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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장화와 왕관
    장화와 왕관

    폭설에 세상이 갇히면토방에 장화 한 쪽 뒤집어 세워놓고그 신발 바닥 뒤축에 모이를 올려놓았습니다.마당에 뿌려놓지 그래요. 새 머리마냥 갸웃거리면쉿! 조용히 창호지 문구멍으로 내다보라 했습니다.저것 봐라. 힘 있는 새가 혼자 다 먹으려고장화에 올라타지. 그럼 어찌 되겄냐? 장화가 넘어지면서모이가 마당에 흩뿌려지지. 그러면 병아리도 먹고굴뚝새도 먹고 참새도 먹고 까치도 먹는 거지.처음부터 흩뿌려놓으면 되잖아요. 그건 다르지.크고 힘센 놈은 작은 새들 앞에서저렇게 굴러떨어져 망신 좀 당해봐야 해.혼자만 먹어서는 안 된다는 걸 깨우쳐줘야지.새대가리라서 번번이 까먹지만, 참새는 짹짹지빠귀는 뽁뽁, 날개짓으로 가슴 치며 웃어봐야지.장화 속에다 모이 한 줌 넣어놓으면, 왕관이라도 쓴 양몸통을 통째로 처박고서는 마루 밑을 기어다니는 꼴이야뉴스 첫머리에서 늘 보지만 말이다. 아버지는넘어진 장화를 가지런히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2025.04.17 20:1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초인(超人)과 비인(非人)
    초인(超人)과 비인(非人)

    주저앉는다말뚝에 매인 염소처럼 도망치지 않는 돌계단은주저앉기에 좋지무엇을 잃어버릴 때마다염소의 등짝 같은 돌계단에 앉아 생각한다내려가는 중인지 올라가는 중인지귀를 세워 듣는다저 높은 곳에서 굴러 내려오는 불안한 숨소리저 낮은 곳에서 걸어 올라오는 고단한 발소리그사이돌계단은 천천히 식어가고곧어떤 결심이 근육을 팽팽하게 한다돌계단이 구부리고 있던 무릎을 펴고 일어서면나는 그 엉덩이를 때리며 말한다가자고까마득한 계단 저 높은 곳으로 아니면 저 낮은 곳으로나를 태우고 가라고결심을 경멸하면서돌계단의 목덜미를 붙잡은 두 손은 놓지도 못하면서- 시, ‘염소 계단’, 유병록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대한민국 시민으로 산다는 것은 염소 같은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늘 상상을 뛰어넘는 몰상식과 무례함과 불공정을 일삼는 비인들에 맞서는 데에는 초인의 극기가 필...

    2025.03.20 21:37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빛, 부서진 밤을 비추는
    빛, 부서진 밤을 비추는

    장벽 속에 몰아넣고 총알을 퍼붓는다길이 사십, 폭 팔 킬로미터의 땅에 가두고로켓과 미사일과 포탄을 밤낮으로 쏟아붓는다하마스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하마스 옆에 있었다는 이유로차라리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아우슈비츠의 자식들이 팔레스타인 땅에 무차별 폭격을 가한다팔레스타인 땅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살해한다일곱살, 다섯살, 세살, 두살, 한살 …아이들 다음에는 노인과 여자들이 피투성이로 누워 있다하마스는 어디에 있는가!이들만 유일하게 살아서 서서히 죽는 방식으로 또 죽인다아우슈비츠보다 더 당당하게 더 공개적으로아우슈비츠가 아우슈비츠를 만든다지중해와 분리벽 사이 이백만 주민들에게 남쪽으로 사라지라고 한다남쪽도 막히고 병원도 학교도 유치원도 모스크도 무너져 내린다전기도 연료도 식수도 빵도 끊겨버린 암흑천지시체 위에 시체가 쌓이는 거대한 콘크리트 피라미드멀리서...

    2025.02.20 20:5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이날 평상 봄이 안 온 적이 없어
    이날 평상 봄이 안 온 적이 없어

    쓰러진 한마리 개 옆에 주저앉아 떨며 죽음의 과속을 멈추려는 사람오염물 뒤집어쓴 흙과 죽어가는 벌레와 풀, 잘린 나무의 신음을 듣는 사람저는 그를 아버지라 부르겠습니다먹고 먹히는 계산법을 넘어 자연의 경이에 무릎을 꿇는 사람자비와 분노가 한통속인 사람서로 밥이 되어주기를 바라 마지않는 사람저는 그를 형제이자 스승으로 받들겠습니다절망조차 사치임을 아는 사람탄식 속에서도 벌거벗은 인간의 영혼에 호소하는 것이결코 헛되지 않음을 믿는 사람아흔아홉의 낙담 속에서도 한줄의 희망을 꿰는 사람죽어가는 나무에게 물을 주는 사람저는 그를 친구이자 동지라 믿겠습니다폭력과 탐욕으로 얼룩진 인류 역사의 나쁜 책들을 태우고절멸을 향해 가는 마지막 페이지를 고쳐 쓰는 당신이 촛불입니다스스로를 태워 자기를 갱신하는 대지처럼폭염과 산불과 가뭄, 광폭한 바람과 비,물과 불조차 치우친 압도적인 비대칭 속에서 세계가 피 흘릴 때대지에...

    2025.01.23 21:2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굉장하고 신비한 불꽃
    굉장하고 신비한 불꽃

    계단을 허겁지겁 뛰어내려왔는데발목을 삐끗하지 않았다오늘은 이런 것이 신기하다불행이 어디 쉬운 줄 아니버스는 제시간에 도착했지만또 늦은 건 나다하필 그때 크래커와 비스킷의 차이를 검색하느라두 번의 여름을 흘려보냈다사실은 비 오는 날만 골라 방류했다다 들킬 거면서 정거장의 마음 같은 건 왜 궁금한지지척과 기척은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장작을 태우면 장작이 탄다는 사실이 신기해서오래 불을 바라보던 저녁이 있다그 불이 장작만 태웠더라면 좋았을걸바람이 불을 돕지 않았더라면 좋았을걸솥이 끓고솥이 끓고세상 모든 펄펄의 리듬 앞에서나는 자꾸 버스를 놓치는 사람이 된다신비로워, 딱따구리의 부리쌀을 세는 단위가 하필 ‘톨’인 이유잔물결이라는 말솥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모른다다만 신기를 신비로 바꿔 말하는 연습을 하며 솥을 지킨다떠나지 않는 사람이 된다는 것내겐 그것이 중요하다...

    2024.12.26 21:25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엄마는 얼마인가
    엄마는 얼마인가

    책을 보다가 엄마를 얼마로잘못 읽었다얼마세요?엄마가 얼마인지알 수 없었는데,책 속의 모든 얼마를 엄마로읽고 싶어졌는데눈이 침침하고 뿌예져서안 되었다엄마세요? 불러도 희미한 잠결,대답이 없을 것이다아픈 엄마를 얼마로계산한 적이 있었다얼마를 마른 엄마로 외롭게,계산한 적도 있었다밤 병동에서엄마를 얼마를,엄마는 얼마인지를알아낸 적이 없었다눈을 감고서,답이 안 나오는 계산을나는 열심히 하면엄마는 옛날처럼 머리를쓰다듬어줄 것이다엄마는 진짜 얼마세요?매일 밤 나는 틀리고틀려도,엄마는 내 흰머리를쓰다듬어줄 것이다-시, ‘계산’, 이영광 시집 <살 것만 같던 마음>이틀 사이에 겨울이 왔다. 추위를 대비해 부직포를 덮어놓은 마늘밭과 무밭도 하얗게 눈이불을 덮고 있다. 몇 포기 남은 배추와 쪽파와 갓배추만 희푸르고 희붉은 빛. 엊그제는 눈 오기 전에 쪽...

    2024.11.28 21:4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물의 말, 공기의 말
    물의 말, 공기의 말

    바닷물은 차고 볕은 한없이 따가운 칠월 초순 첫 멍게 작업이었다휘이휘이 숨 트며 방파제 돌아 나오던 춘자 형님이 그만 정신을 놓았다후불 형님과 돌돌이 형님이 둥둥 뜬 몸 끌고 와물옷 물고 찢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119, 119, 사람 간다. 119 전화해라순식간에 모여든 해녀들이 둥그렇게 에워싸고는 발을 동동 굴렀다백지장처럼 하얗게 돌아가는 목숨을 붙들겠다고 울부짖었다살아래이살 거래이가믄 안 된데이살아야 한데이춘자야 인나거라, 인나라, 인나라숨을 놓는 동료에게 주문을 걸던 고래들이 생각났다주둥이로 힘껏 물 위로 차올려 몇번이고 분기공 띄우려 애쓰던 참돌고래들가라앉는 삶을 떠받치며 푸른 바다 검게 울던 물의 말구급차가 올 때까지 울며불며 심장 두드리던 해녀들이춘자 형님 숨 하나 뱉자 가슴 쓸어내리며 주저앉았다물안경 자국 깊은 얼굴에서 바닷물이 눈물처럼 흘렀다됐다, 인자 됐다-시 ‘...

    2024.10.31 21:31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정뜨르 비행장과 알뜨르 비행장
    정뜨르 비행장과 알뜨르 비행장

    하루에도 수백의 시조새들이날카로운 발톱으로 바닥을 할퀴며 차오르고찢어지는 굉음으로 바닥 짓누르며 내려앉는다차오르고 내려앉을 때마다뼈 무너지는 소리 들린다빠직 빠직 빠지지지직빠직 빠직 빠지지지직시커먼 아스팔트 활주로 밑바닥반백년 전까닭도 모르게 생매장되면서 한 번 죽고땅이 파헤쳐지면서 이래저래 헤갈라져 두 번 죽고활주로가 뒤덮이면서 세 번 죽고그 위를 공룡의 시조새가발톱으로 할퀴고 지날 때마다 다시 죽고그때마다 산산이 부서지는 뼈소리 들린다빠직 빠직 빠지지지직빠직 빠직 빠지지지직정뜨르 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 변하고하루에도 수만의 인파가 시조새를 타고 내리는 지금‘저 시커먼 활주로 밑에 수백의 억울한 주검이 있다!’‘저 주검을 이제는 살려내야 한다!’라고외치는 사람 그 어디에도 없는데샛노랗게 질려 파르르 떨고 있는 유채꽃 사월활주로 밑 어둠에 갇혀몸 뒤척일 때마다 들려오는 뼈들의 아우성이 ...

    2024.10.03 20:3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빵과 장미의 유통기한은 영원
    빵과 장미의 유통기한은 영원

    미래가 없는 사람처럼 살고 미래가 있는 사람처럼 죽고 있습니다오늘도 죽고 있습니다 매일 죽고 있습니다떨어져 죽고 끼여 죽고 맞아 죽고 부딪혀 죽고 깔려 죽고 붕괴되어 죽고 있습니다이 시각에도 땀 흘리다 죽고 피 흘리며 죽고 있습니다미래?죽음을 갈아 넣는 세계와 헛된 죽음의 죽음을 멈추지 않는 이곳에 미래가 있습니까알버틴장미 사향장미 다마스크장미 백장미 캐비지로즈 아일랜드의불꽃 아도니스 레이딩리딩 스노우퀸 붉은 글자의 날 튜터장미 노수부 바스의 아내 토마스 베케트 에밀리 브론테 티 로즈 ……장미들은오늘도 제 몫의 이름을 달고 피어오르는데이름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이름이 없었던 사람들처럼 죽고 있습니다오늘도 죽고 있습니다 매일 죽고 있습니다-시 ‘노동의 미래’, 안현미 시집 <미래의 하양>김장배추와 무와 갓배추를 심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저 하얗게 타버린 고추를 달고 있는 고춧대를 어찌할까. 가지가 ...

    2024.09.05 21:02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어둠 속에서 실패가 빛날 때
    어둠 속에서 실패가 빛날 때

    어둠 속에서 새벽이 오는 것을 보았다어둠이 어떻게 물러나는가를 찬찬히 보았다유리창이 내 얼굴을 꽉 붙들고 있었다내 눈에 비치는 내 눈세숫대야에 담그고 있는 것처럼어둠 속에 얼굴을 담그고 있었다어둠은 꼼짝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더니서서히 얼굴을 풀어 놓아 주었다돌아서서 검은 얼굴을 씻는다묻어나지 않는 어둠, 손바닥으로 훑으니산새 울음 하나 따라 나오고아무리 뚫어져라 보고 있어도 훨훨그가 물러나는 처음을 볼 수는 없었다 -시,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 임혜주 시집 <어둠은 어떻게 새벽이 되는가>덥다. 해마다 기록을 경신하니 올해가 우리 생애 가장 시원한 여름이겠다. 이상한 일이 늘 벌어진다. 모가 한창 기세 좋게 자라야 하는데 뽑아도 뽑아도 논에선 풀이 사라지지 않는다. 평생 벼농사를 지어온 농부도 모르는 풀이 벼 옆에 자란다. 나도 옥수수 때문에 애를 먹었다. 잎이 자랄 때는 폭...

    2024.08.08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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