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지평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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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기의 지평 너머] 금융시장의 약장수들

    금융시장의 약장수들

    요즘은 볼 수 없지만 옛날엔 동네에 약장수가 가끔 찾아왔다. 마을 공터에 자리를 잡은 약장수는 사람들이 모여들면 “애들은 가라”고 외치면서 차력쇼를 선보인다. 건장한 장정들이 나와 맨손으로 철근을 구부리고 머리로 벽돌을 깨고, 입에서 불을 뿜기도 한다. 쇼의 열기가 고조될 때쯤 “이 약 한 번 잡숴봐”라며 약을 돌린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눈을 뜨고 칠순 할배가 늦둥이를 본다”는 식의 대충 만병통치약이다. 약을 산 이들이 몇이나 됐는지는 기억에 없다. 약의 효험에 대해서도 들은 적이 없다. 수려한 말로 허풍을 떨거나 사기를 치는 사람에게 “어디서 약을 팔아”라며 면박 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현대 자본주의 시장에서 대중이 이런 ‘약’을 살 가능성이 높은 곳이 금융시장이다. 금융기관들은 난해한 금융공학으로 파생상품을 만들어 높은 수익을 보장한다며 소비자들을 유혹한다. 파생금융상품은 당초 상품 가격이나 환율, 주가 등의 급변동 위험(리스크)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
  • [김준기의 지평 너머] 크리스마스 휴전은 없었다

    크리스마스 휴전은 없었다

    이스라엘 출신의 유명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원자폭탄을 개발한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그의 동료들에게 노벨 평화상을 줬어야 한다고 했다. 핵무기가 초강대국 사이의 전쟁을 적은 물론 우리 편도 파멸시키는 ‘집단(동반) 자살’로 바꾸어놓아서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시도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이유다. 그러면서 하라리는 지금은 평화를 사랑하는 정치인, 사업가, 지식인, 예술가 등의 엘리트가 세계를 지배하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시대가 됐다고 했다. 과거에는 전쟁을 통해 적의 영토를 약탈하거나 병합해 부를 획득할 수 있었으나 오늘날의 부는 주로 인적 자본과 조직의 노하우로 구성되다 보니 무력으로 정복하기가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선 대외 교역과 투자가 매우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평화가 절실하다는 점도 근거 중 하나다.올 한 해를 돌아보면 세계적 석학의 통찰도 절반만 맞는 것 같다. 초강대국 사이의 직접적 충돌은 없었지만 사실상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
  • [김준기의 지평 너머] 독립언론이 살아있는 나라는 기근이 없다

    독립언론이 살아있는 나라는 기근이 없다

    인도 출신의 아마르티아 센 미국 하버드대 교수는 빈곤과 불평등 문제에 주목한 후생경제학의 틀을 정립한 공로로 1998년 아시아인 최초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경제학자다. 1943년 인도 벵골 대기근을 목격했던 그는 기근이 단순히 식량 생산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재와 불평등 등 정치·사회적 요인에서 기인한다고 분석했다. 주기적으로 선거를 치르고, 집권세력을 비판하는 야당이 있으며, 검열 없이 정부 정책을 자유롭게 보도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이 존재하는 민주주의 국가는 아무리 가난해도 실질적인 기근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중들의 지지를 통해 선거에서 이겨야 하는 민주주의 체제의 정부는 기근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할 강력한 정치적 인센티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20세기 이후 기근이 발생한 1930년대의 우크라이나, 1958~1961년의 중국, 1970년대의 캄보디아를 비롯해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사하라사막 남부 일부 나라들은 대부분 ...
  • [김준기의 지평 너머] 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의 역할

    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의 역할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이 있다. 먹고살 만해야 이웃이나 사회를 살필 여유가 있다는 뜻이다. 미국 하버드대 경제학과 학과장을 지낸 벤저민 프리드먼 교수는 여러 나라의 경제성장과 사회·정치·도덕적 발전의 관계를 연구해 이 속담을 실증적으로 살펴봤다(<경제성장의 미래>). 연구의 결론은 경제가 성장하는 사회는 관용과 다양성, 사회적 유동성, 공정성 및 민주주의가 개선된다는 것이다. 반면 경제성장이 정체되거나 하락하는 사회는 이런 요소들이 퇴보한다.미국의 예를 보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다음해인 1946년부터 오일쇼크가 닥친 1973년까지 미국 경제는 강한 성장세를 이어갔다. 이 시기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에 대한 법적·제도적 근절 장치가 마련됐고, 폐쇄적인 이민정책이 완화돼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출신 이민이 급증했다. 노인과 빈곤층에 대한 건강보험 제공 등 각종 복지제도가 본격화됐고 언론의 자유가 신장됐으며, 유색인종이나 여성의 대학 진학과 사회 진출도 급증했다....
  • [김준기의 지평 너머] ‘개탄스러운 사람들’과 ‘미래가 짧은 분들’

    ‘개탄스러운 사람들’과 ‘미래가 짧은 분들’

    미국의 대통령 선거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2016년 9월9일. 대부분의 언론에서 당선이 유력하다고 보고 있던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뉴욕 맨해튼에서 성소수자 단체가 마련한 모금 행사에 참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공화당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의 절반이 ‘개탄스러운(한심한) 사람들(A basket of deplorables)’이라고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이들이 인종주의자, 동성애 혐오자, 여성차별주의자, 이슬람 및 외국인 혐오자들이라는 이유를 들었다. 발언에 대한 비판이 일자 힐러리는 ‘절반’이라는 표현은 실수라고 인정하며 유감을 표했지만 ‘개탄스러운’이라는 표현에서는 물러서지 않았다.좋은 대학(예일대 로스쿨)을 나와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한 진보 성향의 힐러리 관점에서 그런 트럼프 지지자들이 개탄스럽게 보이는 것은 있을 법한 상황이다. 하지만 치열한 대선 레이스 중에 이런 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공격적으로 표출한 것은 정치적으로는 악재가 될 수...
  • [김준기의 지평 너머] 훌륭한 장군이었던 맥베스

    훌륭한 장군이었던 맥베스

    “유능한 학생이었던 토틀랜드는 초등학교 교사가 된 뒤 능력을 인정받아 장학사로 승진했다. 그녀는 이제 아이들이 아니라 교사들을 상대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들을 가르치던 방법 그대로 교사들과 소통하려 했다. 교사들을 대할 때 한두 음절로 된 쉬운 단어만을 사용해 또박또박 천천히 말했다. 안건을 설명할 때는 교사들이 확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반복 설명했다. 언제나 환한 웃음을 띠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하지만 교사들은 토틀랜드의 생색내는 듯한 태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토틀랜드에게 적의를 갖고 그녀가 내놓는 안을 추진하기보다 반대할 구실만 찾는 교사도 있었다. 토틀랜드는 교사들과의 의사소통 과정에서 무능력을 드러냈다. 그녀는 더 이상 승진하지 못하고 장학사로 남을 것이다.”캐나다 태생 미국 교육학자 로렌스 피터(1919~1990)가 1969년 출간해 지금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는 <피터의 원리(The Peter Principle)>에 나오는 ...
  • [김준기의 지평 너머] 민주주의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

    2009년 5월23일은 토요일이었다. 주 5일 근무도, 주 52시간 노동도 모르던 시절, 일주일 중 유일하게 하루 쉬는 날 회사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다급한 목소리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전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잠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회사로 튀어나갔다. 황망함 속에서도 ‘일’은 해야 했다. 그날 오후 “그동안 힘들었다. 원망하지 마라”라는 큰 제목이 달린 8쪽짜리 신문이 나왔다. 경향신문 77년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발행된 호외다. 엊그제 같은데 벌써 14년이 흘렀다.“역사는 더디다, 그러나 진보한다.” 지난주 김해 봉하마을에서 열린 노 전 대통령 14주기 추도식의 주제다. 노 전 대통령의 어록에서 따온 문구인데, 한국 민주개혁 세력에는 뼛속 깊숙이 각인된 믿음과 희망이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그 기대는 현실이 돼왔다. 수십년 동안 치열한 싸움 속에서 수많은 좌절과 절망을 딛고 우리 사회는 한 걸음 한 걸음씩 ...
  • [김준기의 지평 너머] 전세금 9000만원 vs 연봉 1억원

    전세금 9000만원 vs 연봉 1억원

    “엄마, 2만원만 보내주세요.” 지난 14일 스스로 생을 마감한 전세사기 피해자 20대 청년이 그 며칠 전 어머니에게 전화해 이 말을 꺼낼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고교 때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어렵게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쫓겨나야 하는 날벼락에 밤이고 낮이고 괴로워했을 것이다. 수도요금 6만원을 내지 못해 나붙은 단수 예고장은 힘겨웠던 삶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지난 두 달 사이 20~30대 전세사기 피해자 3명이 빈곤과 절망 속에서 삶을 등졌다. 이들의 전세보증금은 7000만~9000만원이다. 누구는 이 중 얼마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을 테지만 누구는 한 푼도 건지지 못할 사정이었다.다른 한쪽에서 한국 사회는 바야흐로 평균 연봉 1억원 시대가 열리고 있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매출액 100대 상장사(금융업 제외) 중 평균 연봉이 1억원을 넘긴 이른바 ‘1억 클럽’에 들어간 기업은 35개로 전년(23개)보다 12개가 늘었다. 2019년(9개)에 비하면 4배 가까이 급증...
  • [김준기의 지평 너머] 인플레이션 전쟁의 희생자들

    인플레이션 전쟁의 희생자들

    백수(白壽)를 앞두고 있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병원에서의 암 치료를 중단하고 집에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평생 도덕적 신념을 현실 정치에 구현하는 데 노력했던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카터는 200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가 노벨상을 받은 것은 대통령으로서의 업적 때문이 아니다. 퇴임 이후 펼친 민주주의와 인권 증진 활동, 국제 분쟁 해결, 공중보건 개선과 경제·사회적 개발 촉진 등의 공로가 수상 이유다. 역대 최고의 전직 대통령이라는 찬사를 받는 그이지만 재임기간(1977~1981년)의 정치는 미국 유권자들의 인정을 받지 못해 재선에 실패했다. 그를 좌절시킨 결정적 계기는 인플레이션이다.1970년대 미국은 인플레이션의 시대였다. 1960년대 중반 린든 존슨 행정부가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대대적 재정지출에 나서고 베트남전쟁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으면서 물가 상승이 본격...
  • [김준기의 지평 너머]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는 검찰

    돌아오지 않는 다리를 건너는 검찰

    오래전 수사를 참 잘한다는 특수통 검사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주변에선 그의 특기로 피의자로부터 자백받기를 꼽았다. 피의자에게 다른 범죄 혐의들을 들이밀며 협박할까, 부모·자식에 사돈의 팔촌까지 탈탈 털겠다고 압박할까. 아니면 철저한 수사로 꼼짝 못할 증거를 확보해 피의자가 도저히 자백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들까.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제발 자백해달라고 두 손 모아 싹싹 비는 거예요.” 우문에 우답으로 응수해 왔다. 기막힌 방법이라고 짐짓 감탄하니 피의자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나왔다. 검사가 자신을 무도하게 짓밟으려 한다고 피의자가 생각한다면 자백을 쉬이 하지 않을 것이다. 검사가 사심 없이 법과 원칙에 따라 제대로 수사한다는 믿음이 있어야 피의자도 자백할 마음이 생길 것이다. 검사와 피의자의 관계에서도 신뢰는 중요하다.검찰이 그동안 세 차례 소환조사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해 조만간 구속영장을 청구할 것 같다. 이전까지 검찰이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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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앤젤레스 항구 그랑프리에 참가한 각국 팀들 화창한 날, 멕시코 해바라기 밭에서의 사람들 최소 37명 사망.. 토네이도로 인한 미시시피주 모습 전사자들을 잊지 않고 추모하는 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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