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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추석 밥상 앞에서
    추석 밥상 앞에서

    지역구마다 국회의원들 다른 것이야 진즉에 알았지만 지역마다 식당의 풍경도 미세하게 좀 다른 것 같다. 강남구 신사동에서 10여년을 삐댄 적이 있다. 점심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으니, 어쨌든 식당을 이용했다. 요즘은 대개 입식이지만, 그땐 엉덩이를 위한 방석도 준비된 좌식의 방이 많았다. 홀을 비롯해 웬만한 벽에는 큼지막한 액자가 걸렸는데, 일견 인상적인 게 수두룩했다. 그중 기억에 남는 하나, “사나운 파도가 유능한 뱃사공을 만든다.” 주로 횟집, 설렁탕집 등 서너 군데서 본 것 같은데, 어쩐지 신사동을 떠나고 저 글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제약업에 투신한 뱃사공이 있다. 멸치만 하다가 고래로 성장한 그 친구는 유수의 회사를 일군 뒤 소원대로 지난해 은퇴한 바로 다음 날 고성에서 부산 오륙도까지의 해파랑길을 두 발로 직접 걸었다. 아직 메인 데가 많은 나는 주말마다 몇몇 구간을 같이 했다. 삼국유사의 신화가 물씬한 해변을 걷는데, 멀리서 분명 바다가 아닌데도 물고...

    2024.09.19 20:5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중력의 날에 영화 ‘그래비티’를 보았다
    중력의 날에 영화 ‘그래비티’를 보았다

    자연법칙은 자연에는 없다, 과학 교과서에나 있을 뿐. 숫자와 기호로 외운 공식에 맞춰 자연은 행동하는 것 같다. 사과는 줍기 좋게 아래로 떨어진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심은 쪽으로 나와준다. 내 마음의 운율을 정확하게 달래주는 자연의 마음. 보이지 않아도 이 세상을 지그시 누르는 중력은 말 그대로 무거운 힘이다. 우리는 누구나 참을 수 있을 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산다. 세상 만물은 제 무게로 인해 있는 곳에 움푹, 깊은 자리를 만든다. 중력이 사라진 무중력 공간에서의 동작을 상상해 보라. 중력을 이겨야 한 발짝이라도 꼼짝할 수 있는 것. 무거움은 힘들게도 하지만 가능하게도 한다.데이트를 즐기는 청춘의 테이블. 누가 힘을 가하지 않는 한 커피는 잔에서 얌전하다. 어쩌다 그만 첫눈에 반한 남녀. 둘에게는 사랑의 감정이 폭발적으로 흘러나오지만 어느덧 사랑의 무거움이 생활을 짓누를 차례. 그 무게는 점점 가슴에서 어깨로 이동한다. 둘은 한때 그 무게를...

    2024.09.12 22:02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개미에 관한 명상
    개미에 관한 명상

    폭염이 가까스로 물러가고 더위의 소굴인 공중을 보다가 시선을 대폭 낮춘다. 목청껏 울던 매미소리가 내년을 기약하며 점점 잦아진다. 이젠 대지를 보아야 할 때, 바닥은 언제나 든든하다. 나무도 풀도 작년 낙엽도 여전하지만 오늘은 개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개미는 蟻(의)다. 벌레를 뜻하는 부수(훼)와 옳을 의(義)자의 결합이다. 함부로 정한 이름은 세상에 없다. 저 작은 미물 개미에 왜 저런 견결한 뜻을 부여했을까. 이사하고 어수선한 방을 쓸어낼 때 개미 한 마리가 구석에서 어리둥절 나오기도 한다. 옛날이라면 발로 밟거나 손톱을 쓰겠지만 이젠 그럴 일 없겠다. 어느새 내 뇌 속에 제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은 개미. 그냥 쓰레받기에 먼지와 함께 실어 밖으로 내보낸다. 개미는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 탄력성이 있다. 이참에 죽음에 관해서도 생각해 본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착각은 참으로 대단하다. 둥근 대지를 납작하게 여기고 해가 뜨고 지는 줄로 아는 것...

    2024.09.05 21:07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여름 고시엔에서 만끽한 잠깐의 천국
    여름 고시엔에서 만끽한 잠깐의 천국

    속보가 떴다. “한국계 교토국제고, 연장전 끝에 日 고시엔 우승.” 이웃나라 야구대회 하나 가지고 웬 호들갑이냐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건 좀 차원이 다르다. 우리나라도 예전엔 고교야구의 인기가 무척 높았다. 웬만한 신문사마다 거창한 이름의 대회를 주관했다. 대붕기, 봉황대기, 청룡기, 화랑대기, 황금사자기 등등. 이러다 선수를 혹사시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더니 프로야구 출범 후 관심이 졸지에 뚝 끊겼다.그 당시에도 일본의 사정을 간간이 듣기는 했다. 갑자원(甲子園, 고시엔) 대회. 본선 진출만 해도 꿈의 무대로 불리며, 이기고 나면 마운드의 흙 한 줌을 기념으로 가져간다고 했다. 일본은 그 인기가 여전한 모양이다. 올해 고시엔 대회에서 한국계 민족학교가 결승에 올라 우승까지 해버렸다. 그 뉴스를 접하는데 한국어로 부르는 교가가 자꾸 눈에 밟힌다. 어쩌면 소월이나 지용의 시 한 구절처럼 입에 착 감기는 가사.“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2024.08.29 20:1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햇빛과 생각과 기억에 관한 메모
    햇빛과 생각과 기억에 관한 메모

    사실 햇빛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단단히 본 교정과 교열, 심혈을 기울여 붙인 제목, 맵시 있게 디자인한 책도 직사광선에 노출되면 제 모습을 건사하기가 힘들다. 이윽고 하얗게 탈색되더니 너덜너덜 제 본래를 부수고 먼지로 흩어진다. 그러니 햇빛은 주삿바늘처럼 제가 닿은 모든 사물을 찌르며 이렇게 말하는 중이겠다. 조금만 기다려, 물체의 사슬에서 풀려나 공중에 자유롭게 떠다니도록 해줄게. 아침부터 따갑게 내려꽂히는 내 목덜미도 예외가 아니다.여차, 하면 도래하는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생각을 안 하고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해서 지금도 매미소리와 싸우며 하안거에 든 수행자들은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무념무상에 들 것인가. 그러나 아예 생각을 아니 할 수 없기에 타협을 한다. 이런저런 잡념에 빠지느니 차라리 한 생각, 하나의 화두에 몰두하자, 어금니 깨물며 씨름하는 것.불길한 머리카락이 무성한 나는 생각을 제압하지 못해 연신 솟아나는 그것에 휘둘리기 일쑤다. 다만 돌...

    2024.08.22 20:1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1901년부터 2021년까지, 치열하게 전개된 120년의 근현대사를 횡단하듯 조감하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역사는 거대하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장소는 사람들의 소소한 발밑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혹독함을 감당해내야 하는 건 개미 같은 작은 개인들. 그간 헐레벌떡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기에 급급했다면 이제 처마 밑의 대문과 문패와 고샅길의 한해살이풀들과도 눈 맞추는 심정으로 공부하면서 책을 만드는 중이다.온기 없는 문자들, 무정한 사진들에 지난날이 실려 있다 해도, 특히 해방 전후 숨 가쁘게 전개된 그 시대를 들여다보는 일은, 독립의 기쁨과는 별개로 충분히 분하고 고통스럽다. 마음속 치밀어오르는 게 없을 수 없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나라는 결딴나도 산하는 그대로, 두보). 그 어수선한 시절에도 봄은 의연히 오고 나라의 터전부터 다시 수선하였다. 가령 전라남도에 딸린 섬이었던 제주도(濟州島)를 제주도(濟州道)로 승격시켜 먼바다에 심장처럼 떼어놓았다.해방이 발밑의...

    2024.08.15 20:34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이런 여름날의 산보
    이런 여름날의 산보

    아주아주 오래전 시골 큰집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지낸 적이 있다. 저물 무렵 큰아버지와 함께 논에서 피를 뽑고 있으면 지게에 꼴을 지고 지나던 구장이 한마디 했다. 매동어른, 여름 해가 참 기네요. 그러면 농으로 받아넘기는 말씀. 이 사람아, 해는 늘 동글동글하다네!큰아버지 둥근 해 뒤로 숨으시고 나는 고향을 떠나 파주에 산다. 지게 대신 겨우 모니터나 끌어안고 뒹굴다 보면 여전히 여름 해는 참 길다. 이런 날은 사무실이 텅 비기 무섭게 심학산으로 간다. 그리 높진 않지만 깔딱 고개가 있어 한 바가지의 땀을 쏟아야 한다.산은 도립한 포물선이다. 산에 오른다는 건 일정한 기울기로 그 포물선에 접근하는 것. 등산화 뒤축이 일직선이 아니라 말발굽처럼 비스듬히 닳는 건 지구에 부대낀다는 고달픈 증거일까. 나뭇잎이나 열매, 산의 능선, 구름의 난해한 곡선과 수학적 궁합을 맞추며 나도 이 우주의 엄연한 일원이라는 갸륵한 표시일까.시원했다. 심학산 정상에서 겨드랑이를 ...

    2024.08.08 21:0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오대산 월정사 적멸보궁 가는 길
    오대산 월정사 적멸보궁 가는 길

    세속의 어지러운 심사를 잠시 식히겠다며 월정사 지나 상원사도 지나 적멸보궁 오르는 길. 초행이 아니라서 몇 년 전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 나는 꽃동무들과 오대산 비로봉까지 가는 중이었다. 얌전하던 길이 돌연 가파르게 전개되더니 계단 위로 기발한 기와지붕의 중대사자암이 나타났다. 길의 한 매듭인 그곳에서 호흡을 간추린 뒤 급경사를 오르면, 그 어떤 적멸 세계의 바깥으로 나간다는 특별한 실감이 든다. 여기는 문수보살의 성지인 오대산이다. 부도탑 모양의 석등마다 염불 소리 낭랑하고, 저녁이면 은은한 등불이 길을 밝힌다. 우리가 찾던 귀한 야생화인 ‘청닭의난초’가 그 길섶에 피어 있었다.세상 중요한 것에 날씨와 기분이 있다. 땀에 젖어 올라가는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할머니 한 분이 있다. 연세가 상당하고 차림새에 절 냄새가 물씬 배어 있는 고운 분이다. 험한 길에 혼자는 아니고 딸인 듯한 이가 몇 걸음 뒤에서 물병을 들고 할머니를 내내 살피고 있었다. 고되고 힘든...

    2024.08.01 20:49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김민기의 향년
    김민기의 향년

    며칠 전, 케이블에서 <변호인>을 보게 되었다. 예전에 극장에서 보았지만 이런 영화를 만나면 또 꼼짝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영화에 대해서 굳이 더할 말은 없지만 <변호인>에서 건진 단어가 하나 있다. 영화 초반부, 국밥집 주인(김영애)은 건설일용직 단골손님(송강호)의 얼굴이 영 아닌 것을 보고 한마디 던진다. “니 얼굴이 와 이리 축상이고?”영화는 급박하게 전개된다. 돼지국밥집 아들 진우가 독서모임을 하다가 국가보안법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것이다. 욕조가 딸린 어느 건물 어느 방에서 자행되는 잔인한 고문. 그곳은 축사와 다름없고 짐승 같은 자들에 의해 진우의 몸은 구겨지고 망가진다.축상(畜相)? 짐승의 얼굴? 영화를 보는 내내 축상이 어른거렸다. 단순히 얼굴만이 아니라 그 짐승 같은 시대 속 우리의 모습을 한마디로 축약하는 말이기도 하겠다. 축상은 국어사전에 없는 단어다. 생각해보니 죽상이란 말일 것도 같았다. ‘거의 죽을 것처럼 괴로운...

    2024.07.25 20:45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MBC의 뽀송뽀송한 뉴스 하나
    MBC의 뽀송뽀송한 뉴스 하나

    편집이란 말처럼 그 뜻이 폄하된 단어도 드물다. 국어사전은 ‘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가지 재료를 모아 신문, 잡지, 책 따위를 만드는 일’로 풀이한다. 편집은 출판사 한 부서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우리는 각자 의도한 대로 생각을 가꾸며 그에 소용되는 말을 취사선택한다. 이것은 편집이 아닌가. 사람마다 고개를 조절하여 풍경의 한 조각을 보고 취하는 것, 이 또한 편집이 아닌가. 잊지 말라, 당신 주위에 우글거리는 모든 뉴스는 누군가의 의도하에 편집된 것임을. 앵커가 바뀐 뒤, 밤 9시는 나에겐 뉴스가 사라진 암흑지대다. 그러니 이렇게 편집한다. 차라리 그 시간에 세계문학전집이나 읽자. 어이없는 사건, 울화를 돋우는 변명이 연일 도배를 한다. 뉴스 생산자들은 한번 거짓말이 더 큰 거짓말을 낳는다는 기초산수도 모른단 말인가. 그런 와중에 지지난 주말 MBC <뉴스데스크>의 한 토막. 그 멘트는 이랬다. “폭염 속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작업복은 땀과...

    2024.07.18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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