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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함안 말이산 고분군에서 하룻밤
    함안 말이산 고분군에서 하룻밤

    속도란 이럴 때 쓰라고 공중이 내주는 것, 내 고향과도 연결된 경남의 산수를 휘감아 등에 업고 함안읍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이제 육안으로도 포착이 가능하니 어디에서 불쑥 나타날까 은근 기대하면서 전방을 주시했다. 이윽고 시내로 들어와 두리번거리는데 복잡한 전선, 가로등과 표지판 사이에서, 아연, 아라가야의 푸르스름한 무덤들이 공중에 떠올랐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된 말이산 고분군. 무슨 말이 필요하랴, 이 신비와 경이 앞에서.숙소를 정하고 해가 넘어가기 전에 얼른 서둘렀다. 아파트와 무덤이 이리도 서로 잘 어울릴 줄이야. 세상 어디든 바깥과의 접면은 있는 법이다. 늦은 오후와 저녁이 교차하는 해 질 녘, 여름 낮은 길어서 사물의 분간은 아직 뚜렷하고, 햇살도 옆으로 낮게 비춰 키 작은 풀들의 그림자도 길게 만든다. “현실이란 외투의 구멍”(<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을 통해 옛 가야의 정취를 탐험하기에 너무 좋은 시간.제4호 무덤 앞에...

    2024.05.30 20:33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마음 心에 관한 마음
    마음 心에 관한 마음

    물론 햇빛도 빠르지만 빛보다 더 빠른 게 있다. 태양을 출발한 빛이 지구에 도착하는 데 8분20초나 걸리지만 사람의 생각은 그 100분의 1인 5초 만에 우주를 몇 바퀴나 돈 뒤 다시 화성의 고리를 어루만지고도 여유가 있다. 어깨 위의 먼지들에게 말해주라, 우리의 두개골은 저 불타오르는 태양과의 달리기 시합에서 언제나 이긴다.빛은 빠르기가 아니라 그 빠른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한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만약 광속이 관찰자에 따라 다르다면, 눈앞 풍경이 그 얼마나 뒤죽박죽이겠는가. 그래서 명민한 물리학자들은 세상의 길이를 재는 기준인 1미터(m)를 빛이 진공에서 1/299,792,458초 동안 진행한 거리로 정의했다.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바탕이 여기에서 시작된다.세상에 복잡한 것 많아도 마음만 한 게 또 있을까.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마음. 도무지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마음. 그 마음 내려놓아라, 쉽게 말씀들 하시지만, 아니 도대체 어디에 있는 줄을 알아...

    2024.05.23 21:05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붓다에서 부텨까지, 부터에서 부처까지
    붓다에서 부텨까지, 부터에서 부처까지

    자유. 스스로 自(자), 말미암을 由(유). 자신을 원인으로 삼는다니 그 얼마나 서늘하고 무서운 말인가. 자유를 많이 입으로 뱉은 자일수록 그 말에서 도망치기 바쁘다. 문명의 밭(田) 위에 누가 주인처럼 앉아 있는 게 由라면, 눈(目) 위에 새 한 마리 걸터앉은 게 自. 자(自)는 ‘몸소, 자기’라는 뜻도 거느린다.요즘 식당에서 셀프(Self)는 흔히 만나는 단어다. 어제 간 곳에도 셀프가 많았다. 물은 셀프, 셀프 코너, 셀프 앞치마까지. 뜻을 파고들자면 사실 셀프는 그리 쉬운 말이 아닌데도 고개를 갸웃하는 이 아무도 없었다. 저마다 잘 알아서 물과 추가반찬을 직접 가져다 먹었다. 여기에서 셀프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자기’라 할 수 있을까.국어사전은 자기(自己)를 “그 사람 자신”이라고 풀이한다. 한편 自古以來(자고이래, 옛날부터 지금까지)의 경우처럼, 자(自)는 전치사로도 쓰인다. 말석에서 노자를 배우는데, ‘自己造也(자기조야)’란 글귀가 나왔다. “자기 스...

    2024.05.16 20:48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새에 관한 몇 가지 풍경
    새에 관한 몇 가지 풍경

    공중을 휘젓는 새는 수시로 머릿속으로 들었다가, 앉았다가, 날아간다. 새가 날면 나는 움푹 꺼진다. 나를 개구리처럼 우물 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아득히 멀어지는 새. 출구를 찾아 또 떠나는 그 새들에 관한 몇 개의 풍경.오래전, 라디오에서 들은 사연이다. 병실의 한 환자가 자신은 새인데 잠시 인간으로 변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무도 들은 척 아니하자, 의사와 간호사를 모이게 한 뒤, 멀뚱멀뚱 쳐다보는 가운데 창문을 드르륵 열고 푸드덕푸드덕 날아갔다고 한다. 영화 <버드맨>은 근육질의 남자가 팬티만 걸친 채 벌새처럼 공중부양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요란하고 복잡했다. 어쨌든 많은 이야기를 담았지만 이런 한 줄 평도 가능하겠다. 욕망으로 불룩한 도시는 성공의 상징처럼 빌딩과 옥상이 즐비한 곳. 높이 오를수록 깊이는 비례하고, 추락에 가속도가 붙는다. 한 발짝 삐끗해도 아찔한 죽음. 이런 태연한 현상이 범람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사람이 새로 변해...

    2024.05.09 20:24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입술에 관한 몽상
    입술에 관한 몽상

    곡우 근처. 이즈음 물에 잠긴 논을 보면 올해 농사를 준비하는 설렘이 가득하다. 논두렁은 논과 논을 구획하는 경계이지만 또한 길고 좁은 밭뙈기이기도 하다. 옛날 모내기 끝내고 어머니는 그 자투리땅도 그냥 놀릴 수 없다며, 호박이나 울콩을 심으셨지. 지난주 고향 가서 논두렁에 서서 술동이에서 막걸리 익어가듯 논바닥에서 뻐끔뻐끔 올라오는 기포를 보았다. 문득 들판의 논들을 아담하게 죄는 이 야무진 논두렁이 어째 꼭 얼굴의 입술 같다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 하나가 흘러나오지 않겠는가.입술, 인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야 손바닥보다 좁아도 만만한 장소가 결코 아닌 것.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퀴즈. 우리가 그 이름을 불러주면 사라지는 게 뭘까? 침묵이다. 침묵의 일번지인 입술. 솜털이 몹시도 나부끼는 몸의 피부에서 드물게 황무지 같은 입술에 대해 몇 가지 더할 이야기가 있다.뒤늦게 발심하여 한문을 공부할 때 초심자로서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한다. 눈으로 읽...

    2024.05.02 20:4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서정춘이라는 시인
    서정춘이라는 시인

    외출했다 돌아오니 책상에 흰 편지가 놓여 있다. 인정머리 하나 없는 인쇄체의 청구서 따위와는 확 비교되는, 정겨움이 폴폴 나는 시인의 손글씨였다. 봉투를 뜯으니 어느 신문의 서평 스크랩이 나왔다. 내가 식물에 관심이 많은 걸 알고 가끔 이렇게 챙겨주신다.시인을 처음 소개해준 이가 전해준 남도 여행의 일화. 시끌벅적한 식당에서 조금 일찍 수저를 놓고 시인은 일어나 마당으로 나간다. 이 지역과 연결된 자잘한 화단의 근황부터 종내에는 큰 나뭇잎의 뒷꼭지까지를 요모조모 살핀다. 송아지의 귀를 살피듯 잎사귀의 털을 매만지면서 방금 놓은 숟가락과 잎은 왜 이리 닮았을까. 뭐, 그런 궁리도 하는 것 같은 시인의 뒷모습.봄이 되면 꽃소식이 먼저 들려오는 곳을 찾아 나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구례-순천을 연결하는 송치재의 보람찬 골짜기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얼레지 앞에 엎드리는데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아버지 삽 들어갑니다/ 무구장이 다 된 아버지의 무덤을 열었다/ (…)/ 어...

    2024.04.25 20:56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십 년째 오는 봄비
    십 년째 오는 봄비

    비는 신비한 물질이다. 저 창공에 얼마나 깊은 우물이 있어 이 포근한 공중에서 느닷없이 물이 떨어지는가. 비가 와도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이 퍽 놀랍기도 하다. 비는 누구에게만 오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온다. 사물을 적실 뿐 아니라 사람을 촉촉하게 만든다. 우수 지나 곡우 근처, 이즈음에는 물이 많이 필요하다. 비는 와야 하는 것. 비가 온다. 놀라움이 오고 있다.봄비 내린다. 비는 하늘에서 온다. 비에는 많은 성분이 들어 있다. 비는 천하에 골고루 내리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별하게 안긴다. 오늘 오는 비는 그야말로 십 년째 매해 오는 비. 사월에 찾아오는 비는 하늘이 흘리는 눈물 같다. 비에는 비밀이 있다. 공중에도 비밀이 많다. 낮말은 새가 다 들었으니깐. 지상의 비밀을 누설하러 비가 내린다.저 슬픔의 비가 사월의 달력을 적신다. 올해도 하늘은 그 뜻을 알고 때맞추어 비를 정확하게 보내주셨다. 긴 가뭄 끝에 도착한 소식. 저곳의 기미를 전해주는 물방울...

    2024.04.18 20:46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히읗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히읗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히읗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농협은 어떻게 하나로마트의 간판을 내걸 수 있겠나. 나는 어디에서 질 좋은 삼겹살을 한 근 끊을 수 있겠나. 히읗이 없었더라면 어디서 후룩후룩 해장국으로 하루의 허기를 달랠 수 있겠나. 해는 서해에서 찌든 때를 씻고 다시 맑은 얼굴로 동해를 비춘다. 히읗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하루를 호출할 수 있겠나. 나이 들어 헛헛해질수록 가까이해야 하는 건 국어사전이다. 그림자가 반듯해야 그 모양이 단정하듯 적확한 말이라야 정확한 뜻이 가능하다. 초등학교 땐 전과를 보고 중학교에 들어가 영어사전에 제법 손때를 묻혔다. 철저히 외면했던 국어사전. 그러다가 문득 졸업할 때 상품으로 받은 국어사전을 찾았다. 한구석에 먼지 뒤집어쓰고 있던 사전한테 엄청 미안했었다. 저 사전의 마지막을 묵묵히 담당하는 히읗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e’가 없는 단어로만 쓴 소설도 있다. 비교할 건 아니지만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을 찾아보기로 하자. 하나의 문장으...

    2024.04.11 20:2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투표는 신중하게 심판은 단호하게
    투표는 신중하게 심판은 단호하게

    시골 형님댁 큰방의 텔레비전 옆 유리찬장은 작은 책장이기도 하다. 상단에는 오래된 밥그릇과 제기 몇 개, 양초와 성냥. 그 밑으로 노랗게 변한 농민신문과 합천이씨 족보와 조카들의 졸업앨범, 거창군지 그리고 낡은 추리소설 몇권과 최신 유행가요집. 오늘 내 눈에 특별하게 띄는 건 두툼한 옥편이었다.큰절로 인사 드리고, 이런저런 안부 나누고, 올해 사과농사 소식도 들으며 커피까지 마셨다. 그리고 바둑을 두는 형님들 옆에서 옥편을 빼들었다. 나는 요즘 점 복(卜)에 대한 생각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하늘에서 땅으로 기둥 하나 세우고, 그 기둥에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의 손잡이인 양 점 하나로 쾌활하게 마무리하는 글자가 ‘卜’이다. “卜자는 점이나 점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 고대에는 달궈진 쇠꼬챙이를 거북의 배딱지에 지져 갈라진 모양과 소리에 따라 길흉을 점쳤다.”(네이버 옥편) 불과 2획이지만 뜻이 만만찮고 이에 기댄 글자가 제법 된다. 한번 쓰고 나면 공통적...

    2024.04.04 20:32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숲속의 바이올린
    숲속의 바이올린

    이리저리 나는 새, 하늘이 좁다. 공중에서 한번 뒤척임으로 지상의 여러 도시를 장악한다. 바라보는 이를 단박에 움푹 추락시키는 새. 지저귀는 소리에 장단을 맞추며 겨우내 시무룩하던 지붕도 어깨를 들썩인다. 굴뚝에서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날수록 더욱 적막한 동네. 인공과 자연이 맞닿은 어느 한적한 마을 어귀를 지나 산으로 오른다.작년에 핀 자잘한 꽃들이 군데군데 미라처럼 그대로 굳어 있다. 가시덤불에서 툭툭툭 뛰어나오는 참새들. 쫄쫄쫄 흐르다 말고 얕은 여울목에 사로잡힌 물이 웅얼웅얼 거품 물며 항의하고 있다. 저 적폐들을 얼른 치우고 길을 틔워달라는 거다. 경사진 비탈에 구르다 만 바위가 엉거주춤 앉아 있다. 그 옆에 고사리 새순이 돋아난다. 양의 이빨을 닮아 양치식물로 분류되는 것들. 저들의 일생에서 사춘기쯤에 해당될 듯 또그르르 말리는 게 바이올린의 스크롤 같다. 골짜기는 너럭바위 피아노를 비롯해 여러 관현악기를 보유한 교향악단이다. 이참에 쉬어가며 이런 생각 하나 ...

    2024.03.28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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