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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의 위대한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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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숨의 위대한 이웃]검은 개와 마지막 정류장
    검은 개와 마지막 정류장

    나는 멀리서 왔다. 누구나 멀리서 온다. 멀리서 와서, 잠시 잠깐 ‘착지’했다 멀리 떠난다. 아무도 서 있지 않는 텅 빈 정류장에 버스가 머무는 시간보다 잠시 잠깐이다. 그 잠시 잠깐 사이엔 무수한 ‘때’가 있다. 크게는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코헬렛 3장 2절). 태어날 때와 죽을 때 사이엔 눈금자의 눈금처럼 헤아릴 수 없는 때가 있다. 울 때와 웃을 때, 노래할 때와 노래하지 않을 때, 떠날 때와 머물 때…. 심을 때와 심긴 것을 뽑을 때 사이엔 때와 함께 우리가 아는 계절과 알지 못하는 계절이 있다.이곳엔 오래된 정류장이 있다. 그리고 정류장만큼이나 오래된 슈퍼가 있다. 그 슈퍼에는 백발의 여인이 있다. 슈퍼에서는 정류장을 지나가는 몇개 안 되는 버스들의 버스표를 판다. 여인은 첫 버스가 정류장을 지나가기 전에 슈퍼 문을 열고, 마지막 버스가 지나가고 나서야 슈퍼 문을 닫는다. 밤이 꽤 깊어서야 정류장을 지나가...

    2024.05.01 21:35

  • [김숨의 위대한 이웃]‘참외와 오키나와 소년’ 우에즈 노리아키씨
    ‘참외와 오키나와 소년’ 우에즈 노리아키씨

    “쇼와 18년(1943년) 여름방학이었을 겁니다. 바닷가에서 수영하다 참외를 먹고 있었습니다. 여자애가 먹고 싶어 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습니다. 가즈오의 여동생이었습니다. 물이 풍부하고 쌀농사를 지어 자급자족이 가능한 섬이었지만, 태평양 전쟁 때문에 다들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나는 참외를 돌로 쪼개 여자애에게 나눠줬습니다.”1936년생인 우에즈씨의 고향은 구메지마(久米島). 오키나와 본섬에서 서쪽으로 100㎞ 떨어진 면적 63.5㎢인 섬이다. 눈빛이 정직하고 입매가 우아한 소년이 눈부신 태양빛 아래서 참외를 쪼개던 그 여름, 그 섬엔 조선인 구중회씨 가족이 살았다. 그 섬에 이주해 일용잡화 행상을 하던 구(具)씨의 이름을 그는 다니가와 노보루로 기억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오키나와에는 ‘군부’와 ‘위안부’를 비롯해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다. 가즈오는 우에즈씨의 동급생으로 구씨의 장남이었다. “가즈오에게는 여동생이 둘 있었습니다. 아야코, 야에코. 그리고...

    2024.04.03 20:26

  • [김숨의 위대한 이웃]“그녀는 느리다, 아름답다”, 임하은씨
    “그녀는 느리다, 아름답다”, 임하은씨

    느린 존재들 대개는 우아하고 아름답다. 구름이, 달이, 나무가, 판다가 그렇듯 느린 존재들은 자신의 주변을 정신없이 종횡무진하는 존재들을 느리게 ‘스쳐지나가며’ 자신이 지닌 아름다움을 기꺼이 무상의 선물로 남긴다. 스쳐지나감. 그것은 고난도의 예술적 기술이다. 그것은 공기의 기술이고, 바람의 기술이며, 안개의 기술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존재들 또한 ‘스쳐지나가도록 내버려두는’ 무(無) 집착의 태도에 도달한 존재만이 완벽하게 펼쳐보일 수 있는 기술이다. 오늘도 고난도의 기술을 펼쳐보이며 지하철역사 안을, 계단을, 거리 한복판을 걸어가는 그녀(임하은씨, 27세)는 여지없이 아름답다.“아름다움은 사랑으로부터 온다.”(<지극히 낮으신>, 크리스티앙 보뱅) 그녀는 ‘어머니라는 사랑’, 비교 불가능한 경지의 그 사랑이 빚는 신비하고 절대적인 아름다움 속에서 자라났다. 그 아름다움은 자연이 펼쳐보여주곤 하는 아름다움과 닮았다. 그녀가 다섯 살 때,...

    2024.03.06 20:17

  • [김숨의 위대한 이웃] ‘그릇 빚는 남자’ 박현원 도공
    ‘그릇 빚는 남자’ 박현원 도공

    ‘살린다, 살린다…’. 흘러내리는, 무너져 내리는 흙덩이를 뭉개지 않는다, 두 손으로 끝까지 일으켜 세운다. 그릇으로, 화병으로, 찻잔으로 살려낸다. 허물어지려는 흙덩이를 소롯이 살려내는 건 고도의 기술을 요한다. 물레가 아닌 손작업을 주로 하는 데다, 가볍지만 내구성 강한 도자기를 추구하고 빚기 때문이다. 그렇게 탄생시킨 도자기가 진열장에 고이 모셔져 있는 것을 그는 바라지 않는다. ‘매일 보고, 매일 쓰는 것이 귀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는 자신의 도자기를 사람들이 아낌없이 보고, 아낌없이 쓰기를 바란다.‘받아들인다’. 나무가 깎아서 없애는 작업이라면, 흙은 더하는 작업이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번번이 창작자의 의도를 벗어나거나 배반한다. ‘불’의 개입과 역할이 커서다. 실망과 아쉬움을 주곤 하지만 그는 받아들인다. 깨뜨리지 않는다.박현원 도공(1958년생)의 ‘받아들임’은 도공의 길을 걷기 이전부터 시작된다. 중학교 1학년 때 등록금을 못 내...

    2024.02.07 19:56

  • [김숨의 위대한 이웃] ‘만두 빚는 중국 여인’ 왕회이제씨
    ‘만두 빚는 중국 여인’ 왕회이제씨

    온 세상에, 그녀가 있는 춘천 후평동 거리에도 눈이 내린다. 만두가게 앞으로는 꽤 여러 대의 버스가 수시로 지나간다. 그녀는 버스들의 번호를 살피지 않는다. 그녀는 버스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 거리에서 만두가게를 낸 지 5년이 넘었지만 버스를 타고 그 거리를 떠나본 적이 없다. 찜통에서 만두가 쪄지는 사이에 아주 잠깐 담담히 거리를 내다본다. 마침 버스가 지나간다. 그녀는 버스를 타고 멀리 가는 상상에 잠긴다. 멀리, 바다 앞까지 간다. 중국 길림성에서 태어나서 자란 그녀는 벌써 17년 전인 서른 살이 되던 해에 생전 처음 바다라는 걸 봤다. 바다의 이름을 몰라서 ‘그냥 동쪽 바다’로 기억하는 바다가 그녀는 보고 싶을 때가 있다.그녀는 바다를 보러가고 싶지만 만두를 빚어야 한다. 그녀는 만두 빚는 중국 여인. 그녀가 춘천에서 만두 빚는 중국 여인으로 살고 있는 것은 순전히 사랑 때문이다. “밥 먹었어?” “보고 싶네.” 휴대전...

    2024.01.10 19:56

  • [김숨의 위대한 이웃] 부황남 “같이 밥을 먹어요가 가장 좋아요”
    부황남 “같이 밥을 먹어요가 가장 좋아요”

    “엄마아빠가 있어서 왔어요. 같이 살려고 왔어요.” 소년은 지난 6월에 한국에 왔다. 엄마아빠가 한국에 있어서, 엄마아빠와 한국에서 같이 살기 위해서였다. 올해 12세인 소년은 엄마아빠와 같이 살기 위해 무려 12년을 기다렸다. 소년을 우리는 중도입국청소년이라고 부른다. 외국에서 한국에 이주해 살고 있는 부모와 함께 살기 위해 청소년기에 한국으로 이주한 청소년인 것이다. 소년이 태어난 곳은 베트남 남딘. 하노이에서 남동쪽으로 90㎞ 떨어진 곳. 소년의 아빠는 14년 전, 그가 스물한 살이던 해에 한국어시험에 합격하고 근로자 비자로 한국에 왔다. 그때 소년은 아직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소년이 태어나던 날 아빠는 한국에 있었다. 소년이 태어난 날짜와 시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아빠는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전화로 전해 듣고 자신이 믿는 하느님께 기도했다. 소년은 아빠를 여섯 살 때 처음 봤다. 아빠를 본 적도 없는데 소년은 아빠가 보고 싶었다. “난 아...

    2023.12.13 20:25

  • [김숨의 위대한 이웃]현규씨
    현규씨

    “나는 내가 본 것, 내가 계속 지켜본 것, 내가 경험한 것, 그래서 내가 알게 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거예요. 내가 느낀 걸, 내가 깨달은 걸 이야기할 거예요.” 2005년에 경기 양평의 ‘수풀로 운심리(한강생태학습장)’에서 숲 해설가가 된 현규씨. ‘난 앵무새가 아니야, 난 녹음기가 아니야’라는 저항이 그녀의 깊은 내부에서 터져 나온 것은 3년쯤 됐을 때다. 그녀는 앵무새가, 녹음기가 되지 않으려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 나무는 왜 이곳에 서 있을까?’ 그녀는 알고 싶어서 그 나무를 보러 갔다. 오늘도 보러가고,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렇게 그녀는 15년 동안을 거의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수풀로 운심리에 머물며, 억새와 버드나무 몇 그루뿐이던 그곳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풍성한 숲으로 성장하는지 지켜봤다. 팔당호가 만수가 되면 물에 잠기는 그곳에서 물에 실려 온 온갖 씨앗들...

    2023.11.15 20:25

  • [김숨의 위대한 이웃] 소식씨
    소식씨

    “오늘도 나를 씻기고, 나를 먹이고 … 오늘도 … 그게 중요한 일이지. 그게 의미 있는 일이지. 눈 뜨며 ‘오늘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기도를 드리고.” 소식씨는 그래서 오늘도 정성껏 자신을 씻기고, 밥을 지어 먹인다. 불과 두 달 전까지 그녀는 밥을 넘기지 못했다. 작년 10월30일 아침 7시 이후로 밥알이 목구멍으로 삼켜지지 않았다. 그날, 그 시간에, 그녀는 딸 정아의 ‘모르는’ 친구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이태원에서 사고가 났다고 했어. 참사가 일어난 그곳에 내 딸 정아가 있었다고 했어.” “정성껏 화장을 하고, 블라우스에 치마를 입고, 스타킹에 구두를 신고 손님을 맞았지.” 소식씨는 1988년 8월부터 2022년 5월까지 34년 동안, 대전 한민시장에서 ‘꽃신’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남녀노소 신발을 팔았다. “내일 신을 신발이 급히 필요한 손님을 기다리며” 밤 10시 전에는 셔터를 내리지 않았다. “가장 두려워했던 거? ‘그 집 신발 비싸, 그 사람 맘 변했어.’...

    2023.10.18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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