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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설악산 육담폭포 출렁다리
설악산 단풍이 절정이다. 기후변화로 평균기온이 상승하면서 지난 15년간 연간 평균 0.33일씩 단풍시기가 늦어지고 있지만, 결국 올해도 단풍은 왔다. 외설악의 들머리인 소공원을 들어와 설악산 반달가슴곰 조형물을 만나면, 조형물 왼쪽에 육담폭포, 비룡폭포, 토왕성폭포 전망대로 가는 길을 표시하는 이정표가 보인다. 쌍천 위에 놓인 긴 비룡교를 지나면 숲길이 이어진다. 숲길이 끝나면 계곡이 나오는데, 그 계곡길을 400여m 올라가다 덱 계단을 만나면 육담폭포가 눈앞에 펼쳐진다. 1971년 사진에서, 단풍 아래 줄지어 사람들이 지나고 있는 다리의 이름이 ‘출렁다리’다. “흔들지마세요!”라고 다리에 경고문이 있듯이 흔들림이 심하다. 출렁다리 아래에 흐르고 있는 물이 바로 육담폭포이다. 육담에서 담(潭)은 ‘못’을 가리키는 것으로 깊게 물이 괸 웅덩이를 말하는데, 따라서 육담폭포라 함은 못이 6개가 있는 폭포라는 뜻이다. 출렁다리를 지나면 비룡폭포로 ... -
(93) 한강대교
서울 용산구 이촌동과 동작구 본동을 잇는 한강대교는 1900년에 건설된 기차가 다니는 한강철교에 이어 서울 한강에 두 번째로 놓인 다리이다. 1917년 완공된 한강대교는 사람과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다리여서 ‘한강인도교(漢江人渡橋)’라고 불렀는데, 한강의 하중도인 중지도(中之島)를 가운데 두고 남북 양안에서 교량을 건설해 서로 연결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중지도는 지금 노들섬이라 부른다. 한강대교가 놓인 노량진(鷺梁津), 즉 노들나루는 조선시대 한양에서 수원을 거쳐 충청도, 전라도로 가는 사람들이 한강을 건너던 교통량이 가장 많은 나루터였다.한강대교는 줄곧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관문 역할을 해 왔으며, 한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되어 재건되었으며,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폭파되었다가 1958년에야 완전하게 복구됐다. 1965년에는 양화진(楊花津) 나루터에 양화대교가 건설되면서 ‘제2한... -
(92) 진주성, 남강 유등축제
일본군이 뒤로 물러선다. 전국시대 오랜 내전 동안, 성(城)을 공격해서 뺏는 실전 경험이 풍부한 일본군이 진주성에서 조선군과 혈투를 벌이다가 공격을 멈춘다. 진주성은 천혜의 절벽요새다. 성 앞으로 남강이 흐르고 성 둘레에는 해자를 파서 물을 채워 넣었다. 대나무 다리를 만들어 야간에 남강을 건너던 일본군 기습을 간파한 김시민 장군이 명령을 내린다. “유등을 띄워라.”화약을 장착한 기름 등불인 유등(油燈)이 둥둥 떠다니며 남강을 환히 드러내자 조선군 화살이 불벼락처럼 쏟아진다. 일본군이 퇴각한다. 1592년 진주성 1차 전투, 진주대첩이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뿐. 그 다음해 일본군이 다시 진주성으로 집결한다.“진주성 내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할 것,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일지라도.”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린 진주성 2차 공격명령이다. ‘악귀’로 불린 가토 기요마사 등 일본 최고무장들이 이끄는 10만 병사가 진주성을 포위... -
(91) 부산 광복동
광복동(光復洞)은 부산의 원도심인 중구의 행정동이다. 지금의 부산은 조선 시대에는 ‘동래부’로 불렸고, 부산포는 동래부의 작은 지역을 가리켰을 뿐이다. 그러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해 부산포 일대가 개항장이 돼 일본의 조계가 형성되었고, 1910년 국권피탈 후에는 동래부 전체가 ‘부산부’로 개칭됨에 따라 부산은 이 넓은 지역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발전하게 됐다.당시 개항장 지역은 지금의 중구·동구·서구와 영도구에 해당하는데, 중구의 광복동에는 개항 이전에 이미 일본과의 통상 지역인 ‘왜관’이 설치돼 있었기에 개항 이후 중구는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부산의 최고 번화가가 됐다. 그 중심인 광복동은 당시 ‘긴 길’의 의미로 ‘장수통(長手通)’이라 불렸는데, 해방과 함께 ‘광복동’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광복동은 매립에 의해 생긴 남포동과 함께 오랫동안 부산을 대표하는 번화가였다. 관객 1000만명 돌파 영화로도 유명한 <국제시장>이 광복... -
(90) 광화문광장
2023년의 사진에는 세종대왕 동상, 광화문 등이 보여 이곳이 어디인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이 많겠지만, 1971년의 사진만으로는 어느 곳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눈 밝은 사람들, 그중에서도 적어도 50대 이상의 사람들만 넓은 길의 모습과 멀리 살짝 보이는 돔형 첨탑을 가진 건물 등으로 이곳이 세종대로, 지금의 광화문광장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지붕에 첨탑이 있는 건물은 지금은 사라진 중앙청, 옛 국립중앙박물관이다.1971년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적지 않다. 우선 차보다 사람이 훨씬 많으며, 길을 따라 줄 지어선 공중전화 부스가 눈에 띈다. 20개 가까운 많은 전화부스는 이곳이 사람들의 통행량이 많은 번화가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부스 바닥에는 가지런히 타일이 깔려 있고, 번호가 적힌 유리문이 달린 금속제의 부스 안에는 오렌지색 전화기가 설치돼 있다. 그런데 부스 속 여성은 전화를 걸지 않고 책을 읽고(?) 있다. 두꺼워 ... -
(89) 독도 촛대바위
50년 전 사진을 동일한 위치에서 다시 찍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과거에는 없었던 나무와 건물이 촬영대상인 피사체를 가리기 때문이다. 개발 사업으로 지형이 몰라보게 변해 사진을 찍었던 예전 위치를 찾는 것도 만만치 않다. 게재된 1970년 컬러사진은 색깔이 바랜 거 말고는 현재 사진과 데칼코마니다.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이백 리 독도에 인접한 바위섬들 중에서 중앙에 뾰족한 게 촛대바위다. 초를 꽂아놓는 촛대처럼 생겼다고 지어진 이름인데, 다른 위치에서 보면 투구를 쓴 장군의 얼굴처럼 보여 장군바위라고도 부른다. 누군가는 검지를 곧추세운 모습이 남성을 상징한다 해서 송곳바위라고도 한다. 인간보다 훨씬 앞서 지구에 태어난 바위를 인간의 시각으로 붙인 이름들이다.그런데 촛대바위 촬영은 인간의지로 할 수 없다. 날씨가 허락해야만 가능하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독도에 입도할 수 있다’는 말처럼 변화무쌍한 독도 날씨에 배가 뜨지 못하면 사진을 찍지 못한다.... -
(88) 인천 어시장
인천 연안부두에 가면 인천 최대의 수산물시장인 ‘인천종합어시장’이 있다. 이 시장의 연원을 찾아가면 1902년 대한제국 시절에 닿는다. 인천어시장은 1902년 중구 신포동에서 시작됐다. 1883년 인천 개항 이후 재판·치안·과세 등 치외법권을 가진 외국인 거류 지역인 ‘조계(租界)’가 설치되자 인구가 크게 늘었고, 당연히 그 인구를 위한 시장이 배후지에 등장했다. ‘신포(新浦)’라는 말 자체가 ‘새로운 포구’라는 의미인데, 일제강점기 때의 이름 ‘신정(新町)’이 해방 이후 바뀐 것이라 한다. 지금 신포동에는 신포국제시장이 있는데 어시장과 함께 생겼던 채소시장이 면면히 내려온 것으로, 유명한 만두 프랜차이즈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생선을 주식으로 하는 일본인들의 급증이 어시장을 성행하게 한 이유였다. 어시장은 1931년 월미도가 있는 북성동으로 옮겼다가 1975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즉 1971년 사진과 2021년의 사진은 다른 장소의 것이다... -
(87) 뚝섬 나루터와 영동대교
두 사진은 1971년과 2023년의 한강변 풍경이다. 먼저 1971년의 빛바랜 흑백 사진을 보면, 모래와 자갈로 이루어진 강기슭에 크고 작은 배가 정박해 있다. 가운데 보이는 ‘청담 5호’라는 배에는 목적지가 크게 적혀 있는데, ‘봉은사’이다. 배들 뒤로 보이는 다리는 영동대교이다.서울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청담동을 잇는 영동대교는 영동지구 개발을 위해 1970년 착공하여, 서울 한강의 7번째 다리로 1973년 개통되었다. 따라서 이 사진은 한창 다리가 건설 중일 때여서, 공사에 사용된 크레인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영동(永東)’이란 명칭은 영등포의 동쪽 지역이라는 뜻으로, 1970년대 강남 개발 당시 지금의 ‘강남(江南)’을 대신하는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이 다리의 가설로, 현재 한국의 첨단 업무지역이자 최고 부촌으로 꼽히는 삼성동과 청담동 일대가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다.1971년 사진은 한강 북쪽에 있던 뚝섬 나루터의 모습을... -
(86) 대구 동촌유원지
1971년 대구 동촌유원지를 찍은 사진이 지금 모습이라면 ‘영업허가’가 나올까? 대구의 자연풍광을 품고 있는 팔공산이 보이고 금호강이 유유히 흐르는 동촌유원지는 접근성이 좋아 사람들이 많이 찾는 휴식처다. 나룻배는 사람이 양팔로 노를 저어야 갈 수 있다. 직업이 뱃사공이 아닌 이상, 초보자가 배의 방향을 바꾸는 건 쉽지 않다. 1971년 사진을 보면 구명조끼도 착용하지 않았다. 2인 탑승 정원을 초과한 나룻배는 당연히 지붕도 없다. 느닷없는 소나기에 당황해서 탑승객이 일어서는 순간, 배는 기울면서 뒤집힌다. 전복사고에 대비한 튜브와 구조요원이 전무한 상태에서 오로지 자신의 수영실력만으로 물에서 나오지 못하면 신문기사, 사망자 명단에 오를 확률이 높다. 1971년 사진의 출렁다리에는 난간, 펜스가 없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빈병이나 돌멩이를 투척하면 나룻배 탑승자들이 맞을 수 있고, ‘투신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도 용이한 곳이다. 지금 시점으로 보면 ... -
(85) 퇴계로 지하차도
서울역에서 퇴계로로 진입해서 명동역을 지나자마자 지하차도가 나온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무수한 지하차도 중에 별다를 것 없어 보이는 이 지하차도를 1971년 당시 조성봉 선생이 카메라에 담았던 이유는, 이것이 그해 8월15일에 완공되었기 때문이다.그 당시 지하차도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퇴계로 지하차도 위에는 ‘축 개통’ 글자가 걸리고 태극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이 탄 고급 외제승용차가 지나가는 장면을 ‘대한뉴우스’는 화면에 담았다. 1971년 사진 왼쪽에 보이는 ‘세종호텔’ 앞은 상습 정체 구간이었다. 당시 언론은 자동차가 세종호텔 앞을 ‘논스톱’으로 지나가게 된 것을 대서특필했다.1971년 사진을 보면 지금 사진에는 없는 고가도로가 보인다. 1969년 3월22일에 개통한 ‘삼일고가도로’다. 왼쪽으로 따라가면 당시 최고(最高)의 건물을 자랑한 삼일빌딩이 나오고 오른쪽을 타고 올라가면 남산 1호터널이 나온다. 두 건축물 모두 197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