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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경의 한뼘 양생
  • [이희경의 한뼘 양생]불타 죽은 멧돼지를 애도하며
    불타 죽은 멧돼지를 애도하며

    지난 주말 경북 울진에 문상을 다녀오면서 나는 차창 밖으로 새까맣게 타버린 산을 근 한 시간이나 보게 됐다. 서 있는 채로 숯이 된 나무들, 하부 목질 수관이 타버려 꼭대기 잎들이 누렇게 죽어가고 있는 나무들. 의성·안동·청송·영양·영덕 산불 지역의 모습은 처참했다. 피해는 광범위하다. 4500채 정도의 집이 불탔고, 생계 수단이었던 하우스도 사과밭도 양봉장도 양식장도 다 타버렸다. 가축은 20여만마리가 폐사했다. 사람도 많이 상해, 죽거나 다친 사람이 모두 75명이다.영덕 근처에서 혼자 사시던 지인 어머니는 담대한 성격이었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피하라는 방송이 계속 나오고, 하늘은 벌겋게 물들고, 검은 재가 마당으로 날아오자 어쩔 줄 몰라 하셨다. 후배 부모님은 안동 시내에 거주하시는데 “안동 시내 대피 바람”이라는 문자를 다섯 번이나 연속 받자, 밤에 울면서 딸에게 전화했다. 후배는 지역의 온라인 육아카페나 긴급 신설된 모바일 메신저 오픈채팅방에 들어가, 지역 시민들이 올린...

    2025.04.24 20:26

  • [이희경의 한뼘 양생]우리에게는 마을약사가 있다
    우리에게는 마을약사가 있다

    “진짜 약국을 만들자!”인문학공동체 공부가 마을경제에 꽂혔을 때 작업장을 만들었고, 청(소)년에 꽂혔을 때 마을학교를 만들었던 것처럼, 양생이 새로운 화두가 되었을 때 마을약국을 떠올렸다. 때마침 회원 중에 약사도 있지 않은가. 무모함에 가까운 용기, 돈은 쌓아두는 게 아니라 순환시켜야 제맛이라고 생각하는 윤리, 거기에 언제나 기꺼이 보태는 손들이 있으니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세상에 단 하나뿐인 진짜 약국을 만들자. 처방전 조제 대신 상담을 위주로 하고, 약보다 일상의 변화를 더 중시하며, 자기 몸을 스스로 돌보는 사람들의 네트워크인 약국. 이른바 ‘사람과 글과 약이 있는 인문약방’이 우리 포부였다. 약국엔 영양제만큼이나 책을 진열했고, 약사와 손님을 구분 짓는 매대 대신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4인용 테이블을 놓았다. 마침내 이름을 ‘일리치 약국’이라 짓고, 이반 일리치의 얼굴을 크게 만들어 간판을 달았다. 뿌듯했다.그러나 카센터 골목 귀퉁이에서, ...

    2025.03.27 20:54

  • [이희경의 한뼘 양생]올 어바웃 ‘기저귀’
    올 어바웃 ‘기저귀’

    몇 년 전 어머니가 낙상과 심한 요추골절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의사의 당부는 딱 하나였다. 가능한 한 움직이지 말 것. 따라서 갑옷같이 생긴 허리 보호대와 기저귀 착용은 필수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절대 기저귀를 차지 않겠다고 버티셨다. 자식들은 처음에는 부탁, 그다음엔 읍소, 마지막엔 강권했지만 소용없었다. 어머니 허리를 지킬 것인가?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친구들에게 나의 답답함을 하소연하니 한결같이 “나라도 기저귀가 싫을 것 같아”라고 답을 했다. 결국 나는 어머니의 자존감을 선택했다.생각이 바뀐 것은 수나우라 테일러의 “엉덩이를 닦을 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것이 본래 그렇게 끔찍한 일인가?”(<짐을 끄는 짐승들>)라는 문장을 읽고 나서였다. 선천성 관절굽음증을 가지고 태어난, 장애인 운동가이자 동물권 운동가인 그녀에 따르면 휠체어, 배뇨관, 용변 보조 등이 장애인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고 말하는 것은 상상적인 것이지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장애인을 누...

    2025.02.27 21:20

  • [이희경의 한뼘 양생]아는 어른
    아는 어른

    얼마 전 ‘아는 청년’ 한 명이 결혼했다. 세상에서는 그를 ‘자립준비청년’이라 부르는데 인연은 20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느 날 동네 아동복지시설에서 수녀님 한 분이 우리를 찾아오셨는데, 용건은 시설 청소년에게 인문학 공부를 시켜줄 수 있냐는 것이었다. 마침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 유행하던 시절이라, 우리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첫 프로그램은 고전 서당이었다. ‘불우’ 청소년들에게는 무엇보다 자신의 언어가 필요한데, 고전을 읽고 암송하는 방법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하지만 천둥벌거숭이 같은 10대 남학생들에게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같은 논어 문장을 가르치고,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같은 성삼문 시조를 외우게 하는 일은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아이들은 딴청을 부리거나 졸았다. 우리는 서당에 더 많은 교사를 투입하고, 더 맛있는 간식을 만들어 그들과 소통하려고 애썼지만 실패했다. 프로그램을 바꿨다. 글이 아니라 몸을 쓰...

    2025.01.30 21:28

  • [이희경의 한뼘 양생]제주 선흘리 할망들 ‘레퓨지아’
    제주 선흘리 할망들 ‘레퓨지아’

    다른 사람들처럼 한 달 넘도록 삶이 엉망진창이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깊은 ‘빡침’, 감당하기 힘든 우울과 슬픔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붙들어야 산란해진 마음을 수습할 수 있을까. 인류학자 애나 칭의 <세계 끝의 버섯>을 다시 집어 들었다. “삶이 엉망이 되어갈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산책을 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버섯을 발견한다. 버섯을 통해 내 감각은 되살아난다. 꽃처럼 소란스러운 색깔이나 향기를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다. 버섯은 불현듯 나타나, 다행히도 내가 그곳에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면 불확정성의 공포 속에서도 아직 즐거움이 있음을 알게 된다.” 나도 그녀처럼 버려진 땅 어느 귀퉁이에서 남몰래 자라나는 송이버섯을 발견할 수 있을까. 폐허 속에서도 여전히 생기 넘치게 존재하는 공간과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까.얼마 전 제주 중산간 선흘리에서 할망 11명의 그림 전시회, ‘ᄄᆞᆯ 어멍...

    2025.01.02 21:22

  • [이희경의 한뼘 양생]조용필, 말년의 양식
    조용필, 말년의 양식

    고대하던 조용필의 정규 20집이 도착한 날, 두근두근 언박싱을 하고 조심조심 CD를 꺼냈다. 볼륨을 한껏 올린 후 타이틀곡 ‘그래도 돼’를 듣기 시작했는데 몸이 먼저 반응했다. 리듬을 타기 시작했고, 급기야 일어나서 혼자서 춤을 추듯 방 안을 헤맸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는데 가사 때문은 아니었다. 모든 음을 꾹꾹 눌러서 단정하고 정성스럽게 세상에 내보내는 일흔넷 조용필 소리가 더할 나위 없이 절절했기 때문이었다. 위로였다.20대, 강의실이 아니라 거리와 술집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던 그때, 나와 친구들은 시도 때도 없이 조용필을 듣고 불렀다. 1980년 광주를 떠올리며 ‘생명’을 들었고, 감옥에 간 선배를 생각하며 ‘친구여’를 불렀다. 하지만 사실 나의 최애 곡은 트로트가 교묘히 섞인 발라드, ‘보고 싶은 여인아’였다. 청춘이란 무릇 데모를 하고 혁명을 꿈꾸더라도 다른 한편에선 사랑과 연애에 늘 빠져 있으니까.위의 노래는 모두 4집에 실려 있다. 그...

    2024.12.05 20:34

  • [이희경의 한뼘 양생]가을, 곰 소풍
    가을, 곰 소풍

    지난 토요일, 드디어 반이, 달이를 직관했다. 단풍철 주말이라 청주까지 가는 길은 밀렸지만, 몇년 동안 기다렸던 일이라 내내 마음이 들떴다. 다행히 행사 예정 시간보다 일찍 도착해서 가장 먼저 이 아이들을 보러 갔다. 한 녀석만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유유자적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누굴까? 반이? 달이? 둘은 형제지간이라 얼굴은 비슷하다. 다만 반이는 가슴무늬가 크고 짙으며, 달이는 좀 옅고 좁다. 맞다. 반이, 달이는 2018년에 구출되어 현재 청주동물원에서 살고 있는 사육곰이다. 사육곰이란 용어는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생물종 분류로는 반달가슴곰이지만, 행동이 민첩해 나무를 잘 타고, 꿀, 과일, 견과류 같은 식물성 먹이를 선호하며, 높은 지능을 가진 야생 반달가슴곰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게 된 어떤 생물의 불행한 역사와 현재의 곤경을 동시에 표명한다. 그들은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약재로 쓰였던 웅담 때문에 처음에는 무분별한 사냥의 대상이 되고, 그다음에는 사육의 대...

    2024.11.07 20:02

  • [이희경의 한뼘 양생]함께 집을 지을 수 있을까
    함께 집을 지을 수 있을까

    우리 같은 ‘마처’ 세대(부모를 돌보는 ‘마’지막 세대, 자식들에게 돌봄을 받지 못하는 ‘처’음 세대)의 가장 큰 고민은 “늙으면 누가 돌봐주지?” 아닐까? 현실적으로 4인 1실의 요양원 아니면 어림잡아 보증금 2억원, 월 150만원 이상을 내야 하는 실버타운, 이 양자택일밖에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메종 드 히미코>. 도쿄에서 게이바를 운영하던 히미코가 갑자기 은퇴, 바닷가 낡은 호텔을 사서 게이 양로원을 만들었다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영화가 영감을 줬다. 게이는 아니지만 나도 그와 같은 양로원을 만들어 친구들과 함께 살면 어떨까? 생각만 해도 든든했다. 영화에서는 히미코의 젊은 애인(무려 ‘오다기리 조’다!)이 암에 걸린 히미코 대신 양로원을 운영하며 히미코의 딸을 찾아내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도 한다. 오, 우리의 사설 양로원도 주변 청년의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겠네. 그런데 노인복지학 전공 후배의 일갈, “언니, 그거 돈도 엄청 많이 들고, 운영하려면 대관업...

    2024.10.10 21:19

  • [이희경의 한뼘 양생]어느 죽음
    어느 죽음

    20일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무 징조도 없이 너무 황망하게.근래 어머니는 컨디션이 좋으셨다. 나는 낙상만 조심하면 된다며 잔소리했고, 어머니는 “넘어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냐”며 볼멘 대꾸를 하곤 했다. 그런데 정말 보행기 바퀴가 무언가에 걸리면서 크게 넘어지신 것이다. 이어진 응급실 뺑뺑이. 어머니가 다니던 근처 대학병원 응급실에서는 아예 환자를 받지 않았고, 다른 곳은 긴급수술이 필요해도 자기들은 못한다고 했다. 결국 다른 병원으로 갔지만 거기서도 응급실 밖에서 30분 넘게 대기해야만 했다. 나는 까무룩 의식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애간장이 녹았다.어머니 상태는 심각했다. 넘어지는 순간 뇌 전체가 회복 불가능한 손상을 입었고, 뇌출혈 범위가 너무 전방위여서 수술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런데 어머니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놓은 상태였다. 의사는 가장 먼저 문제가 될 것이 기관삽관 여부이니 가족이 미리 의사...

    2024.09.12 22:00

  • [이희경의 한뼘 양생]‘액티브 시니어’에서 도망치기
    ‘액티브 시니어’에서 도망치기

    전철에서 그 광고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인지부조화에 빠졌다. 유명 연예인의 얼굴과 그 밑에 나란히 달린 ‘웨딩’ ‘어학’ ‘여행’ ‘상조’ 사이의 연관성을 전혀 알아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 신문 하단의 통광고를 보았을 때도 비슷했다. 거기 적혀 있는 ‘액티브 시니어를 위한 라이프 스타일 채널’이 무슨 말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한참 뒤에야 요즘 상조회사가 장례 주관을 넘어 ‘토털 라이프 케어 서비스’ 회사로 변신 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 신문 광고 역시 아동 학습지로 유명한 모 기업의 새로운 시니어 사업에 대한 것이었다.2018년 포브스는 인구 고령화가 기업에는 축복이 될 것이라고 했고, 우리나라에서도 모 대학 고령사회연구센터가 ‘에이지 프렌들리’라는 주제로 고령화 트렌드를 분석한 보고서를 2022년에 발간했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나이듦, 죽음, 돌봄 등의 기사를 꾸준하게 스크랩하는데 최근 2~3년 사이에 노인을 잠정적 고객으로 삼는 콘텐츠들이 빠른 속...

    2024.08.15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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