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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나의 친구, 모나미 볼펜
    나의 친구, 모나미 볼펜

    나 처음 왕만두만 한 핏덩어리로 태어나 이내 젓가락, 연필 그리고 볼펜하고 사귀었습니다. 그중의 모나미 볼펜은 언제나 볼품이 참 건조하고 간단해서 가까이하기에 너무 좋았습니다. 수학 시간에 미적분을 맹렬하게 풀 때 기저귀에 애기똥 묻히듯 볼펜똥이 귀엽게 흘러나오기도 했던 나의 친구, 모나미.고등학교 시절의 우리는 금쪽같던 쉬는 시간에 티나크래커 한 봉지를 걸고 볼펜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시합을 하기도 했습니다. 자코메티 조각의 길쭉한 다리 같은 볼펜은 나름 부품이 정교합니다. 몸통, 앞뚜껑, 볼펜심, 스프링, 똑딱이 걸쇠. 나사는 쉽게 풀리지만 뚜껑 걸쇠를 분리하자면 요령이 필요했습니다. 손끝의 감각이 미세한 녀석이 결국 이겼습니다. 나의 이력과 필기구의 종류는 정확히 일대일 대응의 관계입니다. 초등학교-연필, 중학교-만년필, 고등학교-볼펜, 대학교-볼펜 그리고 사회-볼펜과 붓. 그 묵묵한 것들이 실어나른 각종 서류의 밑줄, 연습장의 낙서, 영수증의 사인들. 어지...

    2024.01.11 20:07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생각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

    아주아주 오래전, 차인태 아나운서의 차분한 음성으로 <장학퀴즈>에 이런 난센스 문제가 나왔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다리를 꼴 때 왼쪽일까요, 오른쪽일까요. 벌거벗은 그 사람이 팬티조차 입지 않은 건 분명히 알겠는데 헷갈렸다. 아무리 생각에 몰두했더라도 최소한 부끄러운 그곳은 감추고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사람, 참 복잡한 동물이다. 가슴도 난해하지만 더 시끄러운 곳은 따로 있다. 시가 여기에서 나온다면 소설은 거기에서 나오는 것. 인간사의 복잡다단이 다 그곳으로부터 유래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천하의 조각가도 일단 그곳을 가렸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생각이야 내가 하는 것. 돼지저금통처럼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가 언제나 꺼내서 써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그간 생각을 안 해서 그렇지 작정하고 깊이 궁리하면 제법 그럴듯한 경지에 도달하고, 이제껏 세상에 없던 희유한 생각 하나쯤이야 일도 아니라고 믿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저 자동으로...

    2024.01.04 22:1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입으로 지은 업 깨끗하게 씻으며
    입으로 지은 업 깨끗하게 씻으며

    한 사람을 만나는 건 하나의 문을 여는 것. 말 하나를 배우는 것도 문 하나를 열고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가전제품 살 때, 어디 기계만 달랑 오던가. 설명서에 딸려온 새로운 단어로 사용법을 익힌다. 좋은 일은 앞에 있는 법, 이 물건과 엮어나갈 사연은 또 얼마이겠는가.사람 人. 작대기로 지게를 받쳐놓은 듯 사람이 서로 의지하는 모양이라고 풀이한다. 문 門. 문이야말로 더욱 구체적이다. 마주 보는 두 얼굴의 옆모습이 아닌가. 우리는 문을 만나고 문을 통과하면서 결국 바깥까지 나아간다.대설 지나 동지도 지나면서 시간의 문이 점점 잘록해진다. 계묘년을 닫으며 성큼 들어서는 갑진년. 올해의 마무리를 겸해서 경주에 간다. 발뒤꿈치라도 뚫을 기세의 찬 날씨. 신경주역 광장의 무덤에 가볍게 목례하고 대릉원의 고분군을 거닌다. 여기에서는 오로지 행각(行脚)이다. 첨성대 지나 계림, 반월성에 올라 경주를 일별한 뒤, 내처 성곽을 따라 박물관까지 살살 걸었다. 지금 우러르는 ...

    2023.12.28 22:15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아버지와 아들
    아버지와 아들

    트렘펫은 가장 높은 음을 내는 땡초 같은 금관악기다. 얼마 전 감동적으로 본 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에는 조금 서글픈 일화도 있다. 모리코네가 음악에 입문한 건 트럼펫 연주자인 아버지 덕분이다. 어느 날 어머니의 말씀. 얘야, 아버지도 함께 연주하면 안 되겠니? 아들은 아무 대꾸를 않는다. 늙은 아버지와 젊은 아들. 이제 함께하기에는 실력의 차이가 생겨버렸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마에스트로>는 부자(父子) 음악가의 영화다. 집에서는 식구이지만 밖에서는 꿈의 무대를 두고 은근히 경쟁한다. 둘 사이에도 시기와 질투, 두려움과 동정심이 있다. 유명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내정된 아들. 그런데 그만 아버지에게로 잘못 전화가 가서 벌어지는 이야기. 너무나 유명한 화가인 피카소의 본명은 단어가 20개, 철자는 무려 103개나 된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장난이 아니라서 그는 어머니의 성(姓)인 ‘피카소’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도 있다. 서성(書聖...

    2023.12.21 20:38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청계산의 낙타
    청계산의 낙타

    희붐한 햇살이 창문을 두드릴 때 배낭을 꾸려 청계산을 오른다. 식물탐사대의 송년 번개모임. 헐떡헐떡 순한 짐승처럼 정상 근처 돌문바위를 지나다가 아이쿠, 낙타를 만났다. 산중 가게 좌판에 몽골 낙타털 양말이 진열되어 있지 않겠는가. 발목 근처에 낙타가 선명했다. 그 어디에 있든 낙타는 힘이 세다. 상표와 로고만으로 자꾸 저를 생각나게 했다. 아침의 기립부터 지금의 융기까지, 오늘의 내 행각이 아연 낙타와 엮이기 시작했다. 맞춤하게 떠오른 한 편의 시.“낙타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툭 던지는 저 첫마디가 참으로 아득하다. 그래, 오늘 나도 신분당선 전철을 타고 저승 근처인 듯 지하를 달려 여기까지 솟구치지 않았는가. 비딱한 경사와 깔딱고개마다 저 구절을 중얼거리면 어디선가 비상한 기운이 턱밑으로 올라왔다.“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2023.12.14 20:45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계묘년 저물 무렵의 논어 공부
    계묘년 저물 무렵의 논어 공부

    올해 초, 에너지 회사 대표로 취임한 친구에게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를 써서 축하난을 보냈다. 리본이야 난초의 잎처럼 자라지는 않겠지만 호학하는 경영인의 공부는 더욱더 그윽한 경지로 나아가리라. 그제 형님댁에서 텃밭의 무와 배추를 가져가라는 전갈을 받았다. 아파트 차단기 앞에서 호출화면을 누르는데 자투리에 조야한 광고 대신 이런 구절이 떠오르지 않겠는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 배우고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않겠는가.”축의금이 필요해서 현금자동입출금기에 갔더니 시각장애인에 대한 안내가 나왔다. 대부분 급한 마음에 이내 다음 화면으로 넘어가지만, 이럴 때 논어의 한 대목으로 연결되고 입출금기에 부착된 점자도 한번 쓰다듬는다. “공자께서는 (…) 맹인을 보실 때는 비록 그들이 젊더라도 반드시 일어났으며, 그들 앞을 지날 때는 빠른 걸음으로써 경의를 표하였다.”중국 사상사에서 가장 특출한 이단아를 꼽는다면 단연 이탁오(李贄·1527~1602)일 것이다. 그의 논어에...

    2023.12.07 23:59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휴대폰, 세 번째의 눈
    휴대폰, 세 번째의 눈

    퍽 오래전, 문지방이 닳도록 호프집이나 뻔질나게 드나들며 가슴속의 허기를 취기로 달랠 무렵, 별별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왜 얼굴에서 말하는 곳과 먹는 곳은 하나인가. 자칫 소홀하면 지저분하기 일쑤인 입을 공통으로 사용하는가. 좌우대칭의 균형을 자랑하는 이목구비는 왜 칫솔처럼 한쪽에 몽땅 몰려 있는가. 가령 눈 하나는 외진 골목을 밝히는 가로등처럼 뒤통수에 달려 있다면 효율적이지 않을까.그러나 깜빡거리는 눈이 늘 보기만 한다면 사람의 머릿속은 어떻게 되겠나. 그것은 매일 불침번을 서는 것이며 한밤중에도 형광등 아래 놓이는 것이며, 종점에서도 곧바로 되돌아 나서야 하는 버스의 피곤과 진배없는 것. 말하자면 그것은 뒤가 없어지는 것. 어쨌든 눈썹 가까이 정렬된 두 눈으로 죽이든 밥이든 하나를 택한 뒤, 거기에 집중하라는 함의로 나는 이해했다.그리고 그런 건 그런대로 그냥 내버려 두고 또 다른 문제에 정신을 빼앗기며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는 그런 유치한 질문조차 ...

    2023.11.30 21:1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전보가 사라진다
    전보가 사라진다

    그게 그것 같지만 고사성어와 사자성어는 문자적으로 조금 차이가 있다. 옛이야기 깃든 곳에서 말을 길어 올린 게 전자라면,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뜻을 네 글자에 가둔 게 사자성어(四字成語)다. 한문에 이런 산뜻한 말의 구조가 있다면 영어에는 전혀 뜻밖의 네 글자가 있다. 포 레터 워드. four-letter word. 이는 기억할 만한 가르침이 아니라 욕설이나 육두문자를 뜻한다. 영어에서 상스러운 말들이 주로 네 단어로 이루어진 데서 이런 부작용(副作用)을 얻은 것이다.넷은 우리나라에도 적용되니 4.4조는 우리말의 기본 율격이다. 가령, 술자리에서 네 글자만으로 말하자는 규칙을 정해도 노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더러 이런 추임새로 분위기도 띄울 수 있다. 맥주네병, 그랬구나, 집에가자. 그뿐인가. 길거리를 질주하는 사이렌 소리는 앵, 앵앵, 앵앵앵이 아니라 앵앵앵앵으로 끊어 듣는 게 일반적 말귀 아닌가.영어와 다르게 한문이 저런 형식으로 네 글자의 숭고미를 만...

    2023.11.23 20:26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나무가 똑바로 휘어진 까닭
    나무가 똑바로 휘어진 까닭

    “어째서 산은 삼각형인가.”(이성복) 산은 그냥 높은 흙덩어리일까. 축구공의 표면처럼 지구가 평평하다면 이 세계가 그 얼마나 평범했을 것인가. 그 넓이는 차치하더라도 우리 사는 세상의 높이와 깊이가 이만했을까. 어째서 나무는 화살표인가. 저기 저 나무가 비탈에서 세모 모자나 쓰고 산불이나 지키는 단순한 존재일까. 이태백을 하늘에서 귀양온 신선이라 일컫듯, 나무는 지하에서 바깥으로 특파한 파수꾼이 아닐까.왜 흙은 대단한가. 부드럽게 한 줌 손에 쥐고 흩뿌리는 것, 사탕 하나 깨무는 것처럼 쉬운 일이지만 관찰해 보라. 중용의 한 대목처럼 저 산과 바위를 짊어지고도 하나 무거운 줄을 모르는 대지 아닌가. 그 두터움을 뚫고 나오는 게 나무 아닌가.여기까지만으로도 나무는 충분히 위대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나무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멀리서 나무를 보면 오로지 나무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무는 가지 끝에서 두 갈래로 분지하여 공중으로 진출한다. 대지를 일 획...

    2023.11.16 20:44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아버지의 해방일지’서 찾은 장대
    ‘아버지의 해방일지’서 찾은 장대

    사람의 어떤 일생이란 고향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점점 이주하다가 종내에는 그 고향으로 누운 채 돌아가는 것. 덕유산이 내리뻗다가 아직 차렷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는 곳에 나의 고향은 있다. 그래서 들은 좁고 골은 깊다. 마을 앞에 서면 장대 하나 걸어도 될 만큼 너무 가까운 앞산과 뒷산. 그사이 따갑게 떨어지는 햇살은 알밤처럼 토실토실해서 그것 먹고 자란 거창사과는 그야말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다.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는다. 소설은 처음의 ‘아버지가 죽었다’와 마지막의 ‘나는 울었다’라는 정직한 두 문장을 비집고 웃고 우는 사연들로 빼곡하다. 관처럼 묵직한 문장의 사이마다 구례를 무대로 지리산의 능선과 골짜기가 첩첩이 들어 있다. 아버지와 딸을 이어주는 길고 기이한 장대 하나 걸렸다고 해도 되겠다. 빨치산 활동을 기어코 해낸 망자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생전 어머니와의 대화 한 대목을 보면, 그 어떤 주의고 사상이고 간에 그저 사람에 대...

    2023.11.09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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