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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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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어떤 고구마
    어떤 고구마

    어느 산, 어떤 골을 오를 때의 일. 급경사를 치고 올라 호젓한 능선을 걸을 때였다. 풍성한 치마폭 같은 게 버티고 있어 문득 길이 끊겼다. 제법 널찍한 바위를 타고 넘어야 했다. 바위가 그냥 바위인 경우는 드물다. 바위 안에는 걷잡을 수 없는 침묵이 도사리고 있지만 바위의 표면은 식물의 훌륭한 서식처이다. 각종 이끼나 지의류는 아예 바위를 거처로 삼는다. 그것들이 표시하는 무늬를 보면 우주에서 누가 적은 심오한 문자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힘을 한번 주며 휙 넘어가려는데 바위에 있는 것들이 예사롭지 않다. 자세히 보니 이 산을 주름잡는 어떤 짐승이 내갈긴 그것이 아닌가. 이렇게 활짝 트인 개활지에서 볼일을 보는 녀석들이 보란 듯이 그 증거를 남긴 것이다. 어쩌면 영역표시일 수도 있겠다.휴지를 사용하는 어떤 포유류의 지저분한 그것이라면 고약한 냄새에 얼른 발길부터 돌리겠지만 이것은 자연의 생생한 작품이다. 아무것도 아닌 소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사인하여 ...

    2025.12.04 22:05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낙엽과 늙은 잠자리
    낙엽과 늙은 잠자리

    일년이 두꺼운 국어사전이라면 초겨울은 격음의 시간에 해당한다. 수분 빠진 낙엽들은 ‘ㅊ, ㅋ, ㅌ, ㅍ’처럼 거칠고 비틀리고 꼬부라진 모양으로 지면에 깔린다. 찢어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마른 잎 밟을 때마다 자지러지는 소리가 나는 건 이 때문이다. 가지에서 툭, 떨어지는 낙엽들. 점점 추워지는 날씨도 한몫을 한다.무른 바위 우세한 산기슭에서 잎사귀들의 순한 표정은 올봄의 일이었다. 물결처럼 출렁이던 잎들의 전성시대는 여름. 이제 모두 새우처럼 등을 굽히며 뒤틀린다. 어디 급히 지나가는 쓸쓸이라도 발견하면 다람쥐가 도토리 줍듯 데려다가 입안에 여러 개 저장하고 싶은 늦가을이었다. 세상의 포부를 잔뜩 담았다가 활짝 피었던 그 모든 꽃봉오리들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대궁 위에 꽃받침만 남았다. 이제 단풍도 지나 낙엽의 시기다. 단풍이 색이라면 낙엽은 태도 아닌가.일산에서 모처럼 저녁 약속. 지하철 3호선 종점인 대화는 한자로 쓰면 ‘大化’다. 대단한 변화라는 뜻인...

    2025.11.27 21:52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목포에 가면
    목포에 가면

    가끔 목포 생각이 난다. 나와 목포와의 관계는 어느 야유회에서 허리춤에 손 얹고 노래하는 아버지의 빛바랜 사진에서 시작된다. ‘목포 유달산 1960.5.12’라 적힌 걸 보니 그때의 나는 부산에서 옹알이하면서 열심히 뒤집기를 배우던 시절. 그렇던 목포를 까맣게 모르다가 꽃에 입문하고 종종 드나들게 되었다. 어쩌면 아버지의 사진 한 장이 나를 계속 목포로 끌어당긴 것일까. 지명에 나무가 들어가는 것도 나에겐 예사롭지 않았다.목포역을 나오니 마른나무 같은 사내가 광장을 빙빙 돌며 큰소리로 혼잣말을 하고 있다. 남자라면 그리해서는 안 되지, 암 안 되고 말고, 나는 다 알아요. 가로수 아래 장기판 옆에서 훈수 두는 분께 근대역사관 가는 길을 물으니, 아따 있는 줄이야 알겄는디 관심을 두지 않으니 모르겄소. 지극히 논리적이고 명쾌한 말씀이시다. 근데 바람결에 그 말을 낚아채고는 어느 행인이 이렇게 보탠다. 아따, 날 따라오시셔. 그리하여 그를 강아지처럼 따라붙게 되었다. 그냥 가...

    2025.11.20 20:0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어떤 잠자리에 대한 명상
    어떤 잠자리에 대한 명상

    잠자리는 몹시도 제 머리를 사랑하는 것 같았다. 수평선보다 더 넓은 각도로 머리를 좌우로 돌리며, 뒤룩뒤룩 눈알을 굴리며. 물로 세수하는 것보다 더 엄청 꼼꼼히, 허공에서 마른손으로 연신 얼굴을 닦았다. 어떻게 하면 저리로 빠져나갈 수 있을까. 허공의 한 틈을 노리는 것 같다. 근처의 새들 또한 공중으로 투신하지만 모두 제 그림자 안으로 도로 내려올 뿐이다.인천공항 근처로 애기향유 보러 꽃산행 나선 길. 난개발로 얼룩진 용유도는 발파 흔적이 요란히 남아 있다. 공사하다 말고 중단된 웅덩이마다 기름때 어른거리는 물이 고여 있고, 그건 아주 오래된 듯, 그 상처를 다독이며 힘겹게 무너진 생태를 다시 일으키고 있다. 한 무더기 노란 산국 앞에 엎드렸다가 뜻밖의 광경을 발견했다. 거의 탈색한 나뭇가지를 붙들고 있는 건 다 늙은 잠자리가 아닌가.잠자리의 행색은 그야말로 남루 그 자체였다. 잠자리의 한살이를 내 다 알 수 없지만, 올봄쯤에 애벌레에서 깨어나 부화, 우화한 뒤 ...

    2025.11.13 21:34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이 계절에 유행가 부르기
    이 계절에 유행가 부르기

    산은 생각의 학교이자 고질(痼疾)을 고치는 병원이다. 한편으론 색다른 노래방이기도 하다. 술기운을 다독이며 ‘앗싸’ 기기에 네 자리 숫자를 눌러 유행가 하나 고르듯 호젓한 산길 걷다가 바람, 기온, 기분, 날씨의 네 박자에 맞춰 노래 하나를 호출한다. 어느덧 목덜미가 시큰하고 소매가 긴 옷이 그리운 계절에는 이런 노래다.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의 기나긴 밤 어머니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얼마 전에는 단풍의 유혹에 넘어간 김에 유심초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사랑이란 얼마나 참아야 하는지 나의 사랑 그대여 내 마음 아나요 가슴속을 파고드는 그리움이 눈물 되어 흘러도 내 모습 그대에게 잊혀져도 그대를 사랑하오.”어쩐지 요즘은 졸장부가 되는 느낌이 자주 일더라. 사나이로 시작하는 노래로 못난 위안을 삼기도 한다. 통영 우도 갔다가 멀리 억새와 갈대 사이로 구멍섬을 보았다. 썰물에 확 드러나는 바위 중앙이 내 가슴처럼 뻥 뚫려 있다. 그 풍경에 합세하며 내 ...

    2025.11.06 22:0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횡단, 횡단하는 나날들
    횡단, 횡단하는 나날들

    매년 10월25일은 독도의날이다. 법정기념일은 아니지만 소홀히 할 수 없는 하루다. 대륙에서 홀로 떨어져 동해를 업고 위대한 높이로 솟아올라 먼발치에 일본 열도를 던져둔 독도. 이제 일본은 이런 기본적 사실을 고맙게 여기고 허튼소리 말아야 한다.내가 만든 책을 소개하는 셈이라 퍽 조심스럽지만 작년 광복절 즈음 이 코너에 “1901년부터 2021년까지, 치열하게 전개된 120년의 근현대사를 횡단하듯 조감하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고 쓴 적이 있다. 충분히 고통스러운 개화-식민-독립-독재-민주-선진의 굽이굽이를 나름의 시선으로 요령 있게 요약한 다큐멘터리 북. 지난달에 완성해 <횡단 한국사>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내보냈다. 우리를 웃고 울린 역사는 깨알 같은 사건이 종횡으로 결합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 책에도 독도의 안녕을 기원하고 의미를 묻는 내용이 명토 박혀있다.크든 작든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사람들의 사소한 발밑이다. 언젠가 우리는 달이나 태양에 걸려 ...

    2025.10.30 19:56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우리에게는 먼 산이 있다
    우리에게는 먼 산이 있다

    손바닥은 별들의 전쟁터다. 삼성, 갤럭시, 구글, 클라우드 등등 이 바닥의 작명은 하늘에 빚진 게 많다. 휴대전화를 통해 바깥을 보니 갈수록 점점 더 별 볼 일 없어지는 세상이다. 급기야 그제는 좀 색다른 산이 등장했다. 유튜브가 한때 장애를 일으켜 영상이 재생되지 않는 사고가 벌어졌다. 이에 따라 “지하철에서 유튜브가 안 돼 먼 산만 바라본다”는 사태가 속출했다는 뉴스. 그렇다고 이런 먼 산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제법 오래전. 호남선 종착점인 목포역에 내리자마자 입장 마감 시간에 쫓길라 서둘러 목포문학관으로 뛰었다. 발열체크를 하는 분이 어디서 오셨냐며 조금 늦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목포, 마음먹은 지 수년 만에 오늘. 이렇게 너무나 멀리 돌아오느라 그리된 것이라고 대답했다. 차범석관, 박화성관을 지나 김현관을 보았다. 각종 전시물 중에서 눈에 띄는 몇가지. 김치수에게 보낸 편지 끝에 ‘김광남’이란 본명으로 쓴 초서체 사인이 독특하다. 선생은 그림도 곧잘 그렸다. 병 ...

    2025.10.23 19:47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뱀과 거울
    뱀과 거울

    뱀은 길다. 나에게도 꼬리가 있다. 나이 들수록 차마 코끝이 늘어나지는 못하고 그 꼬리가 자꾸 길어진다. 꼬리는 내가 만드는 업보일까. 그 매서운 줄이 발등을 때리는 날은 기어코 오고야 만다. 있는 줄도 몰랐던 꼬리. 점점 윤곽이 갖춰지는 꼬리. 이제는 희미하게 만져지는 꼬리. 나도 모르게 물컹, 밟을 것 같은 꼬리. 그게 무섭기도 해서 산으로 간다.나이가 길어질수록 자연과의 접촉 면적을 넓히는 게 좋다. 어쩐지 산에서는 꼬리가 감춰지는 것 같다. 이 번들거리는 세상에서의 유일한 비상구다. 산에서 만끽하는 잠깐의 신선한 이탈은 그 덕분일 것이다. 산에서 무덤 하나 지나치지 않을 수 없듯 뱀 하나 만나지 않기란 어렵다. 고요와 침묵의 바위틈에서 넥타이처럼 풀어진 뱀을 또 만났다. 어린 시절 우리한테 걸리면 꼼짝없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뱀. 무서운 우리 보고 재빨리 도망치던 뱀. 이제는 뱀을 보면 내가 무섭다. 옛날 담벼락 아래에서 눈싸움하며 대치하던 생각도 났다....

    2025.10.16 20:17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치읓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치읓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ㅊ. 한글 자모의 열 번째 글자. 치읓이라 이르며, 목젖으로 콧길을 막고 혓바닥을 경구개에 대어 날숨을 막았다가 터뜨릴 때 마찰이 동반되며 거세게 나는 소리다. 치읓은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추위를 만드는 닿소리. 치읓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출렁이는 마음이 어떻게 세상에 닻을 내렸겠나. 치카치카, 아침마다 칫솔질해서 말과 밥이 범한 거친 입을 개운하게 청소하겠나. 저만치 피어 있는 진달래 곁을 떠나 초록의 물결 걷히자 들이치는 인생의 친척들.아, 치읓이 없었더라면 멀리서 친구가 찾아올 수 있으랴. 아차 한번 늙어지면 다시 청춘은 어렵고 아차 한번 죽어지면 북망산천의 흙이로구나, 사철가 눈대목을 들을 수 있겠나.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의 애국가 후렴구를 제창할 수 있으랴. 이제 꽃봉오리의 벅찬 마음도 지나 최소한으로 산다. 약방의 감초처럼 있어야 할 데마다 꼭 있는 치읓.암소 끌던 노인은 삼척 어느 절벽에서 척촉(철쭉) 꺾어 수로부인에게 바치며 헌화가를 불렀지. 표준...

    2025.10.09 20:57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나무에게 배우는 맹자 한 대목
    나무에게 배우는 맹자 한 대목

    천하 사물은 그 모양대로의 웅덩이다. 풍경의 요소들은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고유한 구멍이었다. 햇빛이 그 웅덩이를 차곡차곡 채워야 사물은 그 사물로 드러난다. 나무 한 그루에는 그 부피만큼의 햇빛이 정확하게 든다. 빠르고 일정한 속도의 빛은 이 웅덩이를 동시에 가득 채운 뒤 다음 국면으로 나아간다. 자연이 명확한 둘레로 빈틈없이 구성되는 건 그 덕분이다. 산은 산, 물은 물이다라는 말도 이런 사실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이제는 옛날의 일, 겨울 한밤중 취객이 된 적이 있었다. 벗들과 술자리를 파하고 귀가할 때, 하루의 고요를 다독이며 가로수와 가로등이 나란히 서 있다. 그럴 때 고개 숙인 가로등을 만지면 공기보다 더 찬 냉기가 손바닥을 찌르고 기둥을 두드리면 텅텅 빈 소리가 울려 나왔다. 하지만 가로수는 다르다. 그 싸늘한 추위에도 한낮의 햇빛을 저장했다가 취약한 시간에 미량의 온기를 전해주었다.그때 그 촉감이 고맙고 좋아서 가로수를...

    2025.10.0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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