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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복길의 채무일기
  • [복길의 채무일기]물과 불
    물과 불

    지난 2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을 유튜브로 시청했다. 마니아들의 지지를 받는 시상식답게 채팅창은 소란스러웠지만, ‘올해의 앨범’을 꼽는 마지막 순간만큼은 누구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 ‘단편선 순간들’의 <음악만세>. 그들의 노래는 ‘물에 잠기면서 시작해,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끝나는 이야기’라는 설명처럼 신비로웠다. ‘위풍당당 행진곡’을 편곡한 첫 번째 트랙부터 ‘독립’ ‘물’을 지나 ‘불’에 닿을 때까지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웃으며 ‘삶과 음악’이라는 내러티브를 완성했다. 눈치 보며 키득대고, 배를 잡고 폭소하고, 절망하듯 헛웃음을 짓고. 그렇게 모인 웃음은 아홉 번째 트랙 ‘음악만세’에 이르러 절규로 바뀐다.“여러분들은 미래로 가십시오. 더 이상 울지 않고, 더 이상 죽지 않고, 그리고 더 이상 갈라서지 않는, 그 미래로 거침없이 당당하게 가십시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던 세월, 37년의 싸움을 오늘 저는 마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정리해고 위기 ...

    2025.04.27 20:24

  • [복길의 채무일기]눈 뜨기 연습
    눈 뜨기 연습

    집 앞 하천에 물이 마르면 괜히 눈이 삐뚤어졌다. 냇물을 제집 수도처럼 쓰는 골프장과 저수지 근처의 도축장 공사판을 종일 탓하느라 그랬다. 야속할 만큼 오지 않던 비는 내 눈이 제자리로 돌아올 때쯤 소리 없이 내렸고, 하천에 물이 차면 모난 마음이 조금씩 깎였다. 산천이 대수냐, 저 미운 골프장 방문객들이 마을을 먹이고 살린다. 쌀밥을 한술 떠 제육 반찬을 올리고 둥글어진 속에 넣었다. 마음에서 깎여 나간 모서리가 목구멍에 가시처럼 박혔어도 밥알을 뭉쳐 삼키면 그만이었다.개천 음쓰·축사 오물…그늘진 풍경계획에 없던 귀농이었지만 안개가 끼면 함께 쉬고, 가문 날엔 함께 우는 이웃의 존재는 이곳에 평생 머물 이유로 충분했다. 무엇보다 해가 뜨면 소란스럽고 해가 지면 고요해지는 촌의 시간이 좋았다. 농사짓는 이들의 묵묵함이 만든 푸르고 누런 들판을 누비다가 수줍게 인사를 건네면, 밭에서 난 인심이 채소와 과실을 소쿠리째 안겼다. 물은 맑고 별은 밝아 늘 사철 지나는 ...

    2025.03.30 20:48

  • [복길의 채무일기]광주 드라이브
    광주 드라이브

    여행을 자주 다니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불과 200㎞ 떨어진 이웃 도시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다는 사실을 끝내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었다. 왜였을까? 문장을 좀 더 또렷하게 고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으려나. 내가 사는 도시가 대구이고,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가 광주라는 사실이 그 감정의 원인이 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광주에서 본 장면들지난달 소규모 독서 모임의 초청을 받아 광주에 갔다. 내비게이션에 숙소 이름을 입력하니 경로를 표시하는 녹색 선이 비교적 짧고 곧게 그어졌다. 분명 산도 넘고 강도 건널 텐데 왠지 가는 내내 평평한 길일 것만 같은 그래픽이었다. 두 도시를 잇는 유일한 고속도로에 진입해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생경한 이동을 시작했다. 고령, 거창, 함양, 지리산, 남원, 순창, 담양. 지나치는 길목마다 평소에는 소리 내어 말할 기회가 없던 지명들이 나를 애틋하게 사로잡았다. 데칼코마니처럼 반을 접으면 출발지와 목적...

    2025.03.02 20:35

  • [복길의 채무일기]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긴 연휴를 맞아 요리를 계획했다. 메뉴는 ‘오코노미야키’. 흡사 ‘해물전’처럼 보이지만 새우와 오징어의 탱글한 식감과 마요네즈와 간장이 혼합된 짜릿한 소스 맛은 ‘혼술’에 제격인 안주 같기도 해서 홀로 맞는 명절에 더없이 어울린다. 언젠가 먹었던 그 맛을 떠올리며 신나게 마트로 뛰어갔다. ‘아, 인간은 이렇게 약간의 식량과 여유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구나’ 생각하면서. 그러나 재료를 담기 위해 채소 진열대에 다다른 순간, 내 행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양배추 7300원.” 연휴엔 라면을 먹으면서 농산물 가격 폭등의 원인을 다룬 기사를 읽었다.일요일에도 ‘양탄자 배송’지난 일요일에는 오전 11시쯤 겨우 일어나 한 시간 정도를 멍하게 책상 앞에 앉아서 보냈다. 일간지 투고를 비롯해 각종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지금 내 상황에서 주말에 외출 계획을 세운다는 건 사치스러운 행위다. 보험료를 내고 대출금을 갚고 나니 수중에 5만원이 남았다. 다음 원고를 준비하기 위...

    2025.02.02 20:58

  • [복길의 채무일기]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

    지난달 남태령에서 있었던 ‘전국농민연합’의 트랙터 시위 풍경을 담은 기사에 “K팝 실컷 부르고 좋겠다. 빠순이만 신나는 탄핵 파티”라는 댓글이 달렸다. 총 46개의 따봉을 받아 ‘베스트 의견’이 되었길래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너만 빼고 파티하니까 빡쳤쥬? 너는 혼자라 아무것도 못하쥬? 끼워주는 사람도 없쥬? 평생 없을 꺼쥬?”라는 답글을 남기고 말았다. 나는 내심 키보드 배틀을 기다렸지만 상대가 내 문장 수준에 놀랐는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아 기대했던 소동은 일어나지 않았다.집회는 파티와 같다. 이해관계가 다른 개인이 모두 모여 목소리를 한데 모으는 것이 이미 그 자체로 축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하고 싶다. 영하 9도에서 28시간 동안 서서 K팝을 떼창하는 건 전혀 즐거운 행위가 아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논스톱 K팝 리믹스’에 귀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아무리 길어도 두 시간이다. 미친 듯이 응원봉을 흔들면서 놀다기 사색이 되어 공연...

    2025.01.05 20:56

  • [복길의 채무일기]슬픔의 K팝 집회
    슬픔의 K팝 집회

    ‘여자는 감정적’이라는 말은 쉽게 사용되지만, 정작 화가 난다고 사람을 위협하고 물건을 던지고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면 그것이 새삼 얼마나 상투적 표현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마음을 누르고 감추어야 하는 사람의 손은 늘 비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어떤 자리에 있는 여자들은 모두 손에 무언가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사람은 짱돌 하나만 쥐고 있어도 용기가 생기는 법이니 손 안을 채운 그들의 얼굴이 자유롭고 비장해 보인 것은 비단 나만의 느낌은 아니었을 것이다.K팝 응원봉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18년 출시된 NCT의 ‘믐뭔봄’(기존의 둥근 형태에서 벗어난 직육면체 모양 때문에 붙은 별칭이다)을 보고 나서였다. 압도적인 크기와 생김새 때문에 종종 ‘돈까스 망치’에 비유되기도 하는 ‘믐뭔봄’은 발광 또한 남달라 어두운 곳에서는 그 적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봐도 그것은 누군가를 응원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건 마치 어둠 속에서 몇 명이나 ...

    2024.12.08 20:22

  • [복길의 채무일기]헛똑똑이
    헛똑똑이

    ‘똑똑한 장남’에겐 클리셰가 있지 않은가. 부모와 손아래 형제들의 뒷바라지로 상경해 혼자 잘난 줄 알고 떵떵거리며 일을 벌이다 결국 집안 기둥을 뿌리째 뽑는다는 괘씸한 이야기. 아니, 이야기보다는 풍속이라 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도. 나는 그런 유의 이야기를 들으면 장남도 아니면서 괜히 마음이 따끔따끔해졌다. 왠지 그 이야기가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나는 자라며 부모와 다른 형제를 위해 희생한 적도, 양보한 적도 없었다. 늘 내가 먼저였기에 가족의 배려는 당연하였다.제 잘난 맛에 사는 나를 위해 가족들은 많은 것을 숨겼다. 사회초년생 시절 더는 숨길 수 없을 만큼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을 때도 나는 미래의 나를 위해 급여가 턱없이 적은 인턴 생활을 반복했다. 그러나 불황으로 인해 가장 먼저 불행해지는 것은 일자리가 불안정하거나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재계약을 약속받았던 인턴들은 가장 먼저 해고되었다. 최저 시급도 받지 않고 일을 했던 건 모두 그 약속 때문이었지만 우리...

    2024.11.10 20:36

  • [복길의 채무일기]피라미드에 갇히다
    피라미드에 갇히다

    목요일 밤이 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를 본다. 방송은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뒤 퀭한 눈으로 주말만을 기다리는 밤에 더없이 어울린다. 눈으로 읽으면 1분도 걸리지 않을 이야기를 1시간이 넘도록 정성껏 구연하는 세 명의 진행자와 그런 노고에 보답하듯 자신의 모든 감각기관을 동원해 대꾸해주는 연예인 게스트들. 그들의 대화는 다분히 연극적이고 그래서 조금 민망하다. 그러나 누군가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을 정도의 기운만 남은 목요일 밤엔 그 민망함도 잠시 스치는 기분일 뿐, 나는 기꺼이 그들의 말없는 관객이 되어 이야기를 귀로 삼킨다.구연으로 진행되는 포맷의 특성상 <꼬꼬무>는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의 5막을 철저히 지킨다. 막이 전환될 때마다 목소리의 톤이 바뀌고 조명이나 음향 효과도 동원된다. 그러나 <꼬꼬무>의 구성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대목은 정작 아무 효과도 사용하지 않는 도입이다. ‘스토리 텔러’인 장성규, 장도연, 장...

    2024.10.13 20:37

  • [복길의 채무일기]아지트
    아지트

    아이들은 좁고 어두운 곳에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든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가장 오래된 아지트도 할아버지의 낡은 옷장 한 칸이었다. 나는 매일 그 안에 들어가 숨을 죽인 채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듣다가 잠에 들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문고리에 매달린 나프탈렌 냄새를 맡으면 누구도 나를 찾지 못할 거라는 안도와 누군가 나를 찾아 줄 것이라는 기대가 함께 밀려왔다. 결코 고립이 아닌, 누군가 나를 수색할 수 있을 정도의 은신. 그 욕구가 바로 아지트의 정의였다.사춘기의 몸은 불안과 함께 자란다. 교복을 입을 때가 되자 내 몸은 더 이상 옷장에 들어가지지 않았다. 몸에 비해 훨씬 웃자란 정신은 옷장이 아닌 집도 좁다고 여겼다. 사방이 막혀 있어 안락하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다면 그 공간은 은신처가 아닌 감옥이 된다. 나는 집을 나와 밤낮으로 새로운 아지트를 찾아 다녔다. 모두와 접촉할 수 있지만 모두가 나에게 관심이 없는 곳.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어서 나의 정체를 쉽게 숨길...

    2024.09.08 21:01

  • [복길의 채무일기]죄와 빚
    죄와 빚

    시나리오를 쓰던 친구는 1년 중 절반이 넘는 시간을 24시간 카페의 흡연실에서 보냈다. 테라스를 개조해 만든 흡연실은 밖에서 카페를 바라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드는 공간이었는데, 덕분에 나는 매일 그 앞을 지나며 친구의 안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글을 쓰는 것이 즐거울 수만은 없는 일이다. 그래서인지 유리창 밖에서 바라본 그의 얼굴은 종종 괴롭고 자주 외롭게 보였다.우리를 한숨 쉬게 하는 것들나는 이따금씩 아무런 기척 없이 그의 곁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면 그는 약속도 없이 나타난 나를 멀뚱히 바라보다 ‘죽겠다’는 말을 인사 대신 내뱉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소용없는 위로를 하는 데 몇 시간을 쓰기도 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죽겠다’는 말은 그의 상태가 비교적 멀쩡할 때 나오는 ‘정상’ 신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힘들고 지친 날이면 그 ‘죽겠다’는 말을 듣기 위해 매캐한 흡연실을 찾아갔다. 항상 일정한 모양으로 돌아오는 그 대답을 들으면 요동치던...

    2024.08.11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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