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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파이의 날, 3월14일의 몽상
    파이의 날, 3월14일의 몽상

    ‘가다’와 ‘내려가다’는 뉘앙스가 다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 “가다=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장소를 이동하다/내려가다=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또는 위에서 아래로 가다.” 두 단어를 살피면, ‘가다’는 수평으로 나아가는 동작을 포착하고 ‘내려가다’는 수직으로 구르는 모양을 그린다고 할 수 있겠다. 왕자웨이의 영화 <일대종사>는 인상적인 문장들로 시작한다. “쿵후는 두 단어로 말할 수 있다. 수평과 수직! 지는 자는 수평이 된다. 최후에 수직으로 서 있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다.” 어디 쿵후만 그렇겠는가. 나날의 삶도 낮에 막대기처럼 서서 돌아다니다가 밤에 누워 자는 것. 그러다가 꿈속에라도 나무 곁으로 내려가 꼿꼿이 직립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니 이 범주에 속한다 하겠다.플라톤의 <국가>는 소크라테스의 말로 시작한다. “어제 나는 아리스톤의 아들 글라우콘과 함께 페이라이에우스 항에 내려갔었네.” 이 문장의 그리스어 원문엔 ‘내려갔었네’가 첫 ...

    2024.03.14 20:16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봄날, 나뭇잎 하나의 몽상
    봄날, 나뭇잎 하나의 몽상

    봄은 오되 기차처럼 온다. 참새 떼 훑고 가는 가시덤불로도 은근히 오고 바지 주머니에도 와서 사람들 인정 넉넉하게 데운다. 봄은 잎에 업혀서도 나온다. 대개 꽃보다 먼저 피는 잎은 가지가, 이렇게 아름다운 풍선 좀 보라며, 피리처럼 힘껏 불면 다투어 봄을 싣고 이 세상으로 불룩하게 나오는 것.나뭇잎은 나무의 입에 불과한 것 같아도 그 생김새가 저마다 독특하다. 물푸레나무 잎사귀는 가장자리가 물결처럼 꿀렁꿀렁해서 어느 나라의 해변 같기도 한데 그 물가에서 자맥질하며 놀던 아이들의 파리한 입술을 닮았다. 섬마다 지천인 동백잎은 둘레마다 까끌한 톱니가 발달했는데, 손으로 한바퀴 돌리면, 어느 바깥의 모서리를 만지는 느낌이다. 어떤 운명을 점지한다는 지문과 그 물결은 절호의 궁합을 이루며 어느 결에 세상에 없던 곳으로 나를 배달해 주는 것.연약한 잎사귀는 떡잎보다 조금 컸을 땐 짐승들의 해코지를 피할 겸 부러 못생기게도 보이고, 거치가 아주 거칠다. 짐승들의 사나운 이...

    2024.03.07 20:22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합정역, 보름달, 이방인
    합정역, 보름달, 이방인

    물론 소란도 좋지만 단란은 더욱 좋아서 잊은 듯 잊힌 듯, 정든 땅 언덕 같은 파주에서 단출히 지내다가도, 서울에 또 볼일이 생기기는 마련이라 좌석버스를 타고 자유로를 유유히 달려 합정으로 간다. 언젠가 국민MC 유재석씨가 유산슬이란 예명의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면서 히트한 노랫말대로 ‘합치면 정이 되는 합정’이지만 이곳도 여느 곳과 사뭇 다를 바 없는 한 지하철역이다.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을 만큼 항상 한 움큼씩의 사람들이 합치고 흩어지기를 되풀이하는, 해변처럼 쓸쓸한 곳이기도 하다. 나는 고작 30여분 만에 전혀 다른 풍경이 연출되는 것에 잠시 어리둥절하다. 그렇다고 도시물을 모를 리 없지만 벌써 파주의 듬성듬성한 분위기가 그립고 뭔가 질척거리는 늪의 기운이 알싸하게 퍼지는 것 같다. 이를 중화시키려 불러오는 풍경 하나. 그 옛날 덕유산 아래의 고향에서 새벽밥 먹고 거창읍 차부에서 부산으로 떠나던 날의 아침과 천일여객 타고 하루 종일 달려 고무신 위로 발등이 퉁퉁 ...

    2024.02.29 20:09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숲속의 피아노, 임윤찬의 피아노
    숲속의 피아노, 임윤찬의 피아노

    남해안 어느 섬의 꽃산행은 해가 웬만큼 떠올라 저 멀리 누구네 집 엉덩이를 걷어찰 때쯤 나도 비슷하게 산으로 출발하여 서로 모른 척 하루를 보낸 뒤, 저녁 어스름 각자 헤어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해는 서해에서 씻고 나는 집에서 먼지 묻은 몸을 씻고, 배를 채운 뒤 사진도 정리하다 보면 아주 늦은 밤일 때가 많다. 그럴 때면 텔레비전은 시끄럽고 떠들썩한 건 곶감처럼 다 빼먹은 뒤, 심야방송으로 장중한 선율이 흐르는 클래식 공연실황을 내보내는데 더러 막 연주를 마친 피아니스트가 아주 훤칠한 피아노를 배경으로 인터뷰를 하기도 하였다.클래식에 관한 한 그냥 막 듣기만 하는 수준의 나는 단지 피아니스트가 조금 전까지 뛰논 피아노에 눈길이 가다가 몇 시간 전 희미한 햇살을 따라 하산하다가 만난 어느 반반한 바위를 떠올리기도 하였다. 바위는 급히 심부름을 가다가 잠시 쉬는 듯하기도 하고, 무슨 큰 뜻을 실어나르느라 산을 납치하여 짊어지고 가다가 너무 무거워 그만 주저앉은 것 같기...

    2024.02.22 20:14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입은 작은데 왜 이리 말이 많은가
    입은 작은데 왜 이리 말이 많은가

    몸은 장독대이다(<노름마치>, 진옥섭). 심장, 간장, 비장, 폐장, 신장, 소장, 대장 등의 장기들이 옹기종기 모인 동네. 무심코 던진 돌멩이 하나에 항아리 쉽게 깨지듯 한마디 말에 얼마나 상처 입는 마음인가. 그러니 저 ‘장’자 돌림의 오장육부를 안고 있는 사람의 몸을 장독대라 표현한 건 참으로 절묘하다.얼굴은 ‘얼의 굴’이다(다석 유영모). 굴은 좁아서 한 글자씩 겨우 산다. 눈, 코, 귀, 뺨, 턱, 입. 이런저런 꼬리 없이 단정한 한 세계들. 그래서 힘이 더욱 세다. 입을 드나드는 식구들도 마찬가지다. 혀, 이, 밥, 국, 찬, 물, 술, 숨 그리고 말.식물은 입이 없지만, 외부에서 먹이를 구해야 하는 동물은 입을 구비하고 이빨을 장착해야 한다. 사람도 예외일 수 없다. 누구나 엄연히 가지고 있는 스무 개가 훨씬 넘는 이(齒)에 대해 오래된 생각이 있다. 이 하나하나는, 묵묵한 귀가 그러하듯 누가 푹 꽂아놓고 자루만 달랑 들고 가버린 삽과 비...

    2024.02.15 20:23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떡국 혹은 그것의 방정식
    떡국 혹은 그것의 방정식

    내 또래의 경상도 특히 부산 친구들 영어 발음이 약간 엉망인 건 억센 사투리 탓이다. 영어보다도 수학 공부할 때 더 자주 사용했던 말, ‘이꼬루’ 혹은 ‘이꼴’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정확하게 철자를 적으면 equal, 현지식에 가급적 가깝게 발음하면 이퀄. “두 식 또는 두 수가 같음을 나타내는 부호(=)를 이르는 말”이라고 국어사전은 풀이한다. 이 기호는 수학의 방정식에 약방의 감초처럼 꼭 필요했다. 예를 들어, 일차방정식 ‘x+1=4’는 ‘엑스 더하기 일 이꼬루 사’로 읽은 뒤 부리나케 x의 값을 찾아 볼펜을 굴려야 했던 것.돌이켜 보면 미지수 엑스는 중학생이던 나의 생활에 불쑥 뛰어들었다. 그 이후 무시로 난입하는 저 복면한 괴한을 떨쳐내느라 애쓴 시간의 총합, 다시 말해 저 오리무중을 적분한 것이 곧 한 장으로 요약되는 내 이력서이다. 지금도 x를 찾아서 방황하지만 여전히 엑스는 엑스. 이 난감한 x가 있는 한, 내 무거운 일생은 긴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

    2024.02.08 18:26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이 추운 날, 돼지국밥
    이 추운 날, 돼지국밥

    조리법에 무슨 차이라도 있다는 것일까. 부산역 구내 돼지국밥은 따로 밥이 나오는 것보다 토렴한 것이 천원 더 비싸다. 아무튼, 밥과 고기와 국물의 비율을 대강 맞춰가며 국밥을 먹을 때 어느새 아쉽게 바닥을 긁게 되고 펄펄 끓던 국물도 많이 식었다. 아무래도 숟가락이 건더기를 선호하는 와중에 국물은 좀 넉넉히 남겨두었다.꽃산행을 가지 않는 주말이면 억울한 심사를 달래다가 주섬주섬 챙겨서 동묘 풍물시장에 가기도 한다. 이리저리 발품을 팔다가 결국 헌책방을 찾던 어느 날의 일화. 몸 하나 운신하기 힘든 좁은 서가의 시집 코너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데 출입구에서 이런 말이 들리는 거다. 대강 얼굴을 익힌 주인과 이 가게의 오랜 단골인 듯 머리 희끗한 아저씨가 나누는 대화. “거 말이야, 나는 말이오.” “….” “나중에 꼭 사돈은 강원도 사람이면 좋겠어.” “왜 그러는데….” “거 말이야, 왠지 강원도는 산이 많아서 그냥 사람들이 좋을 것 같애.” “….” “왠지 말이오, 서로...

    2024.02.01 20:09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태백 가는 길
    태백 가는 길

    지형이나 고사를 반영하여 지은 지명은 단순한 명사가 아니다. 수많은 선인들의 발자국이 온축되어 있다. 천명을 받아 한생을 꾸렸다가 이제 짐을 벗고 하늘로 돌아가신 분들, 멀리 지구를 굽어보면서 땅의 이름을 등대 삼아 눈에 밟히는 생시의 동네를 헤아리고 계실까.청량리에서 출발한 무궁화 눈꽃기차는 고을마다 엎드린 역을 차례차례 짚어나간다. 내리는 손님 그만큼, 또 타는 승객 이만큼. 덕소(德沼)와 양정(養正)을 지나더니 금방 은행나무 아래 용문(龍門)이다. 고장의 이름들이 징검다리처럼 하나의 느낌으로 꿰어지고 나는 기꺼이 거기에 사로잡힌다.순식간에 석불(石佛) 지나 일신이다. 일신우일신이라고 할 때와 꼭 같은 그 日新이다. 기차가 길을 재촉하여 그윽한 삼산(三山) 다음 기착한 곳은 원주(原州)다. 原은 그야말로 本과 어금버금하니, 근본에 대한 기운이 깊숙이 일어나는 곳.다시 제천, 영월을 지나니 여기서부터는 석탄 냄새도 물씬해진다. 민둥산 떠나 이른 곳은 예...

    2024.01.25 20:1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새해, 눈 오는 날, 버스정류장에서
    새해, 눈 오는 날, 버스정류장에서

    저 위에 높이 뜬 달에 올라가 지구를 본다면 내려다보일까. 그럴 리가, 달도 분명 지구를 우러르고 있다. 우주에서 상대를 대접하는 방식은 서로를 정중히 받드는 것. 눈도 하늘의 그곳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솟구치며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그걸 낮디낮은 곳, 지구라는 블랙홀에 빠진 우리가 거대한 착각 속에 내리는 것으로 만드는 게 아닐까. 아무튼 눈이 펑펑펑 왔다. 눈은 그냥 오지 않는다. 눈은 짐짓 세상의 무심하던 곳을 햇볕 든 쥐구멍처럼 뜻밖의 장소로 변하게 한다. 몸의 가장 변방인 발바닥도 그중의 하나다. 듣는가, 눈길 걸을 때마다 찍히는 발바닥의 힘찬 주장을. 네 존재의 구멍을 틀어쥐고 있는 건 나야!차는 안 오고 집으로 어서 가고 싶은 마음들이 부딪히는 버스정류장도 그런 곳이다. 다른 것과 다른, 가장 큰 눈송이 하나 골라서 입으로 들이면 마음속 생각 하나가 밖으로 나온다. 나에겐 버스정류장에 대한 오래된 생각이 있다. 공중화장실 근처 나무들의...

    2024.01.18 20:03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나의 친구, 모나미 볼펜
    나의 친구, 모나미 볼펜

    나 처음 왕만두만 한 핏덩어리로 태어나 이내 젓가락, 연필 그리고 볼펜하고 사귀었습니다. 그중의 모나미 볼펜은 언제나 볼품이 참 건조하고 간단해서 가까이하기에 너무 좋았습니다. 수학 시간에 미적분을 맹렬하게 풀 때 기저귀에 애기똥 묻히듯 볼펜똥이 귀엽게 흘러나오기도 했던 나의 친구, 모나미.고등학교 시절의 우리는 금쪽같던 쉬는 시간에 티나크래커 한 봉지를 걸고 볼펜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시합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코메티 조각의 길쭉한 다리 같은 볼펜은 나름 부품이 정교합니다. 몸통, 앞뚜껑, 볼펜심, 스프링, 똑딱이 걸쇠. 나사는 쉽게 풀리지만 뚜껑 걸쇠를 분리하자면 요령이 필요했습니다. 손끝의 감각이 미세한 녀석이 결국 이겼습니다. 나의 이력과 필기구의 종류는 정확히 일대일 대응의 관계입니다. 초등학교-연필, 중학교-만년필, 고등학교-볼펜, 대학교-볼펜 그리고 사회-볼펜과 붓. 그 묵묵한 것들이 실어나른 각종 서류의 밑줄, 연습장의 낙서, 영수증의 사인들. 어지...

    2024.01.1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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