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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퓰리즘의 계절, 밑 빠진 독에서 물 긷기
굳이 정치면을 펼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여당, 야당 가릴 것 없이 ‘돈을 쓰자’는 얘기가 나오면 틀림없다. 선거가 임박했다는 얘기다. 지속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구조개혁만이 대한민국의 명운을 결정지을 것이라던 목소리들이 무슨 숙청이라도 당한 것처럼 일제히 치워진다. 대신 소외된 서민들과 불균형한 지역발전에 대한 재발견이 잇따르며, 돈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박애의 경쟁이 시작된다. 바야흐로 ‘표(票)퓰리즘’의 계절이다.우리가 흔히 대중영합주의로 읽는 포퓰리즘은 사실 너무 다양한 형태로 발현되기 때문에 정치학자들도 한 가지 형태로 정의내리기 어려워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실제로 2016년 미국 대선에서 최저임금 인상과 부유세 강화를 주장했던 버니 샌더스나 이민자 추방과 보호무역을 주장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상대 진영에서는 모두 포퓰리스트 취급을 받았을 만큼 정형화된 모습이 없다.이 포퓰리즘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로마 공화정 말기 그라쿠스 형제... -
‘블루칼라 보난자’에 거는 기대
어학연수를 갔을 때 머물렀던 하숙집 주인은 항만에서 일하는 노동자였다. 그는 새 학생이 올 때마다 작업화를 보여주며 그 신발이 얼마나 비싸고 튼튼한 것인지 자랑하곤 했는데, ‘컨테이너 무게를 버틴다’던 그 신발 때문이 아니라 당시 그가 받던 월급 때문에 놀랐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그는 한 달에 2~3주 정도만 일을 하기 위해 집을 비웠는데, 그럼에도 그의 임금 수준이 당시 한국 대기업 평균을 아득하게 넘는 숫자였던 것으로기억한다.물론 그의 업무강도가 얼마나 세고, 경력이나 기술 수준이 임금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따져보진 못했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으로 블루칼라는 저소득이라는 막연한 고정관념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사실 한국은 한참 동안 많은 것들이 쌌다. 사람들은 ‘쥐뿔도 없는 우리나라가 그나마 인건비가 저렴해서 이만큼 버틴다’고 입을 모았다. 그게 노동, 특히 육체노동에 대한 상대적으로 낮은 보상으로 굴러가는 ‘조금 불공평한 세상’을 설명하는 방... -
이상한 총선용 개각
공개 석상에서 ‘암컷’을 운운한 최강욱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의 충돌이 한동안 세간의 화제였다. 급기야 ‘이게 민주주의다, 바보야(It is democracy, stupid)’라는 최 전 의원의 SNS 글에 한 장관이 ‘이게 민주당이다’로 맞받아치는 장면이 연출되면서 코미디 같은 한국의 정치 현실이 전국에 생중계됐다.실소를 참아내기 어려운 장면이지만, 이런 난장판 속에서 그래도 한 가지 건질 미덕이 있다면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를 2023년 대한민국에 다시 불러냈다는 정도가 될 것 같다.‘문제는 경제야’는 1992년 빌 클린턴 미국 민주당 후보가 현직인 조지 H W 부시 대통령에 맞서 대선에 나서면서 내놓은 메시지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선거 캠페인 중 하나로 꼽히는 이 메시지는, 걸프전 승리로 지지율이 고공비행을 하던 부시 대통령을 누르고 클린턴에게 승리를 안겨줬다.1990년대를 통째로 놓고... -
짜장면과 금반지
사실 짜장면은 만만한 음식이었다. 한참도 더 전에 짜장면이 졸업식에나 먹을 수 있는 고급요리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언젠가부터 짜장면은 출출한데 주머니가 넉넉하지 않을 때 부담 없이 고를 수 있는 첫번째 선택지였다. 그런데 요즘 이 짜장면이 만만치가 않다. 짜장면값은 그동안 큰 요동 없이 꾸준히 올라왔는데, 코로나19 사태 이후 가파르게 오르더니 지난달에는 한 그릇에 7000원(서울 평균)도 넘겼다.짜장면도 억울할 수 있다. 만만하던 짜장면이 이렇게 오르는 동안, 웬만한 음식들 모두 가격표 앞자리 수를 바꿔 달았기 때문이다. 냉면 1만2000원, 국밥 1만원이 보통인 시대인지라, 짜장면에는 여전히 대표 서민음식이라는 타이틀이 그리 어색하지 않은 모양새다.그런데 이 서민음식 짜장면은 의외로 물가당국과 치열한 투쟁 역사를 갖고 있다.서민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식품이라는 영광은, 반대로 정부가 반드시 가격을 안정시켜야 한다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격을 올리면... -
명절에 알아두면 좋을 몇 가지 통계들
이젠 ‘민족의 대이동’까지는 아니지만, 멀리 떨어져 살던 가족·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여 근황을 얘기하고 회포를 풀기에 명절만큼 반가운 날이 또 있을까. 차표를 구하기 위해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왕복 수백㎞ 거리도 기꺼이 운전할 수 있는 건 이런 설렘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하지만 이런 행복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깃들지는 않는다. 노력했던 일이 물거품이 되고 기대했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거나 좌절한 이들에게 명절은 그렇게 반갑지만은 않은 행사다. 그래서 때로는 ‘취업은 언제 하니’ ‘결혼은 안 할 거니’ 같은 인사치레조차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된다. 여기에 한 명 두 명 거들다 보면 관심은 참견이 되고, 염려는 오지랖이 된다.‘명절이 아니면 보기 힘든 친척들’이 ‘명절만 아니면 보지 않아도 되는 친척들’로 돌변하는 데는 이런 몇마디면 충분하다. 어째서인지 기성세대 주변에는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을 구해 인생을 순항하는 ‘엄친아’ ‘엄친딸’들만 즐비하다. 하지만... -
비정상과 적폐, 카르텔
‘비정상의 정상화’는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인 슬로건이었다. 잘못된 관행이나 제도를 철폐하고 비리, 부패를 근절하겠다는 선언 같은 것이었는데, 첫 시작은 학교 앞 불량식품 금지나 아파트 관리비 비리 근절 같은 소소한 것들이었다.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정상화시킬 비정상의 범주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더니, 국정교과서 도입과 노조 탄압 등을 거치며 어느덧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잣대로 전락해 버렸다. 뒤이어 ‘참 나쁜 사람’ ‘배신의 정치’라는 어록을 남긴 박근혜 대통령은 결국 둘도 없는 내 편인 비선실세와의 국정농단으로 정상화를 끝장내 버렸다.잊고 지내던 ‘비정상의 정상화’가 문득 떠오른 것은 얼마 전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이 언론 인터뷰에서 꺼내든 “비효율의 효율화”를 접하면서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연구·개발(R&D) 예산을 ‘카르텔’로 지목한 지 한 달여 만의 일로, 부랴부랴 예산을 재검토하는 상황을 수습하며 내놓은 표현이었다. 하지만 주무장관조차 “과학... -
예비타당성조사의 수난
재건축이 집을 가진 이들의 로또라면, 예비타당성조사(예타)는 땅 가진 사람들의 로또다. 수도권에서 ‘경축 안전진단 탈락’이나 ‘재건축 조합 설립’ 같은 현수막이 돈을 부른다면, 지방에서는 ‘무슨무슨 사업 예타 선정’이라는 문장이 마법을 부린다. 지방에서는 땅에 붙은 도로가 있느냐, 그 도로가 4m냐, 6m냐로 적게는 몇배, 많게는 수십배씩 땅값 차이가 난다. 이런 마당에 고속도로나 철도 같은 국가 기간 교통망 사업 소식이 돌기 시작하면, 풍문만으로도 지역 전체가 들썩인다.교통망 사업이라는 게 결국 접근성을 개선하는 사업이고, 접근성이 개선된다는 얘기는 어제까지 쓸모없던 땅이 하루아침에 금싸라기 땅이 될 수 있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땅부자들은 물론, 자기 땅 한 뼘 없는 사람들도 혹여 집 주변에 나들목이라도 뚫릴까, 역이라도 생길까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이렇게 사업 자체가 근본적으로 물욕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만큼 나랏돈으로 우후죽순 사업을 벌이... -
한한령과 탈한국
소비자시장을 다루는 유통담당 기자의 경우 독특한 아이템이나 유별난 사건이 없으면 신문 앞면에 실리는 기사를 쓰는 일이 많지 않다. 그런데 2017년 유통 기자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1면에 내보낼 기사를 찾아야 했다. 중국이 한국의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도입을 이유로 그해 초부터 ‘한한령(限韓令·한류금지령)’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한국 배우나 가수들의 출연과 공연이 취소되고, 한국에 오는 ‘유커’(중국인 단체관광객)의 발길이 거짓말처럼 뚝 끊어졌다. 한국산 게임 서비스가 하루아침에 중단되고,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매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왕훙’(중국 온라인 인플루언서)들은 한국산 제품을 외면했고, 파리 날리는 면세점 사진이 신문 앞면을 장식했다. 중국의 몽니가 심해지면서 정부에서 공식 피해신고센터까지 운영했는데 신고 실적이 줄어들자, “거래가 다 끊어져 더 신고할 것도 없어졌기 때문”이라던 담당자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잊고 지내던 ‘한한령’이 갑자... -
윤석열 정부 출범 1년, 월급쟁이 1년
아파트 단지 앞 꼬마김밥 가게가 문을 닫았다. ‘오픈 기념 5개 2500원’이라는 문구를 내걸고 손님들을 끌어모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불이 꺼진 채 ‘임대’라는 안내가 문 앞에 내걸려 있었다. 가게 앞 늘어선 사람들을 보고 ‘나도 한번 가봐야지’라고 생각한 게 겨울이었으니 반년도 지나지 않아 문을 닫은 셈이다. 물어보니 오픈 행사가 끝나자 손님들의 발길이 끊겼다고 했다.정부세종청사가 있는 세종시에는 노포가 없다. 애초에 청사 이전을 따라 상가 건물들도 신축된 터라 가게들이 오래되지 않은 데다 그나마 있던 가게들도 하루가 멀다 하고 문을 닫기 때문이다. 사실 떠밀리듯 동네 자영업자가 된 이들의 노하우란 별 볼 일 없어서, 임대료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가게들에서 간판도 주인도 바뀌는 일이 매일같이 벌어진다. 폐업하는 자영업자들을 보면 마음 한편이 착잡하다. 하지만 월급쟁이의 지갑은 요즘 특히나 더 별 볼 일 없어서 아무 가게나 문을 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