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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격차 시대 만든 윤석열의 ‘양극화 해소 쇼’
윤석열 대통령이 임기 후반 국정 목표로 ‘양극화 해소’를 제시했다. 윤 대통령은 “정부가 직접 개입을 해서라도 임기 후반기에는 소득·교육 불균형 등 양극화를 타개하기 위해 전향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실은 서민·청년·중소기업을 지원할 정책 리스트를 만들고 있고, 국회 예산안 심사에서 여야의 양극화 관련 사업을 수용하는 것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느닷없는 태세전환이다. 2년 반 동안 국정운영을 하면서 양극화가 얼마나 심각해졌는지, 국민살림이 얼마나 나빠졌는지 몰랐단 말인가. 분노가 치밀 정도로 어이가 없다.대통령이 양극화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취임사에서 “우리나라는 지나친 양극화와 사회 갈등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협할 뿐 아니라 사회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했다. 여기까지는 무난했으나 해법은 ‘안드로메다’였다. “빠른 성장 과정에서 많은 국민이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고, 사회 이동성을 제고함으로써 양극화와 갈등의 근원을 제거할 수 있다.” ... -
통일은 평화의 반대말이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끝나기 무섭게 38선으로 분단된 뒤 남북은 각자의 근대 국민국가를 세웠다. 같은 정체성을 가진 ‘국민’이 될 기회도, 유일한 통치기구가 일정한 영토를 통제하며 물질적 복리를 제공하는 단일 ‘국가’의 경험도 남북 주민들은 갖지 못했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언어와 출판문화를 공유함으로써 국민의 집단 정체성이 형성된다고 봤지만, 분단 이후 남북 주민들은 같은 신문·잡지와 방송을 접할 수 없었다. 같은 한글을 쓰되, 그에 담긴 사상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한국전쟁 3년간 경남 일부와 제주도를 제외한 전역에서 전쟁으로 가족, 이웃, 친척을 잃지 않은 한국인은 없다시피 했다. 북한은 더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 남북의 적대성은 극단화됐고, 한쪽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으면 통일이 불가능한 구조가 만들어졌다. 통일은 평화의 반대말이 됐다. 이 엄연한 사실을 모른 체하며 남북은 수시로 ‘통일론’을 띄웠다. 전후 한국보다 앞서 경제성장을 달성한 북한이 먼저 통일 공세를 펼쳤으나 19... -
한·일 ‘아베 유훈 체제’의 등장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지난주 서울 방문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3월 강제동원 배상 제3자 변제를 시작으로 ‘아낌없이’ 내줬지만 기시다는 물컵의 ‘나머지 반’을 채우지 않은 채 돌아갔다. 이는 2019년 7월 아베 신조 총리의 수출규제로 시작된 한·일 역사전쟁이 한국의 굴복으로 일단락된 것이자, 다시는 사과하지 않겠다는 ‘아베 독트린’이 관철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일관계를 승패의 관점에서 평가하는 것이 과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적어도 과거사 문제에선 ‘제로섬’ 관계가 존재한다고 본다.윤석열 외교는 아베가 짜놓은 일본의 대외전략이 완성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윤석열 정부가 2022년 12월 발표한 ‘자유, 평화, 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2012년 아베가 만든 ‘인도·태평양 구상’의 복제판이다. 인도·태평양 구상은 일본 민주당 정부의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이 중·일 갈등으로 좌초한 뒤 총리에 오른 아베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만... -
사도광산, ‘위생처리’되는 역사
지난달 20일 독일 베를린 국방부 청사에서는 2차 세계대전 중 히틀러 총통 암살을 기도했다가 희생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 등에 대한 독일 정부 추모식이 열렸다. 슈타인마이어 대통령, 숄츠 총리 등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의인들을 기렸다. 영화 <작전명 발키리>(2008)로도 알려진 사건은 프로이센 귀족 출신 군인들로 구성된 비밀결사 ‘크라이사우 서클’이 주도했다. 슈타우펜베르크는 1944년 7월20일 히틀러가 작전을 주재하던 회의실에 폭탄이 든 가방을 두고 나온다. 폭발을 확인한 뒤 공모자들과 쿠데타 계획(발키리 작전)을 실행했지만, 부상에 그친 히틀러 측 반격으로 그날 밤 붙잡혀 즉결 처형된다.독일 정부가 ‘발키리’ 작전 80주년을 성대하게 기념한 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재무장에 나선 독일이 ‘히틀러식 패권주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하려는 의도다. 유럽연합의 중추인 독일이 재무장까지 하는 상황에서 상생과 공영의 유럽을 추구하겠다는 의... -
여권발 ‘핵무장 논의’의 공허함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 가능성이 커지면서 여권 일각에서 핵무장론이 다시 불거지고 있다. 트럼프가 집권하면 북한 핵을 묵인하는 방향으로 북·미가 타협할 것이고,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도 있어 안보 불안이 커진다는 가정이 주된 전제다. 그러나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기 전에 핵개발을 이처럼 떠들썩하게 공론화할 일인지 의문이 든다. 어느 나라건 핵개발은 극비리에 추진돼왔기 때문이다. 북한, 인도, 이스라엘은 물론이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도 핵개발 착수부터 알제리에서 핵실험을 마칠 때까지 십수년간 비밀을 유지했다. 미국이 눈치를 챘지만 샤를 드골 대통령이 미국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회담하기 전까지는 공론화하지 않았다.박정희 정부의 핵개발 책임자인 당시 경제수석 오원철은 1972년 초 핵개발에 착수할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국방과학연구소 등 7개 연구기관에 과제를 분산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퍼즐조각처럼 분산된 연구과제를 일일이 끼워 맞춰보지 않으면 핵개발임... -
‘침 뱉기’ 말고 할 줄 아는 게 뭔가
문재인 전 대통령이 최근 펴낸 회고록에는 2018년 9월 평양공동선언에 담기지 않은 구두 합의가 나온다. 당시 남북 정상은 공동성명에 담긴 ‘영변 핵시설 폐기’를 북한과 미국의 전문가·기술자들이 공동 작업으로 하는 방안에 뜻을 모았다고 한다. 이는 이듬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직후 리용호 북한 외무상의 기자회견에서도 확인된다. 미국 전문가들은 북한 영변의 핵활동 이력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되고, 따라서 다른 쪽으로 분산돼 있을지 모를 핵물질이나 핵무기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북한 핵의 전모를 미국이 들여다볼 기회이니 투명성 면에서도 ‘핵 리스트’ 제출에 버금가는 효과라고 할 수 있다.미국 내 북한 핵 최고 전문가인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전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장)는 2007년 8월 영변 방사화학실험실(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시설)을 방문한 뒤 이 시설들을 불능화하는 데 최소 1년, 많게는 4~5년이 걸리고 완전 폐기 및 해체·정화 작업까지 포함하면 10년 이상 걸... -
윤석열의 ‘중산층 죽이기’
22대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참패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스윙보터가 많은 중산층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윤석열 정부의 ‘중산층 죽이기’ 정책에 대한 위기의식이 컸던 것이다. 세수결손으로 쪼그라든 재정의 상당 부분을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드는 데 돌리면 중산층·서민에게 돌아갈 몫이 줄어든다는 건 초등학생들도 아는 ‘제로섬’ 산식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뭘 알고, 모르는지’를 모르는 데다 툭하면 격노하는 통에 교정받을 기회도 없던 윤석열 대통령은 ‘감세가 중산층 정책’이라는 희대의 망언을, 선거를 코앞에 두고 쏟아냈다. 사람들의 ‘분노 뚜껑’이 열리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왜 부자들에게 면세를 해주냐, 그 이익은 결국 어려운 사람들이 다 보게 돼 있다. 종부세 대상 중에 거의 대부분 그냥 중산층이다.”(3월19일 민생토론회) 윤 대통령 발언에 고개를 끄덕일 중산층이 얼마나 됐을까. 부자감세 이익이 ‘결국 어려운 사람들’에게 돌아간다는 ‘퀀텀점프’식 화법도... -
미국이 우리 편이 아니게 될 때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 담당자들이 최근 내놓는 발언들은 ‘북한 비핵화’ 목표를 폐기하려고 마음먹은 것처럼 들린다. 대북협상을 총괄하는 정 박 국무부 차관보는 “오판이나 우발적 확전 위험을 줄이기 위한 위험 감소를 포함해 제재(완화)나 신뢰 구축, 인도주의적 협력”에 대해 북한과 대화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3월18일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 팟캐스트). 미라 랩 후퍼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선임보좌관도 “역내 및 전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면 비핵화를 향한 ‘중간 조치’도 고려할 용의가 있다”고 했다(3월5일자 중앙일보). 후퍼가 말하는 ‘중간 조치(interim steps)’는 핵 동결과 군축이다. 북한의 핵무력을 동결시킨 뒤 핵무기 감축을 협상 목표로 삼겠다는 뜻이다.그렇다면 앞으로 열릴 북·미 협상은 ‘비핵화’가 아니라 ‘핵군축’으로 성격이 바뀌게 된다. ‘행동 대 행동’ 방식으로 북한은 핵동결, 미국은 제재 해제를 주고받을 것이다. 이것은 2019년 실패로... -
어떤 다큐의 ‘역사 거꾸로 세우기’
일제강점기 대부분을 미국에서 보낸 이승만은 미·일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한국의 독립은 불가능하므로 무력투쟁은 쓸모없다고 여겼다. 그는 안중근 의사가 “서구에서 많은 존경을 받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이 미국 여론을 악화시켰다고 비판했고, 윤봉길·이봉창 의거가 일본의 탄압만 초래할 것이라는 항의서한을 임시정부에 보냈다. 일본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안온한 미국 땅에 줄곧 머물렀던 이승만은 전 가산을 처분한 뒤 간도 땅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한 이회영이나 홍범도·김좌진, 의열단의 시련을 알 턱이 없었다. 상하이 임시정부 대통령이 돼 독립운동에 합류할 기회가 있었지만 현지에 잠깐 체류했을 뿐, ‘나는 외교를 할 테니 독립투쟁은 알아서들 하라’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이승만이 미국에서 주로 해온 것은 청원 외교였다. 1920년 미국 사회에서 아일랜드 독립투쟁에 관심이 커지자 이승만은 아일랜드 독립 결의안에 편승해 한국도 독립시켜달라고 미 의회에 청원했으나 부결됐다. 생소한 아시아... -
전쟁이 ‘빌드업’되고 있는 한반도
1949년, 남북한은 ‘작은 전쟁’으로 불릴 정도로 격화된 38선 충돌을 통해 전쟁 에너지를 축적해 갔다. 김일성은 1949년 신년사에서 “모든 것을 국토완정(完整)을 위해 바치자”면서 ‘국토완정’을 13차례 언급했다. 신년사를 기점으로 국토완정론은 북한의 최대 슬로건이자 주민을 총동원하는 이데올로기가 됐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을 계기로 반공국가 체제를 확립한 이승만 정권은 1949년 내내 ‘실지회복’ ‘북벌’ 구호를 내걸었다. 반민특위 해산, 국회 프락치 사건, 김구 암살 등 정권 도전세력을 진압하던 시기와 겹친다. 대통령과 군 지도자들의 언행은 일선 지휘관들의 공격 성향을 강화했다.미·소 양군의 38선 철수는 충돌의 방아쇠였다. 1949년 1월19일 대북 특수공작기관이 주도한 ‘해주 의거’를 기점으로, 남북은 많게는 수천명을 동원한 전투를 1년 가까이 전개했다. 1949년 5월 연대급 병력이 동원된 개성 전투는 전면전 직전까지 갔다. 충돌이 발생한 옹진반도, 개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