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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남태령 대첩과 줄탁동기
    남태령 대첩과 줄탁동기

    식물탐사대 송년 산행, 사당역에서 관음사 지나 관악산 오르는 길. 날씨가 칼칼하게 추웠다. 629m 정상에 올라 멀리 여의도 쪽을 바라봤다. 오늘은 탄핵소추안이 결판나는 날. 사람들의 근심을 연결하며 바람은 불고, 세상 부조리를 씻는 듯 한강은 흐르고 있었다.과천향교 쪽으로 내려와 추어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과천에 오면 두 분의 옛어른이 생각난다. 추사 김정희와 동학의 최제우. 개벽의 기치를 내세웠으나 혹세무민의 난적으로 몰린 최제우는 경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다. 거의 초주검의 상태로 과천에 이르러 대기하다가 남태령을 넘으려는데, 갑자기 철종이 죽어 국장 기간이라 다시 경상감영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듬해 대구의 관덕정에서 처형당한다. 기록에 따르면 최제우가 과천을 떠난 날은 1863년 12월26일경이다. 겨우 몸이나 가렸을 홑옷의 허술한 행색에 날씨마저 그 얼마나 혹독했으랴.남태령은 한양과 삼남(충청, 전라, 경상)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이...

    2024.12.26 21:26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아직 끝나지 않은 ‘네 글자’
    아직 끝나지 않은 ‘네 글자’

    #기억하다. 인간은 말로 표현하고 말로서 행동하고 그 말을 남긴다. <논어>의 처음은 ‘배울 학(學)’, 마지막은 ‘말씀 언(言)’이다. 결국 말 하나 제대로 배우라는 가르침이 아닐까. 최근 경천동지할 사태가 발생하고 파천황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 또한 말을 타고 나에게까지 실려왔다. 질서 있는 네 글자들 통해 이 사변을 기억하련다.#처단한다. 조금 일찍 누웠는데 거실에서 아내가 비명을 질렀다. 실감은커녕 차라리 실소가 터지려는데 계엄령 포고문이 발표되었다. “국회와 … 정치활동을 금한다. …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 위반자는 … 처단한다.” 왔던 잠이 확 달아났다. 개그가 아니었다.#중과부적. 국방부 장관 김용현은 비상계엄령을 해제한 직후, 관계자 등에게 “중과부적이었다. 수고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12·4 한겨레신문).#오리무중. 계엄 선포 전 국무회의 참석자가 명확히 파악되지 않으면서 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채...

    2024.12.19 20:46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노벨상, 노자, 비상계엄 그리고 한강
    노벨상, 노자, 비상계엄 그리고 한강

    마지막이다. 달력도 한 장 남았다. 세상의 모든 일, 어김없이 끝을 향해 간다. 작년부터 말석에 앉아 배우던 <노자>도 완독이 코앞이다. 마지막 81장을 앞두고 이 문장을 다시 만났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 하늘의 그물은 성긴 듯해도 빠트리는 법이 없다. 어디 꼭 그런가. 세상에 죄와 벌이 무성하지만, 죄만 벌어지고 그에 합당한 벌은 어디에 있는가. 왜 세상은 잔인한 자들이 활개치는가. 왜 악독한 자들을 내버려 두는가.수십 년 전, 광주를 덮친 비극만 해도 그랬다. 학살의 주범들은 그러고도 떵떵거리며 오래 살더라. 지금도 후손들은 은닉한 쩐으로 잘 먹고 잘 살더라. 쳇, 하늘의 그물을 믿으라고? 저 문장의 효력을 의심했었다. 공중에 아득한 눈발 성글게 날릴 때 하늘은 그물을 슬쩍 보여주는가. 그중에 가장 큰 눈송이 골라 혀끝에 얹으며 중얼거리기를, 고작 연약한 한해살이풀이나 꾸짖듯 흠뻑 덮어씌우고, 자란 죄밖에 없는 나무의 밑동이나 옥죄는 ...

    2024.12.12 20:35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차마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차마 어찌할 수 없는 것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부사로 뒤덮여 있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에 나오는 말이다. 글 쓸 때 부사로 멋내려다 오히려 문장이 엉망이 되는 걸 경계하는 뜻이다. 많은 이들이 글쓰기에서 부사와 형용사를 장식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문제가 있다고 안 쓰는 건 쉬운 일이긴 하겠으나, 가장 좋은 방법은 아닐 것이다. 잘 쓴 부사 하나 사람의 마음을 몽땅 훔치며 글의 격을 높이기도 한다.얼마 전 발표된 가톨릭 사제들의 시국선언을 또 꺼내 읽는다. 성경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붙인 제목부터가 참으로 쩌릿하게 마음을 울린다. ‘어째서 사람이 이 모양인가!’ 이어지는 본문이 모두 명문장이다. “무섭게 소용돌이치는 민심의 아우성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천주교 사제들도 시국선언의 대열에 동참하고자 합니다.”차마 외면할 수 없는 것. 이는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낙동강 파수꾼으로 불리며 민족문학의 한 봉우리로 우뚝한 요산 김정한(1908~1996). 일제의 발악...

    2024.12.05 20:36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버스정류장을 칭송하는 궁리
    버스정류장을 칭송하는 궁리

    버스정류장은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 같은 곳이다. 하늘 아래 서성거리는 사람들, 곧 무언가 벌어지기 직전의 기운들. 막 버스에서 내린 학생(나1)이 기다리던 엄마(나2)와 가볍게 포옹한다. 작은 수첩을 들고 중얼중얼 외우는 소녀(나3)와 빵모자를 쓴 청년(나5) 외 여럿(나7-10)을 태우고 버스는 얼른 앞으로 떠난다. 옆으로 흐르는 것들이 무척 발달한 버스정류장. 전광판에는 주어 없이 토막 난 문장들이 떠다닌다.방황하기를 좋아하는 청년(나29)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단발머리 두 소녀(나4, 나6)가 함박웃음을 터뜨리며 온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아저씨(나12)는 판소리 한 대목을 흥얼거리기에도 딱 알맞은 장소다. 휴대폰에 집착하는 소년(나13)은 이 풍경이 익숙하다. 공중화장실 근처 나무들의 때깔이 좋듯 버스정류장 가까이 가로수는 더 의젓하다. 이 근방을 떠도는 근심을 풍부하게 먹고 자란 덕분이다. 여기에서는 구름도 멈칫, 공손하게 흐르는 것 같다.버스는 아...

    2024.11.28 21:42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평행 우주, 평행 대통령
    평행 우주, 평행 대통령

    어제와 오늘은 평행한다. 하루 차이임에도 영원히 서로 만나지 못하는 건 이 때문이다. 과거로 건너갈 순 없고 이렇게 기억을 뒤적인다. 오래전 고등학교 지구과학 수업 시간. 선생님이 칠판에 점과 동그라미를 그렸다. 태양과 지구. 점에서 방사상으로 화살표를 죽죽 그었다. 보거라, 이렇게 햇빛이 우주에서 오는데, 그 거리가 하도 멀어서 너희들 등에 도착하는 햇살은 모두 평행하다고 간주한다! 이상하게도 이 말이 깊은 울림을 남겼다.날씨는 누구나 공통으로 입는 공중의 옷이다. 하루 차이인데도 내일의 옷은 맞추기가 영 힘들다. 사계절에 밀착하며 살고 싶어 글쓰기에 능한 젊은 마케터와 저 절기를 짚어가면서 궁리출판 소식지에 편지를 교환하고 있다. 이렇게라도 해서 우리를 감싸고 도는 날씨 변화를 제때 껴입고자 하는 것이다.입춘에 시작했는데 어느덧 입동이다. 우리의 무심한 감각이라면 거저 입동(入冬)이겠지만 입동(立冬)이다. 자연에 인격처럼 격(格)을 부여하고 사람하고 나란히 ...

    2024.11.21 20:1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애기향유의 꽃과 고라니의 뼈
    애기향유의 꽃과 고라니의 뼈

    멀리 힘겹게 온 햇빛이 잘게 부서지는 것 같아 손바닥을 한번 비벼보는 시간. 일교차가 심한 환절기에 감기 걱정도 하면서 주먹을 가볍게 쥐면 쥐꼬리 같은 햇살을 사로잡는 느낌도 있다.인천공항 근처 오종종한 섬으로 꽃산행을 나선다. 여러 난개발 공사로 움푹줌푹한 해변가에 무량한 바다와 대치하는 낮은 산들이 특이한 지형을 이루며 귀한 꽃들을 보듬고 있다. 오늘 목표로 한 꽃은 애기향유. 계절이 겨울의 입구로 가도록 늦게까지 꽃의 자리를 유지하는 기특한 야생화다. 이런 꽃은 허공에 그냥 피어 있기보다는 지하의 누군가가 바깥으로 요량껏 툭 던져놓은 것이란 실감도 진하게 든다.썰물이나 밀물도 미치지 못하는 곳에 이르니, 평야처럼 드넓은 평지에 키 작은 야생화가 즐비하다. 소금기를 듬뿍 머금은 채 단풍보다 더 붉은 해홍나물, 함초도 빽빽하고 그 사이로 바닥까지 내려앉은 허공을 맘껏 희롱하며 달랑게들이 재재발거리며 놀고 있다.어라, 어느 곳에 하얗게 백화된 짐승의 뼈가...

    2024.11.14 20:1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빨래에 관하여
    빨래에 관하여

    오래전 기억. 어머니 떠나시기 직전 그래도 기력이 좋을 때 두어 달을 함께 지냈다. 파주출판단지 사무실의 원룸에서였다. 모처럼 모자간에 밥을 끓여 먹으면서 제법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의 지나간 생활에 관해 어머니처럼 많이 알고 계시는 분이 또 있으랴. 어머니야말로 내 곁에 현현하는 스토리텔러이지 않은가.기억력이 비상한 어머니는 소쿠리 들고 산딸기 따던 소녀, 멀리 덕유산으로 산나물 캐러 다니던 새색시, 시골에서의 시집살이 때 일들을 풍성히 이야기해 주신다. 어느 날엔 콩나물 재배기를 장만했다. 어머니의 지도를 받으며 한쪽 구석에서 직접 키우기도 했다.무럭무럭 자라는 콩나물 앞에서 묻는다. 어머이, 옛날에 뭐 해서 멕있능교? 그러면 말씀하신다. 특별한 게 있나. 호박 보이면 호박, 가지 있으면 가지 따고, 정구지 끊고, 고추 뽁고, 밀가루로 칼국수도 참 많이 밀었지. 그땐 멸치도 억수로 귀했다 아이가. 어쨌거나 삼시 세끼 굶은 적은 없다. 그래저래 거둬주신 ...

    2024.11.07 19:53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문 앞에서 만난 ‘동학’
    문 앞에서 만난 ‘동학’

    파주출판단지의 이웃인 교하는 交河다. 사귈 교, 물 하. 두 개의 물이 서로 교차하는 곳이다. 문명이 발생하기에 좋은 장소이겠다. 가끔 교하도서관에 간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문을 통과한다. 예전 문은 여닫이가 많았지만 요즘은 미닫이가 대세다. 이런 문은 밀어야 하는가, 당겨야 하는가. 나의 경우 대부분 먼저 밀어본다. 가지는 것에 익숙한, 무엇이든 당겨 내 소유로 만들려는 아귀다툼에 익숙한 손으로서는 다소 이례적인 동작이겠다. 이제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렀으니 얼른 저곳으로 나가겠다는 몸짓이 은연중에 표현된 것일까.출입문을 통과하면 계단이다. 오르고 내림을 굳이 구별하지 않는 계단 끝에는 경찰의 ‘지명수배자’ 전단이 있다. 사기, 살인, 절도 등등의 범인들의 이름과 증명사진. 그렇게 문 하나, 또 하나의 문을 통과하면 책들의 숲이다. 그곳에서 작은 독자가 되어 신착도서를 살핀다. 공자, 니체, 하이데거의 철학과 시와 소설의 문학 코너를 둘러보고 <무한으로 가는 ...

    2024.10.31 21:33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지난여름 매미의 몰락
    지난여름 매미의 몰락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듯(윌리엄 블레이크), 난파 직전의 조각배 같아도 인류를 다 싣고 거뜬하게 시간의 바다를 항행하는 게 한 편의 시(詩)다. 술과 음악에 휩싸여 일생을 보낸 김종삼(1921~1984)은 단 몇 줄의 시행에 염결한 여백을 절벽처럼 세워놓는 풀잎 같은 시인이다. 피아노 건반보다 훨씬 짧은 시, ‘대화’의 전문을 읽는다. “두이노城 안팎을 나무다리가 되어서/ 다니고 있었다 소리가 난다// 간혹// 죽은 친지들이 보이다가 날이 밝았다/ 모차르트 동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에게 인간의 죽음이 뭐냐고/ 묻는 이에게 모차르트를 못듣게 된다고/ 모두 모두 평화하냐고 모두 모두.”아인슈타인과 모차르트의 관계에 감히 견주며, 시인을 흉내내어 이렇게 말해 볼까. 나에게 지난여름이 뭐냐고 묻는다면 매미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여름의 매미 울음은 수박과 함께 나에게 몹시도 각별한 것이었다. 땡볕 속 그 소리는 귀...

    2024.10.24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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