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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전설
  • [시간의 전설]정영수씨의 경제일기
    정영수씨의 경제일기

    돼지고기 한 근 35전, 인조견 여섯 자 1원32전, 설탕 한 근 35전, 명태 한 쾌 1원, 탁주 한 말 60전. 누님이 아파 점쟁이에게 건넨 복채 10전까지 빠짐없이 적혀 있는 장부가 있다. 전북 진안의 정영수 어른이 3대에 걸쳐 이어온 생활의 기록, 바로 ‘경제일기’다.정 어른이 지켜온 장부는 단순한 가계부가 아니다. 부친 회갑 때 들어온 선물을 적은 ‘물선기’에는 국수 한 봉, 돈 100원, 생꿩 한 마리, 유기 식기 한 벌, 고무신 한 켤레 등이 줄지어 있다. 가장 흔한 선물은 국수였다고 한다. 살림 형편에 맞추어 성심껏 보탠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또 머슴들의 새경을 기록한 ‘고군기’, 품일꾼들의 삯을 적은 ‘고용기’, 돈의 흐름을 정리한 ‘치부책’, 각 도와 고을 이름을 정리한 지리지에 토지대장과 축문까지 생활의 거의 모든 단면이 담겨 있다.기록의 시작은 조부 때로, 1920~1930년대에 이른다. 낡은 시험지 뒷면을 반으로 접어 만든 ...

    2025.10.23 19:57

  • [시간의 전설]왜 사진인가
    왜 사진인가

    사진은 누구나 손가락으로 셔터만 누르면 찍을 수 있다. 어쩌면 그 단순함 때문에 내가 사진을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 단순한 촬영과 진정한 사진 사이엔 깊은 간극이 있다.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넓지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찾는 이가 적다”(마태복음 7장 13·14절)고 했다.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을 떠올리는 이도 있겠다. 사진의 길 또한 닮아 있다. 화려한 명성을 좇는 길도, 진실을 좇아 현장을 떠도는 길도 결국은 각자의 선택이며 삶의 태도다.나는 종종 미국의 종군기자 마리 콜빈을 떠올린다. 그녀는 보스니아, 시에라리온, 체첸, 이라크, 팔레스타인, 시리아까지 전장을 누볐다. 전쟁은 사람이 겪어서는 안 될 고통이라는 것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 그녀의 사명이었다. 전투 취재 중 한쪽 눈을 잃은 뒤에도 안대를 두른 채 현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2012년 시리아 홈스에서 포격을 취재...

    2025.10.02 21:30

  • [시간의 전설]별 하나의 아이
    별 하나의 아이

    요즘엔 사람을 상대로 사진 작업을 하는 일은 여러 제약으로 쉽지 않다. 특히 아이들을 찍을 때는 더 신중해야 한다. 나는 학교 교육제도에 관심이 있어, 아이들이 보다 자유롭게 놀고 자라는 모습을 담고 싶었다. 운 좋게 학교와 학부모의 허락을 받아, 별처럼 소중하고 반짝이는 아이들과 눈을 맞추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내 어린 시절만 해도 집집마다 여섯, 일곱 아이가 북적였다. 밥 세끼조차 해결하기 어려워 굶어 죽거나 방치돼 병들어 죽는 아이도 있었다. 그래서 만 한 살을 무사히 넘긴 아기의 돌잔치는 단순한 축하가 아니라 생존의 기념식이었다. 초등학교 교실은 늘 아이들로 가득 차 있었고, 사람들은 인구가 끝없이 늘다 보면 언젠가 지구가 팽창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했다.그러나 불과 한 세대도 지나지 않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2024년 기준 우리나라의 인구성장률은 0.07%로 세계 평균(0.86%)의 10분의 1 수준이다. 아이의 탄생은 이제 집안의 경사를 넘어 국...

    2025.09.11 20:28

  • [시간의 전설]삼천 원의 식사
    삼천 원의 식사

    ‘삼천 원의 식사’ 사진을 찍고 다닐 때, 3000원은 시골 장터국수나 수제비 정도의 값이었다. 시골 장터에서 옥수수 뻥튀기하러 나온 할머니와 사진을 찍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점심시간이 되었다. 점심을 드시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차례가 오면 뻥튀기해서 그냥 집에 간다고 했다. 추운 겨울이었다. 늘어선 뻥튀기 줄이 길어서, 그 시간에 국숫집에 가서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다. 할머니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나를 따라왔다. 잔치국수가 나오자, 할머니는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양푼을 들고 뜨끈한 국수 국물을 마시며 “맛있네”라고 중얼거렸다.그때 3000원의 값어치를 깨달았다. ‘백여상회’에서는 2000원 하는 막걸리 한 병을 시키면 기본 안주가 서너 가지 나왔다. 이제는 돌아가시고 없는 ‘죽림집’ 할머니는 막걸리 한 병에도 밑반찬에 갈치감자조림까지 주었다. 2500원 하는 뚝배기 라면도 별미였다.‘문짝집’은 콩나물국밥집과는 영 안 어울리는 간판을 달고 있지만, 나름대로 이유가...

    2025.08.21 21:14

  • [시간의 전설]“기왕에 핀 꽃잉께”
    “기왕에 핀 꽃잉께”

    문화는 경제적 여유에서 오는가, 아니면 마음의 여유에서 비롯되는가. 가끔 이런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흔히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지 않던가. 배가 불러야 문화니 예술이니 할 여유도 생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배가 부르다고 모두가 문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아니다. 또 문화나 예술에 종사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품격 있는 인격체라 보기도 어렵다. 우리가 익히 아는 상류층 부인들의 예술 활동을 떠올려본다. 그들의 ‘문화 활동’은 예술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결과일까, 아니면 그럴듯한 허세에 불과한 것일까. 이름을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을 것이다. 예술가인 체하며 벌이는 그 행위들이 얼마나 가증스럽고, 때로는 얼마나 민폐인지.가끔 재벌 회장 사모님이 운영하는 갤러리에 들를 때가 있다. 대체로 실력 있는 큐레이터와 좋은 작가들이 참여해 근사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그런 장면을 마주하면, 작은 공간을 간신히 꾸려가는 내 처지에서는 ‘문화고 뭐고, 결국...

    2025.07.31 20:39

  • [시간의 전설]모래톱
    모래톱

    영산강 사진을 찍으러 다니면서 새삼스럽게 안 것은 강에 모래톱이 없다는 것이다. 잘 가꾸어진 산책길과 자전거길, 그러나 강물에 닿을 수는 없었다. 수풀이 우거지고, 그 속을 한참 헤치고 들어가면 강물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지만 턱이 있어 손으로 만질 수 없다. 어린 시절 모래톱 위로 달음질쳐 가서 강물에 풍덩 몸을 담고 물놀이하던 강변은 찾기가 어렵다.토건업의 대부답게, 이명박 정부는 4대강 사업을 벌였다. 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의 모래를 긁어내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배로 물류를 나른다는 목적 아래 운하를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전체 사업에 들어간 돈이 22조2000억원이다. 강에서 모래를 걷어낸다는 건 단순한 정비 사업이 아니다. 모래톱은 하천 생태계의 균형을 지탱하는 핵심 요소다. 수질을 정화하는 필터 역할을 하며, 홍수와 침식을 조절하고, 다양한 생물들의 서식처가 되기에 ‘하천의 허파’라 불릴 만하다. 운하를 통해 물류를 운송하는 방식은 트럭이나 기차...

    2025.07.10 21:11

  • [시간의 전설]투표로 보는 지역 민심
    투표로 보는 지역 민심

    나는 광주 태생으로 전주에 살고 있다. 가끔 전주 사람이 ‘광주 사람들은 사납고 거칠다’는 소리를 한다. 그쪽에서는 내가 광주 태생이라는 것을 모르고 한 말이다. “나는 광주 사람입니다”라고 하면 상대방이 당혹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순천이나 여수나, 광주나 전주나 다 같은 호남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이처럼 호남 안에서도 분위기가 조금 다르다.나는 1970년대 서울로 올라가 학교도 다니고 직장도 다녔다. 말이 학교, 직장이지 미아리 산동네에서 어렵게 살았다. 그 당시 호남 사람에 대한 인식은 인종차별에 가까웠다. 대기업에서는 호남 사람을 채용하지 않았다. 집에 세입자를 들일 때도 호남 사람을 꺼렸다. 그래서 본적을 서울로 바꾸기도 했다. 주변의 눈총 속에서, 호남 사람은 ‘끝이 안 좋으며 변절자에다 이중인격자, 사기꾼’ 등을 의미했다.그때가 박정희 정권 시대로, 정적인 김대중을 의식해 그런 분위기를 극도로 조성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런 흠이 잡힐까 봐 사...

    2025.06.19 20:52

  • [시간의 전설]오마주와 짝퉁
    오마주와 짝퉁

    오마주는 프랑스어로 ‘존경’ ‘경의’를 의미하며, 예술에서 원작자의 작품을 참조하거나 재구성하는 행위를 말한다. 반면에 짝퉁은 가짜나 모조품을 속되게 부르는 말이다.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일은 2009년 5월23일이다. 나는 그날 시골에서 전구를 사려고 철물 가게에 들렀다. 철물 가게에는 오래된 텔레비전이 있었다. 화면에서 속보로 노 전 대통령 서거를 알리는 뉴스가 나왔다. “할아버지, 저게 무슨 소리예요?”라고 물었다. “글씨, 나도 무슨 소린지 모르것네요”라고 할아버지도 멍한 얼굴로 대답했다. 밖으로 나왔더니 어느 집 담장에 빨간 장미가 눈부시게 피어 있었다. 그 뒤로 매년 장미가 피는 오월이 오면 그의 선한 미소가 그리워진다.노무현 정신의 핵심은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표현으로 대표된다. 인간 중심의 정치, 국민의 삶을 우선하는 정치 철학을 의미하며, 단순한 경제 성장보다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권위주의와 결별하고, 수평적이고 열...

    2025.05.29 20:55

  • [시간의 전설]매몰(埋沒)
    매몰(埋沒)

    어린 시절 같은 마을, 혹은 이웃 마을 사람들 사이에 깊은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 때문인지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떤 마을에는 같은 날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많았다. 반란군, 빨갱이, 경찰 그런 낱말들만 들렸고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증오는 자식대까지 물림을 받아 서로 치고받고 했다.1948년 4월3일, 제주도에서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미군정에 저항하기 위한 무장봉기가 남로당 제주도당 주도로 발생했다. 이에 정부는 군 병력을 투입해 사태를 진압하려 했으며, 같은 해 10월11일에는 전라남도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국군 제14연대에 진압 출동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14연대 소속 일부 병사들이 이에 반발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처럼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무력 충돌이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 사건이 발생했다. 정부는 토벌대를 조직해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주민...

    2025.05.08 20:45

  • [시간의 전설]횡재를 불러오는 힘
    횡재를 불러오는 힘

    서민 생활에서 뜻밖의 재물을 얻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뜻밖의 손실을 보는 경우가 더 허다하다. 그래서 실낱같은 뜻밖의 행운을 바라며 겨우 복권이나 한 장씩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횡재는 꼭 재물에만 한정할 일이 아니라고 본다.대통령 윤석열의 횡포가 극한으로 치달을 때, 조국혁신당은 ‘3년은 너무 길다’라는 구호를 냈다. 그 말에 실감하는 많은 국민조차 그것은 허무한 바람이라고 여겼다. 대통령제 국가에서, 서슬 퍼런 제왕적 대통령을 어떻게 끌어내린단 말인가.“飄風不終朝(회오리바람은 아침을 넘기지 못하고)/ 驟雨不終日(소나기는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天地尙不能久(하늘과 땅조차 오래가지 못하는데)/而況於人乎(하물며 인간이야 어떠하랴).” 노자 도덕경 23장 구절이다.장기 집권의 상징적 인물인 이승만 대통령은 12년 재임 기간 중 발생한 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에 따라 직에서 물러났고, 하와이로 망명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

    2025.04.1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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