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경향신문

기획·연재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새에 관한 몇 가지 풍경
    새에 관한 몇 가지 풍경

    공중을 휘젓는 새는 수시로 머릿속으로 들었다가, 앉았다가, 날아간다. 새가 날면 나는 움푹 꺼진다. 나를 개구리처럼 우물 바닥에 내동댕이친 뒤 아득히 멀어지는 새. 출구를 찾아 또 떠나는 그 새들에 관한 몇 개의 풍경.오래전, 라디오에서 들은 사연이다. 병실의 한 환자가 자신은 새인데 잠시 인간으로 변신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무도 들은 척 아니하자, 의사와 간호사를 모이게 한 뒤, 멀뚱멀뚱 쳐다보는 가운데 창문을 드르륵 열고 푸드덕푸드덕 날아갔다고 한다. 영화 <버드맨>은 근육질의 남자가 팬티만 걸친 채 벌새처럼 공중부양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요란하고 복잡했다. 어쨌든 많은 이야기를 담았지만 이런 한 줄 평도 가능하겠다. 욕망으로 불룩한 도시는 성공의 상징처럼 빌딩과 옥상이 즐비한 곳. 높이 오를수록 깊이는 비례하고, 추락에 가속도가 붙는다. 한 발짝 삐끗해도 아찔한 죽음. 이런 태연한 현상이 범람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사람이 새로 변해...

    2024.05.09 20:24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입술에 관한 몽상
    입술에 관한 몽상

    곡우 근처. 이즈음 물에 잠긴 논을 보면 올해 농사를 준비하는 설렘이 가득하다. 논두렁은 논과 논을 구획하는 경계이지만 또한 길고 좁은 밭뙈기이기도 하다. 옛날 모내기 끝내고 어머니는 그 자투리땅도 그냥 놀릴 수 없다며, 호박이나 울콩을 심으셨지. 지난주 고향 가서 논두렁에 서서 술동이에서 막걸리 익어가듯 논바닥에서 뻐끔뻐끔 올라오는 기포를 보았다. 문득 들판의 논들을 아담하게 죄는 이 야무진 논두렁이 어째 꼭 얼굴의 입술 같다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 하나가 흘러나오지 않겠는가.입술, 인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야 손바닥보다 좁아도 만만한 장소가 결코 아닌 것.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의 한 퀴즈. 우리가 그 이름을 불러주면 사라지는 게 뭘까? 침묵이다. 침묵의 일번지인 입술. 솜털이 몹시도 나부끼는 몸의 피부에서 드물게 황무지 같은 입술에 대해 몇 가지 더할 이야기가 있다.뒤늦게 발심하여 한문을 공부할 때 초심자로서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한다. 눈으로 읽...

    2024.05.02 20:4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서정춘이라는 시인
    서정춘이라는 시인

    외출했다 돌아오니 책상에 흰 편지가 놓여 있다. 인정머리 하나 없는 인쇄체의 청구서 따위와는 확 비교되는, 정겨움이 폴폴 나는 시인의 손글씨였다. 봉투를 뜯으니 어느 신문의 서평 스크랩이 나왔다. 내가 식물에 관심이 많은 걸 알고 가끔 이렇게 챙겨주신다.시인을 처음 소개해준 이가 전해준 남도 여행의 일화. 시끌벅적한 식당에서 조금 일찍 수저를 놓고 시인은 일어나 마당으로 나간다. 이 지역과 연결된 자잘한 화단의 근황부터 종내에는 큰 나뭇잎의 뒷꼭지까지를 요모조모 살핀다. 송아지의 귀를 살피듯 잎사귀의 털을 매만지면서 방금 놓은 숟가락과 잎은 왜 이리 닮았을까. 뭐, 그런 궁리도 하는 것 같은 시인의 뒷모습.봄이 되면 꽃소식이 먼저 들려오는 곳을 찾아 나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구례-순천을 연결하는 송치재의 보람찬 골짜기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얼레지 앞에 엎드리는데 시 한 편이 떠올랐다. “아버지 삽 들어갑니다/ 무구장이 다 된 아버지의 무덤을 열었다/ (…)/ 어...

    2024.04.25 20:56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십 년째 오는 봄비
    십 년째 오는 봄비

    비는 신비한 물질이다. 저 창공에 얼마나 깊은 우물이 있어 이 포근한 공중에서 느닷없이 물이 떨어지는가. 비가 와도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이 퍽 놀랍기도 하다. 비는 누구에게만 오는 게 아니라 모두에게 온다. 사물을 적실 뿐 아니라 사람을 촉촉하게 만든다. 우수 지나 곡우 근처, 이즈음에는 물이 많이 필요하다. 비는 와야 하는 것. 비가 온다. 놀라움이 오고 있다.봄비 내린다. 비는 하늘에서 온다. 비에는 많은 성분이 들어 있다. 비는 천하에 골고루 내리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별하게 안긴다. 오늘 오는 비는 그야말로 십 년째 매해 오는 비. 사월에 찾아오는 비는 하늘이 흘리는 눈물 같다. 비에는 비밀이 있다. 공중에도 비밀이 많다. 낮말은 새가 다 들었으니깐. 지상의 비밀을 누설하러 비가 내린다.저 슬픔의 비가 사월의 달력을 적신다. 올해도 하늘은 그 뜻을 알고 때맞추어 비를 정확하게 보내주셨다. 긴 가뭄 끝에 도착한 소식. 저곳의 기미를 전해주는 물방울...

    2024.04.18 20:46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히읗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히읗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히읗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농협은 어떻게 하나로마트의 간판을 내걸 수 있겠나. 나는 어디에서 질 좋은 삼겹살을 한 근 끊을 수 있겠나. 히읗이 없었더라면 어디서 후룩후룩 해장국으로 하루의 허기를 달랠 수 있겠나. 해는 서해에서 찌든 때를 씻고 다시 맑은 얼굴로 동해를 비춘다. 히읗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이런 하루를 호출할 수 있겠나. 나이 들어 헛헛해질수록 가까이해야 하는 건 국어사전이다. 그림자가 반듯해야 그 모양이 단정하듯 적확한 말이라야 정확한 뜻이 가능하다. 초등학교 땐 전과를 보고 중학교에 들어가 영어사전에 제법 손때를 묻혔다. 철저히 외면했던 국어사전. 그러다가 문득 졸업할 때 상품으로 받은 국어사전을 찾았다. 한구석에 먼지 뒤집어쓰고 있던 사전한테 엄청 미안했었다. 저 사전의 마지막을 묵묵히 담당하는 히읗이 없었더라면 어쩔 뻔했나. ‘e’가 없는 단어로만 쓴 소설도 있다. 비교할 건 아니지만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을 찾아보기로 하자. 하나의 문장으...

    2024.04.11 20:2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투표는 신중하게 심판은 단호하게
    투표는 신중하게 심판은 단호하게

    시골 형님댁 큰방의 텔레비전 옆 유리찬장은 작은 책장이기도 하다. 상단에는 오래된 밥그릇과 제기 몇 개, 양초와 성냥. 그 밑으로 노랗게 변한 농민신문과 합천이씨 족보와 조카들의 졸업앨범, 거창군지 그리고 낡은 추리소설 몇권과 최신 유행가요집. 오늘 내 눈에 특별하게 띄는 건 두툼한 옥편이었다.큰절로 인사 드리고, 이런저런 안부 나누고, 올해 사과농사 소식도 들으며 커피까지 마셨다. 그리고 바둑을 두는 형님들 옆에서 옥편을 빼들었다. 나는 요즘 점 복(卜)에 대한 생각을 모으고 있는 중이다. 하늘에서 땅으로 기둥 하나 세우고, 그 기둥에 바깥으로 나가는 출구의 손잡이인 양 점 하나로 쾌활하게 마무리하는 글자가 ‘卜’이다. “卜자는 점이나 점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 고대에는 달궈진 쇠꼬챙이를 거북의 배딱지에 지져 갈라진 모양과 소리에 따라 길흉을 점쳤다.”(네이버 옥편) 불과 2획이지만 뜻이 만만찮고 이에 기댄 글자가 제법 된다. 한번 쓰고 나면 공통적...

    2024.04.04 20:32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숲속의 바이올린
    숲속의 바이올린

    이리저리 나는 새, 하늘이 좁다. 공중에서 한번 뒤척임으로 지상의 여러 도시를 장악한다. 바라보는 이를 단박에 움푹 추락시키는 새. 지저귀는 소리에 장단을 맞추며 겨우내 시무룩하던 지붕도 어깨를 들썩인다. 굴뚝에서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날수록 더욱 적막한 동네. 인공과 자연이 맞닿은 어느 한적한 마을 어귀를 지나 산으로 오른다.작년에 핀 자잘한 꽃들이 군데군데 미라처럼 그대로 굳어 있다. 가시덤불에서 툭툭툭 뛰어나오는 참새들. 쫄쫄쫄 흐르다 말고 얕은 여울목에 사로잡힌 물이 웅얼웅얼 거품 물며 항의하고 있다. 저 적폐들을 얼른 치우고 길을 틔워달라는 거다. 경사진 비탈에 구르다 만 바위가 엉거주춤 앉아 있다. 그 옆에 고사리 새순이 돋아난다. 양의 이빨을 닮아 양치식물로 분류되는 것들. 저들의 일생에서 사춘기쯤에 해당될 듯 또그르르 말리는 게 바이올린의 스크롤 같다. 골짜기는 너럭바위 피아노를 비롯해 여러 관현악기를 보유한 교향악단이다. 이참에 쉬어가며 이런 생각 하나 ...

    2024.03.28 21:58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코끼리는 죽어서야 등이 땅에 닿았다
    코끼리는 죽어서야 등이 땅에 닿았다

    손오공이 머리카락 한 줌 후, 불어 제 분신을 만들 듯 이 선거판을 확, 뒤집을 수 있다면! 그러나 아무리 분통이 터져도 각각 한 표씩뿐이다. 저 자리 거저 준다 해도 앗, 뜨거워라 도망갈 터이지만 무슨 젖과 꿀을 빨 요량인지 머리 터지도록 그곳으로 돌진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몰라도 알 듯한 그들. 너무 많은 말을 쏟아내느라, 입가에 골짜기가 생기고 입도 비뚤어지는 것 같다. 그런저런 아사리판의 뉴스가 범람하는 곳에서 세계문학전집급의 독후감을 주는 기사 하나를 건졌다. 바다에 모비딕이 있다면 뭍에는 코끼리가 있다. “코끼리 장례, 내 새끼 얼굴이 하늘 보도록…모든 아기 코끼리가 등이 땅에 닿은 채로 묻혔다…”(한겨레)는 코끼리 장례에 관한 며칠 전의 놀라운 뉴스.더러 강원도에서 꽃산행 마치고 귀가할 때 멀리 얼룩말의 갈기 같은 키 큰 나무들의 도열을 본다. 굽이치는 저 능선은 그 어디로 떠나려는 짐승들의 고단한 등을 어찌 그리 닮았는가. 그럴 때면 서늘한 문장...

    2024.03.21 20:3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파이의 날, 3월14일의 몽상
    파이의 날, 3월14일의 몽상

    ‘가다’와 ‘내려가다’는 뉘앙스가 다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 “가다=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장소를 이동하다/내려가다=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또는 위에서 아래로 가다.” 두 단어를 살피면, ‘가다’는 수평으로 나아가는 동작을 포착하고 ‘내려가다’는 수직으로 구르는 모양을 그린다고 할 수 있겠다. 왕자웨이의 영화 <일대종사>는 인상적인 문장들로 시작한다. “쿵후는 두 단어로 말할 수 있다. 수평과 수직! 지는 자는 수평이 된다. 최후에 수직으로 서 있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어디 쿵후만 그렇겠는가. 나날의 삶도 낮에 막대기처럼 서서 돌아다니다가 밤에 누워 자는 것. 그러다가 꿈속에라도 나무 곁으로 내려가 꼿꼿이 직립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니 이 범주에 속한다 하겠다.플라톤의 <국가>는 소크라테스의 말로 시작한다. “어제 나는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과 함께 페이라이에우스 항에 내려갔었네.” 이 문장의 그리스어 원문엔 ‘내려갔었네’가 첫 ...

    2024.03.14 20:16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봄날, 나뭇잎 하나의 몽상
    봄날, 나뭇잎 하나의 몽상

    봄은 오되 기차처럼 온다. 참새 떼 훑고 가는 가시덤불로도 은근히 오고 바지 주머니에도 와서 사람들 인정 넉넉하게 데운다. 봄은 잎에 업혀서도 나온다. 대개 꽃보다 먼저 피는 잎은 가지가, 이렇게 아름다운 풍선 좀 보라며, 피리처럼 힘껏 불면 다투어 봄을 싣고 이 세상으로 불룩하게 나오는 것.나뭇잎은 나무의 입에 불과한 것 같아도 그 생김새가 저마다 독특하다. 물푸레나무 잎사귀는 가장자리가 물결처럼 꿀렁꿀렁해서 어느 나라의 해변 같기도 한데 그 물가에서 자맥질하며 놀던 아이들의 파리한 입술을 닮았다. 섬마다 지천인 동백잎은 둘레마다 까끌한 톱니가 발달했는데, 손으로 한바퀴 돌리면, 어느 바깥의 모서리를 만지는 느낌이다. 어떤 운명을 점지한다는 지문과 그 물결은 절호의 궁합을 이루며 어느 결에 세상에 없던 곳으로 나를 배달해 주는 것.연약한 잎사귀는 떡잎보다 조금 컸을 땐 짐승들의 해코지를 피할 겸 부러 못생기게도 보이고, 거치가 아주 거칠다. 짐승들의 사나운 이...

    2024.03.07 20:22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아니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구독 취소하기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보기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닫기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