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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당나귀 ‘이오’한테 배운다
    당나귀 ‘이오’한테 배운다

    늦은 밤 지하철이 시끌벅적해졌다. 먼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 신나게 떠드는 것을 보며 말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람의 언어란 무엇인가. 소리가 말이 되는 건 직립하고 관계가 있다고 한다. 직립이란 몸통에서 나온 가지를 발과 손으로 인수분해한 것. 네 발 중 두 개를 떼내어 손으로 재분류한 것. 그 덕분에 하늘을 발견하였고 내 것을 챙긴다는 소유개념도 생겨났다. 그리고 목구멍에 변화가 일어나 소리를 정교한 말로 만드는 것.영화 <당나귀 EO>의 주인공 ‘이오’는 겨우 당나귀이다. 딸랑딸랑 폐철 싣고 왔다가 고물상의 사나운 경비견한테도 주눅이 든다. 제 이름 적듯 앞발로 흙이나 긁을 뿐이다. 영화는 사람의 시선, 환상, 당나귀의 시선이 교묘하게 뒤섞인다. 곡마단에서 우정을 나눈 소녀와의 이별과 재회를 다루었다면 영화는 그야말로 신파로 흘렀을 것이다. 영화는 당나귀를 홀로 존재하는 단독자로 대접한다. 당나귀의 눈에 비친 각종 찌질한 인간 군상들. 종류가 가...

    2023.10.26 20:39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나 혼자 짝사랑의 나라, 폴란드
    나 혼자 짝사랑의 나라, 폴란드

    유럽은 좀 얄밉다. 지구는 명확하게 둥근데 무슨 자격으로 근동, 중동, 극동(極東)이라는 제 중심의 거리에 따른 얄팍한 명칭을 입에 올리는가. 우리라고 말서(末西)라는 말을 몰라서 저런 용어를 안 쓰는 게 아니다. 아무튼, 그런 해묵은 지역색은 접어두고 세계지도를 본다. 지지고 볶으며 자기들끼리 사는 소란으로 늘 떠들썩하다.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유럽.낯설기 짝이 없는 한 뼘의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본다. 섬나라 영국과 그 이웃한테 늘 당해온 아일랜드, 노벨을 배출한 스칸디나비아반도, 스피노자의 네덜란드, 맥주의 독일, 와인의 프랑스, 건축의 스페인과 축구로 남북한에 한 번씩 혼쭐이 난 포르투갈이 해안선을 끼고 도열한 게 내 빈약한 지리 상식이다. 그리고 내륙으로 들어가면 엉겨붙은 국기들이 펄럭이지만 그 나라가 다 그 나라 같다. 이름도 쉽게 입에 감기지 않는 복잡한 국가들.그런 배경의 저 유럽에서 폴란드는 좀 특별하게 다가왔다. 이름만으로 다듬잇돌처럼 ...

    2023.10.19 20:29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발과 손, 그 쓰임에 관하여
    발과 손, 그 쓰임에 관하여

    추석 지나고 가을이 왔다. 어느새 발밑에 깔리는 바싹 마른 낙엽들. 어디선가 주춤주춤 나타나서 해자(垓子)처럼 둘레를 친다. 추석, 가을, 낙엽. 이 말속에 최근의 내 감각은 한 소쿠리씩 담긴다. 자연이 있고 이에 따라 언어가 발명되었겠지만, 이젠 저 말의 봉지를 따 그 진한 냄새를 흡입하고서야 이 계절 안에 제대로 풍덩 잠긴다. 알록달록한 단어들이 아니었다면 시월의 이 느낌, 이 기분과 어떻게 밀착하랴. 그런 생각의 와중에 마침 우리의 한글날은 있다. 반짝이는 하루를 지나면서 두툼한 국어사전을 부러 쓰다듬어 본다. 기역부터 히읗까지 질서 있게 배열된 낱말마다 품사도 정확히 벼슬처럼 주어진다. 저 말들을 언제 다 대접해 주나. 죽기 전에 한 번씩 입에 넣고 중얼거려보나. 범박하게 말해 사전 속의 어휘들은 세 종류로 대별할 수 있겠다. 사물(물질)에 대응하는 것과 사건(현상)을 품는 것 그리고 꾸미는 것.어쩌면 이 말들은 인체의 각 기관을 벼리로 삼아 분류할 수도...

    2023.10.12 20:21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추석, 긴 여운
    추석, 긴 여운

    고향 가는 길의 김천 직지사. 압도적인 대웅전 부처님 때문이다. 절에서는 사람들 뒷모습이 주로 눈에 들어온다. 함께 나들이 온 일가족인 듯 엄마와 아들과 딸이 앞에서 손잡고 걷고 아빠와 할머니가 뒤를 따른다. 지금의 나는 앙상하지만 나도 저런 풍경에 담긴 적이 있었다. 몇년 전의 우리집하고 꼭 같은 모습의 실루엣은 여러 봉우리가 이어진 산줄기 같다. 저 단란한 골짜기 사이로도 일어나야 하는 일은 들이닥친다. 멀리 있는 별이야 항상 반짝거리면 그만이지만 가까이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이 끈끈한 가족들도 언젠가는 서로 울면서 행성처럼 흩어져야 하는 것. 왜 구불구불 국도까지 뒷모습이 자꾸 눈에 밟히는가.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적어도 불행한 가정은 없는 것 같다. 긴 연휴를 각자의 방식대로 보내는 귀성객과 성묘객과 여행객들. 그 누구든 지루한 집을 떠났다는 홀가분한 기분을 감추지 않는다. 화장실을 다녀온 뒤 후련한 표정으로 각종 먹을거리를 든 채 섞이고 어긋난다. 가족을 부르...

    2023.10.05 20:29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가을 국화
    가을 국화

    우연이 희한하게 겹치는 그런 날이 있다. 붐비는 설렁탕집 건너건너에서 허겁지겁 밥 먹는 이는 좀 전 지하철에서 마주쳤던 중년. 짧게 깎은 머리, 후줄근한 점퍼에 청바지 차림이다. 그는 아주 오래전 캐나다로 이민 떠난 재종 동생과 어찌 그리 닮았는가. 혹 녀석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몰래 잠깐 귀국이라도 한 것일까. 그러나 또다시 보아도 그럴 리는 없었다.그 바람에 흠칫 짐작을 넓혀본다. 주위에 몰래 거처를 숨기고 없는 듯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신의 행방을 감출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겠구나. 투명인간인 듯 두더지인간인 듯. 유학을 떠났다가 학위를 그만두었으나, 포기했다는 말은 차마 못하고 있던 자리로 돌아와 없는 듯이 살 수도 있겠다. 사업차 멀리 떠난다고 큰소리쳤으나 실은 행선지가 지하였다. 그곳에서 요행히 어제까지를 모두 숨겼지만 그 어떤 절박함에 쫓겨 습기 찬 오늘로 다시 뛰어나올 수밖에 없는 것.착각에 익숙한 시력에...

    2023.09.21 20:30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옥수수수염차
    옥수수수염차

    수십 쪽짜리 쌈박한 논문도 시(詩) 한 편을 못 당한다는 말이 있다. 이에 기대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시루떡 같은 그 짧은 시도 쫄깃한 한 줄의 속담 앞에선 꼼짝마라다. 보름달만큼 잘 빚은 속담 두 개를 꼽아본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이보다 더 어떻게 설명하리오. 숱한 세계문학전집의 한 주제이기도 하듯 그 관계가 참으로 오묘하다. 사랑하기에 헤어진다는 말처럼 서로 잘 알아서 낯설고 너무 가까워서 어긋나기도 쉽다. 그 아픔을 달래기라도 하듯 이런 속담은 또 어떤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프다.’ 이럴 때 촉촉한 눈으로 들어오는 건 대들보가 아니라 엉금엉금 기는 손자.글쎄, 우리 손녀가 돌잡이를 하는데 판사봉을 잡았다 아이가. 친구는 못 이룬 꿈의 격세실현에 한 발짝 가까이 간 듯 조금 흥분한 눈치였다. 요즘 돌잔치는 예전하고 많이 다르다. 돌잡이만 하더라도 우리 땐 백설기 옆에 대개 연필, 돈, 실이 고작이었다...

    2023.09.14 20:37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오펜하이머, 햇빛에 관한 명상
    오펜하이머, 햇빛에 관한 명상

    빛은 빛나기 이전에 비어 있다. 텅 빈 공간이기에 만나는 것 모두를 품을 수 있다. 꽃을 꽃으로, 당신을 당신으로, 대담한 산을 웅장한 높이로 세상 속에 세워놓는 햇빛. 고개 숙인 할미꽃에는 고개 숙인 할미꽃만큼의 햇빛이 정확하게 든다. 거기에는 딱 그만큼 그곳의 햇빛이 있다.빛은 물리학의 오래된 재료다. 천지간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일으켜 세운 뒤 사라지는 이 빛들을 물리학자들은 얼마만큼 사랑할까. 서울 상계동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던 시절. 햇빛이 아주 쨍한 날이면 아내는 그 눈부신 햇살을 굉장히 아까워했다. 베란다에 와글와글 뛰노는 햇빛을 보면 빨래라도 말려야지 않겠느냐며, 귀한 보물이 그냥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기라도 하는 듯 손을 비볐다. 아내가 일견 그런 기특한 생각으로 자신의 서툰 살림솜씨를 가리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한다면 너무 야박한 바가지일까.어쨌든 햇빛은 우리가 짐짓 낭비하는 사이 녹색식물들과 결합하여 세상의 식량을 만드는 공장을 가동하느라 몹...

    2023.09.07 20:08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해양 실크로드에서 혜초 생각하기
    해양 실크로드에서 혜초 생각하기

    인도네시아 해양 실크로드 답사의 말석에 끼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자주 찾아오는 여행에서 혜초 스님과 가끔 동무하기로 했다. 비행기에게는 구름도 자갈이다. 걸음마 배우듯 뒤뚱거리던 비행기는 고도를 높이고서야 겨우 안정을 취했다. 활주로에서부터 끈질기게 따라오는 그림자처럼 계속 쫓아오는 일말의 불안감. 설산 같은 구름 위에서 더듬더듬 <왕오천축국전>을 읽는다. 관련 자료를 보면 혜초가 당나라에서 천축(인도)으로 들어갈 때, 믈라카 해협을 거쳐 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천년 훨씬 이전의 혜초이듯 이 오늘도 언젠가는 천년 전이 된다. <왕오천축국전>에 자주 나오는 혜초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출렁이는 시간 속에서 우리는 서로 ‘不殊’(불수·다르지 않음)하다고 하겠다. 그걸 조금 아는 물은 구름으로 잠시 떠 있고 그걸 많이 아는 돌은 저 아래 무덤 곁을 묵묵히 지키고 있다.나는 이번 여행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기이하고 희한한 것에 자꾸 눈길이 가...

    2023.08.31 20:38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

    영화 <일대종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쿵푸는 두 단어로 말할 수 있다. 수평과 수직!” 과연 인간은 낮에 서서 돌아다니다가 밤이면 죽음의 한 예행연습처럼 무너지듯 쓰러진다. 간밤 어디를 갔다 왔는가. 아침의 궁둥이에 요철을 맞추며 일어나는 건, 저 하늘의 운행에 몸이 빈틈없이 대응하는 것. 인생이라는 거대한 질량을 감당하느라 굽어가는 허리는 상대성이론에 따른 휘어진 공간과 정확히 합을 이룬다.영화 <엔니오:더 마에스트로>를 본다. 책과 악보가 어지럽게 조화를 이룬 거실에서 한 노인이 가벼운 운동을 한다. 바다의 수심을 재듯 바닥에 등을 대고 수평과 수직을 짜보는 마에스트로. 몸을 굴리며 생각의 전환을 도모하다가 전깃줄 위에 제비 몇 마리 앉히듯 연필로 악상을 적는다. 그게 꼭 꼬리를 달고 어디로 날아가는 행성 같고. 이게 아닌가, 고무로 지우기도 한다. 종이 위에 태어나는 지우개똥은 별똥별 같고. 이렇게 뭇별처럼 태어난 엔니오의 음악은 많...

    2023.08.24 20:28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병어의 얼굴
    병어의 얼굴

    생선에 밝은 친구가 강화도 대명항에서 산 회와 병어찜을 준비했다며 식구들을 모두 초대했다. 포도주로 입가심을 하고 찜보다는 회에 먼저 젓가락이 갔다. 병어를 아시는가. 나는 그간 접시에 누운 병어는 여러 번 보았지만 바다의 병어는 본 적이 없다.위키디피아에 따르면 병어는 다음과 같은 생물이다. “병어(Pampus argenteus)는 병어과의 물고기이다. 몸 길이 60㎝가량으로 둥그스름한 마름모꼴의 형태를 갖는다. 등쪽에 푸른빛을 띤 은백색에 온몸에 벗겨지기 쉬운 잔비늘이 있다. 주둥이는 뭉툭하고 양턱에 아주 작은 이가 있으며, 머리 바로 뒷부분에 물결무늬가 있다. 병어는 대륙붕의 수심 100m 이내에 많다. 산란기는 4~8월이며, 연안의 수심 10~20m인 모래 바닥에 알을 낳는다. 갑각류·다모류 등을 먹고 살며, 큰 것은 길이가 60㎝ 정도이다. 한국·일본·중국·인도양 등지에 분포한다.”공기보다 진한 밀도와 수압 때문일까. 고래를 비롯한 모든 물고기는 잘록한...

    2023.08.17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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