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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로 보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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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루페로 보는 시선]모든 것을 살리는 힘, 물
    모든 것을 살리는 힘, 물

    세밑에 서서 2025년을 돌이켜본다. 신년부터 탄핵과 관련해 정치권이 어지러웠고, 2024년 12월부터 이어진 정치적 사태들로 봄을 봄답지 못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여름에 조기 대선을 치렀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청문회와 폭로가 피곤하기도 했지만, 문화 면에서 기쁜 일들이 있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흥행으로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한국을 찾는 해외 방문객들이 많아졌다. 여전히 이어지는 고민들도 있다. 어려운 경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도 걱정스럽고, 종묘 맞은편 세운4구역에 고층빌딩이 세워지기로 결정이 난다면, 소중한 문화유산인 종묘의 경관이 망가지게 될까봐 속상하다. 새해에는 모든 게 순리대로, 술술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에 책을 읽다가 노자의 상선약수가 머리를 스쳤다.어째서 노자는 최고의 선(善)을 물이라고 했을까. 노자는 물을 이롭지만 다투지 않고,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며, 형태가 없으나 모든 형태를 담고, 부드럽지만 가장 강하...

    2025.12.18 20:15

  • [루페로 보는 시선]바다를 닮은 얼굴, 제주의 가장들
    바다를 닮은 얼굴, 제주의 가장들

    11월 중순, 제주도 세화에서 운영하는 워케이션 프로그램에 다녀왔다. 바다가 보이는 공간도 마음에 들었지만, 운영 프로그램 중 ‘해녀와의 대화’ 프로그램에 끌렸다. 팬데믹 시기를 제외하고는 제주도에 매해 가서 사진을 찍었고 해녀 박물관에도 갔었지만, 해녀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한 경험은 없었다.해녀라는 직업은 독특하다. 가부장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노동력이나 번식의 수단으로 여겨지는 것은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제주 해녀들은 남성의 노동력을 제압할 정도로 많은 수익을 내니 분명 대접을 받아야 할 텐데도, 그렇지 못하다는 게 의문이었다. 드라마로 소비되는 해녀들의 모습은 가난을 극복한 위대한 어머니이거나 불우한 운명의 주인공일 뿐, 해녀의 항일운동 역사나 그들의 업적은 뭉뚱그려진 채 캐릭터로만 그려진다고 느껴졌다.프로그램 당일, 해녀 박물관에서 해녀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해녀들이 물질을 마치고 쉰다는 불턱으로 이동했다. 일흔이 넘은...

    2025.11.27 21:39

  • [루페로 보는 시선]자본주의라는 매트릭스
    자본주의라는 매트릭스

    한 청년이 사망했다. 과도한 노동의 결과다. 그의 부고를 접하자마자 슬픔과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노동이 자유케 하리라(Arbeit macht frei).” 독일 언어학자 로렌츠 디펜바흐가 1873년 출간한 소설의 제목이다. 이 소설은 산업화 초기 빈곤과 불안이 가득한 독일 사회에 대한 해법으로 노동윤리를 제시한다. 주인공 프리드리히는 노동의 가치를 천시하지만, 결과적으로 노동의 아름다움을 깨닫는다. 소설의 제목은 1920년대 오스트리아와 독일 전역에서 윤리성을 회복하는 구호로 사용되었다. 사람들은 진실된 노동이야말로 진정한 자유에 도달할 수 있게 해준다고 믿었다.아이러니하게도, 이 구호를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도록 만든 집단은 2차 세계대전 때의 나치였다. 1차 세계대전에 패하고, 전쟁배상금과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붕괴한 뒤 집권한 나치당은 불안의 원인을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에게 돌리고 적으로 규정된 이들을 잡아들여 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시켰다. 노동이 자유를 준...

    2025.11.06 22:12

  • [루페로 보는 시선]데마고그에서 유튜브까지
    데마고그에서 유튜브까지

    업무차 마산에 갔다가 김주열 동상이 근처에 있다는 말을 듣고 들렀다. 1960년 마산 시위에 참여했던 김주열은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고, 그의 죽음은 2차 마산의거, 4·19혁명으로 이어졌다. 한국 현대사를 흔히 ‘피로 쓰인 민주주의 역사’라고 한다. 가끔은 의문이 든다. 민주주의가 뭐라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쟁취하는가.민주주의의 시작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다. 기원전 6세기쯤 아테네 시민들이 정치 참여를 요구했고, 솔론과 클레이스테네스를 거쳐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러 아테네 민주정은 전성기를 맞이했다. 시민으로 분류된 이들이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제도였다. 이때 소크라테스가 나타난다. 그가 던진 질문은 간단했다. 모든 사람이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 있는가?플라톤의 <국가>에서 소크라테스는 “민주정치는 아무나 조종할 수 있다고 믿는 배와 같아 선장의 말을 듣지 않고 가장 시끄럽고 달콤한 말을 하는 자가 배를 지배한다”고 말한다. 그도...

    2025.10.16 20:27

  • [루페로 보는 시선]혐오는 누군가의 작은 손짓부터 시작한다
    혐오는 누군가의 작은 손짓부터 시작한다

    장면 하나. 대학원 시절 도심으로 향하는 새벽 4시의 야간 버스 안, 나는 유일한 동양인 승객이었다. 새벽같이 일터로 나가는 흑인 승객들은 내 동선을 따라 눈동자를 움직이며 나를 바라봤다. 무서웠다. 마치 낯선 동물이 된 기분이었다. 장면 둘.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마지막 뮤지컬을 보고 자정이 넘은 시각, 숙소로 향하는 지하철을 탔다. 내가 탄 칸에는 흑인 남자와 나, 둘뿐이었다. 네 정거장 동안 나는 속으로 저 남자가 착한 사람이기를, 그가 손을 꽂아 넣은 주머니에 총이 없기를 간절히 빌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나를 해치지 말아줘, 속으로 말하면서.안전한 공간에 발을 들이자마자 내게 든 감정은 자괴감이었다. 작가랍시고 온갖 좋은 말을 평소에 떠들고 다니는 주제에 나는 그들을 잠재적인 위험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내가 느낀 공포감과 두려움은 어디에서 왔을까? 소설에서, 아니면 뉴스에서?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느낀 감정일까? 잠시 잊고 있던...

    2025.09.25 20:41

  • [루페로 보는 시선]우리는 서로에게 타자다
    우리는 서로에게 타자다

    한 청년이 생을 마감했다. 사망 원인에는 트라우마가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고대 그리스어 ‘신체적 상처’에서 유래된 단어 ‘트라우마’는 19세기에 히스테리 환자들을 치료하며 연구하던 심리학자 장 마르탱 샤르코가 심리적 충격이 신경증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서 심리적 외상 또는 정신적 외상의 개념으로 확장됐고, 정신의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에 의해 ‘트라우마=심리적 상처’라는 개념이 대중화됐다.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트라우마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라는 공식 이름을 갖고 의학적으로 치료되고 있다.이제 트라우마는 낯선 단어가 아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트라우마라는 말을 그 무게에 비해 가볍게, 자주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일상에서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쓰기 때문에 정작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는지도 모른다.트라우마는...

    2025.09.04 21:34

  • [루페로 보는 시선]젊음은 마음으로부터
    젊음은 마음으로부터

    늙고 싶지 않다는 욕망은 인류의 역사와 같이한다. 당연하다. 인간에게 죽음은 숙명이니까. 그런데 요즘에는 생명 연장과 함께 젊음에 대한 욕망이 트렌드다. 중년에 접어든 40대는 ‘영포티(Young Forty)’라는 신조어를 붙여 ‘늙지 않음’을 강조하고, 인터넷만 연결하면 동안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성형 광고를 볼 수 있다. 동영상 플랫폼에서는 어려 보이는 화장, 패션 콘텐츠가 흥한다. 젊어 보이려는 노력을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젊음이 왜 외모에만 적용되는지 의문이다.농경사회에서는 연륜이 큰 자산이었다. 농작물을 잘 기르고 날씨의 변화를 예측하는 것이 생명과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정보사회인 요즘에는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는 것이 중요하다. 젊어 보이려고 애쓰는 기저에는 변화에 뒤처지는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변화 속도가 특히 빠른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동안에 대한 집착은 뒤처지면 안 된다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

    2025.08.14 21:24

  • [루페로 보는 시선]보이지 않는 로드블록
    보이지 않는 로드블록

    길을 가다가 갑자기 살해 위협을 받는다면, 길에서 나눠주는 물품을 받으려고 서 있다가 갑자기 폭탄이 떨어진다면, 어떤 기분일까? 로드블록(roadblock)은 도로에 설치된 물리적 장애물, 진행을 방해하는 심리적 방해물을 뜻하는 단어다. 1994년 르완다 투치족에 대한 집단 학살을 다룬 다큐멘터리 <이세타: 로드블록 너머(Iseta: Behind the Roadblock)>를 보면 도로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후투 민병대가 투치족을 마체테로 학살하는 장면이 그대로 등장한다. 길에 널린 시체들과 시체 앞에서 춤을 추는 민병대의 모습은 끔찍함 그 자체다. 르완다 학살은 제노사이드의 전형적인 사례로 민족주의와 권력, 국제적 무관심이 결합할 때 일어나는 비극을 고스란히 보여준다.이제는 굳이 도로를 봉쇄하고 검문할 필요도 없다. 첨단 기기를 사용해 무방비한 상대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스라엘의 안보를 침해하지 않고, 테러리즘이 ...

    2025.07.24 21:34

  • [루페로 보는 시선]제국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제국은 어떻게 기억되는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베를린의 상징은 곰과 베를린 전승탑이다.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보고 난 다음부터 그렇다. 높이가 66.89m인 탑 꼭대기에는 황금으로 치장된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이 탑은 프로이센이 연달아 세 차례의 전쟁에서 이긴 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강한 나라를 꿈꿨던 프로이센은 결속된 독일 민족과 독일 제국의 확장을 꿈꾸며 베를린 전승탑을 만들었다. 강력한 힘을 상징하던 전승탑은 이후 히틀러에 의해 증축됐다. 나치는 베를린이 세계 제국의 수도가 될 것을 꿈꾸며, 전승탑 높이를 높이고 지금의 위치인 티어가르텐 공원 중앙에 위치시켰다. ‘강한 민족, 강한 나라’를 꿈꿨던 이들은 국가의 정체성과 힘을 과시하기 위해 거대한 선전물을 세웠다.지금 베를린을 찾는 이들도 그렇게 느낄까. 제국주의를 꿈꿨던 이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시대가 바뀌면서 전승탑을 보는 이들이 느끼는 것은 과거의 영광이 아니...

    2025.07.03 21:12

  • [루페로 보는 시선]도시가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
    도시가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

    “없는 사람 살기엔 서울이 제일이다.” 일이 있어 용산전자상가를 지나게 됐다. 다니는 사람도 없고 건물들은 다 닫혀 있었다. 스산한 느낌이 들어 잰걸음으로 걷다가 어릴 때 들었던 엄마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서울이 최고라는.엄마는 10대 시절 충청도 산골 마을에서 상경해 곧 여든이 되는 지금까지 살고 있다. 공부 잘하는 큰오빠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자매가 손을 잡고 대처에 나와 공장에 취직한 것이다. 집안 기둥이라 믿었던 오빠의 등록금을 다 대고는 둘 다 서울 남자를 만나 서울에 정착했다. 돌아가신 이모도 그랬다. 어린 나에게 과자를 물려주며 사탕공장에서 사탕 껍질을 싸며 힘들었단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그래도 서울에서 살아 좋다고 말하곤 했다.서울이 좋아 고향에 잘 내려가지 않던 엄마 때문에,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지만 어릴 때 엄마나 이모가 서울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삶은 겉으로나 안으로나 별로였다. ...

    2025.06.12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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