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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11시22분
    대한민국 헌법재판소의 11시22분

    2000년 6월13일 오전 11시. 공항 활주로에서 기자가 소식을 전했다. “국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평양입니다.” 이윽고 비행기 문이 열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모습을 나타냈다. 김 대통령은 곧바로 발을 떼지 않았다. 트랩에 선 채 한동안 북녘의 하늘 한구석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정밀한 고독을 깬 뒤 천천히 내려와 김정일 위원장과 악수하고 포옹했다.2007년 9월의 어느 날. 선친이 이승을 떠났다. 향년 81세. 유품을 정리하다가 작은 버릇 하나를 알게 되었다. 많은 사진 속의 아버지는 카메라가 아니라 11시 방향의 공중을 늘 바라보고 있었다. 마흔의 끝자락에서 맞닥뜨린 사고의 후유증을 저런 각도로 감당한 것일까. 지상이 아니라 하늘 한구석에 마음의 거처를 미리 마련해놓은 것일까. 부친의 포즈를 그렇게 뒤늦게 이해했다.2009년 8월18일. 김대중 대통령의 영결식 날, 황지우 시인이 ‘지나가는 자들이여, 잠시 멈추시라’는 제목의 추모시를 발표했다....

    2025.04.10 21:32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악의 평범성
    악의 평범성

    황무지보다 잔인한 달, 4월에 접어들었다. 어떤 일마다 그 어떤 놈이 끼어드는 날들의 연속이다. 발목에 겨우 찰랑대는 내 철학의 수준. 그걸 좀 높이려 하이데거 강의 듣다가 오래전의 영화 한 편으로 연결되었다. <한나 아렌트>, 독일계 유대인 정치철학자 아렌트(1906~1975)의 삶을 다룬 영화다. 뉴요커지의 요청으로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방청하고 리포트를 작성한 아렌트는 유대 지도자들의 책임도 정확하게 지적한 탓에 엄청난 비난을 받는다. 중단하라는 압력 속에 진행된 아렌트의 꿋꿋한 강의. 어라, 오늘 우리 시대가 새겨들을 말이 아닌가. 조금 길게 중계해본다.“법정에 세운 아이히만의 범죄는 법률책에 나와 있지도 않았고 뉘른베르크 재판 이전에 알려지지도 않았던 범죄였어요. 그래도 법정은 아이히만의 행위를 규정해야 했어요. 재판의 체계도 없었고 역사와 이즘, 반유대주의도 없이 한 인물뿐이었어요. (…) 자신이 주도한 건 아무것도 없고 선이든 악이...

    2025.04.03 21:04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독도에 관한 명상
    독도에 관한 명상

    땅에 대한 오해가 있다. 우리는 북반구를 지구의 지붕처럼 여기고 땅도 북녘에서 아래로 흘러내렸다고 쉽게 생각하는 것. 이육사의 시 ‘광야’의 한 구절도 이런 상상에 기댄 게 아닐까.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유치환이 울릉도를 “금수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라고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이리라.아주 오래전 나는 팔당을 출발해 자전거로 부산까지 나섰다. 떠나기 전, 친구들에게 호기롭게 말했다. “서울서 부산까지는 도르래로 걸면 북한산에서 금정산까지 그냥 주르륵 내려가듯, 전부 내리막길이야. 뭐 그리 힘들겠나?” 그러나 실제로 달려보니 그런 내리막은 없었다. 지구는 둥글고, 따라서 모든 곳이 중심이 된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무지몽매함에서 비롯된 착각이었다. 해발(海拔)이란 말처럼, 땅은 바다에서 바로 올라온다.최근 울릉도보다 더 바깥의 섬, 독도를 두...

    2025.03.27 20:57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우두머리에 대하여
    우두머리에 대하여

    말석에 앉아 노자를 읽는다. 노자만큼 도(道)를 강조한 이도 드물다. 흔히 수양이나 처세술로 읽기도 하지만, 내가 듣는 강의에서는 통치술로서의 해석에 방점을 찍는다. 어쨌든 노자 하면 도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논어의 첫 글자가 학(學)이라면 노자의 그것은 도다.둥그렇게 휘어진 세상의 골목과 길. 갈비뼈 같은 저 길이 없다면 서로 통할 수 없고, 통하지 못하면 섬이다. 가슴 안의 꿈도 부풀어 오르지 못하고 세상의 이상도 실현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골방 문화인 게임과 유튜브가 설친다 해도 밀실이 아니라 광장에서 일은 이루어진다. 이건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자명한 이치이다. 이 우주가 질서 있게 요약된 사회, 그것이 집합적으로 구현된 몸도 마찬가지다. 목숨의 바탕인 몸을 다루는 신비의 의학서인 <동의보감>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것이라고 한다. 통(通)하면 살고, 불통(不通)하면 죽는다.자전에 따르면, ‘道’는 (쉬엄쉬엄 갈 착)과 首(머리 수)가...

    2025.03.20 21:46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튀긴 면 하나에 수프 한 봉지. 에걔, 고작 이거냐 싶어도 끓는 물만 부으면 한 끼로 훌륭하다. 텔레비전이 먹통이 되고, 드디어 기사가 오셨다. 대뜸 건장한 기기를 자빠뜨리고, 나사 풀자, 드디어 속이 홀랑 드러났다. 이게 다야? 싸늘한 기판 위에 레고 같은 반도체, 얼기설기 전선들. 거실을 점령한 기기의 실상이다. 같잖게 볼 일은 아니다. 거대하고 복잡한 걸 작고 콤팩트하게 만들려는 게 현대의 문화다. 슥슥삭삭 점검한 뒤 놀랄 틈도 없이 전기를 넣자, 요술처럼 불이 들어오고 미국 대통령이 툭 튀어나왔다.트럼프가 채신머리없이 일론 머스크의 발바닥에 키스하는 사진이 떴다. 교묘하게 둘 다 왼발바닥이다. 물론 가짜 사진이다. 개인적인 역량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머스크는 너무 설친다. 굉장한 머리와 개척자 정신으로 시대의 길목을 지키고 앉아 대박을 노린다. 사업이든 행정이든, 예술까지는 아니더라도 시늉이라도 내야 하는데 막무가내의 효율성만을 따지려 든다. 그의 뉴럴링크는 사람...

    2025.03.13 21:0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계엄과 계몽, 헌법과 풍경
    계엄과 계몽, 헌법과 풍경

    국어사전은 풍경을 ‘산이나 들, 강, 바다 따위의 자연이나 지역의 모습’으로 풀이한다. 이 문장에는 ‘눈앞’이 빠져 있다. 풍경은 내가 보는 눈앞의 광경일 수밖에 없다. 언제나 눈앞은 문제적이다. 늘 빤한 것 같아도 결코 뻔하지 않은 깊숙하고 은밀한 공간. 사물과 사실이 항상 활활 타고 있는 장소.저기 저 눈앞의 자연은 탄복할 만한 재주를 지녔다. 천하 만물에게 자신을 동시에 아낌없이 나누어 주면서도 손톱만큼의 충돌도 없이, 현 사태를 유지 관리하는 자연의 경영술이 아닌가. 자연은 시시각각 엄청나게 변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바라보는 이들을 안심시키느라 안간힘을 다해 안 변하는 척, 정말 고수의 묘기를 부리고 있는 것.언제나 늠름한 나무여, 어제 그대로네. 방심하다간 큰코다친다. 어느 날 나름 생활(生活)에 열중하고 있는 나를 움푹 삽으로 떼내어, 지금 믿고 감탄하며 바라보는 저 풍경의 한구석으로 매정하게 데리고 가서 나무 밑에 매장해버리는 게 또한 자연의 성질 ...

    2025.03.06 21:13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봉준호 감독의 영화 제목 읽는 재미
    봉준호 감독의 영화 제목 읽는 재미

    예측불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인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 <살인의 추억> <괴물> <옥자>에 이은 <기생충>이 가족의 갈등을 다뤘다는 몇 줄의 예고가 흘러나왔을 때,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갑충으로 변한다는 <변신>을 쉽게 떠올렸다. 그러나 제 역할을 못해 가족에게마저 버림받는 밥버러지에 관한 게 아니었다. 나의 안일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카프카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지점이었다. 식충이로 변신한 식구들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세 가족 간의 대립을 통해 사회 계층 문제를 다룬 영화였다.개봉박두. 봉 감독의 신작이 6년 만에 한파도 뚫을 기세다. 먼저 공개된 영화 제목은 <미키 17>. 여기서 ‘미키’는 위험한 일에 투입되는 소모품으로 근미래를 살아가는 복제인간의 이름이고, ‘17’은 그 주인공이 문서를 복사하듯 생명을 프린트하는 횟수를 말한다.무소불위. 냉정히 관찰하면 죽음과 ...

    2025.02.27 21:23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체포의 체’ 자도 꺼내지 않았다는 말
    ‘체포의 체’ 자도 꺼내지 않았다는 말

    어느 국회의원(A)이 회의 석상에서 어느 국회의원(B)에게 고함을 질렀다. 저거 순 쓰레기네! A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이크를 타고 경향 각지의 안방까지 들렸지만 정작 건너편 B의 귀에서는 그냥 스치고 말았다. 둘은 같은 공간에서 또 말을 주고받는다. 말만 A의 발등을 찧었나. 이후 B가 아니라 A만 보이면 쓰레기가 먼저 A의 얼굴을 덮어버린다. 말의 작용이다.어느 변호사가 기자들을 모아놓고 12·3 내란 사태 당시 계엄군이 국회의원 등 주요 인사를 체포하려고 했다는 의혹에 대해 “체포의 ‘체’ 자도 꺼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상하다. 그의 말이 오히려 당시 국회에 투입된 군인들이 진실을 말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측근은 거짓말로 인터뷰하고, 당사자는 자기 살길만 찾는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말의 반작용이다.입에서 나와 귀로 사라지는 말. 이는 사람 사이로 뜻을 연결하는 실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을 묶는 밧줄이기도 하다....

    2025.02.20 20:5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판사 한기택
    판사 한기택

    소주 공장 다니면서 소주 많이 마신다는 말처럼 싱겁기도 하겠지만, 출판에 몸담고 책으로 지은 인연이 제법 많다. 궁리에서 책을 낸 정신과 의사의 주선으로 영화감독, 배우, 의사 등과 어울린 후끈한 자리. 자유로운 정신들답게 화제는 사방으로 흘렀다. 문득 술이 제법 불콰해진 영화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고교 시절, 방송반이었는데, 전설로 자리잡은 선배님이 있다면서, 목숨 걸고 재판했다는 판사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닌가. 당시 이명박 치하에서 광화문의 어이없는 이른바 ‘명박산성’을 성토하다 나온 한 자락이었다.들으면 들을수록 몇해 전 책을 내면서 알게 된 어떤 분의 삶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겠는가. 이런 자리에서 우리 저자의 저 이야기를 듣다니, 내심 출판의 한 꼭지를 따는 듯한 으쓱한 기분으로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감독님, 영동고등학교 나오셨죠!그랬다. 가족과 여름휴가 갔다가 불의의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한기택 판사. 그의 빈자리를 견딜 수 없던 이들이 모인 ‘한...

    2025.02.13 21:28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비상계엄 관련 공소장 읽는 밤
    비상계엄 관련 공소장 읽는 밤

    불발탄이다. 그래도 폭탄은 폭탄이다. 낙진의 후과가 만만찮은 계엄 폭탄. 경계할 계(戒), 엄할 엄(嚴). 계엄이라는 다소 괴이쩍은 이름의 이 짐승을 또 만날 줄이야. 그 옛날 막다른 골목에서 된통 물린 기억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갑진 12월3일. 그날 밤의 내란과 이후 전개된 사태에 일상을 온전히 회복하기가 힘든 이웃이 많다. 수괴(首魁), 체포(逮捕), 탄핵(彈劾), 구속(拘束) 등등 육법전서에나 어울리는 말들이 느닷없이 뛰쳐나와 실생활을 휘젓는다. 사전 속에서는 얌전하지만 신문이나 방송에서는 사납기 그지없는 단어들.법이라는 것은 누구에겐 밧줄, 누군가에겐 기술, 또 누군가에겐 전부겠지만 그 어떤 이에겐 어쩌면 있으나마나한 것. 발길 따라 걷는 대로 걷고, 살아야 하는 대로 사는 이에게 그건 저기 낡은 새끼줄 울타리에 불과한 것. 작위든 부작위든 헛갈리는 말은 전문가에게 맡기고 불혹(不惑)의 삶을 일상으로 여기면서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다. 굳이 나, 여기에서, ...

    2025.02.06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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