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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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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6월의 낱말들
    6월의 낱말들

    #공장=햇빛, 이산화탄소, 물을 반죽하여 광합성하는 나무 앞에 하나 더 있다. 시선의 길이를 조절할 수 없어 볼 수 없는 운명의 공장. #바위=깔딱고개 끝에 엉거주춤 앉아 있다가, 그래도 나를 보고 승천하겠다는 듯, 어서 오시게, 아우, 눈 뜨며 손 내미는 바위를 만나면 어떻게 응대하죠? #반지름=여기에서 저기까지가 지름일 리가 없다. 저기 저 너머로 그만큼의 반지름이 최소한 더 있다. 그림자를 반납해야 보여주는 그 나머지 반지름. #그림자=언젠가 필요하면 따고 들어오너라. 내 발목에 채워주신 열쇠.#독서=책만큼 많은 골짜기가 있으랴. 낫 같은 기역. 호미 같은 니은. 당그래 같은 디귿. 어디로 굴러떨어지기 직전인 가슴을 파헤치는 농기구들. #편집=본다는 건 세상을 편집하는 것이다. 마음이 조립하는 바, 저기가 바로 거기다. 편집은 편집부는 물론 출판사보다 크고 지구보다 넓다. 휘어진 공중을 지휘하는 두 눈의 편집. #화분=내가 그 꽃을 보는 건 눈으로 풍경을 한 삽 뜨는...

    2026.06.04 20:02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부처님오신날에 생각해보는 공(空)
    부처님오신날에 생각해보는 공(空)

    있어 보이는 생각 중에 유무(有無)에 관한 것도 있지만 ‘공(空)이란 무엇인가’도 있다. 최근 어느 일본 영화에서 청년의 팔뚝에 새겨진 ‘空卽是色’(공즉시색)이란 문신을 보다가, 영화가 스크린에 현출된 빛의 집합이듯, 저 살도 실은 다 텅 빈 것이야,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간 내 가공할 소신은 ‘빌 空’에 압도적으로 집착해서 공이란 그저 내 육안으로 못 볼 뿐 핵과 전자 사이가 텅 비어 있는 원자 구조처럼, 모든 물질이란 텅 빈 것이라고 여기는 정도였다.얼마 전 영월 다녀오다가 어느 휴게소에서 커피 마시며 노자 사부님께 질문하였다가, 공에 대한 그간의 거대한 착각이 와르르 붕괴되는 경험을 하였다. 나만 몰랐고 그대들이 저마다 알고 있는 공이란 그게 아니었다. 공이란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고정된 본성이 어디에도 없다는 뜻이다(本無自性). 공을 두고 눈앞의 실체가 텅 빈 것, 몸은 우주 먼지의 집적(集積)에 불과하다는 건 번지수를 거꾸로 짚은 말이었다.공이란 빈 컵이든...

    2026.05.28 20:28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삼척 덕항산에서 외출하기
    삼척 덕항산에서 외출하기

    삼척의 덕항산은 한자로 德項山. 덕을 포함하기에 좀 넉넉할 줄로 알았는데, 항우(項羽)처럼 힘이 불끈 솟아나는 산이었다. 그러니 등산객에겐 그만큼 아찔, 짜릿한 산행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기품 있는 노랑무늬붓꽃을 따라 덕항산 정상에 도착하니 구부시령으로 넘어가는 백두대간 길목에는 이런 무심한 등산 리본. “그냥 다녀갑니다. 遷化”. 생사를 넘어서고자 목숨 걸고 수행하는 고승들도 죽음은 영원한 숙제인가 보다. 굴뚝을 벗어난 연기가 아무 자취 없이 공중을 또 빠져나가듯 이 세상을 떠나는 법은 없을까. “나무꾼도 안 다니는 길로 자기가 걸음을 옮길 수 있는 데까지 들어간 뒤 쓰러지는 거예요. 그래도 기운이 남아 있으면 낙엽 긁어서 깔고 덮고 그리고 누우신다는 거죠. 완전히 기진맥진이니까. 물이 있어 뭐가 있어요. 그냥 그대로 가는 거야. (…) 그것이 가장 멋진 죽음이죠.” 이게 바로 천화다. 좌탈입망보다 더한 저 말을 나는 저 <법정 스님의 의자>라는 다큐에서 ...

    2026.05.21 20:0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풍덩, 빠지는 사람들
    풍덩, 빠지는 사람들

    늘 늦다. 나는 영화를 너무 늦게 본다. 밤늦게도 보지만 개봉하고 10년도 더 된 폴란드 영화, <이다(IDA)>. 괄호 안에 철자가 없었더라면 ‘이다’를 그저 서술격 조사로 여길 뻔했다. 이다는 주인공 이름이다. 폴란드는 좋아하고 영화는 잘 모른다. 오늘은 그 잘 모르는 것 중에서 딱 한 장면들을 소환해본다.수녀원에서 자란 이다는 수녀가 되기 위한 마지막 서원을 앞두고 있다. 전쟁에 희생된 부모님 무덤 행방을 찾아 이모와 떠난 여행. 이모도 가슴 깊숙이 묻어둔 아들을 찾는다. 가족을 짓눌렀던 비밀이 드러나고, 어떤 진실과 맞닥뜨리는 두 사람. 출중한 판사였고, 지독한 골초이자 술꾼인 이모가 붙잡고 있던 구름 너머로 연결된 끈도 끊기고 말았다. 허망했으나 그래도 희망이란 것을 가졌던 이모. 어느 아침, 숙취를 달래며 빵을 먹고, 목욕을 하고, 환기라도 시키려나, 창문을 열더니, 담배꽁초를 물고, 거실을 가로질러 부엌으로 가다가, 음악 볼륨을 높이더니, 안방을 가...

    2026.05.14 20:22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휘청거리는 생의 한때
    휘청거리는 생의 한때

    지하철 합정역. 굉음과 함께 전동차가 들어오자, 내 앞의 한 숙녀가 보건체조하듯 허리를 힘껏 휘청, 뒤로 젖혔다. 눈앞의 공중이 꿀렁, 하는 것 같았다. 그냥 기분 좋은 일이 생겼을 때, 따봉!이라고 한 적이 있다. 어느 시인은 회심의 한 구절을 심득하면 노루처럼 방바닥을 떼굴떼굴 구른다고 했다. 끙끙 앓다가 툭 튀어나온 말의 꽃다발 아래에서 마음의 마개를 꽉 맞추려는 행위. 어느 한 경계의 돌파를 기념하려는 자신만의 고유한 동작들로 나는 이해한다. 이런 일 앞에서는 이에 상응하는 기쁨이 원인처럼 먼저 있어야 한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나. 헤아려보다가 한때 시장처럼 바빴을 배꼽을 만져보지만, 이제 그곳은 완벽한 폐허다. 아, 어머니를 잃은 지 너무도 오래.최근 어떤 분의 근황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더러 펴낸 책을 들추고 신문의 칼럼을 읽었으나 이 역시 바람결에 떠나보냈다. 그땐 글이 어려웠고 잘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는 날씬한 호리병에 깊숙이 물을 담아놓았으...

    2026.05.07 20:18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영월에서 생각하는 그 사람
    영월에서 생각하는 그 사람

    그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만이 안다. 용상에서 내려오고 궁에서 쫓겨나 물길과 산길 따라 유배지로 향하는 이의 정확한 심정을 뉘라서 알랴. 아니다, 정확하다는 게 세상에 있기는 할까. 그건 앎의 영역이 아닐 것이다. 겨우 정확한 건 그가 영월에 발 디뎠고, 청령포에 고립되었다가, 사약을 먹고 죽임을 당했다는 기록뿐.영월의 선돌(立石)은 단종의 가묘인 장릉 근처에 있는 빼어난 경관이다. 우뚝 솟은 바위로 훌쩍 건너뛰어 식생 조사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수직의 선돌 아래 둘레길로 내려가 석회암 지대가 빚어내는 희귀식물들을 관찰했다. 토끼풀 꽃잎에 얼비치는 붉은 무늬를 누가 흘린 피의 흔적이라고 상상해 보는 건 이 현장이 바로 단종 유배길이기 때문이다. 서울 쪽으로 말없이 흐르는 서강. 이를 거슬러 또 발길을 재촉했을 심사를 부질없이 헤아리다 길게 한숨 쉬고 일어서면 가시가 정말 특별하도록 길쭉하게 발달한 나무가 가슴을 찔렀다. 위리안치(圍籬安置)에 사용했다는 탱자나무보다 훨씬...

    2026.04.30 20:0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야성이 부르는 소리 앞에서 멈춘 늑구
    야성이 부르는 소리 앞에서 멈춘 늑구

    산에 갈 때, 내친김에 이대로 그냥 여기에 꽂힐까. 더러 마음먹어 보지만 아직 멀었다. 사납게 돌아다녀도 다 붙들지 못한 욕망. 그야말로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다. 낙엽 밟는 소리. 삐그덕삐그덕, 나무가 야윈 팔 뻗어 하늘문 열려는 소리. 그 날카로운 소리 사이를 헤치고 깊숙이 들어간다. 내가 내는 소리. 내가 풍기는 냄새. 나도 모르게 우르르 골짜기로 떼 지어 몰려간다. 그러다가 저 멀리 깊은 곳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귀에 익은 귀여운 새소리가 아니었다. 우우우, 한바탕 맞붙으면 꼼짝없이 당할 어느 짐승의 울음.마산 의림사 계곡. 아직 겨울의 냉기가 산을 휘감고 있었다. 인곡 저수지 지나 한참을 올라갔다. 거친 숨과 발자국 소리에 짐승도 간헐적인 울음으로 맞대응했다. 조금 쫄았던가. 그건 멧돼지의 경계신호임이 분명했다. 우리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말라는 경고. 여기 있는 금쪽같은 새끼가 다치면 나도 나를 어쩌지 못하니 서로 부딪치지 맙시다, 타협의 소리. 너희를 해코...

    2026.04.23 20:0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벚나무 아래 야단법석
    벚나무 아래 야단법석

    요즘 벚나무 아래는 이런저런 공부하기 좋은 교실이다. 우선 문학에 대한 것. 꽃잎이 어디 세 번만 낙하하랴. 가지에서 떨어지고, 공중에서 흩날리고, 마음에 앉았다가 바닥에서 미끄러져 종내에는 아래로 녹아 들어간다. 지금 조경석 위에 앉아 돌에 바깥 구경시켜 주는 꽃잎들. 물과 불의 거대한 순환에서 벗어나 잠시 쉬는 중인가. 이 사태를 알맞게 번역하는 한 구절을 발굴하여 낙엽과 꽃잎을 회복시킬 수 있다면.모처럼 형제들과 서대문 안산 나들이. 간밤의 봄비에 벚꽃이 절정을 지나니 그래서 더 흔감하다. 하늘보다 더 가까운 땅에 꽃잎이 눈처럼 쌓였다. 야외무대에선 추계예술대학생들의 봄빛 축제 공연. 벚나무 아래의 음악 공부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멀리서 벗이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우리 가곡 ‘명태’의 중후한 음성에 녹슨 귀를 닦으며 바닥에 착지하는 꽃잎을 본다. 나무와 함께하는 수학 수업으로 넘어간 것이다. 세상은 인수분해를 참 우아하게 하는구나. 정교하게 결합된 세...

    2026.04.16 20:09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무에 대한 명상
    무에 대한 명상

    꽃샘추위를 꼬리에 단 겨울이 계절의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다. 지난겨울은 무를 먹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무가 없었더라면 저 매서운 혹한을 어찌 건너왔을꼬. 내 고향에서는 무를 ‘무시’라 했다. ‘무수’라고 한 동네도 있단다. 철들도록 무우로 알고 있었다. 어느 날 표준말은 무라며 허벅지만 한 게 미끈하게 나에게 왔다. 그렇다고 무우를 꼬박꼬박 무라고 대접하진 않았다. 장미를 다른 말로 부른다고 장미의 향이 없어지지 않듯 무를 무우, 무수, 무시라 한다고 그 상냥한 맛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외려 정말 맛있는 무를 만나면 무시라고 해야 그 맛이 그 말에 꽉 감긴다.겨울밤 출출할 때 그냥 깎아 먹어도 과일에 하나 꿇리지 않는 무. 물론 소고기뭇국도 장려할 만하겠으나 아무래도 깍두기가 제격이다. 어느 식당이건 무턱대고 가도 깍두기 하나 없기는 드물다. 깍두기와 쌀밥만 훌륭해도 그 집은 단골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얼마 전 봄꽃 보러 경주에 갔을 때, 아침에 널리 이름난 돼지...

    2026.04.09 20:0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내 눈빛의 이중허리
    내 눈빛의 이중허리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기고 은퇴한 역도 선수를 <유 퀴즈 온 더 블럭>에서 본 적이 있다. 탄마가루 대신 분필가루 휘날리며 교수님으로 변신한 장미란 선수. 용상에서 바벨을 어깨까지 올린 뒤 허리 반동으로 번쩍 들고 포효하는 장면은 길이 기억에 남는다. 그가 덜어낸 무게만큼 세상은 가벼워졌던가. 지난날의 저 무거움을 누구보다 잘 다룬 고수답게 풍선처럼 풀어놓는 이야기. 말은 얼마나 가벼운가. 또한 말은 얼마나 무거운가. 그때의 고독을 이제는 내려놓은 듯 홀가분한 얼굴에 해맑은 표정이 철철 흘러넘쳤다.모래판의 애환을 다룬 ‘나는 씨름 선수다’를 최근에 보았다. 천하의 장사들이 자웅을 겨루던 시합은 인기가 많이 시들해졌다. 그러나 이 한판 승부에 인생을 건 이들이 오늘도 자신과의 모진 싸움을 벌이고 있다. 씨름은 거칠다는 선입견에 여자들은 꺼리는 종목이었지만 근래 많은 선수가 천하장사의 꿈을 키운다고 한다. “남자들은 꺾이는 맛이 있는데 여자들은 (…) 걸려도 이게 부...

    2026.04.0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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