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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페로 보는 시선
  • [루페로 보는 시선]도시가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
    도시가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

    “없는 사람 살기엔 서울이 제일이다.” 일이 있어 용산전자상가를 지나게 됐다. 다니는 사람도 없고 건물들은 다 닫혀 있었다. 스산한 느낌이 들어 잰걸음으로 걷다가 어릴 때 들었던 엄마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서울이 최고라는.엄마는 10대 시절 충청도 산골 마을에서 상경해 곧 여든이 되는 지금까지 살고 있다. 공부 잘하는 큰오빠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자매가 손을 잡고 대처에 나와 공장에 취직한 것이다. 집안 기둥이라 믿었던 오빠의 등록금을 다 대고는 둘 다 서울 남자를 만나 서울에 정착했다. 돌아가신 이모도 그랬다. 어린 나에게 과자를 물려주며 사탕공장에서 사탕 껍질을 싸며 힘들었단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그래도 서울에서 살아 좋다고 말하곤 했다.서울이 좋아 고향에 잘 내려가지 않던 엄마 때문에,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지만 어릴 때 엄마나 이모가 서울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삶은 겉으로나 안으로나 별로였다. ...

    10시간 전

  • [루페로 보는 시선]한 사람의 투표가 바꿀 수 있는 것들
    한 사람의 투표가 바꿀 수 있는 것들

    <쿠니미츠의 정치>라는 만화가 있다. 공부를 많이 하진 못했지만, 의리와 착한 마음씨를 지닌 쿠니미츠가 세상을 바꾸려는 친구의 결의에 감동해 정치에 입문하는 내용이다. 쿠니미츠의 첫 번째 임무는 낙선한 정치인의 비서가 되어 그를 작은 시의 시장으로 만드는 것이다. 쿠니미츠가 도착한 장소는 부패한 시장이 세금을 착복하느라 비리와 부정으로 얼룩지고 공공시설과 영세한 가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중이었다. 이권만 생각하는 정치인들과 마을 유지 사이의 정경유착이 굳건해 사람들은 ‘어차피 항의해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마음가짐으로 살면서 몰락하게 된 도시의 모습에 쿠니미츠는 “누군가 바꿔줄 거라고 생각만 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고, 점점 더 썩어간다”고 말하며 도덕적인 정치인을 돕기 시작한다. 쿠니미츠는 직접 사람들을 만나 투표를 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상기시켰고, 결국 시민들의 90%가 투표에 참여하게 된다.만화적 상상력이 많이 가미된 줄거리지...

    2025.05.22 20:47

  • [루페로 보는 시선]다시 5월이다
    다시 5월이다

    유치원에도 입학하기 전의 일이다. 엄마 손에 이끌려 어디론가 걷다가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거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사불란하게 어딘가로 들어갔고, 엄마도 내 손을 잡고 급하게 뛰기 시작했다. 뛰던 엄마가 내 손을 놓쳤다. 겁에 질려 멍하니 서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재빠르게 낚아채더니 어두운 건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삽시간에 거리가 텅 비었다. 모인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만 아니라면, 진공 속에 들어온 듯 시간이 멈췄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람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주머니 손에 이끌려 빛 속으로 나오니 젊었던 엄마가 울부짖으며 나를 찾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나를 붙잡고 우는 엄마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1984년, 아니면 1985년의 일이다.1981년 9월 ‘88 서울 올림픽’ 유치가 확정되자 제5공화국은 올림픽을 열 수 있을 만한 도시로 서울을 탈바꿈하겠다는 계획을 본격적으로 세웠다....

    2025.05.01 20:16

  • [루페로 보는 시선]새로운 날은 과거의 실수를 제물로 삼아 온다
    새로운 날은 과거의 실수를 제물로 삼아 온다

    햇볕이 부쩍 맑고 따뜻해졌다. 봄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창밖을 보니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마흔 중반을 훌쩍 넘겼으니, 봄꽃을 본 날이 어쩌면 봄꽃을 볼 날보다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했더니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더 곱고 아름답게 보였다. 이번 봄꽃이 유난히 반가운 것은 겨울이 그만큼 추웠기 때문이리라.러시아의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1910년 ‘불새’를 탈고한 후 고대 러시아 축제의 환영을 보게 된다. 그는 자서전에 ‘봄의 제전’ 창작 동기에 대해 상세하게 써놓았다. ‘상상 속에서 엄숙한 이교도 의식을 보았는데, 현자들이 원형으로 둘러앉아 있고 한 소녀가 죽을 때까지 춤을 추고 있었다.’ 그는 꿈에서 본 춤이 봄의 신을 달래기 위해 제물을 바치는 고대 의식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실제 슬라브족들의 봄 축제 ‘야레 고디’에서는 겨울과 죽음을 상징하는 여신, 마르자나 혹은 마라의 이름을 붙인 허수아비를 물에 빠뜨리...

    2025.04.10 21:26

  • [루페로 보는 시선]작센하우젠의 실험대
    작센하우젠의 실험대

    공무원 역사 시험 ‘일타강사’가 눈물을 흘리며 연단에 서서 탄핵 반대를 외치는 뉴스를 보다가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들이 있었다. “어떤 교사도 역사 교육의 목적이 학생들이 알고 싶어 하지 않는 특정한 날짜와 사실들을 암기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역사적 사건으로 보이는 그 결과들의 원인이 되는 힘들을 찾고 발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장의 출처는 <나의 투쟁(Mein Kampf)>. 저자는 나치당의 당수, 아돌프 히틀러다.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입대한 히틀러는 연설능력을 인정받아 독일 공산당에 입당한 후, 극우 민족주의 세력과 결합해 정권 탈취를 시도했다. ‘뮌헨 폭동’이라고 불린 쿠데타로 체포된 히틀러는 재판에 넘겨져 반역죄로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민족주의 성향 판사들의 호의적 반응 때문에 징역 5년이라는 가벼운 형벌을 받았고, 9개월 만에 조기 석방됐다. 수감 기간 동안 그는 <나...

    2025.03.20 21:33

  • [루페로 보는 시선]사라지는 공간의 역사,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둔다’
    사라지는 공간의 역사,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둔다’

    동두천 성병관리소까지 가는 길은 몇년 전과 다를 게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웠던 전과는 달리 건물에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철조망에는 철거를 반대하는 표지판과 현수막, ‘사유지출입금지’라는 푯말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다. 2023년 소요산 관광 사업을 위해 성병관리소 건물을 해체하겠다는 동두천시의 발표 이후 달라진 풍경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없어 철조망 주변을 빙빙 돌면서 최대한 건물을 담아보려고 애썼다. 필름 현상 후 스캔을 한 사진 속 동두천 성병관리소, ‘옛 낙검자 수용소’는 예전에 바다였던 장소가 증발해 드러난, 오래전에 가라앉은 배처럼 보였다.미셸 푸코의 문장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 둔다(faire vivre et laisser mourir)”는 ‘근대문명사회’라는 장치 내에서 국가권력이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방식을 비판한다. 생산성을 발휘하는 인구를 육성하고 전체의 성장을 위해 특정 집단의 희생이나 죽음이 자연스럽게 방치되는 ...

    2025.02.27 21:18

  • [루페로 보는 시선]모두가 작품이 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작품이 될 필요는 없다

    설이 오기 전에 도쿄로 짧은 여행을 떠났다. 세 군데의 전시장을 방문하기로 계획을 세워놓고 마지막으로 류이치 사카모토의 회고전 ‘소리를 보다, 시간을 듣다’를 보기 위해 도쿄도 현대미술관을 찾았다. 전시장까지는 역에서 도보로 20분 거리. 주변에 아기자기한 카페나 잡화점이 많아서 발길이 닿는 대로 골목을 걸어보기로 하고 동네를 기웃거렸다.걷다보니 한 집에서 인부들이 짐을 다 빼내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 살던 사람이 사망했는지, 집의 짐을 모두 정리하는 것 같았다. 30년은 되어 보이는 냉장고와 세탁조와 탈수조가 따로 있는 낡은 세탁기가 집 앞에 놓였고, 2층 창문을 통해 천으로 동여맨 옷가지와 이불을 한 인부가 밀어내고 있었다. 다른 인부들은 사다리를 잡고 끈에 묶여 떨어지는 옷가지와 이불더미를 안전하게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인간의 삶이란 얼마나 많은 짐과 흔적을 남겨놓는가. 태어나는 순간 한 존재로 인해 파생되는 물건들과 살아가면서 남기는 흔적들...

    2025.02.06 21:13

  • [루페로 보는 시선]푸른색 한 줄기
    푸른색 한 줄기

    에밀리 디킨슨의 시 ‘푸른색 한 줄기(A Slash of Blue)’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황금의 물결 ― 하루의 둑 ― 바로 아침 하늘을 만들어내는 것.(A Wave of Gold - A Bank of Day - This just makes out the Morning Sky.)” 에밀리 디킨슨은 서쪽으로 지는 해의 황금빛과 서서히 다가오는 밤의 푸른빛이 섞인 저녁 하늘을 묘사하면서, 일몰의 태양이 다음날을 만들어낸다고 노래한다. 떠오르는 해는 일반적으로 희망이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매년 새해 첫날이 되면 일출 사진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새로운 시작, 떠오르는 희망, 어쩌면 새해에는 더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러나 해가 떠오르기 위해서는 그 전날 해가 사라져야만 한다. 아침 하늘의 청량한 빛은 황금의 물결과 푸른빛이 섞인 황홀하고도 차가운 저녁을 거쳐야 올 수 있는 법이다.한국어 ‘해’의 어원은 명확하게 알려져 ...

    2025.01.16 20:59

  • [루페로 보는 시선]고맙다는 말에 담긴 함께 사는 세상
    고맙다는 말에 담긴 함께 사는 세상

    20대 후반 업무로 알게 된 분이 있었다. 물어볼 것이 있어 e메일을 드렸는데, 아주 상세하게 답변을 보내주셨다. 메일의 마지막에는 발신자의 이름과 ‘고맙습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 느낀 감정은 낯섦이었다. 분명히 감사하다는 말은 내가 해야 하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감사하다는 인사로 끝을 맺다니.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몇번 더 메일을 주고받으니 나도 뭔가 그분이 감사해야 할 일을 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나도 요청받은 일들을 메일로 처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끝에 ‘감사합니다’나 ‘고맙습니다’를 붙인다.요즘은 감사하다는 말에 대한 호응으로 ‘아니에요’를 많이 쓰지만, ‘별말씀을요’나 ‘천만에요’ 같은 격식 있는 표현도 있다. 어원을 들여다보면 감사하다는 말에 ‘결코 그렇지 않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라고 응답하는 셈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말은 우리의 다른 행동들로부터 의미를 얻는다”고 말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사용자의 ...

    2024.12.26 21:24

  • [루페로 보는 시선]희망은 있다, 연대하는 마음 안에
    희망은 있다, 연대하는 마음 안에

    멀티 유니버스 세계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계엄령이 떨어졌고, 무장군인들이 유리창을 깨고 국회로 진입했다. 군인들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잠입해 서버를 확인했다. 소식을 재빠르게 접한 시민들이 입구를 봉쇄한 군인들과 대치했고, 야당 국회의원들은 담을 넘어 국회로 들어갔다. 국회 본회의장을 지키기 위해 몸싸움이 벌어졌다.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이 통과되며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며칠 후, 화가 난 국민들이 국회의사당으로 모여 대통령 탄핵안 지지 시위를 벌였다. 대통령 탄핵안이 발의되었지만, 여당 의원들은 표결을 거부하고 본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같은 날, 폭력이 넘치는 세계에서 사랑과 양심을 말하던 작가는 이국땅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에 답하는 연설을 했다. 이 모든 사건이 고작 일주일 안에 일어났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다.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표결권을 버리고 여당 의원들이 줄 지어 본회의장을 나가는 모습이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

    2024.12.12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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