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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린다
집에 그늘이 너무 크게 들어 아주 베어버린다고참죽나무 균형 살피며 가지 먼저 베어 내려오는익선이형이 아슬아슬하다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다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시, ‘흔들린다’, 함민복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줄 맞춰 심은 백일홍과 과꽃 사이 앙증맞은 채송화와 봉숭아가 피었다. 날마다 양동이로 들이붓는 것 같던 장대비에도 짓무르지도 않았다. 어쩌면 저 작은 것이 저리 온전한 모... -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내 가슴에 쿵쿵거린다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너였다가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다시 문이 닫힌다사랑하는 이여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시집 <게 눈 속의 연꽃&... -
땅의 옹호
물봉숭아 쩔어붙은 골짜기두꺼비 어정시러이 기어가는 저녁돌 틈서리 바위굴마다엔 가재가 살고가재굴 앞 돌멩이 밑엔 꾸구리가 살고쇠똥 같은 초가지붕 아래 우리들이 살았습니다가지나물에 마늘쫑다리고추장 풀어 지진 감자 먹고우리들이 살았습니다호박잎 물들어 파란 밥 먹고 살았습니다찬물구덩이 물 길어다먹고도롱골 오박골 가릅재로 밭매러 다니며우리들이 살았습니다가위로 싹둑싹둑 오려놓은할아버지 발톱 할머니 손톱밥풀 으깨 하늘에다 붙이고도랑물 소리 마당 가득 쟁여놓고우리들이 살았습니다- 송진권, 시 ‘못골 살 때’, 시집 <원근법을 배우는 시간>일어나자마자 ‘살아 있는 마트’인 텃밭으로 향한다. 청치마상추는 넓게 자리를 차지한 채 플레어스커트처럼 주름 잔뜩 잡고 있고, 적상추는 쭉 뻗은 타이트스커트를 입은 것 같다. 아삭거리는 로메인과 담배상추는 두꺼운 잎마다 푸른 ... -
저 드높고 무거운 짐
밥 차리러 가는 당신 때문에나는 살았다흙 묻은 손으로 씻어준알갱이들 때문에밥을 차리러 간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가까스로 이어가며 살 수 있었다쌀을 구하려 손발이 닳던 노동 때문에화구에 불을 넣고 연기를 쬐던주름진 노역 때문에수심이 깊은 밥주걱 때문에개수대로 쓸려가는 수챗물처럼아무것도 아닌 인생 때문에밥물이 한소끔 끓을 시간만큼도못 살다 간 인생 때문에우리는 살 수 있었다그러니들어가 밥이나 하라는 말은쉰밥만도 못한 말밥을 버리라는 말밥의 자식이 아니라는 말불내의 식구가 아니라는 말- 시, ‘밥이나 하라는 말’, 문동만 시집 <설운 일 덜 생각하고>얼었다 녹은 자국인 듯 잎이 불그스레한 고추 옆에 쇠뜨기와 쑥을 베어 덮어주었다. 잎 하나가 팔뚝만 한 소루쟁이는 한 포기만 베어도 고추 열 주는 ... -
우는 나무
홀로 취한 것도 죄가 될까 떠다니는 말들이 아문 상처까지 헤집어 스스로 빚어 올린 독에 갇혀 꽃 한송이 피운다이따금 누군가 간절하지만 갈마드는 덴 가슴꽃그늘처럼 떤다심연에서 만나기로 하고덩그러니 혼자 남을 걸 알기에어둠에 깍지를 끼고깨물어서 아플 손가락은 잘라냈다 용서라는 꽃말 덧덮으며또다시 엎드려 물줄기를 잇는다무릎을 껴안다 얼굴마저 파묻고 젖은 흙, 빈 몸뚱이를 쓰다듬는다옅은 잠귀 날 부르는 소리, 소리, 소리떨어진다잠깐만 한눈팔아도 꽃받침에 거미줄이 보이고 뒤돌아 앉으면 이끼가 낀다 밤에서 밤으로 멍 자국 숨기며 새가 난다- 이동우 시 ‘용서를 강요받을 때’, 시집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었을까>한 달... -
가문비나무 아래, 손글씨를
전에는 편지가 있었다.친구로부터 아버지로부터연인으로부터 형으로부터.우표가 붙어 있었고손으로 쓴 내 이름이 있었고가슴 설레며 봉투를 열었고혼자 읽고 싶어 옷 속에 감추고 산으로 올라가기도 했다.지금은 아파트관리비 청구서, 수도요금 고지서,백화점 카탈로그, 신용카드 명세서,구독 신청한 적 없는 잡지와 신문들.절반은 뜯지도 않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나도 손글씨 편지 보낼 곳이 없다.-시 ‘손글씨 편지’ 서홍관, 시집 <우산이 없어도 좋았다>장래 희망으로 ‘원예사’라 쓰고, 호수 옆에 나무집과 수선화까지 몇 포기 그리다, “아나, 농부가 좋것다”, 담임선생님한테 꿀밤을 맞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다. 고등학교 때는 서점을 하는 게 꿈이었다. 내가 운영할 서점 옆에 꽃집을 하겠다는 친구와 그 옆에 찻집과 빵집을 겸하겠다는 친구도 나섰다. 돈 벌 재주가 있... -
품앗이와 마을 민주주의
구복리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한천댁과 청동댁이 구복리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구년 뒤, 한천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구복리댁과 청동댁이 한천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다시 십일년 뒤, 청동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구복리댁과 한천댁이 청동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연속극 켜놓고 간간이 얘기하다 자는 게 전부라고들 했다자식새끼들 후다닥 왔다 후다닥 가는 명절 뒤 밤에도이 별스런 품앗이는 소쩍새 울음처럼 이어지곤 하는데,구복리 댁은 울 큰어매고 청동댁은 내 친구 수열이 어매고한천댁은 울 어매다-시 ‘어떤 품앗이’, 박성우,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나라가 어수선해서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우리 동네가 딱 그 축소판이다. 작은 마을이지만 명함이 꽤 많고 복잡해 이해하는 데 몇 년 걸렸다. 직위가 ‘완... -
갈수록 가난해지는 이상한 직업
농사가 안된 해는팔 게 없어 걱정이더니좀 많은 해는 다 못 팔아 걱정이다갈수록 가난해지는 이상한 직업이다농약과 화학비료 안 쓰니흙이 살아나 살맛 나는데허리 휘어져라 일할수록손마디만 굵어지는 이상한 직업이다괭이와 호미 한 자루에생존을 맡기고풀과 흙에게세금 내며 만족하는 일이다아등바등하지 않고 그저새벽녘 잠을 깨우는온갖 새소리에 귀를 씻는 일이다 -시, ‘산골농부’, 최정, 시집 <푸른 돌밭>등유 경유 식용유 밀가루 등 세상천지 모두 올랐는데 쌀값만 떨어졌다. 밥 한 공기 가격이 300원이었는데 최근엔 206원이란다. 소비자들은 체감하기 힘들겠지만 농민들은 그 차이가 크단다. 동네에서 직접 지은 쌀 사먹은 지 8년째인데, 대부분 20㎏ 한 포대에 4만원이었다. 8년 동안 그대로다. 이종관씨는 쌀을 실... -
진정한 애도는 진실뿐이다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는 이들 곁에서작은 촛불이라도 켜게 하소서이들은 창밖의 어떤 불빛도 새어 들어오지 못하는얼음장 속에 갇혀 있습니다자식을 잃고 형제와 친구와 사랑하는 이를 잃고울부짖는 이들 곁에서 함께 통곡하게 하소서차가운 돌무덤에 갇힌 자들의 체온은 영하이들은 흐르는 눈물조차 얼어붙는 찬바닥에 갇혀 있습니다산산조각난 심장 곁에서 함께 부서지게 하소서산산조각난 심장의 부스러기로라도 곁에 있게 하소서이들은 꽃도 피지 않고 새도 노래하지 않는겨울 정원을 견디고 있습니다이미 대못이 박혀 결박당한 사지에 대못만은 박지 않게 하소서비수가 박혀 마비된 심장에 더는 비수를 꽂지 않게 하소서진실은 아직 눈물조차 스며들지 않는아스팔트 밑에 묻혀 있습니다진정한 애도는 진실뿐입니다진실만이 산산조각난 심장에 대한 예의입니다- 근작시, 김해자, ... -
동치미를 담그며
한 달여 비워둔 집엉거주춤 남의 집인 양 들어서는데 마실 다녀오던아랫집 어머니가 당신 집처럼 마당으로 성큼 들어와꼬옥 안아주신다 괜찮을 거라고아파서 먼 길 다녀온 걸 어찌 아시고 걱정마라고,우덜이 다 뽑아 김치 담았다고 얼까 봐남은 무는 항아리 속에 넣었다고가리키는 손길 따라 평상을 살펴보니, 알타리 김치통 옆에 늙은 호박들 펑퍼짐하게 서로 기대어 앉아있고, 항아리 속엔 희푸른 무가 가득, 키 낮은 줄엔 무청이 나란히 매달려 있다. 삐이이 짹짹, 참새떼가 몇 번 나뭇가지 옮겨 앉는 사이, 앞집 어머니와 옆집 어머니도 기웃하더니 우리 집 마당이 금세 방앗간이 되었다. 둥근 스뎅 그릇 속 하얗고 푸른 동치미와 살얼음 든 연시와 아랫집 메주가 같이 숨 쉬는 평상, 이웃들 손길 닿은 자리마다 흥성스러운 지금은, 입동 지나 소설로 가는 길목나 이곳 떠나 다른 세상 도착할 때도지금은 잊어버린,먹고사느라 잊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