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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나는 고요하게 몸을 부풀리는 중일 초 일 초 아주 조금씩 늘어나는 중내일 보면 모르겠지 일년 후에도 모를 거야멀리서 돌아보면 나는 커져 있을 예정스멀스멀 징그럽게한이나 화 나뭇가지 이것저것 모아서너를 지우기 위해 말이지약한 자라 참고 있는 거 아니냐 하면 맞아 난 강해져도 티내지 않는식물성 힘을 갖게 될 거야크게 자라 신령하게 될 거야모두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게 될 거야기도하는 손들 점점 늘어술과 떡을 바치게 될 거야어느 날 벼락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알 바 있니 늘어나는 중인데 부푸는 중인데세상의 이치를 거슬러 시간을 뛰어넘어고요하게 날뛰는 중인데물을 머금고 공기와 스킨십하며 - 시 ‘자연-복수’, 권민경 시집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비 갠 봄날 아침은 눈부시다. 온갖 열망이 터져나오는 듯 싱싱하다. 물방울 맺힌 풀 하나도 풀에 얹힌 물방울도 저마다 빛나며 서로를 비춘다... -
오래 들여다본다는 것
바이칼호수 푸른 눈가에서 태어났다 태극 무늬 두르고 먼 하늘 날아왔다 시베리아 몽고 지나 만리 길날갯짓 소리 들으며 서로의 울음소리 들으며 날면서 합류하고 날수록 무리가 커졌다맨몸으로 왔다 공중에 매달려 왔다 작아서 모였다 추울수록 날았다떼 지어 춤추고 떼로 울면서, 가창오리는 야간조 노을빛 이고 밥 벌러 간다어두워야 난다 배고파서 오른다원이 춤춘다 공이 날아가고 물폭탄이 쏟아진다날개 파닥이는 자리마다 탱크 소리, 서로 상하지 않는다부딪치지 않는다 춤꾼이자 소리꾼 가창오리는 노래가 춤이고 울음이 노래, 어두울 무렵 기지개를 켠다 외따로들 앉아 있던 가창오리들이 물 박차고 치솟는다 동시에 날아오른다 곤두박질치고 흩어졌다 다시 대열을 이룬다시시각각 하늘에 새겨지는 검붉은 띠펼쳤다 접고 갔다 돌아온다 산이 울렁거린다 강이 흔들린다,기나긴 밤샘 작업이 끝나고 먼동이 트면 다시 솟구칠 게다낱낱이 ... -
너, 먼 데서 이기고 올 사람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보면 눈부셔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시 ‘봄’, 이성부 시집 <우리들의 양식>봄이다. 꽃다지도 부추도 파도 시금치도 퍼렇게 올라오는 봄이다. 봄바람과 겨울 끝바람이 기싸움을 벌이긴 해도 봄이다. 간밤에 얼었는지, 이파리 가장자리마다 눈꽃 같은 흔적이 있긴 해도, 봄이 이길 것이란 믿음만은 흔들리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 -
슬픔이 한 숟가락은 줄어들기를
아프리카 기니산 조기 눈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뒤집히고 뒤집힌 배가 검게 그을릴 때까지기름이 연기가 될 때까지밤을 벗어난 아침은 상을 차린다차례와 제사는 하나의 형식페루산 오징어와 칠레산 포도기니산 조기와 미국산 오렌지국산 도라지도 올라간다허겁지겁 식사를 하는 검은 눈에 쳐진 그물들‘내년이면 이 집도 슬픔이 한숟가락은 줄어들 겁니다’뒷밥을 문밖에 내놓는다지나가던 검은 눈의 방글라데시인 칸씨도터키인 쇤메즈씨도중국인 리우씨도 탈북인 김씨도형태를 알 수 없이 일그러진 무연고자씨도허겁지겁 음복하는 문 앞한술 뜨는 수십개의 손들젓가락이 놓친 공기들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조기의 눈들처럼텅 빈 입이 둥둥 떠다니는 씨들생이 일찌감치 거덜 난 씨들다시 발이 없이 멀어지는 씨들칼끝이 바깥으로 향하는 ... -
사람값과 목,숨,값,
‘집값’이 아닌 ‘집’이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학벌’이 아닌 ‘상식’이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드높은 ‘명예’보다 드러나지 않는 ‘평범’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소수의 풍요’보다 ‘다수의 행복’을 우선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독점과 지배’보다 ‘공유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사람’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 앞에 경배하는 인간종이 되게 하소서 -시 ‘사람값’, 송경동 시집 <내일 다시 쓰겠습니다>며칠 동안 내린 눈으로 세상이 하얗다. 산도 논도 밭도 비닐하우스도 지붕도 모두 새하얗다. 평등하게 희다. 눈이 오면 꼼짝없이 산골에 갇힌다. 새들과 산고양이는 뭘 먹고 이 한파를 견디나. 어젯밤 이 언덕길까지 올라와 스티로폼 박스를 눈 위에 던지고 간 택배기사는 오늘도 빙판길을 오르내리고 있겠지. 거창 산골의 그 꼬불꼬불한 길도 얼어 있겠지.작년 마지막 날은 경남 ... -
나란히
새벽의 오한은 어깨로 오고 인후와 편도에 농이 오고 눈두덩이가 부어오고 영은 내 목에 마른 손수건을 매어주고 옆에 눕고 다시 일어나 더운물을 가져와 머리맡에 두고 눕고 이상하게 자신도 목이 아파오는 것 같다고 말하고 아픈 와중에도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웃고 웃다 보면 새벽이 가고 오한이 가고 흘린 땀도 날아갔던 것인데 영은 목이 점점 더 잠기는 것 같다고 하고 아아 목소리를 내어보고 이번에는 왼쪽 가슴께까지 따끔거린다 하고 언제 한번 경주에 다시 가보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몇 해 전의 일을 영에게 묻는 대신 내가 목에 매어져 있던 손수건을 풀어 찬물에 헹구어 영의 이마에 올려두면 다시 아침이 오고 볕이 들고 그제야 손끝을 맞대고 눈의 힘도 조금 풀고 마음의 핏빛 하나 나란히 내려두고- 시 ‘나란히’, 박준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엊그제는 면 소재지에 있는 우체국에 다녀오다, 달포 전 윗니를 뽑고 제법 돈이 든다는 이 시술을 앞... -
꽉 껴안는다
당신은 머리를 적시며물의 온도가 어떤지 묻는다삼단처럼 탐스러운 머리카락들풍만하고 부드러운 거품들당신의 긴 손가락들이 한꺼번에머리카락 사이로 밀려온다두피를 문지르며 당신은밤이 오면 용접공이 된다고 속삭인다나는 눈을 감고 일렁이는 푸른 불꽃을 더듬는다 낮이나 밤이나 당신은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군요당신 손등의 어렴풋한 흉터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담한 두상을 당신의 두툼한 손바닥이 꽉 껴안는다뜨거운 숨결이 훅 불어오고나는 푸른 불꽃 속으로 들어간다- 시, ‘머리를 감는 동안’ 김선향 시집 <F등급영화>어제는 청년들 몇이 집에 다녀갔다. 충북 옥천과 지리산 자락에 산다는 감자, 팔매, 아라 등과 강아지까지 여섯 명이 놀러와서 너댓 시간 동네를 젊게 물들여 놓았다. 농촌에서 오래 살아온 어... -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여기 주민이오. 닭을 길렀소. 하늘에 별을 뿌리고 땅바닥에 등 깔고 누워 세었소. 하나도 빠뜨림 없이 세었소.해가 떨어지더이다. 문에 뚫린 구멍으로 한 다발의 석양빛이 들어와 내 가슴에 꽂혔소. 빛이 나를 죽였소. 나는 빛에 살해당한 자요. 언어가 남쪽으로 기울더니, 나는 죽어 있더이다. 나는 언어로 살해당한 자요.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나는 여기 주민이오. 내 발로 길을 새겼소: 개미 떼처럼 오가면서, 내 발로 길을 다졌소. 쇠와 밀알을 내 턱으로 물어 날랐다오. 밤과 낮도 내 턱으로 날았다오.내게 며칠은 남아 있소. 내 몸에 둘려 있는 몇 가닥의 밧줄을 큰 쥐처럼 갉으려오.돌아라, 내 위에서 맴도는 매야. 언덕 위를 맴돌아라. 나는 밧줄을 갉아 스스로 놓여날 테니.좀생이별이 이울었소. 아침의 숨결이 내 얼굴에 끼치오. 내가 씨 뿌린 밀은 어디 있소? 내가 바람에 묶어둔 머리끈은 어디 있소?... -
소풍과 휴가
꼭대기로 소풍 가요우리가 딛고 걷는 바닥은 아무 데도 없거든요저기 교묘하게 죽어 있는 바닥들이 보이잖아요우리의 바닥들은 바닥을 치고 위로 더 올라가죠이제 혁명의 노래도 위로 올려 보내요이제 투쟁의 기다림도 위로 올려 보내요이제 죽음의 상징 따위도 위로 올려 보내요정교하지 못한 거짓말들도 위로 올려 보내요위로 위로 올라가다보면 그곳에어처구니없는 이유들이 기다리고 있겠지요그 위에 아마도 펄럭이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목소리들이 붙잡고 있는 깃발들이 있을 거예요그 속에 바닥에서 올라온 것들이 숨어 있을 거예요올라간 것들은 이제 내려오지 않을지도 몰라요울음을 위로하는 시간만큼 견딘다면 또 모를까의문투성이 위로가 필요할 때아니면 바닥의 가장자리가 닳을 즈음 내려올지도그러니 우리 이제 바닥을 치고 꼭대기로 소풍 가요- 시, ‘소풍’, 유현아... -
호미의 길, 생명의 길
올여름엔 “그 집 고추는 좀 어뗘?” 질문이 잦다. 표정들로 보아 올해 고추농사가 영 시원찮은 모양이다. “뭐 그냥 그럭저럭….” 답한다. 생각보다는 잘됐다는 말은 생략한다. 벌레약도 뿌리지 않고 제초제로 풀을 잡지도 않았으며, 고추에 달라붙은 노린재는 툴툴 털어냈으니까. 비 한 방울 뿌리지 않는 땡볕 더위가 보름, 장대비가 쏟아진 날들이 보름씩 번갈아 찾아왔으니까. 악조건에서 이렇게나마 자라준 고추가 대견하고 기적 같다. 아무리 이상기후라지만 지금처럼만 되길 기원하는 심정이기도 하다.참외처럼 노릿한 토종오이 장아찌 몇 개 들고, 아랫집 언니집에 마실 가니 온 가족이 수돗가에서 고추를 씻고 있다. 큰 다라이 두 개에서 번갈아 씻겨지는 고추를 건지다 보니, 물속 고추 빛깔이 환상적이다. “이 색 좀 봐. 고추는 정말 이쁜 선홍색이고, 꼭지는 진짜 이쁜 녹색이다.” 나는 철없이 색을 찬양하고, 언니는 “올핸 고추 따는 재미가 없네. 고추가 죄다 떨어져서 줍느라…” 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