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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소풍과 휴가
    소풍과 휴가

    꼭대기로 소풍 가요우리가 딛고 걷는 바닥은 아무 데도 없거든요저기 교묘하게 죽어 있는 바닥들이 보이잖아요우리의 바닥들은 바닥을 치고 위로 더 올라가죠이제 혁명의 노래도 위로 올려 보내요이제 투쟁의 기다림도 위로 올려 보내요이제 죽음의 상징 따위도 위로 올려 보내요정교하지 못한 거짓말들도 위로 올려 보내요위로 위로 올라가다보면 그곳에어처구니없는 이유들이 기다리고 있겠지요그 위에 아마도 펄럭이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목소리들이 붙잡고 있는 깃발들이 있을 거예요그 속에 바닥에서 올라온 것들이 숨어 있을 거예요올라간 것들은 이제 내려오지 않을지도 몰라요울음을 위로하는 시간만큼 견딘다면 또 모를까의문투성이 위로가 필요할 때아니면 바닥의 가장자리가 닳을 즈음 내려올지도그러니 우리 이제 바닥을 치고 꼭대기로 소풍 가요- 시, ‘소풍’, 유현아...

    2023.10.05 20:26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호미의 길, 생명의 길
    호미의 길, 생명의 길

    올여름엔 “그 집 고추는 좀 어뗘?” 질문이 잦다. 표정들로 보아 올해 고추농사가 영 시원찮은 모양이다. “뭐 그냥 그럭저럭….” 답한다. 생각보다는 잘됐다는 말은 생략한다. 벌레약도 뿌리지 않고 제초제로 풀을 잡지도 않았으며, 고추에 달라붙은 노린재는 툴툴 털어냈으니까. 비 한 방울 뿌리지 않는 땡볕 더위가 보름, 장대비가 쏟아진 날들이 보름씩 번갈아 찾아왔으니까. 악조건에서 이렇게나마 자라준 고추가 대견하고 기적 같다. 아무리 이상기후라지만 지금처럼만 되길 기원하는 심정이기도 하다.참외처럼 노릿한 토종오이 장아찌 몇 개 들고, 아랫집 언니집에 마실 가니 온 가족이 수돗가에서 고추를 씻고 있다. 큰 다라이 두 개에서 번갈아 씻겨지는 고추를 건지다 보니, 물속 고추 빛깔이 환상적이다. “이 색 좀 봐. 고추는 정말 이쁜 선홍색이고, 꼭지는 진짜 이쁜 녹색이다.” 나는 철없이 색을 찬양하고, 언니는 “올핸 고추 따는 재미가 없네. 고추가 죄다 떨어져서 줍느라…” 울상이다....

    2023.08.31 20:35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흔들린다
    흔들린다

    집에 그늘이 너무 크게 들어 아주 베어버린다고참죽나무 균형 살피며 가지 먼저 베어 내려오는익선이형이 아슬아슬하다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흔들림의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다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고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시, ‘흔들린다’, 함민복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줄 맞춰 심은 백일홍과 과꽃 사이 앙증맞은 채송화와 봉숭아가 피었다. 날마다 양동이로 들이붓는 것 같던 장대비에도 짓무르지도 않았다. 어쩌면 저 작은 것이 저리 온전한 모...

    2023.08.03 20:11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내 가슴에 쿵쿵거린다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너였다가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다시 문이 닫힌다사랑하는 이여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시집 <게 눈 속의 연꽃&...

    2023.07.07 03:0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땅의 옹호
    땅의 옹호

    물봉숭아 쩔어붙은 골짜기두꺼비 어정시러이 기어가는 저녁돌 틈서리 바위굴마다엔 가재가 살고가재굴 앞 돌멩이 밑엔 꾸구리가 살고쇠똥 같은 초가지붕 아래 우리들이 살았습니다가지나물에 마늘쫑다리고추장 풀어 지진 감자 먹고우리들이 살았습니다호박잎 물들어 파란 밥 먹고 살았습니다찬물구덩이 물 길어다먹고도롱골 오박골 가릅재로 밭매러 다니며우리들이 살았습니다가위로 싹둑싹둑 오려놓은할아버지 발톱 할머니 손톱밥풀 으깨 하늘에다 붙이고도랑물 소리 마당 가득 쟁여놓고우리들이 살았습니다- 송진권, 시 ‘못골 살 때’, 시집 <원근법을 배우는 시간>일어나자마자 ‘살아 있는 마트’인 텃밭으로 향한다. 청치마상추는 넓게 자리를 차지한 채 플레어스커트처럼 주름 잔뜩 잡고 있고, 적상추는 쭉 뻗은 타이트스커트를 입은 것 같다. 아삭거리는 로메인과 담배상추는 두꺼운 잎마다 푸른 ...

    2023.06.09 03:0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저 드높고 무거운 짐
    저 드높고 무거운 짐

    밥 차리러 가는 당신 때문에나는 살았다흙 묻은 손으로 씻어준알갱이들 때문에밥을 차리러 간 사람들 때문에 우리는 가까스로 이어가며 살 수 있었다쌀을 구하려 손발이 닳던 노동 때문에화구에 불을 넣고 연기를 쬐던주름진 노역 때문에수심이 깊은 밥주걱 때문에개수대로 쓸려가는 수챗물처럼아무것도 아닌 인생 때문에밥물이 한소끔 끓을 시간만큼도못 살다 간 인생 때문에우리는 살 수 있었다그러니들어가 밥이나 하라는 말은쉰밥만도 못한 말밥을 버리라는 말밥의 자식이 아니라는 말불내의 식구가 아니라는 말- 시, ‘밥이나 하라는 말’, 문동만 시집 <설운 일 덜 생각하고>얼었다 녹은 자국인 듯 잎이 불그스레한 고추 옆에 쇠뜨기와 쑥을 베어 덮어주었다. 잎 하나가 팔뚝만 한 소루쟁이는 한 포기만 베어도 고추 열 주는 ...

    2023.05.12 03:0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우는 나무
    우는 나무

    홀로 취한 것도 죄가 될까 떠다니는 말들이 아문 상처까지 헤집어 스스로 빚어 올린 독에 갇혀 꽃 한송이 피운다이따금 누군가 간절하지만 갈마드는 덴 가슴꽃그늘처럼 떤다심연에서 만나기로 하고덩그러니 혼자 남을 걸 알기에어둠에 깍지를 끼고깨물어서 아플 손가락은 잘라냈다 용서라는 꽃말 덧덮으며또다시 엎드려 물줄기를 잇는다무릎을 껴안다 얼굴마저 파묻고 젖은 흙, 빈 몸뚱이를 쓰다듬는다옅은 잠귀 날 부르는 소리, 소리, 소리떨어진다잠깐만 한눈팔아도 꽃받침에 거미줄이 보이고 뒤돌아 앉으면 이끼가 낀다 밤에서 밤으로 멍 자국 숨기며 새가 난다- 이동우 시 ‘용서를 강요받을 때’, 시집 <서로의 우는 소리를 배운 건 우연이었을까>한 달...

    2023.04.14 03:0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가문비나무 아래, 손글씨를
    가문비나무 아래, 손글씨를

    전에는 편지가 있었다.친구로부터 아버지로부터연인으로부터 형으로부터.우표가 붙어 있었고손으로 쓴 내 이름이 있었고가슴 설레며 봉투를 열었고혼자 읽고 싶어 옷 속에 감추고 산으로 올라가기도 했다.지금은 아파트관리비 청구서, 수도요금 고지서,백화점 카탈로그, 신용카드 명세서,구독 신청한 적 없는 잡지와 신문들.절반은 뜯지도 않고 쓰레기통으로 들어간다.나도 손글씨 편지 보낼 곳이 없다.-시 ‘손글씨 편지’ 서홍관, 시집 <우산이 없어도 좋았다>장래 희망으로 ‘원예사’라 쓰고, 호수 옆에 나무집과 수선화까지 몇 포기 그리다, “아나, 농부가 좋것다”, 담임선생님한테 꿀밤을 맞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일이다. 고등학교 때는 서점을 하는 게 꿈이었다. 내가 운영할 서점 옆에 꽃집을 하겠다는 친구와 그 옆에 찻집과 빵집을 겸하겠다는 친구도 나섰다. 돈 벌 재주가 있...

    2023.03.17 03:0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품앗이와 마을 민주주의
    품앗이와 마을 민주주의

    구복리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한천댁과 청동댁이 구복리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구년 뒤, 한천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구복리댁과 청동댁이 한천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다시 십일년 뒤, 청동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구복리댁과 한천댁이 청동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연속극 켜놓고 간간이 얘기하다 자는 게 전부라고들 했다자식새끼들 후다닥 왔다 후다닥 가는 명절 뒤 밤에도이 별스런 품앗이는 소쩍새 울음처럼 이어지곤 하는데,구복리 댁은 울 큰어매고 청동댁은 내 친구 수열이 어매고한천댁은 울 어매다-시 ‘어떤 품앗이’, 박성우,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나라가 어수선해서 잠 못 이루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우리 동네가 딱 그 축소판이다. 작은 마을이지만 명함이 꽤 많고 복잡해 이해하는 데 몇 년 걸렸다. 직위가 ‘완...

    2023.02.17 03:0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갈수록 가난해지는 이상한 직업
    갈수록 가난해지는 이상한 직업

    농사가 안된 해는팔 게 없어 걱정이더니좀 많은 해는 다 못 팔아 걱정이다갈수록 가난해지는 이상한 직업이다농약과 화학비료 안 쓰니흙이 살아나 살맛 나는데허리 휘어져라 일할수록손마디만 굵어지는 이상한 직업이다괭이와 호미 한 자루에생존을 맡기고풀과 흙에게세금 내며 만족하는 일이다아등바등하지 않고 그저새벽녘 잠을 깨우는온갖 새소리에 귀를 씻는 일이다 -시, ‘산골농부’, 최정, 시집 <푸른 돌밭>등유 경유 식용유 밀가루 등 세상천지 모두 올랐는데 쌀값만 떨어졌다. 밥 한 공기 가격이 300원이었는데 최근엔 206원이란다. 소비자들은 체감하기 힘들겠지만 농민들은 그 차이가 크단다. 동네에서 직접 지은 쌀 사먹은 지 8년째인데, 대부분 20㎏ 한 포대에 4만원이었다. 8년 동안 그대로다. 이종관씨는 쌀을 실...

    2023.01.2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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