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경향신문

기획·연재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이런 여름날의 산보
    이런 여름날의 산보

    아주아주 오래전 시골 큰집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지낸 적이 있다. 저물 무렵 큰아버지와 함께 논에서 피를 뽑고 있으면 지게에 꼴을 지고 지나던 구장이 한마디 했다. 매동어른, 여름 해가 참 기네요. 그러면 농으로 받아넘기는 말씀. 이 사람아, 해는 늘 동글동글하다네!큰아버지 둥근 해 뒤로 숨으시고 나는 고향을 떠나 파주에 산다. 지게 대신 겨우 모니터나 끌어안고 뒹굴다 보면 여전히 여름 해는 참 길다. 이런 날은 사무실이 텅 비기 무섭게 심학산으로 간다. 그리 높진 않지만 깔딱 고개가 있어 한 바가지의 땀을 쏟아야 한다.산은 도립한 포물선이다. 산에 오른다는 건 일정한 기울기로 그 포물선에 접근하는 것. 등산화 뒤축이 일직선이 아니라 말발굽처럼 비스듬히 닳는 건 지구에 부대낀다는 고달픈 증거일까. 나뭇잎이나 열매, 산의 능선, 구름의 난해한 곡선과 수학적 궁합을 맞추며 나도 이 우주의 엄연한 일원이라는 갸륵한 표시일까.시원했다. 심학산 정상에서 겨드랑이를 ...

    2024.08.08 21:0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오대산 월정사 적멸보궁 가는 길
    오대산 월정사 적멸보궁 가는 길

    세속의 어지러운 심사를 잠시 식히겠다며 월정사 지나 상원사도 지나 적멸보궁 오르는 길. 초행이 아니라서 몇 년 전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때 나는 꽃동무들과 오대산 비로봉까지 가는 중이었다. 얌전하던 길이 돌연 가파르게 전개되더니 계단 위로 기발한 기와지붕의 중대사자암이 나타났다. 길의 한 매듭인 그곳에서 호흡을 간추린 뒤 급경사를 오르면, 그 어떤 적멸 세계의 바깥으로 나간다는 특별한 실감이 든다. 여기는 문수보살의 성지인 오대산이다. 부도탑 모양의 석등마다 염불 소리 낭랑하고, 저녁이면 은은한 등불이 길을 밝힌다. 우리가 찾던 귀한 야생화인 ‘청닭의난초’가 그 길섶에 피어 있었다.세상 중요한 것에 날씨와 기분이 있다. 땀에 젖어 올라가는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할머니 한 분이 있다. 연세가 상당하고 차림새에 절 냄새가 물씬 배어 있는 고운 분이다. 험한 길에 혼자는 아니고 딸인 듯한 이가 몇 걸음 뒤에서 물병을 들고 할머니를 내내 살피고 있었다. 고되고 힘든...

    2024.08.01 20:49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김민기의 향년
    김민기의 향년

    며칠 전, 케이블에서 <변호인>을 보게 되었다. 예전에 극장에서 보았지만 이런 영화를 만나면 또 꼼짝할 수 없게 된다. 이제 영화에 대해서 굳이 더할 말은 없지만 <변호인>에서 건진 단어가 하나 있다. 영화 초반부, 국밥집 주인(김영애)은 건설일용직 단골손님(송강호)의 얼굴이 영 아닌 것을 보고 한마디 던진다. “니 얼굴이 와 이리 축상이고?”영화는 급박하게 전개된다. 돼지국밥집 아들 진우가 독서모임을 하다가 국가보안법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것이다. 욕조가 딸린 어느 건물 어느 방에서 자행되는 잔인한 고문. 그곳은 축사와 다름없고 짐승 같은 자들에 의해 진우의 몸은 구겨지고 망가진다.축상(畜相)? 짐승의 얼굴? 영화를 보는 내내 축상이 어른거렸다. 단순히 얼굴만이 아니라 그 짐승 같은 시대 속 우리의 모습을 한마디로 축약하는 말이기도 하겠다. 축상은 국어사전에 없는 단어다. 생각해보니 죽상이란 말일 것도 같았다. ‘거의 죽을 것처럼 괴로운...

    2024.07.25 20:45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MBC의 뽀송뽀송한 뉴스 하나
    MBC의 뽀송뽀송한 뉴스 하나

    편집이란 말처럼 그 뜻이 폄하된 단어도 드물다. 국어사전은 ‘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가지 재료를 모아 신문, 잡지, 책 따위를 만드는 일’로 풀이한다. 편집은 출판사 한 부서의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는다. 우리는 각자 의도한 대로 생각을 가꾸며 그에 소용되는 말을 취사선택한다. 이것은 편집이 아닌가. 사람마다 고개를 조절하여 풍경의 한 조각을 보고 취하는 것, 이 또한 편집이 아닌가. 잊지 말라, 당신 주위에 우글거리는 모든 뉴스는 누군가의 의도하에 편집된 것임을. 앵커가 바뀐 뒤, 밤 9시는 나에겐 뉴스가 사라진 암흑지대다. 그러니 이렇게 편집한다. 차라리 그 시간에 세계문학전집이나 읽자. 어이없는 사건, 울화를 돋우는 변명이 연일 도배를 한다. 뉴스 생산자들은 한번 거짓말이 더 큰 거짓말을 낳는다는 기초산수도 모른단 말인가. 그런 와중에 지지난 주말 MBC <뉴스데스크>의 한 토막. 그 멘트는 이랬다. “폭염 속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작업복은 땀과...

    2024.07.18 20:38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해월 최시형 선생의 피체지에서
    해월 최시형 선생의 피체지에서

    몹시 뜨거운 날. 원주에 간다. 이제 지구는 온난화를 넘어 열대화로 진입했다고 한다. 과히 과한 말은 아닌 듯. 드디어 도착한 송골 마을. 입구에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모든 이웃의 벗 崔보따리 선생님을 기리며.” 동학의 2대 교조인 최시형 선생의 피체지이다. 선생은 여기에서 포승에 묶여 서울로 압송되어 단성사 터에서 참수되었다 한다.내리쬐는 땡볕. 작은 언덕에 자리잡은 초라한 초가. 기우뚱한 마당에 나무들이 있다. 뒤안엔 상수리나무, 밭가에는 뽕나무, 마당 입구엔 자두나무. 나무는 무엇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술렁술렁 몸을 일으킨다. 나무들의 느리고 느린 동작들은 나의 짧은 지혜와 조급한 성격으론 도통 가닿을 수 없는 영역이다.너무 늦었지만 동학에 대한 관심은 공부로 이어지고, 꽃산행을 떠나면 동학의 흔적도 먼저 찾게 된다. 강원도 산간지방은 동학을 지켜낸 도피로와 겹치는 곳이 많았다. 최시형 선생의 사상 중에 향아설위(向我設位·살아 있는...

    2024.07.11 20:54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기괴한 시대의 희한한 물고기 앞에서
    기괴한 시대의 희한한 물고기 앞에서

    펄펄 끓는 폭염, 걱정스러운 장마, 기이한 기후변화 등으로 점철되는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해외토픽 하나가 눈길을 끈다. 싱가포르 해변에서 모래에 몸을 묻은 채 머리를 내민 물고기. 먹잇감을 노리는 듯 앞을 쳐다보며 입을 뻐끔거리는 모습이 영상에 잡혔다. 이 희한한 물고기는 ‘긴코 스타게이저’(Longnosed stargazer)로 밤하늘의 별을 응시하는 것 같아서 저 멋진 이름을 얻었단다. 그것은 입술이 통통하게 발달한 사람의 얼굴과 너무 흡사하다. 눈알도 뒤룩뒤룩 굴린다. 조금 무서워도 인어공주의 특별한 동생이라 여기면 봐줄 만도 하다. 우리나라에는 큰무늬통구멍이라는 독특한 이름으로 제주와 남해안에 산다고 한다.세상의 생물은 어쩌면 이렇게 다양한가. 이 사소한 질문에서 다윈의 진화론은 출발하였다. 여기에 하나 더 더할 수 있겠다. 그 다양함은 어쩌면 이렇게 모든 지면을 대접하며 골고루 분포하는가. 어느 골짜기에 가서 어떤 돌 하나라도 뒤집으면, 융단 같은 이끼 아래 저...

    2024.07.04 20:5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밥맛에 대하여
    밥맛에 대하여

    에잇 밥맛이야, 라고 할 때 누구나 쉽게 떠올릴 얼굴도 몇몇 있겠지만 사실 밥맛이 쉬운 맛은 아니다. 그렇게 만만하게 대접할 맛은 더더구나 아니다. 쌀이 간직했던 맛, 물이 찰지게 만든 맛, 빈 들판의 정기가 곤두서는 맛. 백반집에 가서 꽤 맛있는 국과 반찬이 나와도 밥이 별로면 그 식당에 다신 안 가게 된다.훤칠한 나무를 키우기 위해 산이 우람하게 있듯, 또 그만큼의 용도로 텅 빈 들판이 있고, 거기에서 벼와 보리를 비롯한 각종 작물이 자란다. 가축화와 작물화. 외양간에 소를 가두고 논에서 벼를 거두지 않았다면 인류는 식량을 찾아 지금도 거친 들판을 헤매고 다녀야 하지 않았을까.나무나 풀만큼이나 정말 고마운 벼과/사초과의 식물들. 어느 해 강릉 해변 사구 주변으로 벼과/사초과를 공부하러 갔다. 꽃들이 뜸한 시기에 공중에서 바닥으로 눈높이를 대폭 낮춘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입술을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게 하는 그 간지러운 풀들. 사실 벼과/사초과는 종류도 많고 ...

    2024.06.27 20:38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돌멩이, 이층, 카프카
    돌멩이, 이층, 카프카

    일은 꼬이고 울적해 발길에 걸리는 대로 걷어차며 걸을 때, 아무 잘못도 없이 애꿎게 당하는 건 대개 돌멩이거나 나뭇가지인데 그냥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하던 발끝에서 옛생각 하나 몰려나오기도 한다. 어린 시절 뒹군 고향의 이웃 마을은 거창군 고제면이다. 한자로 高梯, 하늘에 걸친 ‘높은 사다리’라는 뜻. 덕유산 자락인 고제는 한때 금 광산도 있고, 오일장도 열리며 번성했으나, 옛 자취는 흔적 없고 그 시절을 기억해 줄 어른들마저 사다리 타고 거의 다 올라가신 듯하다. 지금은 농협 하나로마트가 그나마 큰 건물이고, 보건소와 면사무소는 시무룩하게 서 있을 뿐이다. 그 곁에서 눈을 씻고 보면 ‘높은 다리’가 뱀 허물처럼 앉아 있는데, 이젠 그곳에서 떨어져도 안 다칠 듯한 가냘픈 높이다.그때 고제면 마을 어귀에는 초가집 이층이 있었다. 지붕 가운데를 뚫어 원두막처럼 올린 소박한 규모였다. 초가로 만든 이층이라니! 지금까지 남았더라면 아마 전국에서 유일한 건물이 아닐까. 그러다 초...

    2024.06.20 20:55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나의 나타샤 이야기
    나의 나타샤 이야기

    쟁반 같은 어깨 위로 빼꼼하게 솟아난 얼굴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최근 있었다. 사람의 생각이 언어의 지평 위로 드러난 것이라면 얼굴은 몸에서 가장 전위적으로 표현된 부분이겠다. 저 얼굴의 차이가 없다면 우리는 모두 익명의 섬을 떠도는 안개에 불과하지 않겠는가.오래전, 동북아생물다양성연구소의 사할린 꽃산행에 참가했을 때의 이야기. 현관부터 시작해서 몇 개의 문을 통과하고 출국심사대에 섰다. 심사관은 여권 사진과 실제 얼굴을 이모저모 대조하였다. 그즈음 누가 급격히 휩쓸고 간 내 마음의 주소를 몇 년 전의 모습에서 찾기가 어려웠던가.사할린에서 먼저 마주한 건 텁텁한 공기와 낯선 문자였다. 영어 알파벳과는 족보를 전혀 달리하는 키릴 문자들. 건조하고 딱딱한 러시아 관리들의 따발총처럼 빠른 말투. 그들 앞에 또 섰다. 그 역시 대한민국 외교부 장관이 발행한 여권과 한 사내의 얼굴을 여러 번 힐끔거렸다.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 몹시 붐비는 국제공항. 저마다의 생각...

    2024.06.13 20:5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뒷모습과 화양연화
    뒷모습과 화양연화

    나이 사십이면 본인 얼굴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있다. 살아가는 동안 몸을 대표하는 그것을 문지르고 닦지만, 그것만으로 얼굴은 관리되는 게 아니다. 세월이 와서 주무르는 데 피할 방법이 어디 있겠나. 그러니 저 말은 살아간다는 것의 단정함과 엄숙함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이해한다.그보다 더 서늘한 말도 있다. 사람의 뒷모습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는 것. 자신의 뒷모습을 아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 광명한 세상에 유일한 맹점이 있다면 그건 본인뿐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기를 보지 못하고, 자신을 잊어버리고 종내에는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운명인가 보다.누구나 가까이에 짊어지고 있는 뒷모습. 결코 볼 수 없는 모습. 자주는 아니고 어쩌다 한 번씩 꼭 펴보는 책이 있다. 인물의 뒷모습을 찍은 흑백사진과 깊은 사유가 뒷받침하는 짧은 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집 <뒷모습>이다. 사진도 좋...

    2024.06.06 20:47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아니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구독 취소하기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보기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