑곶선착장 집단양민학살지’라는 표지판을 발견했다. 방치된 낡은 표지판은 글자의 페인트 빛이 바래져서 그 내용을 간신히 읽었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에 부역(협력)했다는 강화도 주민 60명(70세 노인, 갓난아기 포함)을 강화향토 방위특공대가 재판절차도 없이 갑곶선착장에서 총살했다. 갑곶선착장은 구 대교 다리 밑이다.사진기 뷰파인더에 구 대교가 보이고 셔터를 누르려는 순간, 부역자들이 나타났다. 갑곶선착장 가는 길은 가팔라서 어린이 부역자들은 엄마 손을 ... -
(108) 태평로
태평로(太平路)라는 길은 전국적으로 여러 곳에 있다. 대구 중심가에도 있고, 경기 성남시에도 있다. 누구나 꿈꾸는 태평성대(太平聖代)의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지명으로 많이 쓰인 것이다. 서울에도 태평로가 있었다. 교보문고가 있는 세종대로사거리에서 서울시청과 숭례문을 거쳐 서울역에 이르는 길이 태평로였다. 2010년 광화문에서 세종대로사거리에 이르는 세종로와 합쳐져 ‘세종대로’가 되면서 태평로라는 길 이름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서울 태평로의 이름은 숭례문 서북쪽의 현재 대한상공회의소 부근에 있었던 태평관(太平館)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태평관은 조선 초부터 임진왜란 때까지 명나라 사신이 머물던 숙소였다.숭례문과 서울시청 사이의 태평로는 현재 서울 도심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가장 넓고 중요한 도로이지만, 그리 오래된 길은 아니다. 조선시대 한양 도성의 주된 남북 도로는 숭례문에서 동북쪽으로 활모양으로 휘어져 청계천을 건너 종각까지 이어진 남대문로였다. 그래서 숭례... -
(107)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TV부조정실
신문사는 신문사라 하는데 방송사는 방송사라 하지 않고 왜 ‘방송국’이라고 할까. 일제강점기에 경성방송이 설립됐고 해방 후 경성방송은 서울중앙방송국으로 이름이 변경되면서 영어 약칭으로는 KBS라고 불렀다. 정부조직은 실(室), 국(局)으로 나뉘는데, 그중에서 KBS는 박정희 정권의 국정 홍보를 담당하는 국영방송국이었다. 대학교에 소속된 대학방송국 같은 기관이었다. 그러다가 한국방송공사법이 만들어지면서 문화공보부에서 분리되어 1973년에 KBS가 공영방송이 됐다. 왼쪽 사진은 1971년 KBS가 공영방송이 되기 전의 서울중앙방송국 TV부조정실이고 오른쪽은 2023년 KBS TV부조정실(일명 ‘부조’) 모습이다. 프로그램을 만들 때, “카메라 투, 컷! 카메라 원, 스탠바이! 뮤직 스타트~”라고 PD가 외치는 곳이 TV부조다. 이 소리에 따라 스튜디오 카메라들이 움직이고 엔지니어는 화질, 음질을 조정(제어)하여 녹화방송을 하거나 생방송을 한다.제작 완성된 프로... -
(106) 덕수궁 석조전
수도권 전철 서울시청역 2번 출구로 나오면 덕수궁이 있다. 원래 남이의 역모사건 가담자인 조영달의 집이 있었는데, ‘역적’의 집이라 조정이 몰수하여 연경궁이라고 이름을 짓고 별궁으로 삼았다. 그 이후 이곳은 파란만장한 역사의 현장이 된다. 임진왜란 때 백성들이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을 모두 불태웠기 때문에 환도한 선조는 살 곳이 없어 연경궁을 개·보수해 살게 되었고, 정릉이 원래 여기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정릉동행궁으로 불리게 되었다.광해군이 확장을 명하고 경운궁이란 이름을 하사해 정식 궁궐로 승격되었지만,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격하해 오랫동안 버림받았다. 경운궁이 우리 역사의 현장으로 재등장한 것은 1896년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던(‘아관파천’) 고종이 이듬해 이곳으로 환궁했기 때문이다. 근처에 러시아,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공사관 등이 밀집해 일본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이 선포... -
(105) 반도호텔과 롯데호텔
2024년 사진은 서울 중구 소공동에 위치한 롯데호텔 모습이다. 오른쪽 건물이 1979년에 지은 본관(메인 타워)이며, 왼쪽이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1988년에 문을 연 신관(이그제큐티브 타워)이다. 본관은 지상 38층, 지하 3층 규모로, 개관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호텔이었고, 31층의 삼일빌딩을 누르고 서울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 되었다. 본관 건축에는 경부고속도로 공사비에 버금가는 비용이 들었다.흥미로운 사실은 본관 자리에는 그전에도 반도호텔이라는 호텔이 있었다는 것이다. 1971년 사진의 육중한 건물이 바로 반도호텔이다. 이 호텔은 1936년 노구치 시타가우라는 일본인이 만들었다. 그는 당시 “조선반도의 사업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한반도에서 여러 사업을 하였다.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함경남도에 부전강수력발전소를 건설하고, 흥남에 그 유명한 질소비료공장을 운영하였다. 그가 설립한 회사는 지금도 화학공업, 건설업을 위주로 한 일본 굴지의 대기업이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