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주년 경향신문


경향신문

기획·연재

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 전체 기사 18
  • [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인생을 멀리서 보는 일
    인생을 멀리서 보는 일

    가족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을 던지기 훨씬 전부터 나는 가족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매주 제출했던 수필 원고에도 가족은 어김없이 등장한다. 왜냐고 묻는다면 일단은 나랑 먼 이야기를 지어내는 법을 몰라서였다. 어째서 <나니아 연대기>나 <왕좌의 게임> 같은 서사는 내 안에 씨앗조차 없는지 한탄스러웠다. 하지만 나를 키운 어른들에겐 재미있는 면이 아주 많았다. 안 쓰기엔 너무 웃겼다. 웃긴 만큼 눈물겹기도 했다. 가까이 사는 이들이 마침 흥미로웠으므로 별수 없이 그들을 보며 받아적었다. 평이했던 문장(우리 엄마는 털털하다)에 시간이 흐르면서 유머와 거리감이 생겼고(퇴근한 복희는 자신이 하루 종일 신었던 양말 냄새를 꼭 맡아본다) 내가 자란 부품 상가 골목의 대가족을 조망하는 첫 문장(태어나보니 주변엔 온통 상인들뿐이었습니다)도 쓰여졌다. 솔직함과 탁월함은 무관하다애증의 대상인 가족을 서사화하는 작업엔 분명히 까다롭고 아슬...

    2023.08.27 20:16

  • [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두 엄마 밑에서 자랄 아이에게
    두 엄마 밑에서 자랄 아이에게

    혹시 혁명이라는 게 일어나고 있다면 나는 겨우 뒷줄에서 까치발을 든 사람일 것 같다. ‘이상하고 뛰어난 친구들아, 이번엔 또 뭘 해낸 거니?’ 선구자가 쳐놓은 사고와 이뤄놓은 업적을 종종대며 따라가는 동안 혁명의 끄트머리에서 내 삶도 변해간다. 오랜 동지 규진의 임신 소식을 듣던 밤 나는 문득 더 강하고 웃긴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규진이 이미 그런 엄마이긴 하지만 양육이 엄마들만의 책임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엄마 친구로서의 나, 시민으로서의 나, 출산과 육아가 남일이 아니게 된 작가로서의 나를 상상하면 저항과 사랑을 위한 체력뿐 아니라 고도의 유머 감각까지 필요할 터였다. 아직도 동성혼이 법제화되지 않은 이 나라에서 레즈비언 부부인 규진과 세연은 세금을 ‘따박따박’ 내며 살아간다. 이달 초 언론 인터뷰를 통해 규진의 임신 소식을 발표하자 축하뿐 아니라 무수한 악플도 달렸다. 진심 어린 걱정인지, 교묘한 비난인지 헷갈리는 댓글도 있었다. 아이가 차별받을까봐 걱정된...

    2023.07.31 03:00

  • [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그리움으로 해내는 일들
    그리움으로 해내는 일들

    이 나라에서 내가 배우는 것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사람들이 그리움으로 무얼 하는지.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를 가슴에 품은 채 어떻게 움직이는지. 사랑하는 친구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미 수술실에 들어간 터라 친구 휴대폰의 전원이 꺼진 상태였다. 전화기가 켜지기만을 기다리며 친구의 부드러운 밤색 피부를 떠올렸다. 뒷산을 성큼성큼 오르는 두 다리와 자주 엉키는 머리카락과 툭 치면 흘러나오는 숱한 문장들도 떠올렸다. 그는 아주 많은 책을 외우고 있었다. 친구의 사라짐은 도서관의 사라짐이고 어떤 대화의 멸종이고 다시는 만질 수 없는 살갗일 것이었다.며칠 만에 다시 휴대폰이 울렸다. 몸 이곳저곳에 깁스와 철심과 붕대를 칭칭 감은, 그러나 또렷하게 살아있는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부러지지 않은 한쪽 팔로 간신히 휴대폰을 든 채 나를 반겼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내 음성을 얼마나 귀하게 듣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지금 이 통화, 지금 이...

    2023.07.03 03:00

  • [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기후위기 시대에 마음을 돌본다는 것
    기후위기 시대에 마음을 돌본다는 것

    어떤 날엔 쉬이 잠에 들지 못한다. 너무 많은 생각 때문일 것이다. 앞날을 그리다 보면 그렇게 된다. 몇년 후, 혹은 몇십년 후가 두려운 건 내 삶의 필수 조건들이 나빠질 게 분명해서다. 홀로세를 지나 인류세로 접어들어 기후위기 시대를 사는 우리의 생태적 운명을 콧노래하며 낙관하기란 어렵다. 나에게 미래란 기후위기와 떼어놓을 수 없는 무엇이다. 그런 밤엔 나처럼 잠 못 들고 있을 것만 같은 친구의 얼굴이 떠오른다. 프랑스 서점 매대에서 저널리스트 로르 누알라의 책을 처음 발견했을 때 생각했다. 뒤척이는 친구들과 나의 손에 이 책을 쥐여주고 싶다고. 서둘러 판권을 구입한 뒤 번역 출간 작업을 진행했다. 처음 만들어보는 외서였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책이 <지구 걱정에 잠 못 드는 이들에게>다. 이 시대의 새 화두 ‘생태불안’로르 누알라는 환경 전문기자로 오랫동안 일해온 작가다. 온갖 걱정스러운 생태 정보를 분석하는 게 그의 직업이라는 의미다. 기후위기 피해를 ...

    2023.06.05 03:00

  • [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누가 책 만드는 사람들을 밀어내는가
    누가 책 만드는 사람들을 밀어내는가

    서점에서 몰래 독자를 기다려본 적이 있다. 내가 쓴 소설이 놓인 매대 옆을 서성거리면서 말이다. 주말의 대형 서점엔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으나 내 책에 눈길을 주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다가오다가 금세 멀어져버리는 이들을 응시하다 보니 동공이 자꾸 흔들렸다. 책은 조용히 기다리는 운명을 지녔음을 그날 이해했다. 읽힐 때까지. 만날 때까지. 그러나 마침내 독자가 나타난다면 책은 결코 한 사람만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지난 9년을 작가로, 5년을 출판사 대표로 지냈다. 여전히 서툴지만 출판 생태계에 관해 부단히 배우고 있다. 출판은 독자를 향해 헤엄치는 일이다. 독자란 다른 이의 삶을 궁금해하는 사람이자 책과 함께 고독해지고 충만해지는 사람이다. 이들에게 최대한 좋은 것을 바치고 싶은 기술자들이 출판계에서 일한다. 종이책 독자가 급감했다는, 출판은 이미 저물어가는 산업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해진 지도 10년이 넘었건만 나는 비관할 수가 없다. 그러기엔 훌륭한 출판인들과 훌륭한...

    2023.05.08 03:00

  • [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인생을 펼쳐서 보여줄 수 있다면
    인생을 펼쳐서 보여줄 수 있다면

    다음 문장에는 빈칸이 있다. ‘나의 ○○○ 이야기’. 당신이라면 무엇을 채워 넣을까? 빈칸에 들어갈 단어의 조건은 이렇다. ‘끔찍이 싫었지만 끌어안은 것. 나를 나로 만든 내 인생의 한가운데.’ 이것은 출판사 후마니타스에서 제작한 ‘나의 ○○○’ 시리즈 설명 중 일부다. 곱씹을수록 위 두 문장이 만만치 않게 느껴진다. 싫어도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숙명으로 받아들인 까다로운 일들이 모두의 삶에 있을 것이다. 어떻게든 진실을 길어올리게 되는 빈칸. 그곳에 ‘이동권’을 채워넣은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어떤 인생은 이동권이라는 말 없이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동이 딱히 시련이었던 적 없는 자는 죽을 때까지 모를 일들을 그 사람은 안다. ‘나의 이동권 이야기’를 시작한 그의 이름은 이규식이다. 어린 시절 규식은 제비가 집 짓는 과정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자랐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중증 뇌병변 장애인으로 태어난 그를 시골집에 남겨두고 날마다 일하러 나...

    2023.04.10 03:00

  • [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당신과 다시 싸우기 위하여
    당신과 다시 싸우기 위하여

    격투 경기에는 늘 패자가 있다. 아니라면 승자도 없을 것이다. 승자에게만 마이크를 쥐여주는 대회를 나는 보지 않는다. 격투기의 본질은 때때로 패자의 인터뷰에서 더욱 생생히 읽힌다. 1년 전 국제격투기 대회인 UFC에서 볼카노프스키에게 패배한 정찬성은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말했다.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고. 나는 챔피언이 될 수 없다고 느낀다고. 계속하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면서 그는 말끝을 흐렸다. 그의 몸은 피와 땀과 눈물로 뒤덮여 있었다. 세계적인 파이터도 어떤 싸움 뒤에는 그토록 정직하게 약해진다. 그러나 정찬성의 흔들리는 동공을 나는 용감무쌍한 자의 눈빛으로 기억한다. 고통의 깊숙한 안쪽으로 자신을 밀어붙이며 수련해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긴 선수뿐 아니라 진 선수까지 존경할 때, 부디 꺾이지 말고 다시 링 위로 돌아와달라고 응원할 때, 격투기라는 스포츠를 향한 마음은 깊어진다.지난달에는 한·일전이 있었다. 국내 격투기 단체 블랙컴뱃에서 주최한 대회였다....

    2023.03.13 03:00

  • [이슬아의 갈등하는 눈동자] 어떤 선수는 건너온 다리를 불태운다
    어떤 선수는 건너온 다리를 불태운다

    ‘뒤얽히다’라는 동사를 종합격투기 경기장에서 배운다. 케이지는 선수들의 팔다리, 손목과 발목, 팔꿈치와 무릎 관절이 뒤얽히는 장소다. 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선망 혹은 앙금, 이해관계, 훈련의 역사가 뒤얽힌다. 시계방향으로 자라는 등나무와 반시계방향으로 자라는 칡나무처럼 두 선수는 시합의 형식 안에서만큼은 상생할 수 없다. 칡 갈(葛)자와 등나무 등(藤)자를 나란히 놓으면 ‘갈등’이 된다. 충돌과 뒤얽힘이 격투기의 본질일 것이다. 그것은 우발적인 싸움이 아니다. 오랜 시간 상대와 자기 자신을 연구하며 정진해온 자들의 스포츠다. 격투기라는 기예, 그중에서도 서로 다른 무술을 섞어가며 겨룰 수 있게끔 룰을 고안한 종합격투기(MMA)는 풍부한 텍스트를 지녔다. 선수들이 비언어로 움직이는데도 경기를 다 본 내 마음엔 수많은 문장이 남게 된다. 내 시선을 사로잡는 건 언제나 패자의 얼굴이다. 시합이 끝나면 모든 선수들은 진실을 맞닥뜨린다. 이겼다는 혹은 졌다는 진실. 승자는...

    2023.02.13 03:00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