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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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우두머리에 대하여

    우두머리에 대하여

    말석에 앉아 노자를 읽는다. 노자만큼 도(道)를 강조한 이도 드물다. 흔히 수양이나 처세술로 읽기도 하지만, 내가 듣는 강의에서는 통치술로서의 해석에 방점을 찍는다. 어쨌든 노자 하면 도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논어의 첫 글자가 학(學)이라면 노자의 그것은 도다.둥그렇게 휘어진 세상의 골목과 길. 갈비뼈 같은 저 길이 없다면 서로 통할 수 없고, 통하지 못하면 섬이다. 가슴 안의 꿈도 부풀어 오르지 못하고 세상의 이상도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골방 문화인 게임과 유튜브가 설친다 해도 밀실이 아니라 광장에서 일은 이루어진다. 이건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자명한 이치이다. 이 우주가 질서 있게 요약된 사회, 그것이 집합적으로 구현된 몸도 마찬가지다. 목숨의 바탕인 몸을 다루는 신비의 의학서인 <동의보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것이라고 한다. 통(通)하면 살고, 불통(不通)하면 죽는다.자전에 따르면, ‘道’는 (쉬엄쉬엄 갈 착)과 首(머리 수)가...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튀긴 면 하나에 수프 한 봉지. 에걔, 고작 이거냐 싶어도 끓는 물만 부으면 한 끼로 훌륭하다. 텔레비전이 먹통이 되고, 드디어 기사가 오셨다. 대뜸 건장한 기기를 자빠뜨리고, 나사 풀자, 드디어 속이 홀랑 드러났다. 이게 다야? 싸늘한 기판 위에 레고 같은 반도체, 얼기설기 전선들. 거실을 점령한 기기의 실상이다. 같잖게 볼 일은 아니다. 거대하고 복잡한 걸 작고 콤팩트하게 만들려는 게 현대의 문화다. 슥슥삭삭 점검한 뒤 놀랄 틈도 없이 전기를 넣자, 요술처럼 불이 들어오고 미국 대통령이 툭 튀어나왔다.트럼프가 채신머리없이 일론 머스크의 발바닥에 키스하는 사진이 떴다. 교묘하게 둘 다 왼발바닥이다. 물론 가짜 사진이다. 개인적인 역량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머스크는 너무 설친다. 굉장한 머리와 개척자 정신으로 시대의 길목을 지키고 앉아 대박을 노린다. 사업이든 행정이든, 예술까지는 아니더라도 시늉이라도 내야 하는데 막무가내의 효율성만을 따지려 든다. 그의 뉴럴링크는 사람...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계엄과 계몽, 헌법과 풍경

    계엄과 계몽, 헌법과 풍경

    국어사전은 풍경을 ‘산이나 들, 강, 바다 따위의 자연이나 지역의 모습’으로 풀이한다. 이 문장에는 ‘눈앞’이 빠져 있다. 풍경은 내가 보는 눈앞의 광경일 수밖에 없다. 언제나 눈앞은 문제적이다. 늘 빤한 것 같아도 결코 뻔하지 않은 깊숙하고 은밀한 공간. 사물과 사실이 항상 활활 타고 있는 장소.저기 저 눈앞의 자연은 탄복할 만한 재주를 지녔다. 천하 만물에게 자신을 동시에 아낌없이 나누어 주면서도 손톱만큼의 충돌도 없이, 현 사태를 유지 관리하는 자연의 경영술이 아닌가. 자연은 시시각각 엄청나게 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바라보는 이들을 안심시키느라 안간힘을 다해 안 변하는 척, 정말 고수의 묘기를 부리고 있는 것.언제나 늠름한 나무여, 어제 그대로네. 방심하다간 큰코다친다. 어느 날 나름 생활(生活)에 열중하고 있는 나를 움푹 삽으로 떼내어, 지금 믿고 감탄하며 바라보는 저 풍경의 한구석으로 매정하게 데리고 가서 나무 밑에 매장해버리는 게 또한 자연의 성질 ...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봉준호 감독의 영화 제목 읽는 재미

    봉준호 감독의 영화 제목 읽는 재미

    예측불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인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 <살인의 추억> <괴물> <옥자>에 이은 <기생충>이 가족의 갈등을 다뤘다는 몇 줄의 예고가 흘러나왔을 때,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갑충으로 변한다는 <변신>을 쉽게 떠올렸다. 그러나 제 역할을 못해 가족에게마저 버림받는 밥버러지에 관한 게 아니었다. 나의 안일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카프카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지점이었다. 식충이로 변신한 식구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 가족 간의 대립을 통해 사회 계층 문제를 다룬 영화였다.개봉박두. 봉 감독의 신작이 6년 만에 한파도 뚫을 기세다. 먼저 공개된 영화 제목은 <미키 17>. 여기서 ‘미키’는 위험한 일에 투입되는 소모품으로 근미래를 살아가는 복제인간의 이름이고, ‘17’은 그 주인공이 문서를 복사하듯 생명을 프린트하는 횟수를 말한다.무소불위. 냉정히 관찰하면 죽음과 ...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체포의 체’ 자도 꺼내지 않았다는 말

    ‘체포의 체’ 자도 꺼내지 않았다는 말

    어느 국회의원(A)이 회의 석상에서 어느 국회의원(B)에게 고함을 질렀다. 저거 순 쓰레기네! A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이크를 타고 경향 각지의 안방까지 들렸지만 정작 건너편 B의 귀에서는 그냥 스치고 말았다. 둘은 같은 공간에서 또 말을 주고받는다. 말만 A의 발등을 찧었나. 이후 B가 아니라 A만 보이면 쓰레기가 먼저 A의 얼굴을 덮어버린다. 말의 작용이다.어느 변호사가 기자들을 모아놓고 12·3 내란 사태 당시 계엄군이 국회의원 등 주요 인사를 체포하려고 했다는 의혹에 대해 “체포의 ‘체’ 자도 꺼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상하다. 그의 말이 오히려 당시 국회에 투입된 군인들이 진실을 말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측근은 거짓말로 인터뷰하고, 당사자는 자기 살길만 찾는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말의 반작용이다.입에서 나와 귀로 사라지는 말. 이는 사람 사이로 뜻을 연결하는 실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을 묶는 밧줄이기도 하다....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판사 한기택

    판사 한기택

    소주 공장 다니면서 소주 많이 마신다는 말처럼 싱겁기도 하겠지만, 출판에 몸담고 책으로 지은 인연이 제법 많다. 궁리에서 책을 낸 정신과 의사의 주선으로 영화감독, 배우, 의사 등과 어울린 후끈한 자리. 자유로운 정신들답게 화제는 사방으로 흘렀다. 문득 술이 제법 불콰해진 영화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고교 시절, 방송반이었는데, 전설로 자리잡은 선배님이 있다면서, 목숨 걸고 재판했다는 판사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당시 이명박 치하에서 광화문의 어이없는 이른바 ‘명박산성’을 성토하다 나온 한 자락이었다.들으면 들을수록 몇해 전 책을 내면서 알게 된 어떤 분의 삶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겠는가. 이런 자리에서 우리 저자의 저 이야기를 듣다니, 내심 출판의 한 꼭지를 따는 듯한 으쓱한 기분으로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감독님, 영동고등학교 나오셨죠!그랬다. 가족과 여름휴가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한기택 판사. 그의 빈자리를 견딜 수 없던 이들이 모인 ‘한...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비상계엄 관련 공소장 읽는 밤

    비상계엄 관련 공소장 읽는 밤

    불발탄이다. 그래도 폭탄은 폭탄이다. 낙진의 후과가 만만찮은 계엄 폭탄. 경계할 계(戒), 엄할 엄(嚴). 계엄이라는 다소 괴이쩍은 이름의 이 짐승을 또 만날 줄이야. 그 옛날 막다른 골목에서 된통 물린 기억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갑진 12월3일. 그날 밤의 내란과 이후 전개된 사태에 일상을 온전히 회복하기가 힘든 이웃이 많다. 수괴(首魁), 체포(逮捕), 탄핵(彈劾), 구속(拘束) 등등 육법전서에나 어울리는 말들이 느닷없이 뛰쳐나와 실생활을 휘젓는다. 사전 속에서는 얌전하지만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사납기 그지없는 단어들.법이라는 것은 누구에겐 밧줄, 누군가에겐 기술, 또 누군가에겐 전부겠지만 그 어떤 이에겐 어쩌면 있으나마나한 것. 발길 따라 걷는 대로 걷고, 살아야 하는 대로 사는 이에게 그건 저기 낡은 새끼줄 울타리에 불과한 것. 작위든 부작위든 헛갈리는 말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불혹(不惑)의 삶을 일상으로 여기면서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다. 굳이 나, 여기에서, ...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을사년을 맞이하며

    을사년을 맞이하며

    우리말을 받아적는 자음과 모음 중에 하나라도 잃는다면 자연계의 연쇄 사슬이 돌발적으로 끊어진 미싱 링크처럼 그곳의 발음이 술술 새서 아무리 반듯한 생각을 하더라도 말의 빈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이 있어야 세계도 가능한 것.이러한 자음 중에서 특히 리을(ㄹ)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저 리을이 없다면 이 세상의 의성어, 의태어가 이렇게 풍부할 수 있겠나. 천지간에 미만한 소리와 동작을 어떻게 다 살리겠는가. 빗소리, 바람 소리, 아득한 허공을 나는 철새들의 기척.이런 리을은 구불구불한 골목 같기도 하고, 가늘가늘 내리는 빗줄기가 사나운 바람에 휘청거리며 그리는 궤적 같기도 한데, 그런 리을이 있어 이 세상은 스프링 같은 탄력을 마음껏 발휘하느니, 활활 끓는 리을의 행렬을 보라. 물, 불, 길, 술, 말, 발, 돌, 철 그리고 얼굴.을사(乙巳), 올해의 간지에 유념하면서 생각을 굴리다가 리을(ㄹ)과 모양이 비슷한 한자 하나를 발굴했다. 그것...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네 글자의 점묘화

    네 글자의 점묘화

    달이 둥싯 높이 떠오른다. 훌쩍 달에 건너가면 지구가 저 아래 보일까. 그럴 리가, 어느새 지구가 저 위로 둥글 떠 있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정중히 받들지 않는다면 우주는 아예 성립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밤하늘에서 별자리를 골라 마르지 않는 신화를 두레박처럼 퍼올리듯, 저 허공에서 누군가 우리가 만들어내는 말과 막걸리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지 않을까. 갑진년에서 을사년, 두 해의 접면에서 네온사인 같은 네 글자들을 골라 이 시대의 풍속을 점묘해 본다. #맞절하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후 마지막 사고 브리핑에서 유가족협의회 대표가 정부 관계자들을 앞으로 나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저희 요구에도 욕도 많이 먹고 고생도 많이 하셨다. 정말 감사하다”면서 허리 숙여 인사했고, 이들도 맞절했다. #우두머리. 어떤 일이나 단체에서 으뜸인 사람이다. 한밤중의 느닷없는 계엄과 함께 뛰쳐나온 단어. 평생 서너 번 만날 말을 지금 포식하고 있다. 세 글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네 글자를 ...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어느 색다른 호외에 대하여

    어느 색다른 호외에 대하여

    호외(號外)란 일간지가 매일 발행하는 정규 호수 외에 따로 발행하는 책받침 같은 신문을 말한다. 그 어떤 돌발 사태가 터졌을 때, 이를 급히 전하기 위해 만든다. 주로 계엄이나 긴급조치 등 정치적인 격변이 많았던 시기에 호외가 뿌려지곤 했다. 가장 최근에 접한 건 경향신문의 “시민이 이겼다. ‘내란 주범’ 윤석열 탄핵소추안 가결”, 동아일보의 “尹 대통령 탄핵, 직무정지” 등이었다.이건 신문사가 제작하는 것이고 내 스스로 달력에서 하루를 특별히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호외가 있다. 개인적 역량이 미천해 직접 호외를 만들진 못하고 그날치 주요 신문들을 모아 호외처럼 간직하는 것이다. 그간 나는 딱 두 번 나의 호외를 발행하였다.간신히 결혼하고 첫째에 이어 둘째가 내 곁을 찾아왔다. 그날도 아이와 산모의 건강을 확인한 뒤, 병원에서 신새벽의 가판대로 내달렸다. 이날치 잉크 냄새 가득한 신문을 구입하고 밀봉을 했다. 그리고 아이가 일생의 동반자라며 듬직한 청년을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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