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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이름의 회전목마
잠이 잘 들지 않는 밤에는, 빗소리나 조용한 음악을 들으며 잠을 청한다. 재클린 듀프레이의 첼로 연주들, 영화 <토니 타키타니>에 나오는 사카모토 류이치의 ‘솔리튜드(Solitude)’와 함께 자주 듣는 음악은 히사이시 조가 작곡한 ‘인생의 회전목마(人生のメリ-ゴ-ランド)’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메인 테마곡. 왈츠풍의 ‘인생의 회전목마’는 차분한 피아노 연주로 시작하여 활기찬 어린 시절에서 청년을 거쳐 절정에 이르렀다가 천천히 정리되었다가 다시 이어지는, 인생을 회전목마에 비유한 곡이다.어린 시절, 어린이대공원이나 에버랜드에 가면 회전목마를 탔다. 말 위에 앉아서 빙글빙글 돌아가면 나를 찾는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다시 돌아가면 또 만날 수 있었다. 조금씩 변하지만 회전목마에서 보는 풍경은 돌 때마다 같은 곳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더 이상 회전목마는 타지 않게 됐다. 빠르고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롤러코스... -
조용하게, 천천히 가는 사람들
지인들과 만나 대화를 하다가, 첫 기억이 무엇인지 묻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기억을 되짚어봤다. 유치원으로 가던 골목길의 낡은 풍경이 기억났다. 어린 시절, 마당에서 형과 뛰어놀던 기억도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니 화사한 빛이 떠올랐다. 아마도 어릴 때 살던 집의 마루였다. 홀로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온몸에 가득 맞고 있었다. 옆에 누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혼자서, 조용히, 햇볕을 즐겼던 걸까. 처음으로 가장 좋았던 기억인 걸까.이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생각하면서 근래에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고사성어를 떠올렸다. 돈과 명예에 매달리지 않고, 고요하고 평온하게 일상을 유지하며 살아가자는 정도의 의미. 오십이 넘으면 주변의 풍경이 조금씩 달라진다. 친구와 동료, 선후배의 부고를 수시로 듣게 되고, 세상의 많은 것이 나와는 무관한 세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는 우주의 티끌 같은 존재임을 더 많이 떠올린다.그런 생각을 하다가, 지난 10일 스웨덴 ... -
기억할 만한 작품 ‘로봇 드림’
9월이 시작되면서 자주 흥얼거린 노래가 있다. ‘Do you remember…’로 시작하는, 어스, 윈드 앤드 파이어(Earth, Wind & Fire)의 ‘셉템버’(September). “말해줘요. 당신은 기억하나요? 우리가 춤추던 9월에는 걱정 없는 나날뿐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춤추던 9월은 황금빛 꿈이 빛나는 날들이었다는 것을.” 가사는 아련하지만, 무척이나 흥겨운 곡이라 절로 몸이 들썩이며 리듬을 타게 된다. 1978년 발표하여 번들거리는 1980년대에 꽤 유행한 사랑 노래.현란했던 시절의 기억만으로 9월 들어 ‘셉템버’가 머릿속을 맴돈 것은 아니다. ‘셉템버’를 흥얼거리며, 다정한 개와 로봇을 생각했다. 올해 3월13일 개봉하여 4만8000명의 관객이 본 애니메이션 <로봇 드림>의 주제곡이 ‘셉템버’였다. 주제곡의 계절을 맞아서, 9월25일 메가박스 단독으로 재개봉을 했다.<로봇 드림>은 올해 아카데미 장편 애니메이션 부문 ... -
아무것도 없는 풍경의 아름다움
처음으로 일본에 간 해는 1998년이었다. 베니스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영화 <하나비>의 기타노 다케시 감독을 인터뷰하러 도쿄에 갔다. 당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가수 아무로 나미에의 스타일을 따라 하는 젊은 여성들이 활보하는 시부야, 만화 <시티 헌터>의 배경인 신주쿠, 첨단 전자제품과 애니메이션의 성지 아키하바라 등 도쿄의 중심가를 경탄하며 걸었다. 당시의 일본은 한국보다 앞서가는 선진국이었다. 화려한 거리와 느긋한 공원의 비일상적인 풍경,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상품들이 즐비한 세련된 상점도 모두 신기했다. 그 시절, 일본을 다녀올 때면 캐리어에 책과 DVD, CD가 가득 채워졌다. 새로운 문화와 트렌드를 알고 싶으면, 미국이나 일본을 가야 했던 시절이었다.이후 일본 여행을 자주 갔다. 일 년에 대여섯 번 넘게 가기도 했다. 도쿄와 오사카를 주로 갔고, 가끔 후쿠오카 정도. 선진국의 대도시에서, 당시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새로운 것을 ... -
완벽하지 않지만, 멋진 선택
우리는 무수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간다. 대부분은 인생에 큰 영향이 없다.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어떤 운동화를 살까, 비가 오는데 산책을 갈까 등등. 하지만 때로는 가벼운 선택이 인생의 경로 자체를 바꿔버린다. 우연히 본 영화인데 마음을 흔들어 삶의 방향이나 태도가 달라진다. 우연히 떠난 여행에서 인생의 파트너를 만나기도 한다. 어쩌면 선택은 우리 삶의 정체성일까.그때 선택하지 않은 길을 후회하기도 한다. 어리석게 자책에 사로잡혀 남은 인생을 고통으로 메우기도 한다. 후회가 없더라도 궁금하기는 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인생의 변곡점이 몇번 있다. 그때 다른 길을 택했다면 나의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가보지 않은 길은 너무나 궁금하다.마블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소니의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와 2023년 아카데미에서 작품, 감독, 여우주연, 남우조연 등 7개 부문상을 휩쓴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
작고 단단한 일상이 만드는 ‘완벽한 날들’
새벽에 일어나 싱크대에서 세수하고, 화분에 물을 준다. 도쿄 시부야구의 화장실을 돌며 청소하고, 점심시간이 되면 한적한 신사에서 나무와 햇살을 보며 샌드위치를 먹는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면 동네 공중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아사쿠사역 근처 허름한 선술집에서 하이볼을 마신다. 작은 다다미방에서, 스탠드 불빛으로 윌리엄 포크너의 문고본을 읽다가 잠이 든다.이 정도면 완벽한 날들일까? 1960년대 말과 1970년대 새로운 영화와 세계를 꿈꾸었던 뉴 저먼 시네마의 기수였고, 현대인의 삭막한 마음을 위로하는 <파리 텍사스>와 <베를린 천사의 시>를 연출했고,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과 <피나>로 현대 예술의 지고한 아름다움을 영상으로 담아냈던 빔 벤더스가 일본의 한 중년 남자의 일상을 그린 영화 <퍼펙트 데이즈>다.예고편을 보고 생각했다. 소박한 일상만으로 완벽한 날들이라고. 짐 자무시의 <패터슨>(201... -
‘창가의 토토’에게 배운 자유
매월 마지막 수요일에는 영화를 보러 간다. 문화의날이라 영화 관람료가 절반이다. 하루 중에 할인되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그래도 일정을 맞춰 보러 간다. 코로나를 거치면서 관람료가 1만5000원까지 올랐기 때문에, 잘 모르겠는데 일단 아무 영화나 보러 갈까라는 선택은 사라졌다. 이 영화를 꼭 보고 싶은지, 몇번이나 생각하고 신중하게 결정한다.5월의 마지막 수요일, 집에서 가까운 극장의 상영표를 살펴봤다. 시간대로 훑어내리다, <창가의 토토>를 발견했다. 내가 아는 <창가의 토토> 맞나? 개봉 소식을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고, 구로야나기 데쓰코의 유명한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인지 몰랐다. 포스터를 보고, 영화 정보를 찾아보니, 내가 읽은 소설 <창가의 토토>를 각색한 애니메이션이었다.<창가의 토토>는 일본의 배우이자 MC인 구로야나기 데쓰코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쓴 자전 소설이다. 1933년생인 그는 배우로도 ... -
옛날 극장에 가고 싶다
충무로의 대한극장이 올해 9월30일 운영을 종료한다고 발표했다. 1958년, 당시 최대 규모로 개관하여 <벤허>와 <사운드 오브 뮤직> 등 70㎜ 대작을 상영한 대한극장은 시대 변화에 따라 2001년 멀티플렉스로 전환했지만 결국 문을 닫고 말았다. 이로써 단성사, 명보, 스카라, 국도, 중앙 등 추억의 극장들은 모두 사라졌다. CGV에서 인수한 피카디리극장만이 ‘CGV피카디리1958’이라는 이름으로 그나마 남아 있다.아쉬운 것은 극장의 이름만이 아니다. 대한, 명보, 단성사 등은 멀티플렉스로 전환하기 위해 기존의 건물을 헐었다. 국도, 스카라는 변신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1999년과 2005년에 문화재로 남았어야 할 극장 건물을 철거해 버렸다. 최근 원주에서도 아카데미극장을 보존하는 대신 부숴버렸다. 20세기의 영화관은 서울에서 경험할 수 없는, 기록만 남은 과거가 되어버렸다.20세기의 영화 개봉 방식은 지금과 달랐다. 시내에 있는 개봉관... -
부자가 환경보호를 외친다면 모순일까?
속초로 여행을 갔다. 근 20년 만이었다. 그동안 동해 바다를 보러 강릉, 정동진, 묵호, 고성 등은 갔는데 속초만 빼놓았다. 예전 속초를 갈 때는 한계령을 굽이굽이 넘어갔는데, 양양고속도로를 이용하니 2시간 조금 넘어 도착한다. 호쾌한 동해가 좋고, 아기자기한 영랑호와 청초호가 함께 있어 더욱 끌리는 도시다. 앞으로 바다, 옆에는 호수, 뒤로 설악산의 어우러짐은 어떤 장소와 비교해도 멋지다.바다가 보이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속초 등대 옆 영금정으로 향했다. 정자 이름인가 했는데, 바닷가에 깔린 넓은 암반을 영금정(靈琴亭)이라고 한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신령한 거문고 소리 같아서 붙여진 이름. 조선 시대 문헌에 따르면, 당시엔 이곳을 비선대라 불렀다 한다. 밤이면 선녀들이 내려와 목욕하고 노래를 부르며 놀던 곳. 영금정의 정자에 올라 앞을 보니 푸르른 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뒤를 돌아보니, 설악산이 드리워져 있다. 아직 산 위의 눈이 녹지 ... -
‘호러’는 금기어
무서운 이야기를 좋아했다. 동네 재개봉관에서 부모님과 한국영화 <목없는 미녀>를 봤고, TV에서 방영하는 <전설의 고향>에 빠져들었다. ‘소년중앙’ ‘새소년’ 등 아동잡지에서 세계의 불가사의, 유령이 나오는 집 꼭지는 반복해서 읽었다. <엑소시스트> <오멘> <13일의 금요일> <나이트메어>의 몇 장면은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무서운 이야기를 지금도 좋아한다. <심야괴담회>를 즐겨 보고, 종종 유튜브의 괴담 영상을 틀어놓고 일한다. 흥행에 실패했으나 수작인 한국영화 <소름>과 <불신지옥>을 모르는 이에게 늘 추천한다. OTT에 올라오는 낯선 공포영화들도 찾아본다. 가끔 공포영화를 함께 보는 소모임에 나가 한국에 수입되지 않은 호러영화를 보고 담소한다. 그곳에 모인 이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 공포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대부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본다고 한다. 끔찍한 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