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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
[1970년대 중반, 일기] 부모님과 여행을 가기 위해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터미널이 보물1호 흥인지문(동대문) 옆에 위치해서 부모님도 쉽게 찾아오셨다. 예전에는 이곳이 경성(서울)전차 차고지였는데 전차운행이 중단되면서 1972년에 동대문 고속버스터미널이 건립됐다. 1969년부터 경인, 경부, 호남고속도로가 잇따라 개통되면서 ‘고속버스’라는 차종이 등장했고 ‘터미널’이라는 영어 단어와 듀엣처럼 합체하여 ‘고속버스터미널’이 탄생했다.우리는 벤츠 마크가 부착된 고속버스에 승차했다. 한국은 고속버스 완성차 생산능력이 없어 독일 벤츠회사에서 직수입한 버스를 사람들은 ‘벤즈 버스’라 불렀다. 출발지와 도착지 사이, 중간에 정차하지 않고 고속도로를 통행하는 게 고속버스다. 그런데 시골 국도를 완행으로 달리는 시외버스 업체들도 사명에 고속버스를 표기했다. 고속버스, 이름만으로도 괜히 멋져보였다.복잡한 서울 시내를 벗어난 고속버스가 제3한강교(현재 ... -
(103) 한국의집
서울 중구 필동의 대한극장 뒤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고즈넉한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한국의집’이란 간판이 걸린 이곳은 고급 한정식 식당이자 전통혼례와 전통문화체험, 전통예술공연이 이뤄지는 곳으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유명하다. 이곳의 역사는 파란만장하다. 이 터는 원래 ‘사육신’ 박팽년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예로부터 남산의 4대 명당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조선시대 ‘남촌’이라 불린 인근 동네는 가난한 선비나 중인들이 주로 살던 곳이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촌으로 변모했고, 이곳은 조선총독부 2인자인 정무총감의 관저로 사용됐다. 1945년 일본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이 여운형 선생을 불러 협상을 진행한 역사적 현장도 이곳이다. 해방 후 이곳은 미군정청 관리로 들어가면서 미군의 숙소이자 위락시설로 활용되었고, 이 무렵부터 ‘Korea House’로 불리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4년밖에 안 된 1957년, 대통령... -
(102) 명동 밤 풍경
며칠 뒤면 크리스마스다. 산타클로스의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를 비롯해 벌써 마음이 설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1970년대에는 지금보다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젊은이들이 훨씬 많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밤새도록 친구, 연인과 마음 놓고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는 1945년 9월부터 1982년 1월까지 ‘야간통행금지’라는 제도가 있었다. 치안 및 공공질서 유지, 청소년 보호 등을 명목으로 국가가 국민이 밤에 다니는 것을 법으로 막았다. 1961년부터 이 제도가 폐지된 1982년까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하였다. 만약 이를 위반하여 적발되면, 가까운 파출소에서 지내다 통행금지가 해제될 무렵에 즉결심판을 받고 벌금을 낸 후 풀려났다.그런데 이 야간통행금지가 일시적으로 해제되는 때가 있었으니, 야간에 통행이 많아지는 연말연시와 크리스마스이브 그리고 부처님오신날이었다. 부처님오신날은 종교의 ... -
(101) 백담사
영화 <서울의 봄>은 전두환과 그의 똘마니 하나회가 1979년 12월12일에 벌인 군사반란 만행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날 이후, 전두환은 광주시민 학살, 천문학적 비자금 조성 등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전두환 덕분에 알려지기 시작한 절이 하나 있다. 백담사다. 신라시대 창건 이래 수차례 화재가 발생, 다시 짓기를 반복하다보니 무량수전 기둥 같은 천년사찰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는 신식 전각 절이다. 물의 기운을 빌려 불을 막고자 설악산 대청봉과 절 사이에 100개의 담(潭), 연못이 있다고 해서 백담사(百潭寺)라 칭했다. 지금도 셔틀버스가 아니면 통행이 불편한 백담사는 독립 운동가이자 승려인 한용운이 입산수도해 ‘님의 침묵’ 등 저작물을 남기면서 인지도가 생겼다.두 장의 사진에 보이는 백담사 앞을 흐르는 영실천 물처럼 시간이 흘러 1988년에 ‘부정축재’ 위기에 몰린 전두환이 부인과 백담사로 피신했다. 이때부터... -
(100) 영락교회
남산1호터널을 나와서 쭉 내려가 퇴계로를 지나면 왼쪽에는 명동성당, 오른쪽에는 영락교회가 있다. 지난 12월2일은 영락교회 창립일이다. 1945년 세워진 영락교회는 한국 최초의 대형교회로서 예장통합 교단을 대표하는 교회 중 하나이다. 영락교회의 뿌리는 북한에 있다. 특히 1907년 대대적인 회개와 고백 운동으로 개신교의 대부흥을 연 평양은 일제강점기에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리며 한국 개신교의 교세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평양에서 교사·교목으로 활동하다 신의주에서 목회를 이끌었던 한경직 목사는, 해방 이후 이북에서 기독교 탄압이 시작되자 월남해 베다니전도교회를 창립하니 그것이 영락교회의 시작이다. 영락교회는 월남한 기독교인들의 마음의 안식처이자, 월남에 얽힌 역사를 공유하는 단단한 신앙공동체가 되었다. 특히 이북에서 신앙을 탄압받고 토지개혁 와중에 땅을 잃고 심지어 가족이 처형당하기도 한 체험은 신도들의 강한 반공의식의 근거가 ... -
(99) 황궁우와 조선호텔
두 사진에는 서로 대비되는 두 개의 건물이 보인다. 앞쪽에는 높은 화강암 기단 위에 기와를 이은 전통 양식의 3층 팔각 건물이 있고, 뒤쪽에는 휘어진 모양의 20층 현대식 빌딩이 서 있다. 앞 건물은 황궁우(皇穹宇)이고, 뒤 건물은 웨스틴조선호텔이다. 50여년 사이에 호텔 건물의 외관이 조금 바뀐 것 외에는 큰 변화가 없다.황궁우는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환구단의 시설이다. 일제에 의해 명성황후를 잃은 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대사관에 약 1년 동안 머물다 덕수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나라를 지키려고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자신은 황제가 된다. 그런데 황제가 되려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했고, 이를 위해 1897년에 만든 시설이 환구단이다.중국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베이징의 천단(天壇)을 본떠 만든 환구단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에 따라 둥글게 만들었다. 이에 그 명칭... -
(98) 경성전차
“제 이름은 경성전차입니다. 고종 임금이 명성황후의 능이 있는 홍릉 행차 시, 가마로 이동하는 것보다 전차로 가는 게 경비가 저렴하다고 해서 전차가 1899년에 개통됐습니다. 저는 전기로 움직이는 노면 전차로 1960년대 중반까지 서울시내 철로 운행을 했습니다.” “운행 잘하던 전차 철로가 왜 갑자기 땅에 묻혔죠?”“광복 이후, 서울의 자동차와 버스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도로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전차가 교통 방해자가 됐습니다. 그러자 전차사업을 중단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습니다. 이 와중에 미국 존슨 대통령의 한국 방문에 맞춰 서울시장이 전차 철로가 지저분하다고 1966년에 그대로 묻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공구리를 쳤습니다.”“공구리라는 일본말은 삼가 주세요.”“죄송합니다. 경성의 모든 전차를 일본인들이 운전해 일본말이 몸에 뱄습니다.”“검사님! 공소사실의 요지를 진술해 주세요.”“피고인 전차는 두 건의 살인을... -
(97) 연세대 신촌캠퍼스 독수리상
우리나라에는 캠퍼스에 동물 동상이 있는 대학들이 많다. 건국대에 황소가 있다면 연세대에는 독수리가 있다. 연세대 독수리상이 1971년에 세워졌으니, 연세대 신촌캠퍼스가 1885년 지금의 자리에 세워진 것을 감안하면 매우 뒤늦은 일이다. 일제강점기 보성전문 때부터 호랑이가 상징이었던 고려대와 달리 연세대는 상징동물이 없었다. 4·19혁명 이후 자유의 기상이 하늘을 찌르던 1960년 가을 연고전을 앞두고 고려대가 대형 호랑이 깃발을 만들어 애드벌룬으로 띄우기로 하자, 연세대는 연세춘추 신문사 편집국장의 제안에 따라 독수리 깃발을 급조했다. 많은 연세대 학생들이 ‘고려대는 벌거벗은 야산이므로 호랑이라면, 연세대는 나무가 울창한 밀림이므로 사자’라는 주장에 공감해 사자를 주장했지만, 연고전 당일 ‘독수리와 호랑이의 대결’이라는 언론 보도가 도배되면서 독수리로 굳어져 버렸다고 한다. 독수리가 연세대의 상징 동물이 되자 1971년 학생들은 700만원을 손수 ... -
(96) 명동예술극장
한국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서울시 중구 명동 한복판에 있는 명동예술극장은 일제강점기인 1936년 명치좌(明治座)라는 극장으로 개관하였다. 명치, 즉 메이지라는 명칭은 일본 왕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당시 명동 일대를 명치정(明治町)이라고 불렀다. 명치좌는 1100여명의 관객을 수용하는 지하 1층, 지상 4층의 건물이었고, 주로 일본 영화를 상영하는 일본인들을 위한 위락시설이었다. 명동의 안쪽 사거리에 위치하여 건물의 모서리 부분을 정면으로 하여 양 측면이 같은 모양으로 지어졌다. 이 건물은 일본 도쿄에 있었던 유명 극장인 다이쇼칸(大勝館)을 그대로 베꼈다고 한다.명치좌는 해방 이후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46년 ‘국제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1947년에는 서울시 소유가 되어 ‘시공관(市公館)’이란 이름으로 집회시설로 쓰이거나 연극 등을 공연하였다. 1957년에는 ‘명동예술회관’으로 개칭되어 국립극장 역할을 맡게 되었으며, 1962년에는 다시 ‘명동국립극장... -
(95)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11월3일은 학생의날이다. 1929년 11월3일 광주 학생들이 일본 제국주의 식민통치에 항거하여 대규모 시위를 벌인 날을 기려 광복 후 학생의날로 지정됐다. 그러나 박정희는 학생들이 모이는 집회를 두려워하여 학생의날을 폐지했다. 그러다가 1984년 학생의날이 부활했는데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의 유화책이었다. 전두환 시절, 학생의날 기념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가담)한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건 기념품이 아니라 구속영장이었다. 학생의날에 시위대가 외친 구호는 ‘광주학생운동 계승하여 전두환 정권 타도하자!’였다. 독재정권 타도를 위해 계승하려던 광주학생운동 정신은 무엇일까?3·1 만세운동 이후 6·10 만세운동에 놀란 일제는 조선인 학생들의 독서모임까지 금지했다. 일제의 악랄한 탄압으로 ‘독립’이란 말조차 꺼내지 못했던 그때, 광주 학생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섰다. ‘분연히’는 앞날이 창창한 학생들이 자신들이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구속을 각오한 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