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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을 밝힌 기술
언제나 연말은 기억할 새도 없이 쏜살같이 지나가곤 했는데, 올해 12월만큼은 유난히 더디게 느껴진다. 아마 나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모두가 공유하는 감각일 것이다. 12월3일 계엄령 선포부터 14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에 이르기까지 한날한시도 뉴스에서 눈 뗄 겨를이 없었다. 평일엔 뉴스를 계속 들춰보다 주말이면 송년모임 대신 여의도 집회에서 지인들을 만났다. 잊고 지내던 오랜 인연들도 여의도 골목 어귀에서 우연히 마주쳐 반가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사람들이 여의도에 인산인해를 이뤘던 만큼, 화장실이며 카페 등 온갖 장소가 만원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광장에 모인 시민들을 위해 여의도 내 건물에서 자발적으로 화장실을 개방해주었다는 점이다. 또한 개방된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손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화장실 지도 또한 만들어졌다. ‘커뮤니티매핑센터’가 기획한 화장실 지도는 여의도에 이어 최근 집회가 이어지는 광화문과 안국역 일대까지 안내됐다. 그외에 시민들... -
기업인의 자리는 기업이어야 한다
전 세계가 주목한 미국 대선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다. 개인적으로는 그 소식보다도 이후 일론 머스크가 ‘정부 효율부서’의 장관으로 임명되었다는 뉴스가 더 놀라웠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머스크는 ‘테슬라’와 ‘X(전 트위터)’의 CEO이며 화성 이주 프로젝트를 위해 ‘스페이스X’를 창업한 바 있다. 그런 그가 지난 대선 트럼프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것은 그다지 새로울 게 없는 소식이지만, 정부 기관의 요직에 임명된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다. 기업과 정부가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에 있는 것도 경계해야 하는데, 심지어 정부 기관에서 결정권을 행사하는 자리에 거대 빅테크의 수장이 임명되다니? 이것은 그 거리가 가까운 것을 넘어서, 거리 자체를 없애버리는 시도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국가는 공동체를 위해 존속하고 기업은 이윤을 내기 위해 운영된다. 이 둘의 역할과 목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국가는 기업이 이윤을 과도하게 추구하다가 공공성을 해치는 일이 ... -
청년들의 문이 닫히고 있다
정보기술(IT) 업계 사람들이 즐겨 보는 ‘GeekNews’라는 채널이 있다. 해외의 ‘HackerNews’를 모티브로 개설한 것으로, 테크업계 사람들이 관심 있게 볼만한 뉴스, 블로그, 기술 토픽 등을 소개한다. GeekNews에 얼마 전 “당신 회사는 주니어 개발자가 필요해요(Your company needs Junior devs)”라는 제목의 칼럼이 공유됐다. 신입 개발자의 역할은 인공지능(AI)으로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고 믿으며, 고급 개발자로만 팀을 구성하려는 실리콘밸리의 리더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해당 포스팅의 필자는 신입 개발자를 영입하고 교육하는 일은 팀 내 지식을 순환하게 하고 시니어의 역량 강화를 도우며 동시에 신선하고 창의적인 관점을 도입할 기회라고 강조한다.그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글 자체보다도 이러한 포스팅이 떠들썩하게 공유되는 분위기 자체가 낯설고 기묘하게 여겨졌다. 불과 몇년 전까지는 이렇게 신입사원의 필요성을 역설하지 않더라도,... -
아무도 그녀들을 능욕할 수 없다
지난주 수요일, 제17회 여성인권영화제의 막이 올랐다. 올해 여성인권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작품은 <나의 가해자 추적기(My Sextortion Diary)>로, 파트리시아 프랑케사 감독(이하 파티)이 직접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다큐멘터리다.파티는 Sextortion 범죄의 피해자다. Sextortion은 주로 ‘몸캠피싱’이라 불리는데, 피해자의 나체 사진 등을 유포하겠다며 협박하는 범죄를 일컫는다. 사건은 파티가 노트북을 도둑맞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식당 안에서 몇몇 남성들이 조직적으로 파티의 가방에서 노트북을 훔쳐간 일이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파티의 메일함으로 웬 e메일 하나가 날아든다. e메일에는 파티가 찍었던 사적인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도난당한 노트북이 해커의 손에 들어가면서 파티의 개인정보와 사진, 연락처 등이 모두 유출된 것이다.협박범은 시시각각 파티의 숨통을 조여오며 사진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하며 돈을 요구한다. 이런 와중에도... -
공공 DNA DB?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요즈음에는 기술 발전에 대해 회의감을 부쩍 느낀다. 하루가 멀다고 터져 나오는 딥페이크 성범죄 때문이다. 올해 5월 일명 ‘서울대 딥페이크 사건’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지난주에만 딥페이크 성범죄가 두 건이나 보도됐다. 피해자 얼굴을 합성한 딥페이크 영상을 보기 위해 무려 1200여명이나 채팅방에 참여하고 있던 인하대 딥페이크 사건, 동급생과 교사 얼굴을 음란물과 합성해 공유한 부산 중학생 딥페이크 사건이다.딥페이크라는 기술은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지만, 악의적으로 불법성착취 영상을 제작하고 공유하는 행태 자체는 우리 사회가 익히 보아왔던 것이다. 1997년 ‘빨간마후라’에 이어 2018년 ‘n번방’, 그 외에도 지금까지 여러 여성을 대상으로 한 불법성착취 영상 등. ‘성욕’만을 위한 일들이 아니다. 그 이면에는 왜곡된 권력욕이 도사리고 있다. ‘n번방’처럼 피해자를 직접 통제하고 지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러한 불법성착취 영상을 돌려보는 커뮤니티에서의 욕망마저 포괄한다... -
데이터센터의 전기는 눈물을 타고 흐른다
한국데이터센터연합회가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올해에만 우리나라에 민간 데이터센터가 총 24개 더 지어진다고 한다. 지금까지 전국에 운영 중인 데이터센터가 150여개인 것을 감안하면, 고작 1년 만에 기존 데이터센터의 16%가 추가 건립되는 셈이다. 데이터센터가 가파르게 늘어나는 것은 AI 산업의 영향이다. 초대규모로 데이터를 학습하고 운용해야 하는 AI 기술에 전 세계적으로 열띤 투자가 이어지면서 AI 서버를 가동하는 데이터센터 수요도 늘어난 것이다.잘 알려진 것처럼, 데이터센터는 ‘전기 먹는 하마’다. 서버를 운용하는 데에도, 열을 식히는 데에도 전기가 필요하다. 전기를 많이 사용한다는 건, 곧 전기를 생산하는 곳에서 그만큼의 전기를 날라와야 한다는 사실로 이어진다. 데이터센터를 짓는다고 전기가 어딘가에서 뚝딱 생겨날 리 없다. 전기를 나르기 위해서는 송전망을 이용해야 하는데, 여기에도 전력을 전달할 수 있는 한계선이 존재한다.우리나라의 데이터센터는 대체로 수도권에 ... -
게임계 길이 남을 악례, ‘배그’의 뉴진스 컬래버
뉴진스를 좋아한다. 도쿄돔에 가지는 못했지만, 일본에서 전해진 무대 소식을 듣고선 괜히 들떠 설렐 정도로. 그러나 뉴진스가 어린 나이에 데뷔한 데다 아직 미성년인 멤버도 있어, 그들의 무대를 즐기는 것이 미안해지기도 한다. 꼭 뉴진스가 아니더라도, 어린 아티스트를 향한 마음은 언제나 갈등의 연속이다.편치 않은 마음에 불을 지른 건, FPS 게임 ‘PUBG: BATTLEGROUNDS’(‘배틀그라운드’)와 뉴진스의 컬래버레이션이었다. 사전에 공개된 티저 영상에는 뉴진스 멤버들이 무대에서 춤추는 모습만 담겨 있었기에, 지난해 진행됐던 ‘배틀그라운드’와 블랙핑크의 컬래버레이션과 비슷한 정도라고 여겼다. 그땐 ‘배틀그라운드’에서 블랙핑크의 의상을 게임 속 캐릭터가 착용할 수 있는 아이템으로 판매했고, 더불어 블랙핑크 안무를 따라 출 수 있는 기능도 유료로 제공했다. 그러나 뉴진스 컬래버레이션은 달랐다. 의상과 안무를 판매한다는 점은 같았으나 여기에 멤버들의 얼굴을 캐릭터로 재현할 수 ... -
카카오는 알고 있었다
3년 전쯤, 가족 여행을 떠났을 때 일이다. 가족과 함께 예약한 방에 짐을 풀고 창밖을 보기 위해 커튼을 걷는 순간, 천장 모서리에 이상한 게 눈에 띄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벌집이었다. 살펴보는 중에 말벌이 쏜살같이 날아오기에 우리 가족은 비명을 지르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를 알리자, 호텔 직원도 놀라 달려왔다. 이후 호텔 측에서 취한 조치는 빠르고 정확했다. 먼저 방을 바꿔주었고, 119에 신고한 뒤 출동한 대원과 함께 벌집을 떼어냈다.그런데 만약 그때 호텔 측에서 벌집을 처리해 주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호텔을 이용하는 손님이면서도 쉼을 누리기는커녕 내내 불안에 떨며 방에 들어가는 것조차 꺼렸을 것이다. 벌이 벌집을 만든 건 호텔 입장에서도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고 해도, 벌집이 있다는 걸 인지한 이상 호텔 측에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도의적 의무가 생겨난다.올해 초 진실탐사그룹 ‘셜록’에서 서울대 딥페이크 범죄 사건에 대해 보도했다. 기사에 따르면... -
효율성이 높아지면 더 적게 일할 수 있는가
AI는 특정 분야에서의 업무 효율성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킨다. 여기에 이견은 없다. 나만 해도, 이전에는 10시간 남짓 걸렸던 개발 프로젝트를 여러 AI 개발 도구와 함께 하니 한두 시간 만에 뚝딱 완성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전에는 인터뷰 녹취록을 푸는 데에만 수어 시간이 소요되었는데, 지금은 네이버 클로바노트를 사용해 그 시간을 비약적으로 단축했다. 이제는 클로바노트로 녹취록의 초안을 만든 후 틀린 부분만 검수하면 되니 훨씬 편하기까지 하다.하지만 이러한 업무 효율성의 증대가 곧 노동량의 절감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다양한 AI 서비스를 이용하여 절약한 시간만큼, 그 빈자리에 다른 노동이 채워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MIT 경영대학원의 한 교수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더 효율적으로 일한다는 것이 곧 실제로 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는 불분명하다(it’s also unclear whether being more productive means you actually get... -
나는 내가 찍을 후보를 얼마나 알고 있나
평소 만날 일 없던 정치인들을 거리에서 자주 보니 지금이 선거철이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주요 사거리마다 후보의 얼굴과 정당의 색깔이 부각되는 현수막이 걸려있고, 곳곳에 원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후보자의 홍보물을 들고 걸어다닌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눈에 띄는 것에 비해 후보자가 어떤 정치를 추구하는지는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누군가는 홍보물의 첫 장에 정책 방향성이 아니라 ‘심판’이라는 단어를 배치했고, 또 누군가는 다른 정당에 대한 비판 메시지를 자신의 슬로건으로 걸었다. 홍보물에 새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희망찬 메시지보다 다른 정당에 대한 적개심이 더 진하게 인쇄된 듯했다. 하지만 정치인들이 그렇다고 시민들마저 이러한 흐름에 휘말리는 건 아니다. 후보자들이 정책을 말하지 않자, 어떤 이들은 자신의 팔을 걷어붙이고 후보자들에게 정책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특정한 사회문제 혹은 정책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직접 따져 묻기로 한 것이다. 어떻게? 바로 기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