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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바이올린
이리저리 나는 새, 하늘이 좁다. 공중에서 한번 뒤척임으로 지상의 여러 도시를 장악한다. 바라보는 이를 단박에 움푹 추락시키는 새. 지저귀는 소리에 장단을 맞추며 겨우내 시무룩하던 지붕도 어깨를 들썩인다. 굴뚝에서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날수록 더욱 적막한 동네. 인공과 자연이 맞닿은 어느 한적한 마을 어귀를 지나 산으로 오른다.작년에 핀 자잘한 꽃들이 군데군데 미라처럼 그대로 굳어 있다. 가시덤불에서 툭툭툭 뛰어나오는 참새들. 쫄쫄쫄 흐르다 말고 얕은 여울목에 사로잡힌 물이 웅얼웅얼 거품 물며 항의하고 있다. 저 적폐들을 얼른 치우고 길을 틔워달라는 거다. 경사진 비탈에 구르다 만 바위가 엉거주춤 앉아 있다. 그 옆에 고사리 새순이 돋아난다. 양의 이빨을 닮아 양치식물로 분류되는 것들. 저들의 일생에서 사춘기쯤에 해당될 듯 또그르르 말리는 게 바이올린의 스크롤 같다. 골짜기는 너럭바위 피아노를 비롯해 여러 관현악기를 보유한 교향악단이다. 이참에 쉬어가며 이런 생각 하나 ... -
코끼리는 죽어서야 등이 땅에 닿았다
손오공이 머리카락 한 줌 후, 불어 제 분신을 만들 듯 이 선거판을 확, 뒤집을 수 있다면! 그러나 아무리 분통이 터져도 각각 한 표씩뿐이다. 저 자리 거저 준다 해도 앗, 뜨거워라 도망갈 터이지만 무슨 젖과 꿀을 빨 요량인지 머리 터지도록 그곳으로 돌진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몰라도 알 듯한 그들.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느라, 입가에 골짜기가 생기고 입도 비뚤어지는 것 같다. 그런저런 아사리판의 뉴스가 범람하는 곳에서 세계문학전집급의 독후감을 주는 기사 하나를 건졌다. 바다에 모비딕이 있다면 뭍에는 코끼리가 있다. “코끼리 장례, 내 새끼 얼굴이 하늘 보도록…모든 아기 코끼리가 등이 땅에 닿은 채로 묻혔다…”(한겨레)는 코끼리 장례에 관한 며칠 전의 놀라운 뉴스.더러 강원도에서 꽃산행 마치고 귀가할 때 멀리 얼룩말의 갈기 같은 키 큰 나무들의 도열을 본다. 굽이치는 저 능선은 그 어디로 떠나려는 짐승들의 고단한 등을 어찌 그리 닮았는가. 그럴 때면 서늘한 문장... -
파이의 날, 3월14일의 몽상
‘가다’와 ‘내려가다’는 뉘앙스가 다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 “가다=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장소를 이동하다/내려가다=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또는 위에서 아래로 가다.” 두 단어를 살피면, ‘가다’는 수평으로 나아가는 동작을 포착하고 ‘내려가다’는 수직으로 구르는 모양을 그린다고 할 수 있겠다. 왕자웨이의 영화 <일대종사>는 인상적인 문장들로 시작한다. “쿵후는 두 단어로 말할 수 있다. 수평과 수직! 지는 자는 수평이 된다. 최후에 수직으로 서 있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어디 쿵후만 그렇겠는가. 나날의 삶도 낮에 막대기처럼 서서 돌아다니다가 밤에 누워 자는 것. 그러다가 꿈속에라도 나무 곁으로 내려가 꼿꼿이 직립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니 이 범주에 속한다 하겠다.플라톤의 <국가>는 소크라테스의 말로 시작한다. “어제 나는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과 함께 페이라이에우스 항에 내려갔었네.” 이 문장의 그리스어 원문엔 ‘내려갔었네’가 첫 ... -
봄날, 나뭇잎 하나의 몽상
봄은 오되 기차처럼 온다. 참새 떼 훑고 가는 가시덤불로도 은근히 오고 바지 주머니에도 와서 사람들 인정 넉넉하게 데운다. 봄은 잎에 업혀서도 나온다. 대개 꽃보다 먼저 피는 잎은 가지가, 이렇게 아름다운 풍선 좀 보라며, 피리처럼 힘껏 불면 다투어 봄을 싣고 이 세상으로 불룩하게 나오는 것.나뭇잎은 나무의 입에 불과한 것 같아도 그 생김새가 저마다 독특하다. 물푸레나무 잎사귀는 가장자리가 물결처럼 꿀렁꿀렁해서 어느 나라의 해변 같기도 한데 그 물가에서 자맥질하며 놀던 아이들의 파리한 입술을 닮았다. 섬마다 지천인 동백잎은 둘레마다 까끌한 톱니가 발달했는데, 손으로 한바퀴 돌리면, 어느 바깥의 모서리를 만지는 느낌이다. 어떤 운명을 점지한다는 지문과 그 물결은 절호의 궁합을 이루며 어느 결에 세상에 없던 곳으로 나를 배달해 주는 것.연약한 잎사귀는 떡잎보다 조금 컸을 땐 짐승들의 해코지를 피할 겸 부러 못생기게도 보이고, 거치가 아주 거칠다. 짐승들의 사나운 이... -
합정역, 보름달, 이방인
물론 소란도 좋지만 단란은 더욱 좋아서 잊은 듯 잊힌 듯, 정든 땅 언덕 같은 파주에서 단출히 지내다가도, 서울에 또 볼일이 생기기는 마련이라 좌석버스를 타고 자유로를 유유히 달려 합정으로 간다. 언젠가 국민MC 유재석씨가 유산슬이란 예명의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면서 히트한 노랫말대로 ‘합치면 정이 되는 합정’이지만 이곳도 여느 곳과 사뭇 다를 바 없는 한 지하철역이다.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을 만큼 항상 한 움큼씩의 사람들이 합치고 흩어지기를 되풀이하는, 해변처럼 쓸쓸한 곳이기도 하다. 나는 고작 30여분 만에 전혀 다른 풍경이 연출되는 것에 잠시 어리둥절하다. 그렇다고 도시물을 모를 리 없지만 벌써 파주의 듬성듬성한 분위기가 그립고 뭔가 질척거리는 늪의 기운이 알싸하게 퍼지는 것 같다. 이를 중화시키려 불러오는 풍경 하나. 그 옛날 덕유산 아래의 고향에서 새벽밥 먹고 거창읍 차부에서 부산으로 떠나던 날의 아침과 천일여객 타고 하루 종일 달려 고무신 위로 발등이 퉁퉁 ... -
숲속의 피아노, 임윤찬의 피아노
남해안 어느 섬의 꽃산행은 해가 웬만큼 떠올라 저 멀리 누구네 집 엉덩이를 걷어찰 때쯤 나도 비슷하게 산으로 출발하여 서로 모른 척 하루를 보낸 뒤, 저녁 어스름 각자 헤어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해는 서해에서 씻고 나는 집에서 먼지 묻은 몸을 씻고, 배를 채운 뒤 사진도 정리하다 보면 아주 늦은 밤일 때가 많다. 그럴 때면 텔레비전은 시끄럽고 떠들썩한 건 곶감처럼 다 빼먹은 뒤, 심야방송으로 장중한 선율이 흐르는 클래식 공연실황을 내보내는데 더러 막 연주를 마친 피아니스트가 아주 훤칠한 피아노를 배경으로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클래식에 관한 한 그냥 막 듣기만 하는 수준의 나는 단지 피아니스트가 조금 전까지 뛰논 피아노에 눈길이 가다가 몇 시간 전 희미한 햇살을 따라 하산하다가 만난 어느 반반한 바위를 떠올리기도 하였다. 바위는 급히 심부름을 가다가 잠시 쉬는 듯하기도 하고, 무슨 큰 뜻을 실어나르느라 산을 납치하여 짊어지고 가다가 너무 무거워 그만 주저앉은 것 같기... -
입은 작은데 왜 이리 말이 많은가
몸은 장독대이다(<노름마치>, 진옥섭). 심장, 간장, 비장, 폐장, 신장, 소장, 대장 등의 장기들이 옹기종기 모인 동네. 무심코 던진 돌멩이 하나에 항아리 쉽게 깨지듯 한마디 말에 얼마나 상처 입는 마음인가. 그러니 저 ‘장’자 돌림의 오장육부를 안고 있는 사람의 몸을 장독대라 표현한 건 참으로 절묘하다.얼굴은 ‘얼의 굴’이다(다석 유영모). 굴은 좁아서 한 글자씩 겨우 산다. 눈, 코, 귀, 뺨, 턱, 입. 이런저런 꼬리 없이 단정한 한 세계들. 그래서 힘이 더욱 세다. 입을 드나드는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혀, 이, 밥, 국, 찬, 물, 술, 숨 그리고 말.식물은 입이 없지만, 외부에서 먹이를 구해야 하는 동물은 입을 구비하고 이빨을 장착해야 한다. 사람도 예외일 수 없다. 누구나 엄연히 가지고 있는 스무 개가 훨씬 넘는 이(齒)에 대해 오래된 생각이 있다. 이 하나하나는, 묵묵한 귀가 그러하듯 누가 푹 꽂아놓고 자루만 달랑 들고 가버린 삽과 비... -
떡국 혹은 그것의 방정식
내 또래의 경상도 특히 부산 친구들 영어 발음이 약간 엉망인 건 억센 사투리 탓이다. 영어보다도 수학 공부할 때 더 자주 사용했던 말, ‘이꼬루’ 혹은 ‘이꼴’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정확하게 철자를 적으면 equal, 현지식에 가급적 가깝게 발음하면 이퀄. “두 식 또는 두 수가 같음을 나타내는 부호(=)를 이르는 말”이라고 국어사전은 풀이한다. 이 기호는 수학의 방정식에 약방의 감초처럼 꼭 필요했다. 예를 들어, 일차방정식 ‘x+1=4’는 ‘엑스 더하기 일 이꼬루 사’로 읽은 뒤 부리나케 x의 값을 찾아 볼펜을 굴려야 했던 것.돌이켜 보면 미지수 엑스는 중학생이던 나의 생활에 불쑥 뛰어들었다. 그 이후 무시로 난입하는 저 복면한 괴한을 떨쳐내느라 애쓴 시간의 총합, 다시 말해 저 오리무중을 적분한 것이 곧 한 장으로 요약되는 내 이력서이다. 지금도 x를 찾아서 방황하지만 여전히 엑스는 엑스. 이 난감한 x가 있는 한, 내 무거운 일생은 긴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 -
이 추운 날, 돼지국밥
조리법에 무슨 차이라도 있다는 것일까. 부산역 구내 돼지국밥은 따로 밥이 나오는 것보다 토렴한 것이 천원 더 비싸다. 아무튼, 밥과 고기와 국물의 비율을 대강 맞춰가며 국밥을 먹을 때 어느새 아쉽게 바닥을 긁게 되고 펄펄 끓던 국물도 많이 식었다. 아무래도 숟가락이 건더기를 선호하는 와중에 국물은 좀 넉넉히 남겨두었다.꽃산행을 가지 않는 주말이면 억울한 심사를 달래다가 주섬주섬 챙겨서 동묘 풍물시장에 가기도 한다. 이리저리 발품을 팔다가 결국 헌책방을 찾던 어느 날의 일화. 몸 하나 운신하기 힘든 좁은 서가의 시집 코너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출입구에서 이런 말이 들리는 거다. 대강 얼굴을 익힌 주인과 이 가게의 오랜 단골인 듯 머리 희끗한 아저씨가 나누는 대화. “거 말이야, 나는 말이오.” “….” “나중에 꼭 사돈은 강원도 사람이면 좋겠어.” “왜 그러는데….” “거 말이야, 왠지 강원도는 산이 많아서 그냥 사람들이 좋을 것 같애.” “….” “왠지 말이오, 서로... -
태백 가는 길
지형이나 고사를 반영하여 지은 지명은 단순한 명사가 아니다. 수많은 선인들의 발자국이 온축되어 있다. 천명을 받아 한생을 꾸렸다가 이제 짐을 벗고 하늘로 돌아가신 분들, 멀리 지구를 굽어보면서 땅의 이름을 등대 삼아 눈에 밟히는 생시의 동네를 헤아리고 계실까.청량리에서 출발한 무궁화 눈꽃기차는 고을마다 엎드린 역을 차례차례 짚어나간다. 내리는 손님 그만큼, 또 타는 승객 이만큼. 덕소(德沼)와 양정(養正)을 지나더니 금방 은행나무 아래 용문(龍門)이다. 고장의 이름들이 징검다리처럼 하나의 느낌으로 꿰어지고 나는 기꺼이 거기에 사로잡힌다.순식간에 석불(石佛) 지나 일신이다. 일신우일신이라고 할 때와 꼭 같은 그 日新이다. 기차가 길을 재촉하여 그윽한 삼산(三山) 다음 기착한 곳은 원주(原州)다. 原은 그야말로 本과 어금버금하니, 근본에 대한 기운이 깊숙이 일어나는 곳.다시 제천, 영월을 지나니 여기서부터는 석탄 냄새도 물씬해진다. 민둥산 떠나 이른 곳은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