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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진정한 애도는 진실뿐이다
    진정한 애도는 진실뿐이다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는 이들 곁에서작은 촛불이라도 켜게 하소서이들은 창밖의 어떤 불빛도 새어 들어오지 못하는얼음장 속에 갇혀 있습니다자식을 잃고 형제와 친구와 사랑하는 이를 잃고울부짖는 이들 곁에서 함께 통곡하게 하소서차가운 돌무덤에 갇힌 자들의 체온은 영하이들은 흐르는 눈물조차 얼어붙는 찬바닥에 갇혀 있습니다산산조각난 심장 곁에서 함께 부서지게 하소서산산조각난 심장의 부스러기로라도 곁에 있게 하소서이들은 꽃도 피지 않고 새도 노래하지 않는겨울 정원을 견디고 있습니다이미 대못이 박혀 결박당한 사지에 대못만은 박지 않게 하소서비수가 박혀 마비된 심장에 더는 비수를 꽂지 않게 하소서진실은 아직 눈물조차 스며들지 않는아스팔트 밑에 묻혀 있습니다진정한 애도는 진실뿐입니다진실만이 산산조각난 심장에 대한 예의입니다- 근작시, 김해자, ...

    2022.12.23 03:0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동치미를 담그며
    동치미를 담그며

    한 달여 비워둔 집엉거주춤 남의 집인 양 들어서는데 마실 다녀오던아랫집 어머니가 당신 집처럼 마당으로 성큼 들어와꼬옥 안아주신다 괜찮을 거라고아파서 먼 길 다녀온 걸 어찌 아시고 걱정마라고,우덜이 다 뽑아 김치 담았다고 얼까 봐남은 무는 항아리 속에 넣었다고가리키는 손길 따라 평상을 살펴보니, 알타리 김치통 옆에 늙은 호박들 펑퍼짐하게 서로 기대어 앉아있고, 항아리 속엔 희푸른 무가 가득, 키 낮은 줄엔 무청이 나란히 매달려 있다. 삐이이 짹짹, 참새떼가 몇 번 나뭇가지 옮겨 앉는 사이, 앞집 어머니와 옆집 어머니도 기웃하더니 우리 집 마당이 금세 방앗간이 되었다. 둥근 스뎅 그릇 속 하얗고 푸른 동치미와 살얼음 든 연시와 아랫집 메주가 같이 숨 쉬는 평상, 이웃들 손길 닿은 자리마다 흥성스러운 지금은, 입동 지나 소설로 가는 길목나 이곳 떠나 다른 세상 도착할 때도지금은 잊어버린,먹고사느라 잊고 ...

    2022.11.25 03:0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꽃도둑의 눈
    꽃도둑의 눈

    자고나면 갓 핀 꽃송이가 감쪽같이 없어지더니 밤새 금잔화 꽃숭어리만 뚝 따먹고 가더니 이 눔이 좀 모자란 놈인가, 시 쓰는 놈 혹시 아닐랑가 서리태 콩잎보다 향기로운 꽃을 좋아하다니이 눔 낯짝 좀 보자 해도 비 온 뒤 발자국만 남기더니 며칠 집 비운 새, 앞집 어르신이 덫 놓고 널빤지에 친절하게도 써놓은 ‘고랭이 조심’에도 아랑곳없이 밤마다 코밑까지 다녀가더니 주야 맞교대 서로 얼굴 볼 일 없더니 어느 아침 꽃 우북한 데서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꽃향기에 취해 잠이 들었나 놀란 이 꽃도둑 후다닥 논틀밭틀로 뛰어가는데 아 참, 도둑의 눈이 그렇게 맑다니 - 시 ‘꽃도둑의 눈’, 김해자, 시집 <해자네 점집> 중에서갈색으로 물들어가는 들깨를 베고 있는데, 윗밭 언니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올라오다, “그래 댁의 콩은 괜찮수?” 묻길래, “갸가 팥도 먹대유.” 했더니, “이그...

    2022.10.28 03:0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그냥상
    그냥상

    물장화 고무장갑 냅다 던지고고무줄바지 낡은 버선 돌돌 말아 처박고꽃내 분내 관광 간다굼실굼실 떡도 찌고돼지머리 꾹꾹 눌러정호반점 앞에서 새벽 버스 한 대씨바씨바 출발이다소주도 서너 박스 맥주도 서너 박스행님아 아우야 고부라지며자빠질 듯 자빠질 듯흔들며 흔들리며간다, 매화야 피든 동 말든 동간다, 빗줄기야 치는 동 개든 동죽은 영감 같은 강 따라술 마시고 막춤 추며씨바시바 봄이 간다-시, 「씨바씨바」, 권선희, 시집 <꽃마차는 울며 간다>권선희는 최근 태풍 힌남노가 휩쓸고 간 포항 구룡포에서 산다. 20년 가까이 사는 포구에서 중대장각시로 불리는 그는 짠물에 들어가지 않고도 홍게나 오징어 과메기나 자연산 미역 등 철철이 귀한 것들을 얻어먹고 산다. 그중 일부는 멀리 사는 친구들 입에도 들어간다. 동네 어른들은 물론 ‘종팔씨’나 ‘흰돌이’ ‘...

    2022.09.30 03:0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그 많던 참새는 다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참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 몇 마리가 나부대며 해종일 복상나무 위로 들락거리고 있었다이튿날도 한 무리가 그쪽에서 종종거렸다며칠 뒤에는 하늘 가득 새떼가 북풍을 몰고 은하수처럼 흘러왔다진눈깨비 날리는 한파와 함께 코로나 역병 소문이 먼 도시에서 흘러왔다나는 얼음장 성질이 좀 눅눅해질 때까지 부초 발가락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매화나무 뿌리가 물소리 쪽으로 귀 세우는 기척 엿듣자톱 들고 가위 차고 사다리 위로 올라갔더니복상나무 가지마다 진흙 발자국이 백 켤레쯤 걸려 있었다진흙 발자국은 먼 길 떠나는 새들의 항로 이정표 아닌가그러니까 나는 해마다 새들의 이정표를 싹둑싹둑 잘라버렸다는 것,새들이 지평선 끌고 가버려 옹색해진 들판에서서른 몇 해 농사와 내 시인 깜냥이 참 구성없다는 것이었다- 시, ‘가지치기 하다가’, 이중기, 시집 <정녀들이 밤에 경찰 수의를 지었다> 중장대비가 쏟아진 8월8일 저녁,...

    2022.09.02 03:0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양승분 언니의 식탁
    양승분 언니의 식탁

    밤새 비 내린 아침옥수수 거친 밑동마다 애기 손톱만 한 싹이 돋아났다 지가 잡초인 줄도 모르고, 금세 뽑혀질 지도 모르고 어쩌자고 막무가내로 얼굴 내밀었나밤새 잠도 안 자고 안간힘을 썼겠지푸른 심줄 투성이 저 징그러운 것들,생각하니 눈물 난다누구 하나 건드리지 않고 무엇 하나 요구하지 않고 스스로 그러하게 솟아오른 저 순한 새순 앞에 우리네 시끌벅적한 생애는 얼마나 엄살투성인가 내가 사람으로 불리기 전에도 잠시 왔다 가는 이승의 시간 이후에도 그저 그러하게 솟았다 스러져 갈 뿐인 네 앞에 너의 부지런한 침묵 앞에 이 순간 무릎 꿇어도 되겠는가-시, ‘스스로 그러하게’, 김해자, 시집 <축제> 중8월은 무성하다. 우거질 무(茂)에, 담을 성(盛), 풀도 우거지고 작물도 차고 넘친다. 여름에는 억센 풀만 잡고 삐죽한 데만 분지른다....

    2022.08.05 03:00

  • [김해자의 작은 이야기] 덕순 언니의 밥상
    덕순 언니의 밥상

    봄이 오는 소리에 놀라씨감자가 뿔이 났어요밭에다 심었더니새삭이 잘 자랏다연보라색 꽃이 예쁘게 되었다다 자랏다는 신호인 것 같다토실토실한 감자가 얼마나 열였을까생각만 해도 마음이 흐믓하다-시, ‘봄이 오는 소리’, 신위선, 공동시집 <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고개를 젖히더니 옆으로 누워버린 누런 잎들이 늘어가고 있었다. 망설이다 폭우가 내린다기에 감자를 캐기로 했다. 줄기를 살살 흔들면서 잡아끌었더니 뿌리가 뽑혀 올라오는데 놀랐다. 제법 큰, 그러니까 어른 주먹만 한 감자가 달려 나왔으니까. 쭈글쭈글한 감자알을 쪼개 묻어 두었을 뿐인데, 그 시꺼먼 땅속에서 맑고 둥글둥글한 것들이 알아서 자라고 있었다니. 기대하지 않아서 더 신기했을 것이다. 새로 얻은 도지에 흙을 퍼붓고 돌을 고르고 이랑을 만들다보니 이웃들보다 한 달여 늦게 심은 데다, 5월 내내 비가 내리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

    2022.07.08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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