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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디어 트랙터’를 가능케 한 질문들
지난 5일(현지시간) 세계 최대 전자박람회인 ‘CES 2023’이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 4m 높이의 거대한 트랙터가 전시돼 있었다. 농기계회사 존디어가 개발한 완전자율주행 트랙터다. 운전석에 탈 필요 없이 스마트폰 조작만으로 이 트랙터가 광활한 평원을 다니며 쉬지 않고 밭을 갈게 할 수 있다. 그 위에 씨앗을 심고 적당량의 비료액도 뿌려준다. 비전카메라가 달린 제초장비를 설치하면 이동 중에 잡초만 포착해 그 위에만 제초제를 살포한다. 밀밭이나 옥수수밭을 달려도 거대한 바퀴가 작물을 깔아뭉개는 일이 없다. 고성능 GPS 장치가 있어 오차가 2.5㎝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토양·기후 데이터 등을 모아 사이버상에 똑같은 밭을 만드는 ‘디지털 트윈’ 기술을 적용해 어떤 작물이 적합한지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그 결과를 농가에 알려준다. 최첨단 스마트 공장에서나 적용할 법한 첨단 장치들이 농기계에 장착됐다는 사실에 관람객들이 트랙터 내부를 구경하겠다며 줄을 섰다. 농기... -
이주노동자 손과 함께 삶과 꿈도 온다
전북 장수에서 1만평의 사과 농사를 짓는 정지성 농부는 요새 ‘부사’ 수확에 정신이 없다. 며칠 전부터 이주노동자들을 고용해 사과를 따고 있다고 했다. “예전에는 마을 어르신들이 농사일을 도와주곤 했는데, 그분들이 80대가 돼 일하실 수 없게 됐거든. 사과를 따려면 이주노동자들을 불러야지.” 양파 수확기와 겹치면서 이주노동자 다수가 양파 농가로 가는 바람에 일손 구하는 데 애를 먹긴 했지만, 코로나19로 이주노동자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지난해보다는 사정이 나아졌다고 했다.드는 자리는 표가 나지 않아도 나간 자리는 커보이는 법이다. 정씨는 “코로나19를 계기로 농촌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새삼 느끼게 됐다”고 했다. 사과와 양파뿐이랴, 식탁에 올라오는 국내산 먹거리 대부분이 이주노동자 손을 거친다. 강원도 강릉의 안반데기 배추를 싹 거둬들이는 것도, 충남 금산 비닐하우스에서 밤낮 깻잎을 따는 것도, 인근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 오는 일도, 대규모 ... -
사과 농부는 왜 서울역에 갔을까
명절이 다가올 때마다 항상 전북 장수의 사과 농부에게 전화해 선물용 사과 두세 상자를 주문한다. 그의 사과 과수원은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 농약 등 해충 방제약을 적게 쓴다. 그가 키우는 홍로 사과는 달콤하고 아삭거리는 식감이 좋다. 선물받은 지인이 사과가 참 맛있다며 과수원 전화번호를 알려달라 했을 때 뿌듯했고 그에게 감사했다. 그런데 이번 추석에는 전화를 할까 말까 고민스러웠다. 아내가 “올해는 이른 추석이라 사과값이 비싸니 이번 추석에는 다른 걸 선물하자, 사과는 추석 이후에 값이 좀 내리면 구입하자”고 해서 마지못해 “그러겠다”고 답했는데 내내 마음에 걸렸다. 전화를 걸어 “이번에는 추석 끝나고 홍로를 몇 상자 구입하겠다”고 말하려는데 그의 목소리가 심상치 않다. “올해 사과는 망쳐버렸어. 15년 농사 중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는데 … 사과 탄저병이 돌았어.” 탄저병은 사과 표면에 곰팡이가 퍼지면서 흑갈색 반점이 생기고 과육이 썩는 병이다. 고온다습한 상황이 이... -
왜 하필 철원 땅에 머물러서
귀농·귀촌에도 ‘수저계급론’이 있다. 부모의 농사를 물려받을 수 있다면 ‘금수저’, 농부의 자식은 아니지만 그 지역 출신이라면 ‘은수저’, 도시 출신 귀농인들은 ‘흙수저’로 불린다. 평생을 도시에서 살아온 나는 흙수저이지만, 아내는 다르다. 처가 식구들은 장인 장모를 제외하고 대부분 강원 철원에 있고 여든이 넘은 외조부는 평생을 농군으로 살았다. 말하자면 나는 결혼을 통해 금수저로 ‘신분세탁’을 한 셈이다. 하지만 처외조부의 직계 자손들은 공무원, 간호사, 자영업(세탁소) 등 모두 다른 일을 한다. 지방공무원인 넷째는 아프리카돼지열병 같은 가축 전염병이 돌거나, 지역축제가 시작되거나 혹은 장대비라도 내리면 주말도 반납하고 일을 해야 하고, 간호사인 여섯째는 업무량이 많아 매번 야근에 시달린다. 20년간 한자리에서 세탁소를 운영해 온 둘째, 나의 장모는 새 집주인으로부터 “건물 리모델링을 해야 하니 세탁소를 빼달라”는 통보를 듣고 한동안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그렇게 힘든 일을 ... -
반도체에 ‘올인’하는 나라
지난해 봄 대만에 심각한 가뭄이 닥쳤다. 중부 쩡원, 남부 바오산 등 저수지 대부분이 바닥을 드러냈다. 대만 정부는 논으로 들어가는 물길을 막고 이를 세계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TSMC 등의 생산공장으로 돌렸다.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 세정·연마·절단 작업 등에 물 수십만t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만 농지의 5분의 1에 달하는 7만4000㏊에 물 공급이 중단되자 한 농민이 말했다. “(대만에서) 농부가 되는 건 정말 최악이야. 비료값도, 농약값도 점점 비싸지고 있어.” 미국 뉴욕타임스는 “대만 사람들은 벼농사가 이 섬(대만)과 세계 모두에게 있어 반도체보다 덜 중요하다고 판단했다”면서 “ ‘하늘’과 ‘거대한 경제적 힘’이 대만 농부들에게 다른 직업을 찾아볼 때라고 말하는 것 같다”고 전했다. 남의 나라의 얘기만은 아니다. 경기도 평택·기흥·화성·이천·용인의 농지는 일찌감치 반도체 공장 부지로 바뀌었고, 공장마다 엄청난 양의 물을 팔당댐에서 끌어오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
텃밭과 식물재배기 사이
지난 3월 지방자치단체에서 1년 동안 빌려주는 도시 텃밭을 신청했지만 탈락했다. 대기번호 473번. 시 외곽 텃밭 단지 2곳에서 3평(9.9㎡)짜리 텃밭 630구좌를 분양하는 데 무려 4000여명이 몰렸다. 지난해 용케 텃밭을 분양받아 아이와 함께 토마토, 상추, 당근, 배추 따위를 심었는데, 그런 행복을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됐다. 텃밭을 하겠다는 사람은 수천명이나 되는데, 정작 서울 인근의 이 도시에서는 텃밭이 사라지고 있다.집 근처 야산에 있던 지자체 텃밭 단지는 아파트 단지 조성 계획으로 지난해 폐쇄됐고 지금은 그 자리에 ‘대토보상 상담’ 현수막만 어지럽게 걸려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지자체 텃밭 단지에도 최근 아파트 단지 개발 승인이 떨어졌다. 시 외곽에 민간이 운영하는 텃밭 농장과 친환경 벼농사를 체험할 수 있는 논들이 일부 남아 있지만 곧 3기 신도시가 들어선다. 그곳에서 텃밭을 일구고 벼농사에 참여했던 도시농부들이 들판과 논습지의 생태적 중요성을 들며 신도시... -
짐 로저스는 꿈도 못 꾸는 일
“농업이 미래다. 농업에 투자하라.” 월가의 투자자 짐 로저스의 말이다. 앞으로 곡물 등 농산물 가격은 계속 뛰게 될 것이고 투자 수익률도 높을 거란다. 현명한 농부들은 람보르기니를 몰게 될 거라면서 자신이 한국의 청년이라면 농부가 되겠다고도 했다. 선물시장에서 돈의 흐름을 좇으며 고수익을 내는 사람의 말이니 권위가 실린다. 짐 로저스의 말은 농업·농촌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이들의 강연에서 자주 소환되는데, 며칠 전 서울에서 열린 정책 토론회 자리에서도 이 말이 나왔다. 농업 관련 기술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고 있는 빌 게이츠의 사례도 단골 메뉴다. ‘아프리카 기아를 막겠다’면서 유전자조작농산물(GMO) 기술 개발에도 돈을 댄다. 그는 미국에서 경기도 전체 면적보다도 넓은 경작지를 사들인 농지 부자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그들이 말하는 농업의 미래가 무엇인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투자라는 말보다 투기라는 말을 써야 하는 건 아닌지 헷갈리기 시작한다.사실 우리 농업은 일찌감치 투... -
‘귀농 스카우트’ 거절한 까닭
강원 화천군 간동면은 애호박으로 유명하다. 기온이 낮다보니 잘 무르지 않고 수확해도 2~3일을 더 유통할 수 있다. 한때 서울 가락시장의 도매법인에서는 간동면에서 온 애호박 하역 장소를 따로 마련해 둘 정도였다. 돈 되는 애호박 농사를 짓겠다며 마을로 들어오려는 젊은 귀농인들이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주민모임을 만들고, 영농조합법인도 세웠다. 한때 영농조합에서는 애호박만으로 십수억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단다. 초등학교는 전교생이 100여명에 달했고, 주민들은 아이들 교육을 함께 고민했다. 공부방, 영어캠프, 마을캠프 등이 만들어졌다. 2000년대 중반의 일이다.인근 홍천, 양구 등에서도 돈이 되는 애호박을 재배하게 됐다. 2010년 이후부터는 애호박 공급이 넘치면서 시장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간동면에 들어와 농사지으려는 젊은 귀농인의 유입도 끊겼다. 마을 영농조합에서는 더 이상 애호박을 취급하지 않는다. 애호박을 재배하던 한 농부는 지금은 담배농사를 한다고 했다. 계약 ... -
‘소멸’을 마주하는 법
귀농 연습 3년차. 퇴근 후 귀농학교에 다녔다. 경남 다랑논에선 손으로 모를 내다 거머리에 기겁하고, 호남평야에선 콤바인으로 벼를 베다 앞날(디바이더)을 부러뜨릴 뻔했다. 농약 없이 텃밭 농사에 나섰다가 벌레들에게 배추를 다 헌납했다. ‘프로’ 농부들에겐 가소로운 수준이지만, 귀농 연습생 중에서는 ‘만렙(최고 레벨에 도달하는 것)’을 찍지 않았을까. 연습생 딱지 떼고 농부로 데뷔할 날도 머지않았다. 내 딴엔 일생일대의 결단이라고 생각하는데, 진지하게 내게 묻는 이들은 정년 앞둔 선배들뿐이다. “어디 살 만한 지역은 있어?”‘살기 좋은 곳’이란 뜻의 ‘생거(生居)’가 붙은 지역들이 있다. 부안 사람들은 ‘생거부안’을 말하고 진천에선 ‘생거진천’이 진짜라고 하는데, 저마다 예로부터 전하는 말이라고 하니 누가 원조인지 가리기도 어렵다. 그래도 진천 이월면 사당마을을 가보면, 생거진천이 괜한 말이 아니라는 걸 안다. 500년 된 마을 앞에는 넓은 논이 있고, 뒤로는 야트막한 야산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