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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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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나무에게 배우는 맹자 한 대목
    나무에게 배우는 맹자 한 대목

    천하 사물은 그 모양대로의 웅덩이다. 풍경의 요소들은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고유한 구멍이었다. 햇빛이 그 웅덩이를 차곡차곡 채워야 사물은 그 사물로 드러난다. 나무 한 그루에는 그 부피만큼의 햇빛이 정확하게 든다. 빠르고 일정한 속도의 빛은 이 웅덩이를 동시에 가득 채운 뒤 다음 국면으로 나아간다. 자연이 명확한 둘레로 빈틈없이 구성되는 건 그 덕분이다. 산은 산, 물은 물이다라는 말도 이런 사실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이제는 옛날의 일, 겨울 한밤중 취객이 된 적이 있었다. 벗들과 술자리를 파하고 귀가할 때, 하루의 고요를 다독이며 가로수와 가로등이 나란히 서 있다. 그럴 때 고개 숙인 가로등을 만지면 공기보다 더 찬 냉기가 손바닥을 찌르고 기둥을 두드리면 텅텅 빈 소리가 울려 나왔다. 하지만 가로수는 다르다. 그 싸늘한 추위에도 한낮의 햇빛을 저장했다가 취약한 시간에 미량의 온기를 전해주었다.그때 그 촉감이 고맙고 좋아서 가로수를...

    2025.10.02 21:35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거창군수님께 드리는 간청
    거창군수님께 드리는 간청

    고향은 저물 무렵이 특히 좋다. 오늘은 벌초하는 날. 풀 냄새 흥건한 산소 앞에서 절하다가 저무는 저녁을 맞이했다. 언제나 고향은 상냥하고 포근한데, 내 마음 왜 이리 무거워질까.지리산, 가야산, 덕유산의 무게중심인 거창. 내 고향은 그중에서도 주상면 내오리 오무마을. 무주구천동 지나 백두대간의 한 자락인 덕유산 빼재에서 남으로 뻗은 수려한 경치 속에 있다. 전라에서 경상으로 넘어가는 곳. 그 가운데 알싸한 문명이 있으니, 하늘로 가는 높은 사다리라는 고제(高梯)다. 다시 내리닫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은 퇴계가 극찬한 수승대, 왼편은 거창읍으로 연결된다. 완대초등학교 터, 내오리 지석묘를 따끔따끔 지나니 바로 고반재(考槃齋)다. 아, 고향에 가까워지는데 왜 내 마음 점점 어두워질까.고반재는 있을 만한 곳에 있을 법하게, 그냥 없는 듯이 있는 작은 재실. 내 어린 시절 소먹이 하러 자주 드나들던 고방골 입구에 쓰러질 듯 자리 잡았다. 고반은 시경(詩經)으로 바로 연결되는...

    2025.09.25 20:29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다

    비는 가볍게 내려 무겁게 떨어진다. 집 벗어나니 해방된 감각인가. 낯선 곳에 가면 빗소리도 더 잘 들린다. 반복되는 일상의 보자기를 벗어던진 덕분일까. 그곳이 바닷가라면 빗방울도 더욱 굵어진다. 모텔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깨어나 바깥을 보았다. 산에 가려고 동해시에 왔는데 난감한 상황으로 머릿속이 아연 축축해졌다.몇해 전, 제주에 꽃산행 갔다가 비슷한 상황에서 번개 같은 꾀 하나를 장만해 두었더랬다. 타박타박 떨어지는 저 빗소리, 하늘에서 누가 글 읽는 소리! 주룩주룩 빗줄기를 옛글로 환기한 이후 이런 혼자만의 ‘우쭐’에 빠졌다. 어쨌든 하루는 비가 오거나 비가 안 오거나 둘 중의 하나이니 시시때때로 공부하는 셈이 아닌가.산행 도중 산에서 비 만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아침부터 비 내리는데 등산하기에는 마음이 좀 켕긴다. 그러나 이 또한 어쩔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가뭄 강릉, 이 지역의 물 사정은 재난으로 선포될 정도로 심각하다는 뉴...

    2025.09.18 20:02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물방울 하나 관찰하기
    물방울 하나 관찰하기

    비 그친 뒤 숲에는 돌연 적막. 이윽고 공중이 비의 발을 모두 거두자 잎사귀마다 물방울 하나 만들려는 안간힘이 빗발친다. 아무래도 널찍한 활엽수보다 새침한 침엽수가 물방울 만들기에는 유리한 구조다. 그냥 덧없이 증발되기보다는 한 방울이라도 되어 뿌리 근처로 뛰어내리려는 빗방울들의 갸륵한 노력.그 물방울 떨어져 들꽃이 먹는 이슬이 되고, 그런 광경을 보고 윌리엄 블레이크는 이런 시를 남겼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떠도는 먼지에서 몸을 읽고 뒹구는 모래에서 세계를 찾는 것은 실로 대단한 통찰이다. 거미줄처럼 가는 줄기에 얹힌 들꽃에서 하늘나라를 발견하다니!감나무에 맺힌 물방울에서 뜻밖의 무늬를 알아차리고 시를 쓴 소년도 있다. “빗방울에/ 풍경이 비치고 있다/ 방울 속에/ 다른 세계가 있다.” 이후 ‘나무와 풀을 주시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람이 된 그는 그 빗방울이 내어준 길을 따라 걸어, 세심히 보고 끊임없이...

    2025.09.11 20:16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이사하는 날, 장롱과의 작별
    이사하는 날, 장롱과의 작별

    모처럼 늦잠 자고 일어나 베란다에서 바깥을 보니 공중을 들락날락거리는 보따리의 행렬이다. 좋은 구경거리라서 잠깐 아래를 보니 사다리차 근처 올망졸망한 짐들 사이로 건장한 체격의 장롱이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어둑한 곳에서 조금 억울한 일상만 지내다가 모처럼 햇빛 활짝 쬐며 고향 쪽도 실컷 쳐다보는 장롱. 다들 고만고만한 세간살이 중에서도 유독 장롱에 마음이 가는 건 오래전 이런 시를 읽은 덕분이다.“우리집 식당에는 윤이 날 듯 말 듯한/ 장롱이 하나 있는데, 그건/ 우리 대고모들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할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었고/ 우리 아버지의 목소리도 들은 것이다./ 그들의 추억을 언제나 간직하고 있는 장롱, (…)”(프랑시스 잠, ‘식당’). 만물을 만진 뒤 하늘로 떠난 햇빛은 우주 한 귀퉁이에 차곡차곡 쌓이는데, 그 빛뭉치를 지구로 가지고 와 조심스레 풀면 아득한 옛날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고 한 물리학자가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리 멀리 갈 것 있으랴. 우리...

    2025.09.04 22:03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호주머니 속의 송곳에 대하여
    호주머니 속의 송곳에 대하여

    생김새는 물론 한번 이름을 들으면 쉬 머리를 떠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송곳도 그런 것 중의 하나다. 일상에서 접하기 퍽 힘든 사물이지만 이런 말은 일찍이 들었다. 가령, 송곳 하나 꽂을 데가 없을 만큼 해운대에 구름 인파로 붐볐다는 표현.내가 나온 고등학교의 상징은 벌이다. 부지런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는 말은 그때부터 머리에 꽉 박힌 경구다. 일생을 통틀어 하고 싶은 일 하나는 분명히 가지자는 말은 이웃사촌이다. 어쩌면 우리가 산다는 건 그것에 바쳐져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망외의 그 어떤 성취를 이루더라도 그게 없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그것.이런 경우도 있다. 어느 청년이 ‘문학, 목매달고 죽어도 좋은 나무’에 한번 씌고 나면 설령 그리로부터 멀어진다 하더라도 호주머니 속에 송곳 하나를 평생 간직하게 된다. 하여 그 송곳이 삐죽이 솟아나서 걸을 때마다 허벅지를 찌른다. 그러다가 종내에는 그곳이 피로 붉게 젖는 느낌.색다른 송곳도 있...

    2025.08.28 21:13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명품이라는 것들
    명품이라는 것들

    경남 남해군 아기자기한 바닷가에 물건리가 있다. 잘 조성된 방풍림이 천연기념물일 만큼 명승 해안 마을이다. 상록수 공부하러 갔다가 한번 들으매 잊을 수 없는 이름의 물건중학교가 있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빗방울 흔적, 뛰놀던 운동화 자국이 뚜렷하게 어울린 운동장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어 보았다. 물건리의 물건은 우리가 짐작하는 그 물건은 아니다. 지세가 ‘물’(勿)자 혹은 ‘수건 건’(巾)자 모양을 닮아서 물건(勿巾)이다. 학교마다 명물은 있고, 여기 졸업생들 사회로 나가 물건리 출신답게 물건이 되고 명사가 되기도 하였을까.살아가는 동안 이래저래 말의 영향을 입는다. 어느 시기에는 어떤 특정한 말에 꽂히기도 한다. 주방의 칼도 명장이 요리할 땐 한입 크기로 재단하는 훌륭한 도구이지만, 누군가의 손에서는 살벌한 흉기가 될 수도 있다. 말도 마찬가지다.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가 없다는 말도 명언이다. 한번 뱉은 말,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점에서 말과 물은 같다....

    2025.08.21 21:18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가로등 아래 반지 찾는 사람
    가로등 아래 반지 찾는 사람

    형하고는 지은 인연이 오래고 두텁다. 멀리 꽃산행 갈 땐 늘 룸메이트다. 형은 과학 출판 초창기 무렵, 번역에 투신해 ‘과학세대’를 이끌며 두툼한 목록을 쌓았다. 독문학 전공의 형이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군 성과다. 그랬던 형도 호주머니에서 늘 콕콕 찔러대는 송곳을 피하지 못했다. 서른 무렵 독일로 공부하러 가겠다며, 불후의 명작 하나 써오겠다며, 나태한 일상에 젖은 나에게 말했다.문학에 대한 순정으로 반짝거리던 형의 눈망울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나 몇몇이 발목을 잡아 당시에는 다소 생소하던 과학사회학에 뛰어들었다. 형의 도저한 세계를 내가 운위할 깜냥은 아니고 가끔 형의 유튜브 강의를 즐겨 듣는다. 어느 날에는 이런 마무리에 혼자 박장대소했다. 형이 펴낸 <과학에 대한 새로운 관점, 과학혁명의 구조>(김동광, 아이세움)에 실린 우화이기도 하다.늦은 밤 이(李)의 귀갓길. 동네 가로등 한 줌 불빛 아래 김(金)이 쪼그리고 앉아 있다. 이가 뭐 하느냐...

    2025.08.14 21:28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나무와 어린 왕자
    나무와 어린 왕자

    거대한 두 눈의 외계인이 사는 공중. 그 무량한 곳에서 나오는 톱니바퀴 같은 더위가 전신을 꽉꽉 찔러댄다. 땡볕의 나날, 요즘 가장 각광받는 장소 중 하나는 나무 아래일 것이다. 저 집요한 태양도 어쩌지 못하는 곳. 문명사적으로 많은 일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곳도 보리수, 공자가 제자를 길러낸 곳도 은행나무 아래 아닌가. 인류는 그늘에 큰 빚을 지고 있다. 부채 하나 들고 나도 나무 아래로 내려가 나무에 관한 오래된 생각을 구슬려본다.나무에 대해 많은 이들이 많은 이야기를 한다. 나무에 대한 시도 흔하고 우리 안의 폭력성을 견딜 수 없어 나무가 되려는 인간을 다룬 소설도 있다. 나무 동화도 많다. 그러나 이 모두는 부분적인 것이다. 나무를 옆에서 보고 나무의 일부를 다룬 것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구름은커녕 전봇대보다 낮은 키의 나는 아직 나무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식물성이 우리를 구원한다지만 나무라고 완결된 존재일 리는 없다. 또 어디로 가...

    2025.08.07 20:52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장인어른과 옛날로 떠나기
    장인어른과 옛날로 떠나기

    하루에도 몇번 드나드는 화장실. 그곳에 우두커니 걸린 수건을 보며 쓴 시가 있다. “거실 화장실 수건은 늘 아내가 갈아 두는데/(…)/ 어느 날 아침 변기에 앉아 바라보면, 억지로/ 찢어발기거나 태워 버리지 않으면 사라지지도 않을/ 낡은 수건 하나가(…)/ 이제나 저제나 우리 숨 끊어질/ 날을 지켜보기 위해 저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소멸에 대하여1, 이성복)저 ‘무시 못할’ 수건에서 소멸을 길어 올리는 어마무시한 시에는 그 수건을 어느 기념식에서 받아온, 이제는 돌아가신 ‘도포에 유건 쓴 우리 아버지’와 ‘강서구청 총무국장인 우리 장인어른’이 등장하는데, 오늘은 그 구절을 훔치며 나도 장인어른에 관한 생각 하나를 덧대본다.장인어른은 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한 지 어느덧 30여년. 장모님 병원에 누워 계시고 홀로 일상을 다스리는데 가끔 안부도 살피고 말벗도 해드릴 겸 춘천으로 찾아뵌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장인께서 강원도의 벽지학교를 전전하신 것을 새삼 알게 ...

    2025.07.31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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