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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트
아이들은 좁고 어두운 곳에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든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가장 오래된 아지트도 할아버지의 낡은 옷장 한 칸이었다. 나는 매일 그 안에 들어가 숨을 죽인 채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듣다가 잠에 들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문고리에 매달린 나프탈렌 냄새를 맡으면 누구도 나를 찾지 못할 거라는 안도와 누군가 나를 찾아 줄 것이라는 기대가 함께 밀려왔다. 결코 고립이 아닌, 누군가 나를 수색할 수 있을 정도의 은신. 그 욕구가 바로 아지트의 정의였다.사춘기의 몸은 불안과 함께 자란다. 교복을 입을 때가 되자 내 몸은 더 이상 옷장에 들어가지지 않았다. 몸에 비해 훨씬 웃자란 정신은 옷장이 아닌 집도 좁다고 여겼다. 사방이 막혀 있어 안락하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면 그 공간은 은신처가 아닌 감옥이 된다. 나는 집을 나와 밤낮으로 새로운 아지트를 찾아 다녔다. 모두와 접촉할 수 있지만 모두가 나에게 관심이 없는 곳.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어서 나의 정체를 쉽게 숨길... -
죄와 빚
시나리오를 쓰던 친구는 1년 중 절반이 넘는 시간을 24시간 카페의 흡연실에서 보냈다. 테라스를 개조해 만든 흡연실은 밖에서 카페를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드는 공간이었는데, 덕분에 나는 매일 그 앞을 지나며 친구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이 즐거울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유리창 밖에서 바라본 그의 얼굴은 종종 괴롭고 자주 외롭게 보였다.우리를 한숨 쉬게 하는 것들나는 이따금씩 아무런 기척 없이 그의 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면 그는 약속도 없이 나타난 나를 멀뚱히 바라보다 ‘죽겠다’는 말을 인사 대신 내뱉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소용없는 위로를 하는 데 몇 시간을 쓰기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죽겠다’는 말은 그의 상태가 비교적 멀쩡할 때 나오는 ‘정상’ 신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힘들고 지친 날이면 그 ‘죽겠다’는 말을 듣기 위해 매캐한 흡연실을 찾아갔다. 항상 일정한 모양으로 돌아오는 그 대답을 들으면 요동치던... -
빚더미에서
경기 양주시에 있는 ‘두리랜드’는 배우 임채무가 34년째 운영하고 있는 테마파크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폐업위기까지 맞았으나, 현재는 시설을 증축하고 직원을 늘려 많은 사람들이 찾는 휴양지가 되었다고 한다. 나는 두리랜드에 한 번도 방문한 적 없지만, 이상하리만큼 자주 그곳을 떠올리는데, 이것은 공간 자체에 대한 호기심 때문은 아니다. 임채무는 종종 TV에 출연해 두리랜드를 운영하며 생긴 채무가 150억원이라는 말을 하고는 했다. 본인의 이름을 ‘임채무’가 아닌 ‘채무왕’이라고 고쳐야 한다면서…. 개인이 놀이동산을 운영하기 위해 그만한 빚을 냈다는 것도 나로서는 도무지 받아들이기 힘든데, 그것을 고백하는 중년배우의 얼굴은 뭐랄까, 마치 ‘채무’의 모든 섭리를 깨우친 불상처럼 보였다.벗어날 수 없는 빚의 굴레10년 전, 나는 내게 발생한 질병의 원인을 ‘채무로 인한 스트레스’라고 스스로 결론지었다. 어떠한 의학적 근거도 없지만, 내가 빚에 시달리며 실제로 느낀 정신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