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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바다는 누가 올려다보나
    바다는 누가 올려다보나

    해발이 높을수록 아파트 분양가도 높다천국 속살 같은 햇볕에 조경수는 자라고바다로 뛰어드는 불굴의 투지를투자로 바꾼 자는 영웅이 되어바다를 바닥처럼 내려다본다바다는 천국과 멀다불굴의 투지가 투자가 되지 못하면바다에 들러붙어 살아야 한다치통이 있는 어금니 방향으로 볼을 누르고 자는 것처럼누가 높고 빛나는 곳을 천국이라고 고정시켰을까?기도드리며 기다림을 견디던 곳에 들어선 아파트에불이 켜진 밤에는 배들이 사라지고집어등 불빛으로 밥 먹던 풍경은우리만 아는 것이 되었다바다는 바다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길 끝이 바다인 걸 알면서도매일 어머니께 “어디 가요?” 묻는다묻고 나면 헉헉거렸다-시 ‘바다는 누가 올려다보나’ 허유미 시집 <바다는 누가 올려다보나>10월15일 부동산 대책이 나온 직후, 서울 외곽 도시에 취업한 청년을 따라서 월세방을 보러 갔다. 기억 속에 있는 공장들...

    2025.10.30 19:5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배부른 달, 배부른 여자, 배부른 희망
    배부른 달, 배부른 여자, 배부른 희망

    부른 배 미싱판에 대고 헉헉대는 여자배는 만삭 월급은 초생달인데안 먹어도 불룩한 배는 늘 고픈 여자집들이 때 쌓인 슈퍼타이 슈퍼에 들고 가우유와 콩나물로 바꿔 먹는 여자위층 상가 갈빗집에서 솔솔 풍겨 나오는숯불갈비 냄새 킁킁거리다 깜박 잠에 빠진 여자블라우스 원단에 수놓은 꽃밭손으로 밀고 발로 밟으며 가는 여자밟아도 밟아도 늘 제자리배로 미싱을 밀고 가는 여자-시 ‘배부른 여자’, 김해자 시집 <무화과는 없다>고구마를 캐는데 농부가 아니라 숫제 광부가 된 기분이다. 올핸 뿌리줄기가 아주 깊은 데까지 들어가 주상절리처럼 서 있어서 살살 만지면서 다치지 않게 캐야 했으니. 본줄기에서 멀리 도망가서 자란 애들도 많아서 가장자리까지 흙을 파헤치며 달래듯 캐야 했으니. 크기도 들쑥날쑥이다. 큰 애는 애호박만 하고 작은 애는 애기당근만 하다. 양극화가 꽤 심하다. 고구마를 배게 심어서 그런가, 가뭄과 폭우가 번갈아 와서 그런가...

    2025.10.02 21:34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하늘의 인간, 대지의 인간
    하늘의 인간, 대지의 인간

    자신의 나라에서 우리는 자주 난민이었다자신의 나라에서 우리는 자주 불법체류자였다자신의 나라에서 우리는 자주 보트피플이었다젊었을 때 그것은 젊은 날의고독한 낭만적 비애인 줄 알았다우리의 노동이 부족해서인 줄 알았다애국심이 모자라서인 줄 알았다불우한 민족의 슬픔인 줄 알았다하지만 피땀을 쏟아내도 우리는 언제까지나정상 국민이 될 수 없었다우리의 배경으로는 정규 시민이 될 수 없었다우리의 신분은 종종 계약 해지된 상태였다선거에서 정의가 승리하고 만세를 부르고노동자는 철탑에 올랐다선거에서 국민이 승리하고 카퍼레이드를 하고노동자는 송전탑에 올랐다선거에서 민주주의가 승리하고 정권 교체를 하고노동자는 굴뚝에 올랐다그러나 나쁘지 않다우리를 받아들였다면 우리 모두 국토에 길이 들었을 것이다우리는 대지의 인간이길 원한다 -시 ‘대지의 인간’-철탑 농성 노동자들에게, 백무산 시집 <폐허를 인양하다&g...

    2025.09.04 22:0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서정시를 쓰십니까?
    서정시를 쓰십니까?

    서정시를 쓰십니까?아니요 벼락을 씁니다벼락 맞을 짓이라는 말을 들어봤나요?벼락 맞을 짓을 하는 인간들에 대해서벼락에 고하는 글을 씁니다벼락에 고하는 글화평한 서정시를 쓰고 싶습니다위선과 비열, 몰염치와 야비, 교활하기까지 한그 가면들을 순간의 빛 속에 가두고때리는서정시를 쓰십니까?아니요 ‘서정시’를 씁니다벼락같은-시 ‘서정시를 쓰십니까?’, 장석남 시집 <내가 사랑한 거짓말>꽃 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그림쟁이의 연설에 대한 경악이나의 가슴속에서 다투고 있다.그러나 바로 이 두 번째 것만이나를 책상으로 몬다.-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베르톨트 브레히트간만에 호흡이 편해지는 기온이다. 폭염과 폭우에 시달리며 바짝 마르고 흠뻑 젖기를 반복하던 작물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연스럽다. 늦은 밤 귀를 기울이면 텃밭 뒤에 있는 둔덕에서 풀벌레 소리도 들린다. 수국과 장다리꽃과 곤드레...

    2025.08.07 20:51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아버지의 시간, 아들의 시간
    아버지의 시간, 아들의 시간

    무논에다 나무를 심은 건 올봄의 일이다벼가 자라야 할 논에 나무를 심다니, 아버지가 아시면 크게 혼이 날 일이다수백 년 도작(稻作)한 논에 나무를 심으면서도 아버지와 한마디 의논 없었던 건 분명 잘못한 일이다하지만 아버지도 장남인 내게 일언반구 없이 여길 훌쩍 떠나지 않으셨던가풀어헤친 가슴을 헤집던 아버지 손가락의 감촉을 새긴 논은이제 사라지겠지만 남풍에 족보처럼 좍 펼쳐지던물비린내나는 초록의 페이지 덮고올봄엔 두어 마지기 논에 백일홍을 심었다백일홍 꽃이 피면한여름 내내 붉은 그늘이 내 얼굴을 덮으리백날의 불빛 꺼지고 어둠 찾아오면 사방 무논으로 둘러싸인 들판 한가운데나는 북카페를 낼 것이다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북카페를 열 것이다천 개의 바람이 졸음 참으며 흰 페이지를 넘기고 적막이 어깨로 문 밀고 들어와 좌정하면고요는 이마를 빛내며 노을빛으로 저물어갈 것이다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활자 앞에 쌀가마니처럼 무겁게 앉아아버...

    2025.07.10 21:13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씨알의 힘, 엉덩이의 힘
    씨알의 힘, 엉덩이의 힘

    땅이 되고 싶었다 하늘은 제 앉을 자리 가장 낮은 데로 골랐다사람을 그리워하는 일이 큰 공부, 부지런히 익혔다읽고 쓰고 읽고 쓰고, 온몸이 귀가 되었다 황송했다별빛을 듣고 빗방울을 듣고 땅강아지를 들었다어미도 되었다가 새끼도 되었다가 배고픈 그림자들 품었다기다리다 끌어안고 기다리다 끌어안고, 온몸 엉덩이가 되었다배운 대로 들은 대로 삶도 죽음도 한자리에서 둥그레졌다아무것도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이 천명금 간 시멘트벽에 기대어 한해 내내 슬픔의 집을 키웠다펑퍼짐한 신이 내려와 산다 씨앗이 된다 -시 ‘청둥호박의 까닭’, 김수우 시집 <뿌리주의자>올해도 여러 종류의 호박이 자라고 있다. 큰 호박잎이 다른 작물을 덮어버리기 일쑤여서 욕심을 줄이려는데 맘대로 안 된다. 찌개에 넣거나 전 지져 먹기도 좋은 애호박은 기본이고, 둥글게 열매가 달리는 조선호박도 세 개 정도 심는데, 늦봄쯤엔 두엄더미에서...

    2025.06.12 20:27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전태일이 전태일에게
    전태일이 전태일에게

    겨울을 건너지 않고서야 무슨 꽃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당신은 내 겨울의 추위와도 같은 존재였지요나는 당신의 추위 안에서 덜덜 떨며한 번쯤 얼어붙은 시간을 반드시 건너와서야이렇게 싹을 틔우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이겠지요당신의 추위 안에서 나는 안으로 안으로만 울면서눈물 꽁꽁 얼려 꽃의 형상을 꿈꾸었습니다내가 여름을 기다려 꽃 피우는 까닭을 당신은 아시겠지요당신의 추위를 혼신으로 견디며 건너지 않고서야어찌 한여름 이 높은 산정에서 꽃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당신의 추위는 내 여름날의 꽃으로 핀 사랑의 종말입니다 -시 ‘두메양귀비’, 안상학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 내일>“저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쌍문동 208번지 2통 5반에 거주하는 스물두 살 된 청년입니다. (중략) 우리들의 현실에 적당하게 만든 것이 바로 법입니다. 잘 맞지 않을 때에는 맞게 입히려고 노력을 하여야 옳은 것으로 생각합니다.”윗글은...

    2025.05.15 20:14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장화와 왕관
    장화와 왕관

    폭설에 세상이 갇히면토방에 장화 한 쪽 뒤집어 세워놓고그 신발 바닥 뒤축에 모이를 올려놓았습니다.마당에 뿌려놓지 그래요. 새 머리마냥 갸웃거리면쉿! 조용히 창호지 문구멍으로 내다보라 했습니다.저것 봐라. 힘 있는 새가 혼자 다 먹으려고장화에 올라타지. 그럼 어찌 되겄냐? 장화가 넘어지면서모이가 마당에 흩뿌려지지. 그러면 병아리도 먹고굴뚝새도 먹고 참새도 먹고 까치도 먹는 거지.처음부터 흩뿌려놓으면 되잖아요. 그건 다르지.크고 힘센 놈은 작은 새들 앞에서저렇게 굴러떨어져 망신 좀 당해봐야 해.혼자만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걸 깨우쳐줘야지.새대가리라서 번번이 까먹지만, 참새는 짹짹지빠귀는 뽁뽁, 날개짓으로 가슴 치며 웃어봐야지.장화 속에다 모이 한 줌 넣어놓으면, 왕관이라도 쓴 양몸통을 통째로 처박고서는 마루 밑을 기어다니는 꼴이야뉴스 첫머리에서 늘 보지만 말이다. 아버지는넘어진 장화를 가지런히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2025.04.17 20:1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초인(超人)과 비인(非人)
    초인(超人)과 비인(非人)

    주저앉는다말뚝에 매인 염소처럼 도망치지 않는 돌계단은주저앉기에 좋지무엇을 잃어버릴 때마다염소의 등짝 같은 돌계단에 앉아 생각한다내려가는 중인지 올라가는 중인지귀를 세워 듣는다저 높은 곳에서 굴러 내려오는 불안한 숨소리저 낮은 곳에서 걸어 올라오는 고단한 발소리그사이돌계단은 천천히 식어가고곧어떤 결심이 근육을 팽팽하게 한다돌계단이 구부리고 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서면나는 그 엉덩이를 때리며 말한다가자고까마득한 계단 저 높은 곳으로 아니면 저 낮은 곳으로나를 태우고 가라고결심을 경멸하면서돌계단의 목덜미를 붙잡은 두 손은 놓지도 못하면서- 시, ‘염소 계단’, 유병록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대한민국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염소 같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늘 상상을 뛰어넘는 몰상식과 무례함과 불공정을 일삼는 비인들에 맞서는 데에는 초인의 극기가 필...

    2025.03.20 21:37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빛, 부서진 밤을 비추는
    빛, 부서진 밤을 비추는

    장벽 속에 몰아넣고 총알을 퍼붓는다길이 사십, 폭 팔 킬로미터의 땅에 가두고로켓과 미사일과 포탄을 밤낮으로 쏟아붓는다하마스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하마스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차라리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아우슈비츠의 자식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살해한다일곱살, 다섯살, 세살, 두살, 한살 …아이들 다음에는 노인과 여자들이 피투성이로 누워 있다하마스는 어디에 있는가!이들만 유일하게 살아서 서서히 죽는 방식으로 또 죽인다아우슈비츠보다 더 당당하게 더 공개적으로아우슈비츠가 아우슈비츠를 만든다지중해와 분리벽 사이 이백만 주민들에게 남쪽으로 사라지라고 한다남쪽도 막히고 병원도 학교도 유치원도 모스크도 무너져 내린다전기도 연료도 식수도 빵도 끊겨버린 암흑천지시체 위에 시체가 쌓이는 거대한 콘크리트 피라미드멀리서...

    2025.02.2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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