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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엘리베이터에서 누리호를 생각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누리호를 생각하다

    점심 약속이 있어 모처럼 서울로 외출했다. 언제든지 바깥으로 나와 흙을 만질 수 있는 곳에서 알록달록 빌딩숲으로 들어서니 어리둥절하다.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광고들 사이로 이상한 나라에라도 온 기분이다. 회전문이 빙글빙글 돌면서 무슨 상품처럼 회사원들을 토해낸다. 점심시간, 허기가 몰려올 땐 사람들도 한꺼번에 몰리며 공중에서 땅으로 나가는데 벼슬하는 것처럼 힘이 든다. 모두들 인간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제작되는 느낌을 실감하는 순간이다.금융기관과 대사관이 밀집한 빌딩. 출입하려면 신분증을 맡기고 방문증을 받아야 했다. 도시화를 추구한 인류는 스스로를 첨단에 올려놓고 위험에 처하기를 즐기는 고약한 고질이 있다. 어렵게 엘리베이터를 탔더니 누리호의 뒷뉴스가 자막으로 흘러나왔다. 설렁탕집은 호황이었다. 대기하는 줄이 제법 길었다. 푸짐한 국물에 공깃밥을 마는데 문득 드는 생각 하나. 지금 식당에서 이 쌀밥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고대가 아닐 수 없겠다. 취사도구나 그릇의 변화가 무...

    2023.06.09 03:0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오월의 끝에서 생각하는 마지막 단어
    오월의 끝에서 생각하는 마지막 단어

    그때 나는 어떤 등산모임에 끼여 점봉산으로 가는 중이었다. 영동고속도로 문막을 신나게 달릴 무렵 속보가 떴다.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였다. 이미 병중에 있던 한 전직 대통령이겠거니 했다. 성(姓)이 같은 대통령은 내 짐작을 빗나갔다. 상대적으로 나이도 적은 대통령이 세상을 훌쩍 등진 것이다.사람들이 모두 멍한 상태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유서가 공개되면서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모두를 지극히 눌렀다. 소식을 전하는 매체마다 온도가 달랐다. 서로 눈치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투신, 자살, 사망, 별세 등으로 갈팡질팡하던, 더러 폄훼를 담기도 하던 단어가 장삼이사의 힘에 의해 하나로 모아졌다. 서거.그때 내가 잘못 짚었던 그 전직 대통령도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를 접한 건 2년 전이다. 그때도 어떤 단어가 선택되는지 유심히 살폈다. 언론사마다 처음에는 별세, 작고, 타계로 나뉘더니 하루 만에 대체적으로 정리되었다. 사망.한 인간의 마지막을 담당하는 종...

    2023.06.02 03:0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부처님오신날의 삐딱한 생각
    부처님오신날의 삐딱한 생각

    심학산 약천사 근처 사하촌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물 반찬에 예술 같은 된장찌개 그리고 돌솥밥. 방풍나물과 꽁치조림이 특히 훌륭했다. 일행과 떨어져 혼자 심학산 둘레길을 걸어 사무실에 복귀하기로 했다. 나른한 초여름 햇볕을 덮고 어느 그늘 아래에서 죽은 듯 낮잠 한 방 때리고 가라며 유혹하는 날씨.절 입구부터 부처님오신날을 기리는 연등이 길 따라 가득하다. 이 구역을 불국토로 선포하려는 듯 날렵한 기와지붕의 추녀 끝에서 떨어져 깔리는 풍경 소리. 가파른 비탈이라서 들이치는 풍광이 사뭇 압도적이다. 종무소 앞 계단에서 스님과 몇 분이 서서 담소 중이다. 무슨 재미난 이야기를 하시는지 한바탕 웃음소리가 주위의 모든 바람 소리를 눌렀다. 그 웃음 끝을 붙잡고 누군가의 말이 또 뒤따라 나오기를. 아, 그래요, 부처님 말씀대로…?바람이 풍경을 두드리자 다시 소리의 파고가 높아져서 그다음 말을 나의 귀는 잡아채질 못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 저켠에서 은근한 용심이 하...

    2023.05.26 03:0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장남의 무게
    장남의 무게

    방학동의 김수영문학관에 가면 ‘우리 시의 가장 벅찬 젊음’인 김수영에 관한 죽음 일보 직전의 생생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서른에 떠난 김소월만큼이나 마흔일곱의 향년을 요절로 여길 만큼 뜻밖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김수영의 죽음이었다.1968년 6월15일, 문우들과의 술자리에서 돌연히 빠져나와 귀가하다가 버스에 치여 의식을 잃고 다음날 아침 숨을 거둠. 급히 이송된 시인의 가슴 안주머니에서 나온 꼬깃꼬깃 접힌 메모지에는 시상이 아니라 동생의 이름이 적혀 있었음. 여동생은 오빠는 죽음으로 비로소 오빠의 갑옷을 벗었다며 울었다고 함. 서울에서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난 김수영. 시대와 가정의 위태로운 사정들과 싸워야 했던 그는 시인의 자리 못지않게 장남의 자리도 무겁게 여겼던가 보다. 대한민국 모든 장남들의 마음 한 자락을 살짝 엿보는 기분이었다.시인의 좌우명인 ‘상주사심(常住死心, 늘 죽음을 생각하며 생활함)’을 적어놓은 액자 옆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남들이 귀중히 ...

    2023.05.19 03:0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삼국유사와 해파랑길
    삼국유사와 해파랑길

    속초로 가는 입구인 미시령터널 톨게이트에는 예전에 이런 팻말이 있었다. ‘강풍에 현금주의.’ 여기서 현금은 동전이 아니다. 태백산맥 길목을 지키는 심술궂은 높새바람이 낚아챌지 모르니 통행료 낼 때 이른바 배춧잎을 조심하라는 주의사항이다. 아이코, 종이돈 다시 말해 지전(紙錢)이라니! 저 말을 고리로 고속도로에서 삼국유사 속으로 미끄러져 들지 않을 수 없었다.“생사(生死) 길은/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이르고 어찌 갑니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 모르온저/ 아아, 미타찰에서 만날 나/ 도(道) 닦아 기다리겠노라.” 단 열 줄로 인간의 윤회하는 층층의 생을 두텁게 묘사한 신라의 향가, 오누이의 도타운 정을 사무치게 그려낸 제망매가의 세계로.한 가지에서도 잎과 꽃으로 다르고, 같은 잎인데도 그 크기와 상태는 또한 다 다르다. 월명이 죽은 누이를 위하여 재(齋)를 올릴 때 저 향가를 지어 ...

    2023.05.12 03:0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어린이날에 생각해 보는 주어
    어린이날에 생각해 보는 주어

    할아버지가 된 지 오래되었다. 큰조카가 벌써 두 아이의 엄마다. 집안의 첫 손자에게 나는 ‘바보’ 할아버지로 통한다. 반포에 살았던 나를 택호처럼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나를 바보로 만든 그 손자가 초등학생이 된 게 엊그제 같더니 곧 대학교에 입학할 나이란다. 아니 벌써! 라고 나는 쉽게 말하지만 아이 엄마에게는 그게 아닐 것이다.문득 아주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첫째가 놀이방에 다니고 둘째가 엉금엉금 기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어느 일간지 사회면에서 짤막한 기사를 읽었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첫 단어가 ‘나, 너, 우리’로 바뀐다는 내용이었다. 아니 이게 뭔 기삿거린감! 하려다가 얼른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것은 신문이라면 꼭 다루어야 할 대단히 가치 있는 뉴스였다. 거창하게 시대정신이나 교육이념 따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 어린이에게 한 사회가 공식적으로 가르치는 첫 언어는 무척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무수한 옹알이 끝에 ‘어머이’ ‘아...

    2023.05.05 03:0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해파랑길에서 다른 사람 되기
    해파랑길에서 다른 사람 되기

    제약업계에서 오래 잔뼈가 굵은 친구가 있다. 대학과 군대까지 같은 곳을 뒹굴다 보니 쌓인 추억이 많다. 출중한 실력의 친구는 현역에서 물러나면 바로 해파랑길을 걷겠다고 자주 말했다. 술잔 앞에서의 약속이야 늘 있는 것, 설마 하는 심정도 보태면서 가볍게 추임새는 물론 함께하자고 했다. 달력 속의 그날이 거짓말처럼 실제로 오고 친구는 지난 만우절에 통일전망대에서 오륙도를 향하여 출발하겠다면서 나를 쳐다보았다.소 몰고 장에 가는 이웃한테처럼, 몸조심하고 잘 다녀오시게, 하기에는 섞인 말들이 아교처럼 너무 딱 들러붙었다. 무엇보다도 나도 내심 꿈꾸던 길이 아닌가. 쇠뿔은 단김에 빼야 하는 것. 부산 종점까지 죽 내달리지는 못해도 주말에 몇 구간씩 길에 발목을 묻기로 했다.국토의 등허리 같은 해안선은 그냥 울퉁불퉁한 곡선으로 여기기에는 너무 따끔한 선분이다. 그 길은 삼국유사의 신화가 아직도 살아 숨쉬는 장소이고, 최시형 신사께서 온갖 간난신고를 겪으며 관군의 탄압과 ...

    2023.04.28 03:0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식물은 영리하다
    식물은 영리하다

    어릴 적 읽은 이야기 한 토막. 한 아이가 과자 가게를 하는 친척 집에 갔다. 마음껏 집어먹으렴. 아이는 가만있었다. 무언가 생각이 있는 눈치였다. 괜찮아, 실컷 먹으래도. 그래도 잠자코 있었다. 녀석, 체면을 차리기는, 옜다. 아저씨가 한 움큼 집어주었다. 얼른 윗도리를 보자기처럼 벌리는 아이의 입가에 실룩실룩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고사리만 한 제 손보다는 포클레인 같은 아저씨의 손에 과자가 훨씬 많이 집힌다는 것을 아이는 진즉에 알아차렸던 것이다. 어른의 손을 빌려 원하는 바를 이룬 그 아이는 나중에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고 한다.궁리 사무실에는 식물이 많다. 모두들 화분에 담겨 있다. 식물분류학을 전공한 친구가 와서 말했다. 야, 온통 식물들의 감옥이군. 고문 좀 고만해라. 무슨 대꾸를 해야겠는데 아무런 말을 찾지 못했다. 짧은 생각에도 그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어느 저술업자에게 이 사정을 말했더니 이런 글로 체면을 세워주었다. “저 넓은 땅에서 햇볕 담뿍 ...

    2023.04.21 03:0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뒷모습에 관하여
    뒷모습에 관하여

    앞만 보고 살아온 나에게 뒷모습이 있다는 걸 최근 확인했다. 그날은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심심한 오후였다. 빗소리인가. 인기척인 듯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뒤돌아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무슨 기척이 남은 듯하기에 천천히 돌아보는 척하다가 재빨리 사라지려는 이의 꼬리를 겨우 붙들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낯선 이의 모습에 어리둥절했다. 그래도 전혀 막무가내는 아니었다. 가까스로 붙잡고 보니 알 듯 모를 듯한 녀석. 아, 눈을 씻고 보니, 언젠가 헤어진 묵묵한 막냇동생 같은 익숙함도 배어나오는 모습. 어라, 내 뒷모습이 아닌가.이렇게 가까이에 뒷모습을 항상 짊어지고 있었다니! 불룩한 배로 대표되는 내 부피를 생각하면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지냈다. 희미하게 느낀 적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갸웃할 때마다 광고, 거울 등등이 집요하게 달려들어 얼른 그 자리를 채웠다. 늙고 닳은 승용차의 백미러에도 항상 앞모습만 담겼다. 그간 있는 줄도...

    2023.04.14 03:0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봄비 맞으며
    봄비 맞으며

    반가운 봄비. 봄은 이미 늙은 과객인데 비는 너무 오랜만의 손님이다. 고마움을 넘어 달콤하기까지 한 봄비 보는데 두보(杜甫)의 시 한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좋은 비 시절을 알아/ 봄이 되니 모든 것 피어나게 하네/ 바람 따라 몰래 밤으로 들어와/ 소리 없이 촉촉이 만물을 적시네.” 시절은 봄을 훌쩍 지났지만 이제 본격 꽃은 피어나고, 이참에 빗줄기에 등짝을 맞으며 활짝 개구리로 변신하여 뛰어오르는 올챙이도 있을 것이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내리는 비는 어디에도 없다.바람 따라 몰래 밤으로 들어온 비. 세상 만물을 촉촉히 적시는 것처럼, 빗소리는 대낮의 사무실로도 당당히 잠입해왔다. 유리창을 열자 묵은 공기가 빠져나가며 새 기운으로 교체되고 빗소리가 금세 손에 만져질 듯 방 안에 가득 들어찼다. 시무룩하게 내뱉었던 한숨들이 구석에 쌓여 있다가 우르르 몰려나갔다. 급기야 사무실 가운데 멍청하고 우두커니 앉아 있던 나의 가슴으로도 쳐들어와서는 모종의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2023.04.07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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