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탄 선물로 카타르시스는 어떠한가
카타르시스(katharsis)! 연민과 공포의 정화, 혹은 찌꺼기의 배설을 뜻하는 그리스 말이다. 카타르시스는 통상 비극의 개념으로 이해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을 “서사가 아니라 연기를 통해서, 연민과 공포로 생겨난 그런 감정들을 정화시킨다”(6장 1449 b)고 정의해 놓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정화’는 크게 세 갈래로 이해된다. 혹자는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그런 감정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드라마를 구성하는 것으로, 혹자는 드라마를 보는 관객의 마음에 생겨난 연민과 공포를 해소하는 것으로, 혹자는 종교적 차원의 정화로 풀이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카타르시스에 함축된 정치적 기능에 대해서는 상세히 논하지 않는다. 드라마가 아닌 현실에서 겪는 두려움과 공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에 대해 한마디 정도는 해줄 법도 한데 말이다. 내 생각에, 카타르시스는 드라마의 기능을 넘어서 정치적인 정화 작용까지를 포괄하는 개념... -
일어선 국가
키케로는, 시민의 자유(libertas civium)가 억압되면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시민들이 들고일어나는데, 이를 “일어선 국가(concitata civitas)”라고 불렀다. 키케로의 말이다.“여기에서부터다. 왕정에서 공화정으로의 저 새로운 전환이 비롯되었다. 청자여, 자연적인 운동의 순환과 방향을 저 발단에서부터 살펴보고 통찰하라! 이는 국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핵심 사건이다. 오만왕의 큰아들이 … 루크레티아를 강제로 범했다. 고귀하고 정숙한 여인은 저 불의의 폭행에 맞서 죽음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이를 보고 한 사람이 의연히 일어났다. 덕과 능력에 있어서 탁월했던 브루투스였다. 그는 질곡의 노예 상태에서 시민들을 구원했다. 국가로부터 어떤 공직도, 어떤 중책도 맡고 있지 않은 사인(私人)에 불과했다. 하지만 공동체 전체를 구했다. 시민들의 자유를 지키는 일에 공사(公私)의 구분이 없음을 가르친 최초의 인물이다. 그가 주도하고 지도하여 일어... -
단어의 시민권에 대하여
서기 1세기 로마에 포르켈루스(Porcellus)라는 사람이 살았다. 싸움 잘하는 장군도, 말 잘하는 정치가도, 노래 잘하는 가수도, 멋진 근육의 검투사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로마 역사의 한 귀퉁이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사연인즉 이렇다. 그는 문법 학교의 교사였다. 까칠하고 꼬장꼬장한 라틴어 ‘훈장’이었다. 특히 사람들이 라틴어 문법에 어긋나는 말을 하거나 어떤 단어나 문장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자신의 이익이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거나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말과 언어를 자의적으로 사용하거나 해석하는 것에 대해서는 목숨까지 내놓고 맞섰다.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말이다. “포르켈루스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연설에서도 잘못을 찾아내어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아테이우스 카피토가 ‘황제의 말은 라틴어 문법에 맞는 표현이고, 설령 잘못된 말이라 할지라도, 황제가 말하는 그 순간부터 올바른 라틴어가 될 것’... -
어떤 박절했던 결단에 대하여
어느 날 로마 왕실의 기둥에서 뱀이 나왔다. 기이한 징조였다. 이런 징조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공적인 일에 해당하고, 그 해석은 에트루리아 출신의 사제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왕은 자신의 아들들을 델포이의 신전에 파견했다. 왕은 이 사건을 사적인 일로 판단했지만, 이 판단은 국가를 공동의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불의한 것으로 여겨졌다. ‘각자의 것은 각자에게(suum cuique)’라는 정의의 원리에 따라 공과 사는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하는데, 왕의 판단은 이에 위배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적인 일을 사적으로 처리한 왕이 타르퀴니우스였다. 이에 맞서 싸운 사람이 로마 공화정의 아버지인 브루투스였다.“그는 먼저 그곳에서 인민의 맹세를 낭독했다. ‘누구든 왕이 되려거나 자유에 위험이 되는 사람이 로마에 있는 것을 용납하지 말라. 이를 전력을 다해 지키고, 이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경시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는, ‘만약 나라 사랑이 앞서지 않았다면, 자신은 인간적인... -
말의 한계에 대하여
말의 한계는 어디에서 드러날까? 그 답은 소리와 이미지 사이에 있는 차이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차이는 오비디우스의 ‘나르키소스와 에코’의 이야기에서 잘 읽을 수 있다. 이미지를 중시했던 나르키소스와 목소리의 상징인 에코의 슬픈 사랑은 인식 지평에서 이루어지는 시각 이미지와 청각 이미지의 밀당 관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미지를 소리로 포착하려고 하면, 그 소리가 보여주는 것은 이미지의 끝모습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말은 이미지의 끝자취를 지시하는 무엇에 불과하다는 것. 말로는 결국 실체를 붙잡지 못한다는 것. 생각도 말에 남은 이미지의 마지막 흔적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이, 어쩌면 이미지의 흔적을 뱅뱅 도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사물의 세계란 사실 이미지의 흔적에 불과하기에. 이는 데리다라는 철학자가 주목한 물음이기도 하다. 릴케가 <어린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들>에 남긴 말이다. “대개 사람들이 우리에게 믿게 하려 ... -
라틴어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라틴어도 처음에는 가난했다. 그 시절에 로마인들이 했던 일은 그리스 작가를 모방하고 번역하는 것이었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 직후의 한글 작품 대부분이 <월인석보> <두시언해>와 같은 언해들이었던 한국어의 초기 상황에 비견된다. 아무튼, 일찍이 그리스어는 일상생활에서도 라틴어를 압도했는데, 카이사르는 브루투스의 칼을 맞는 순간에도 그리스어로 “아들아, 너마저(kai su, teknon!)”(수에토니우스 <아우구스투스전(傳)>, 82장)라고 했다고 한다.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라틴어의 가난함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그리스인들이 발견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라틴어로 포착하여 선명하게 표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네. 특히 처음 접하는 사태와 말의 가난함으로 인해 단어들을 자주 새롭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네.”(<사물의 본성에 대하여> 1권 137~139행)호라티우스도 라틴어의 가난함 때문에 아... -
다시, 소문(fama)의 시대다
숨기면 숨길수록 커지는 것이 소문이다. 베르길리우스의 말이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강해지고 퍼지면 퍼질수록 세진다. 처음엔 겁이 많고 왜소하지만 금세 하늘을 찌른다. 발로는 땅 위를 걷지만 머리는 구름에 가려져 있다. (…) 빠른 발과 날랜 날개를 가진 무시무시하게 거대한 괴물이다. 몸에 난 깃털만큼 많은 잠들지 않는 눈과 소리를 퍼뜨리는 혀와 입과 쫑긋 선 귀를 깃털들 아래에 가지고 있다. (…) 지붕 꼭대기와 높은 성탑에 올라앉아 망을 보며 온 나라를 경악하게 만든다. 사실을 전하지만, 거짓말과 꾸민 이야기도 퍼뜨린다.”(<아이네이스> 제4권 175~189행)감추면 감출수록 퍼지는 것이 소문이다. 소문이 이미 도시의 골목, 술집의 술자리, 집 안의 식탁에 자리 잡았을 때에는 그것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괴물로 자라나 버린다. 그때에는 사실 여부의 논쟁도 부질없다. 진위에 대한 다툼은 본성적으로 소문의 관심 사항이 아니다. 오비디우스에 따르면,... -
미친 헤라클레스
그리스 속담에, ‘벗에게는 사랑을, 적에게는 증오를 주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전시(戰時)에 힘을 발휘하는 전우론(戰友論)이었다. 자신의 애인이자 전우였던 파트로클로스를 죽인 헥토르에게 되돌려준 아킬레우스의 복수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런데 이 전우론을 평시(平時)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특히 국내 정치를 대외 전쟁으로 인식하도록 만들고, 내 편을 지지하지 않거나 반대하는 진영과 정적을 동포이자 동료 시민이 아니라 죽이거나 제거해야 하는 적으로 보게 만드는 인식의 뿌리가 실은 전시의 전우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과 정치는 다르다. 정적도 동포이고 동료 시민이다. 에우리피데스의 <미친 헤라클레스(Heracles Mainomenos)>는 이 차이에 대한 인식이 왜 필요한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전시의 전우관이 평시의 정치에 악용되어 정적을 적군으로 보게 만드는 인식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편에게는... -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한 사람만의 국가는 국가가 아니지요!”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 나오는 말이다. “이 나라를 내가 아닌 남의 뜻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고?”(736행)라는 크레온의 물음에 대한 그의 아들 하이몬의 답이다. 이에 크레온이 “국가를 통치하는 자가 바로 국가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이냐?”(738행)라고 되묻자, 하이몬은 “사막에서라면 멋대로 독재할 수 있지요”라고 되받는다. 크레온은 격노한다. 이성을 잃고 크레온이 비극적 불행을 마주하는 장면으로 작품은 막을 내린다. 하이몬은 자신이 사랑하는 안티고네를 따라 지하세계로 가버린다. 그의 어머니도 사랑하는 아들의 뒤를 따른다. 크레온의 말이다.“내가 너를 죽였구나. 아들아! 뜻하지 않았건만/ 당신도! 여보, 아아, 기구한 운명이여!/ …/ 손대는 일마다 잘못되었구나.”(1340~1345행)자신을 국가의 주인으로 착각한 크레온도 자신이 “국가가 임명한 자”(666행)라는 점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권력... -
늑대 정치를 아시나요
‘약자에게는 동아줄이지만 강자에게는 거미줄인 것이 법이다.’ 솔론의 말이다. 자신에게 향한 법은 거미줄처럼 찢어버리고 다른 사람에게는 법을 동아줄로 이용하는 통치자를 그리스인들은 튀란노스(Tyrannos)라고 부른다. 독재자를 뜻한다. 튀란노스들 중에는 완력과 폭력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자도 있지만, 대개는 말기술과 법기술을 자신의 통치술로 삼는다. 대개 자신의 지지 세력에 의지해서 다른 세력을 외적으로 돌리거나 정치적인 희생양(scapegoat)으로 만드는 말기술과 법기술을 자신의 통치술이라고 자랑한다. 이들에 대한 플라톤의 말이다. “이들도 마찬가지로 시민 대중이 자신의 말에 잘 넘어간다는 것을 믿고 같은 나라 사람의 피에 자신의 손을 적시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이들은 늘 그렇듯이 누군가를 무고하고 법정으로 끌고가서 살해한다. 그렇게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뒤에 혀와 입으로 같은 나라의 사람의 피를 불경스럽게 맛본다. (…) 이런 짓을 하던 이들은 정적에게 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