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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심학산으로 초대한 버니지아 울프
    심학산으로 초대한 버니지아 울프

    근래 이래저래 읽은 글 중에는 시나 소설, 울화통 터지는 기사, 가끔 흥얼거린 가사도 있지만 젖은 낙엽처럼 나의 심층에 오래 묵혀 있던 어떤 완고한 생각의 딱지를 긁어낼 만큼 폐부를 깊숙하게 찌른 산문이 있다. 오랜 동안, 시간을 잃어버리며 나는 사람의 상태를 유지해 왔다. 무려 6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된 몸은 반투과성의 특수한 막에 둘러싸여 그 신진대사를 영위하는 중이다.나무 공부하러 산에도 제법 다닌다. 산이 좋아 산에 가지만 나는 자연과의 분리, 사물들과의 구별을 철저하게 해왔다. 모름지기 내 위주로 생각을 해왔고 뱀이나 벌레 하나 속옷으로 뛰어들까 겁을 먹었다. 언제나 한결같이 제자리를 지키는 깔딱고개의 눈으로 나를 보자면 참 이기적인 놈이라 여길 게 틀림없겠다.이런 나의 태도를 한번 되돌아보게 하고 나를 좁장한 졸장부로 만든 한 편의 글은 버지니아 울프의 ‘나방의 죽음’이다. 우연히 열린 창문으로 뛰어든 나방이 힘을 잃고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담백한 ...

    2024.10.17 21:15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교대역에서 혼자 한글날을 기념하다
    교대역에서 혼자 한글날을 기념하다

    지하철 3호선 교대역은 한때 약속장소로 뻔질나게 이용했던 곳이다. 인정 없는 사각형들의 단조로운 지형지물들이라 추억이 고일 장소는 아니다. 어릴 적 시골과 비슷했더라면 모처럼 이곳에서 퇴적된 흔적을 찾느라 약속 시간에 짐짓 늦을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도시란 그런 곳이 아니다. 뱀을 보고 놀랄 일도, 송아지한테 장난칠 일도 없다. 지하도가 길게 똬리를 튼 교대역은 증명사진보다 엄청나게 큰 법률가들의 광고판이 제 세상인 듯 활개 치는 곳일 뿐.생활의 근거를 옮긴 뒤 물길 끊긴 우각호 같은 교대역이다. 그런데 지난주 합천 황매산 꽃산행 마치고 귀경하여 남부터미널을 지나 환승하느라 실로 오랜만에 잠시 체류하게 되었다. 무척 붐비는 교대역에서 옛날 동작을 되살려 물살 가르는 쉬리처럼 지름길로 잽싸게 움직이려다가 그만 마음을 탁 놓아버렸다. 사흘 후면 한글날, 그걸 알았으니 교대역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사람의 입술, 함부로 볼 장소가 아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

    2024.10.10 21:2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비행기에 대한 명상
    비행기에 대한 명상

    아마 비행기를 처음 본 건 시골의 비탈진 밭에서였을 것이다. 어머니와 형들과 함께 두둑 따라 감자 캐다가 무슨 낌새가 있어 하늘을 쳐다보니 서울 쪽으로 급히 달려가는 전봇대 사이로 두더지처럼 똥구멍으로 하얀 연기를 뱉으며 ‘뱅기’가 날아가고 있었다. 쳇, 저 뱅기. 저거 한번 타보는 날 있을까. 야, 뱅기 타면 출세한 것 아이가. 그렇게 깔깔깔 웃어주다가 시무룩하다가 나도 모르게 나는 푹, 자랐다.모처럼 비행기 타는 날. 비행기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본다. 저 날씬한 동체만큼 인간의 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도 드물리라. 펄펄 끓는 솥 같은 캐리어 하나씩 안고 공항에서 시끄럽던 승객들. 이제 탑승해서는 좀 조용하다. 이윽고 이륙. 아무것도 없는 공중이라고 마냥 빈 건 아니다. 벼락과 천둥이 대기하고 공중의 구름은 충분히 자갈밭이다. 울퉁불퉁 호시게 나는 뱅기. 띵띵띵, 소리 끝에 승무원의 다급한 목소리. 승객 여러분 지금 우리 비행기는 난기류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동을...

    2024.10.03 20:35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입술의 얼룩과 추락의 해부
    입술의 얼룩과 추락의 해부

    한자는 한 자다. 품사 하나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군처럼 행동하면서 여러 뜻을 거느린다. 한 한자에 하나를 더하면 보통의 단어가 되고, 하나만 더 추가하면 본인의 이름처럼 세 글자가 된다. 여기에 하나를 보태면 사자성어, 다시 하나를 붙이면 오언율시, 둘을 얹으면 칠언절구의 그윽한 한시의 세계다. 여기에 몇 글자와 더 어울리면 동양 고전의 심오한 문장들. 이렇게 산술적으로 더해나가면 쉽게 넘는 계단이 될까. 과연 그럴까.초등학생 시절, 자유교양경시대회라고 하는 고전읽기에서 처음 <논어 이야기>를 접했다. 이때 읽은 깜냥을 논어의 전부로 생각한 게 병통이었다. 그러다가 불혹의 나이도 지나 문득 범 앞의 하룻강아지인 줄을 깨닫고 <논어>를 찬찬히 읽었다. 당시 부모님을 막 여읜 때이기도 해서 여러 글귀에서 많은 위로와 뒤늦은 후회를 함께 받았다.빈 깡통은 언제나 요란한 법이다. 이런저런 느낌을 경박하게 떠들던 자리. 불문학에 정통한 번역가께서 이...

    2024.09.26 20:5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추석 밥상 앞에서
    추석 밥상 앞에서

    지역구마다 국회의원들 다른 것이야 진즉에 알았지만 지역마다 식당의 풍경도 미세하게 좀 다른 것 같다. 강남구 신사동에서 10여년을 삐댄 적이 있다. 점심을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으니, 어쨌든 식당을 이용했다. 요즘은 대개 입식이지만, 그땐 엉덩이를 위한 방석도 준비된 좌식의 방이 많았다. 홀을 비롯해 웬만한 벽에는 큼지막한 액자가 걸렸는데, 일견 인상적인 게 수두룩했다. 그중 기억에 남는 하나, “사나운 파도가 유능한 뱃사공을 만든다.” 주로 횟집, 설렁탕집 등 서너 군데서 본 것 같은데, 어쩐지 신사동을 떠나고 저 글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제약업에 투신한 뱃사공이 있다. 멸치만 하다가 고래로 성장한 그 친구는 유수의 회사를 일군 뒤 소원대로 지난해 은퇴한 바로 다음 날 고성에서 부산 오륙도까지의 해파랑길을 두 발로 직접 걸었다. 아직 메인 데가 많은 나는 주말마다 몇몇 구간을 같이 했다. 삼국유사의 신화가 물씬한 해변을 걷는데, 멀리서 분명 바다가 아닌데도 물고...

    2024.09.19 20:5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중력의 날에 영화 ‘그래비티’를 보았다
    중력의 날에 영화 ‘그래비티’를 보았다

    자연법칙은 자연에는 없다, 과학 교과서에나 있을 뿐. 숫자와 기호로 외운 공식에 맞춰 자연은 행동하는 것 같다. 사과는 줍기 좋게 아래로 떨어진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심은 쪽으로 나와준다. 내 마음의 운율을 정확하게 달래주는 자연의 마음. 보이지 않아도 이 세상을 지그시 누르는 중력은 말 그대로 무거운 힘이다. 우리는 누구나 참을 수 있을 만큼의 무게를 지니고 산다. 세상 만물은 제 무게로 인해 있는 곳에 움푹, 깊은 자리를 만든다. 중력이 사라진 무중력 공간에서의 동작을 상상해 보라. 중력을 이겨야 한 발짝이라도 꼼짝할 수 있는 것. 무거움은 힘들게도 하지만 가능하게도 한다.데이트를 즐기는 청춘의 테이블. 누가 힘을 가하지 않는 한 커피는 잔에서 얌전하다. 어쩌다 그만 첫눈에 반한 남녀. 둘에게는 사랑의 감정이 폭발적으로 흘러나오지만 어느덧 사랑의 무거움이 생활을 짓누를 차례. 그 무게는 점점 가슴에서 어깨로 이동한다. 둘은 한때 그 무게를...

    2024.09.12 22:02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개미에 관한 명상
    개미에 관한 명상

    폭염이 가까스로 물러가고 더위의 소굴인 공중을 보다가 시선을 대폭 낮춘다. 목청껏 울던 매미소리가 내년을 기약하며 점점 잦아진다. 이젠 대지를 보아야 할 때, 바닥은 언제나 든든하다. 나무도 풀도 작년 낙엽도 여전하지만 오늘은 개미에 대해 생각해 본다. 개미는 蟻(의)다. 벌레를 뜻하는 부수(훼)와 옳을 의(義)자의 결합이다. 함부로 정한 이름은 세상에 없다. 저 작은 미물 개미에 왜 저런 견결한 뜻을 부여했을까. 이사하고 어수선한 방을 쓸어낼 때 개미 한 마리가 구석에서 어리둥절 나오기도 한다. 옛날이라면 발로 밟거나 손톱을 쓰겠지만 이젠 그럴 일 없겠다. 어느새 내 뇌 속에 제 안전장치를 마련해 놓은 개미. 그냥 쓰레받기에 먼지와 함께 실어 밖으로 내보낸다. 개미는 아무리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 탄력성이 있다. 이참에 죽음에 관해서도 생각해 본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착각은 참으로 대단하다. 둥근 대지를 납작하게 여기고 해가 뜨고 지는 줄로 아는 것...

    2024.09.05 21:07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여름 고시엔에서 만끽한 잠깐의 천국
    여름 고시엔에서 만끽한 잠깐의 천국

    속보가 떴다. “한국계 교토국제고, 연장전 끝에 日 고시엔 우승.” 이웃나라 야구대회 하나 가지고 웬 호들갑이냐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건 좀 차원이 다르다. 우리나라도 예전엔 고교야구의 인기가 무척 높았다. 웬만한 신문사마다 거창한 이름의 대회를 주관했다. 대붕기, 봉황대기, 청룡기, 화랑대기, 황금사자기 등등. 이러다 선수를 혹사시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더니 프로야구 출범 후 관심이 졸지에 뚝 끊겼다.그 당시에도 일본의 사정을 간간이 듣기는 했다. 갑자원(甲子園, 고시엔) 대회. 본선 진출만 해도 꿈의 무대로 불리며, 이기고 나면 마운드의 흙 한 줌을 기념으로 가져간다고 했다. 일본은 그 인기가 여전한 모양이다. 올해 고시엔 대회에서 한국계 민족학교가 결승에 올라 우승까지 해버렸다. 그 뉴스를 접하는데 한국어로 부르는 교가가 자꾸 눈에 밟힌다. 어쩌면 소월이나 지용의 시 한 구절처럼 입에 착 감기는 가사.“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2024.08.29 20:1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햇빛과 생각과 기억에 관한 메모
    햇빛과 생각과 기억에 관한 메모

    사실 햇빛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단단히 본 교정과 교열, 심혈을 기울여 붙인 제목, 맵시 있게 디자인한 책도 직사광선에 노출되면 제 모습을 건사하기가 힘들다. 이윽고 하얗게 탈색되더니 너덜너덜 제 본래를 부수고 먼지로 흩어진다. 그러니 햇빛은 주삿바늘처럼 제가 닿은 모든 사물을 찌르며 이렇게 말하는 중이겠다. 조금만 기다려, 물체의 사슬에서 풀려나 공중에 자유롭게 떠다니도록 해줄게. 아침부터 따갑게 내려꽂히는 내 목덜미도 예외가 아니다.여차, 하면 도래하는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생각을 안 하고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해서 지금도 매미소리와 싸우며 하안거에 든 수행자들은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무념무상에 들 것인가. 그러나 아예 생각을 아니 할 수 없기에 타협을 한다. 이런저런 잡념에 빠지느니 차라리 한 생각, 하나의 화두에 몰두하자, 어금니 깨물며 씨름하는 것.불길한 머리카락이 무성한 나는 생각을 제압하지 못해 연신 솟아나는 그것에 휘둘리기 일쑤다. 다만 돌...

    2024.08.22 20:1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1901년부터 2021년까지, 치열하게 전개된 120년의 근현대사를 횡단하듯 조감하는 책을 준비하고 있다. 역사는 거대하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장소는 사람들의 소소한 발밑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혹독함을 감당해내야 하는 건 개미 같은 작은 개인들. 그간 헐레벌떡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기에 급급했다면 이제 처마 밑의 대문과 문패와 고샅길의 한해살이풀들과도 눈 맞추는 심정으로 공부하면서 책을 만드는 중이다.온기 없는 문자들, 무정한 사진들에 지난날이 실려 있다 해도, 특히 해방 전후 숨 가쁘게 전개된 그 시대를 들여다보는 일은, 독립의 기쁨과는 별개로 충분히 분하고 고통스럽다. 마음속 치밀어오르는 게 없을 수 없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나라는 결딴나도 산하는 그대로, 두보). 그 어수선한 시절에도 봄은 의연히 오고 나라의 터전부터 다시 수선하였다. 가령 전라남도에 딸린 섬이었던 제주도(濟州島)를 제주도(濟州道)로 승격시켜 먼바다에 심장처럼 떼어놓았다.해방이 발밑의...

    2024.08.15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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