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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작은 것이 아름답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이웃들, 벗들, 새와 달과 양철지붕에 내리는 빗소리와 별과 나무 그리고 텃밭의 벌레와 채소들과 찾아오는 손님들과 지고 뜨는 해와 꽃등처럼 내건 곶감과 마당의 꽃들과 아침 고요한 차 한 잔과 처마 끝 풍경소리와 계절마다의 비바람과 함박눈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네또한 깊은 밤 자꾸 방안으로 기어 들어오는 개울물 소리와 푸른 하늘과 따뜻한 장작더미와 삶의 뜨락을 쓸어 주는 인연의 빗자루와 혼자 먹는 밥상의 쓸쓸함과 그 밥상 위의 장식이 되어 준 생명들과 내 안의 웃음과 미움과 분노와 눈물과 슬픔과 사랑들께 깊이 허리 숙이네 가엾은 내 몸과 영혼이여 고마워요 거듭 감사드리네- 시 ‘인사말’, 박남준 시집 <어린 왕자로부터 새드 무비>흙을 깊게 갈아엎지 않아도 되는 농사법을 실험 중이다. 산마늘이나 아스파라거스 같은 귀족 식물은 물론이려니와 꽃나물이라 불리는 삼잎국화나 울릉도취라 불리는 부지깽이와 곰취 등 나물이 주종이다. 그 애들은 아무리 잎을 잘라먹어...

    2024.07.11 20:53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땀방울에 섞인 눈물 닦고
    땀방울에 섞인 눈물 닦고

    그대가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능소화보다 더 진한 노을이 그대 뒤에 있었다그대가 기진맥진해 있을 때감빛 노을에 어둠의 먹물이 흘러들고 있었다그대의 한쪽 무릎이 주저앉을 때노을은 한쪽 가슴이 까맣게 타고 있었다포기하지 마라재가 된 하늘 위에 사리 같은 별이 뜬다그 별이 더 많은 별을 불러올 것이다땀방울에 섞인 눈물 닦고 허리를 펴라어둠 속에 어둠만 있는 게 아니다저녁 바람도 초승달도 모두 그대 편이다-시, ‘노을’, 도종환 시집, <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 며칠째 땡볕이 이어진다. 하지가 열흘 남았는데 7월인가 싶게 뜨겁다. 상춧잎도 헐떡거리고 여린 고춧잎도 기진맥진해 보인다. 붉은 꽃 수없이 피워내던 양귀비도 시들해지고 감자잎이 눕고 마늘대도 노리끼리해졌다. 하지 무렵 땅과 이별해야 할 감자와 마늘 너머 옥수수밭만 청청하다. 사춘기 아이들처럼 날마다 다르게 커간다. 귀촌해 사는 동안 땅이 공짜...

    2024.06.13 20:49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나는 고요하게 몸을 부풀리는 중일 초 일 초 아주 조금씩 늘어나는 중내일 보면 모르겠지 일년 후에도 모를 거야멀리서 돌아보면 나는 커져 있을 예정스멀스멀 징그럽게한이나 화 나뭇가지 이것저것 모아서너를 지우기 위해 말이지약한 자라 참고 있는 거 아니냐 하면 맞아 난 강해져도 티내지 않는식물성 힘을 갖게 될 거야크게 자라 신령하게 될 거야모두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게 될 거야기도하는 손들 점점 늘어술과 떡을 바치게 될 거야어느 날 벼락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알 바 있니 늘어나는 중인데 부푸는 중인데세상의 이치를 거슬러 시간을 뛰어넘어고요하게 날뛰는 중인데물을 머금고 공기와 스킨십하며 - 시 ‘자연-복수’, 권민경 시집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비 갠 봄날 아침은 눈부시다. 온갖 열망이 터져나오는 듯 싱싱하다. 물방울 맺힌 풀 하나도 풀에 얹힌 물방울도 저마다 빛나며 서로를 비춘다...

    2024.05.16 20:46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오래 들여다본다는 것
    오래 들여다본다는 것

    바이칼호수 푸른 눈가에서 태어났다 태극 무늬 두르고 먼 하늘 날아왔다 시베리아 몽고 지나 만리 길날갯짓 소리 들으며 서로의 울음소리 들으며 날면서 합류하고 날수록 무리가 커졌다맨몸으로 왔다 공중에 매달려 왔다 작아서 모였다 추울수록 날았다떼 지어 춤추고 떼로 울면서, 가창오리는 야간조 노을빛 이고 밥 벌러 간다어두워야 난다 배고파서 오른다원이 춤춘다 공이 날아가고 물폭탄이 쏟아진다날개 파닥이는 자리마다 탱크 소리, 서로 상하지 않는다부딪치지 않는다 춤꾼이자 소리꾼 가창오리는 노래가 춤이고 울음이 노래, 어두울 무렵 기지개를 켠다 외따로들 앉아 있던 가창오리들이 물 박차고 치솟는다 동시에 날아오른다 곤두박질치고 흩어졌다 다시 대열을 이룬다시시각각 하늘에 새겨지는 검붉은 띠펼쳤다 접고 갔다 돌아온다 산이 울렁거린다 강이 흔들린다,기나긴 밤샘 작업이 끝나고 먼동이 트면 다시 솟구칠 게다낱낱이 ...

    2024.04.18 20:44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너, 먼 데서 이기고 올 사람아
    너, 먼 데서 이기고 올 사람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어디 뻘밭 구석이거나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지쳐 나자빠져 있다가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흔들어 깨우면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너를 보면 눈부셔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 보는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시 ‘봄’, 이성부 시집 <우리들의 양식>봄이다. 꽃다지도 부추도 파도 시금치도 퍼렇게 올라오는 봄이다. 봄바람과 겨울 끝바람이 기싸움을 벌이긴 해도 봄이다. 간밤에 얼었는지, 이파리 가장자리마다 눈꽃 같은 흔적이 있긴 해도, 봄이 이길 것이란 믿음만은 흔들리지 않는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

    2024.03.21 20:24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슬픔이 한 숟가락은 줄어들기를
    슬픔이 한 숟가락은 줄어들기를

    아프리카 기니산 조기 눈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뒤집히고 뒤집힌 배가 검게 그을릴 때까지기름이 연기가 될 때까지밤을 벗어난 아침은 상을 차린다차례와 제사는 하나의 형식페루산 오징어와 칠레산 포도기니산 조기와 미국산 오렌지국산 도라지도 올라간다허겁지겁 식사를 하는 검은 눈에 쳐진 그물들‘내년이면 이 집도 슬픔이 한숟가락은 줄어들 겁니다’뒷밥을 문밖에 내놓는다지나가던 검은 눈의 방글라데시인 칸씨도터키인 쇤메즈씨도중국인 리우씨도 탈북인 김씨도형태를 알 수 없이 일그러진 무연고자씨도허겁지겁 음복하는 문 앞한술 뜨는 수십개의 손들젓가락이 놓친 공기들서로 다른 국적을 가진 조기의 눈들처럼텅 빈 입이 둥둥 떠다니는 씨들생이 일찌감치 거덜 난 씨들다시 발이 없이 멀어지는 씨들칼끝이 바깥으로 향하는 ...

    2024.02.22 20:12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사람값과 목,숨,값,
    사람값과 목,숨,값,

    ‘집값’이 아닌 ‘집’이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학벌’이 아닌 ‘상식’이 소중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 드높은 ‘명예’보다 드러나지 않는 ‘평범’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소수의 풍요’보다 ‘다수의 행복’을 우선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독점과 지배’보다 ‘공유와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 되게 하소서‘사람’만이 최고라는 생각을 버리고 살아 있는 모든 것 앞에 경배하는 인간종이 되게 하소서 -시 ‘사람값’, 송경동 시집 <내일 다시 쓰겠습니다>며칠 동안 내린 눈으로 세상이 하얗다. 산도 논도 밭도 비닐하우스도 지붕도 모두 새하얗다. 평등하게 희다. 눈이 오면 꼼짝없이 산골에 갇힌다. 새들과 산고양이는 뭘 먹고 이 한파를 견디나. 어젯밤 이 언덕길까지 올라와 스티로폼 박스를 눈 위에 던지고 간 택배기사는 오늘도 빙판길을 오르내리고 있겠지. 거창 산골의 그 꼬불꼬불한 길도 얼어 있겠지.작년 마지막 날은 경남 ...

    2024.01.25 20:06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나란히
    나란히

    새벽의 오한은 어깨로 오고 인후와 편도에 농이 오고 눈두덩이가 부어오고 영은 내 목에 마른 손수건을 매어주고 옆에 눕고 다시 일어나 더운물을 가져와 머리맡에 두고 눕고 이상하게 자신도 목이 아파오는 것 같다고 말하고 아픈 와중에도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고 웃고 웃다 보면 새벽이 가고 오한이 가고 흘린 땀도 날아갔던 것인데 영은 목이 점점 더 잠기는 것 같다고 하고 아아 목소리를 내어보고 이번에는 왼쪽 가슴께까지 따끔거린다 하고 언제 한번 경주에 다시 가보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몇 해 전의 일을 영에게 묻는 대신 내가 목에 매어져 있던 손수건을 풀어 찬물에 헹구어 영의 이마에 올려두면 다시 아침이 오고 볕이 들고 그제야 손끝을 맞대고 눈의 힘도 조금 풀고 마음의 핏빛 하나 나란히 내려두고- 시 ‘나란히’, 박준 시집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엊그제는 면 소재지에 있는 우체국에 다녀오다, 달포 전 윗니를 뽑고 제법 돈이 든다는 이 시술을 앞...

    2023.12.28 22:08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꽉 껴안는다
    꽉 껴안는다

    당신은 머리를 적시며물의 온도가 어떤지 묻는다삼단처럼 탐스러운 머리카락들풍만하고 부드러운 거품들당신의 긴 손가락들이 한꺼번에머리카락 사이로 밀려온다두피를 문지르며 당신은밤이 오면 용접공이 된다고 속삭인다나는 눈을 감고 일렁이는 푸른 불꽃을 더듬는다 낮이나 밤이나 당신은아름다움을 만들어 내는군요당신 손등의 어렴풋한 흉터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담한 두상을 당신의 두툼한 손바닥이 꽉 껴안는다뜨거운 숨결이 훅 불어오고나는 푸른 불꽃 속으로 들어간다- 시, ‘머리를 감는 동안’ 김선향 시집 <F등급영화>어제는 청년들 몇이 집에 다녀갔다. 충북 옥천과 지리산 자락에 산다는 감자, 팔매, 아라 등과 강아지까지 여섯 명이 놀러와서 너댓 시간 동네를 젊게 물들여 놓았다. 농촌에서 오래 살아온 어...

    2023.11.30 21:08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나는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여기 주민이오. 닭을 길렀소. 하늘에 별을 뿌리고 땅바닥에 등 깔고 누워 세었소. 하나도 빠뜨림 없이 세었소.해가 떨어지더이다. 문에 뚫린 구멍으로 한 다발의 석양빛이 들어와 내 가슴에 꽂혔소. 빛이 나를 죽였소. 나는 빛에 살해당한 자요. 언어가 남쪽으로 기울더니, 나는 죽어 있더이다. 나는 언어로 살해당한 자요.지나가는 사람이 아니오. 나는 여기 주민이오. 내 발로 길을 새겼소: 개미 떼처럼 오가면서, 내 발로 길을 다졌소. 쇠와 밀알을 내 턱으로 물어 날랐다오. 밤과 낮도 내 턱으로 날았다오.내게 며칠은 남아 있소. 내 몸에 둘려 있는 몇 가닥의 밧줄을 큰 쥐처럼 갉으려오.돌아라, 내 위에서 맴도는 매야. 언덕 위를 맴돌아라. 나는 밧줄을 갉아 스스로 놓여날 테니.좀생이별이 이울었소. 아침의 숨결이 내 얼굴에 끼치오. 내가 씨 뿌린 밀은 어디 있소? 내가 바람에 묶어둔 머리끈은 어디 있소?...

    2023.11.02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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