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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비상계엄 관련 공소장 읽는 밤
    비상계엄 관련 공소장 읽는 밤

    불발탄이다. 그래도 폭탄은 폭탄이다. 낙진의 후과가 만만찮은 계엄 폭탄. 경계할 계(戒), 엄할 엄(嚴). 계엄이라는 다소 괴이쩍은 이름의 이 짐승을 또 만날 줄이야. 그 옛날 막다른 골목에서 된통 물린 기억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갑진 12월3일. 그날 밤의 내란과 이후 전개된 사태에 일상을 온전히 회복하기가 힘든 이웃이 많다. 수괴(首魁), 체포(逮捕), 탄핵(彈劾), 구속(拘束) 등등 육법전서에나 어울리는 말들이 느닷없이 뛰쳐나와 실생활을 휘젓는다. 사전 속에서는 얌전하지만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사납기 그지없는 단어들.법이라는 것은 누구에겐 밧줄, 누군가에겐 기술, 또 누군가에겐 전부겠지만 그 어떤 이에겐 어쩌면 있으나마나한 것. 발길 따라 걷는 대로 걷고, 살아야 하는 대로 사는 이에게 그건 저기 낡은 새끼줄 울타리에 불과한 것. 작위든 부작위든 헛갈리는 말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불혹(不惑)의 삶을 일상으로 여기면서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다. 굳이 나, 여기에서, ...

    2025.02.06 21:18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을사년을 맞이하며
    을사년을 맞이하며

    우리말을 받아적는 자음과 모음 중에 하나라도 잃는다면 자연계의 연쇄 사슬이 돌발적으로 끊어진 미싱 링크처럼 그곳의 발음이 술술 새서 아무리 반듯한 생각을 하더라도 말의 빈 구멍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말이 있어야 세계도 가능한 것.이러한 자음 중에서 특히 리을(ㄹ)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저 리을이 없다면 이 세상의 의성어, 의태어가 이렇게 풍부할 수 있겠나. 천지간에 미만한 소리와 동작을 어떻게 다 살리겠는가. 빗소리, 바람 소리, 아득한 허공을 나는 철새들의 기척.이런 리을은 구불구불한 골목 같기도 하고, 가늘가늘 내리는 빗줄기가 사나운 바람에 휘청거리며 그리는 궤적 같기도 한데, 그런 리을이 있어 이 세상은 스프링 같은 탄력을 마음껏 발휘하느니, 활활 끓는 리을의 행렬을 보라. 물, 불, 길, 술, 말, 발, 돌, 철 그리고 얼굴.을사(乙巳), 올해의 간지에 유념하면서 생각을 굴리다가 리을(ㄹ)과 모양이 비슷한 한자 하나를 발굴했다. 그것...

    2025.01.30 21:3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네 글자의 점묘화
    네 글자의 점묘화

    달이 둥싯 높이 떠오른다. 훌쩍 달에 건너가면 지구가 저 아래 보일까. 그럴 리가, 어느새 지구가 저 위로 둥글 떠 있다. 이처럼 서로가 서로를 정중히 받들지 않는다면 우주는 아예 성립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밤하늘에서 별자리를 골라 마르지 않는 신화를 두레박처럼 퍼올리듯, 저 허공에서 누군가 우리가 만들어내는 말과 막걸리에서 의미를 길어 올리지 않을까. 갑진년에서 을사년, 두 해의 접면에서 네온사인 같은 네 글자들을 골라 이 시대의 풍속을 점묘해 본다. #맞절하다.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후 마지막 사고 브리핑에서 유가족협의회 대표가 정부 관계자들을 앞으로 나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저희 요구에도 욕도 많이 먹고 고생도 많이 하셨다. 정말 감사하다”면서 허리 숙여 인사했고, 이들도 맞절했다. #우두머리. 어떤 일이나 단체에서 으뜸인 사람이다. 한밤중의 느닷없는 계엄과 함께 뛰쳐나온 단어. 평생 서너 번 만날 말을 지금 포식하고 있다. 세 글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네 글자를 ...

    2025.01.23 21:23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어느 색다른 호외에 대하여
    어느 색다른 호외에 대하여

    호외(號外)란 일간지가 매일 발행하는 정규 호수 외에 따로 발행하는 책받침 같은 신문을 말한다. 그 어떤 돌발 사태가 터졌을 때, 이를 급히 전하기 위해 만든다. 주로 계엄이나 긴급조치 등 정치적인 격변이 많았던 시기에 호외가 뿌려지곤 했다. 가장 최근에 접한 건 경향신문의 “시민이 이겼다. ‘내란 주범’ 윤석열 탄핵소추안 가결”, 동아일보의 “尹 대통령 탄핵, 직무정지” 등이었다.이건 신문사가 제작하는 것이고 내 스스로 달력에서 하루를 특별히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호외가 있다. 개인적 역량이 미천해 직접 호외를 만들진 못하고 그날치 주요 신문들을 모아 호외처럼 간직하는 것이다. 그간 나는 딱 두 번 나의 호외를 발행하였다.간신히 결혼하고 첫째에 이어 둘째가 내 곁을 찾아왔다. 그날도 아이와 산모의 건강을 확인한 뒤, 병원에서 신새벽의 가판대로 내달렸다. 이날치 잉크 냄새 가득한 신문을 구입하고 밀봉을 했다. 그리고 아이가 일생의 동반자라며 듬직한 청년을 데리고...

    2025.01.16 21:0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헌법과 憲法 속의 눈을 생각한다
    헌법과 憲法 속의 눈을 생각한다

    헌법(憲法). 요즘 가장 또렷해진 단어는 단연 헌법일 것이다. 한밤중, 느닷없는 계엄 선포라니! 두부 같은 머리, 그 머릿속 실핏줄이 거미줄이 아니라면 어디 감히 꿈조차 꿀 일인가. 저 위헌적 발상에 놀라 어안이 벙벙했으나 이젠 헌법에 적힌 대로 따박따박 응징할 차례다. 독 안에 든 쥐의 말로는 외길뿐임을 역사는 증명한다. 이참에 헌법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본다.‘憲’자는 宀(집 면)과 丰(예쁠 봉), 目(눈 목), 心(마음 심)이 결합한 모습이다. 일견 해롭다는 뜻의 해(害)와 얄궂게도 비슷해 보인다. 이는 해로운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밝은 눈과 마음으로 감시하라는 것. ‘法’자는 水(물 수)와 去(갈 거)가 결합한 것으로 한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이자 모두가 공감해야 하는 당연한 이치를 뜻하는 것(이상 네이버 옥편 참조).지금부터 약 250년 전에 살았던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지독한 메모광이었다. 연암의 초상화를 ...

    2025.01.09 21:12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혼신의 글쓰기, ‘김윤식 전시회’에서
    혼신의 글쓰기, ‘김윤식 전시회’에서

    한 해의 마지막 달이 밋밋하게 끝나지 않고 뿔처럼 하루가 더 있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12월31일. 복면한 괴한인 듯 아라비아 숫자 즐비한 달력에서 지난 1년을 휘감으며 등대처럼 밝힌다. 그냥 하루, 여느 날처럼 지나치기엔 내 간이 너무 작다.요즘 대한민국에서 일상을 살아내는 건 비장한 일이다. 기괴하고 희한한 일들이 마구마구 범람해서 정신을 모으기가 몹시 힘들다. 해가 뜨고 다시 달이 뒤쫓아 오기까지, 누구에게나 주어진 하루라는 시간의 보자기에서 이 마지막 날은 목석같은 나에게도 좀 특별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무엇으로 다시 못 볼 갑진년을 마무리할까.참 수상한 시절, 그저 흘러가고 지나가는 것들이 변덕을 부리지만 그 와중에도 무겁게 지그시 제자리를 누르며 중심을 잡아주는 것들이 있어 이나마 세상은 이렇게라도 유지된다. 산이 제 높이를 지탱하려고 무거운 돌이나 바위를 부둥켜안고 있는 것처럼.허황한 말들이 활개치는 이 부박한 지상의 표면에서 사람의 생...

    2025.01.02 21:23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남태령 대첩과 줄탁동기
    남태령 대첩과 줄탁동기

    식물탐사대 송년 산행, 사당역에서 관음사 지나 관악산 오르는 길. 날씨가 칼칼하게 추웠다. 629m 정상에 올라 멀리 여의도 쪽을 바라봤다. 오늘은 탄핵소추안이 결판나는 날. 사람들의 근심을 연결하며 바람은 불고, 세상 부조리를 씻는 듯 한강은 흐르고 있었다.과천향교 쪽으로 내려와 추어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과천에 오면 두 분의 옛어른이 생각난다. 추사 김정희와 동학의 최제우. 개벽의 기치를 내세웠으나 혹세무민의 난적으로 몰린 최제우는 경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거의 초주검의 상태로 과천에 이르러 대기하다가 남태령을 넘으려는데, 갑자기 철종이 죽어 국장 기간이라 다시 경상감영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대구의 관덕정에서 처형당한다. 기록에 따르면 최제우가 과천을 떠난 날은 1863년 12월26일경이다. 겨우 몸이나 가렸을 홑옷의 허술한 행색에 날씨마저 그 얼마나 혹독했으랴.남태령은 한양과 삼남(충청, 전라, 경상)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이...

    2024.12.26 21:26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아직 끝나지 않은 ‘네 글자’
    아직 끝나지 않은 ‘네 글자’

    #기억하다. 인간은 말로 표현하고 말로서 행동하고 그 말을 남긴다. <논어>의 처음은 ‘배울 학(學)’, 마지막은 ‘말씀 언(言)’이다. 결국 말 하나 제대로 배우라는 가르침이 아닐까. 최근 경천동지할 사태가 발생하고 파천황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 또한 말을 타고 나에게까지 실려왔다. 질서 있는 네 글자들 통해 이 사변을 기억하련다.#처단한다. 조금 일찍 누웠는데 거실에서 아내가 비명을 질렀다. 실감은커녕 차라리 실소가 터지려는데 계엄령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국회와 … 정치활동을 금한다. …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 위반자는 … 처단한다.” 왔던 잠이 확 달아났다. 개그가 아니었다.#중과부적. 국방부 장관 김용현은 비상계엄령을 해제한 직후, 관계자 등에게 “중과부적이었다. 수고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12·4 한겨레신문).#오리무중. 계엄 선포 전 국무회의 참석자가 명확히 파악되지 않으면서 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채...

    2024.12.19 20:46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노벨상, 노자, 비상계엄 그리고 한강
    노벨상, 노자, 비상계엄 그리고 한강

    마지막이다. 달력도 한 장 남았다. 세상의 모든 일, 어김없이 끝을 향해 간다. 작년부터 말석에 앉아 배우던 <노자>도 완독이 코앞이다. 마지막 81장을 앞두고 이 문장을 다시 만났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해도 빠트리는 법이 없다. 어디 꼭 그런가. 세상에 죄와 벌이 무성하지만, 죄만 벌어지고 그에 합당한 벌은 어디에 있는가. 왜 세상은 잔인한 자들이 활개치는가. 왜 악독한 자들을 내버려 두는가.수십 년 전, 광주를 덮친 비극만 해도 그랬다. 학살의 주범들은 그러고도 떵떵거리며 오래 살더라. 지금도 후손들은 은닉한 쩐으로 잘 먹고 잘 살더라. 쳇, 하늘의 그물을 믿으라고? 저 문장의 효력을 의심했었다. 공중에 아득한 눈발 성글게 날릴 때 하늘은 그물을 슬쩍 보여주는가. 그중에 가장 큰 눈송이 골라 혀끝에 얹으며 중얼거리기를, 고작 연약한 한해살이풀이나 꾸짖듯 흠뻑 덮어씌우고, 자란 죄밖에 없는 나무의 밑동이나 옥죄는 ...

    2024.12.12 20:35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차마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차마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부사로 뒤덮여 있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 나오는 말이다. 글 쓸 때 부사로 멋내려다 오히려 문장이 엉망이 되는 걸 경계하는 뜻이다. 많은 이들이 글쓰기에서 부사와 형용사를 장식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문제가 있다고 안 쓰는 건 쉬운 일이긴 하겠으나,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다. 잘 쓴 부사 하나 사람의 마음을 몽땅 훔치며 글의 격을 높이기도 한다.얼마 전 발표된 가톨릭 사제들의 시국선언을 또 꺼내 읽는다.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붙인 제목부터가 참으로 쩌릿하게 마음을 울린다. ‘어째서 사람이 이 모양인가!’ 이어지는 본문이 모두 명문장이다.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민심의 아우성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천주교 사제들도 시국선언의 대열에 동참하고자 합니다.”차마 외면할 수 없는 것. 이는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낙동강 파수꾼으로 불리며 민족문학의 한 봉우리로 우뚝한 요산 김정한(1908~1996). 일제의 발악...

    2024.12.05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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