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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참해진 말의 질서
말의 질서가 갈수록 처참해지고 있다. 위헌 계엄을 발동하고는 계몽령을 내렸다고 천연덕스레 말함으로써 계몽이란 말을 우롱했다. 내란 조장과 폭력 선동을 국민저항권 행사라고 호도함으로써 국민저항권이란 말을 더럽혔다.당장의 현상만이 아니다. 소위 보수를 자처하는 측이 집권할 때에는 정의니 법치 같은 말이 호되게 모욕당했다. 사뭇 정의롭지 못하고 탈법에 불법을 일삼은 자들이 오히려 국민을 향해 법치를 요구하고 정의를 부르댔기 때문이다. 때로는 법치나 정의 같은 말은 사회적 루저나 되뇌는 것이라 하며 법치와 정의란 말을 대놓고 모독했다.일반적으로 보수는 말의 가치와 권위, 질서를 지키는 쪽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보수를 자처하는 언론과 정치인, 목사, 교수 등이 적극적으로 말의 가치를 희롱하고 권위를 허물며 질서를 유린한다. 보수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보수라고 자처하는 꼴인데, 그들은 왜 그렇게 집요하게 말을 처참하게 만들까?말에는 통합의 힘과 ... -
판을 뒤엎는 자와 몽둥이질
바둑에는 이기는 수 아니면 지는 수밖에 없다. 상대보다 실력이 없다거나 자신이 잘못해서 패색이 짙어졌다면 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럴 때면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돌을 던짐이 떳떳한 모습이다.적어도 양식 있고 도덕과 법률의 가치를 믿는 이들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그 순간에 지는 수 외에 또 다른 수가 있다고 주장하며 그 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실행에 옮기는 자들이 있다. 그 수는 다름 아닌 판을 뒤엎는 수다. 승패를 확정 짓기 전에 판을 뒤엎었기에 자신이 졌다는 점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다. 판을 뒤엎는 것은 룰에 어긋나며 몰상식하고 비윤리적이라 비판해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지는 것보다는 뒤엎는 것이 자신에게 유리했기에 뒤엎는 수를 결행했고, 또 자신은 그렇게 해도 될 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그리했다고 눈 껌벅이며 말할 뿐이다.그래서 이렇게 자기에게 힘이 있다고 하여 판을 뒤엎는 사람을 두고 몰염치하다, 무법하다, 사악하다고 비판하는 건 무의미하다.... -
거짓말 좀비
중국 고전 가운데 <신이경(神異經)>이라는 책이 있다. 신기하고 괴이한 이야기를 모아둔 책이다. 거기에 보면 ‘와수(訛獸)’, 그러니까 ‘거짓말 짐승’이 나온다.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서남방 야만의 땅에는 와수가 출몰하는데 토끼 같은 외모에 사람 얼굴을 하고 말을 한다. 늘 사람을 속여 동쪽으로 간다면서 서쪽으로 가고, 나쁜 것을 좋은 것이라 말한다. 그 고기는 정말 맛이 좋은데 그걸 먹으면 참되지 않은 말만 하게 된다.”와수는 ‘거짓말을 하는 짐승’이 아니라 ‘거짓말 짐승’이라는 얘기다. 와수 자체가, 그 본질이 거짓말이라는 뜻이다. 사람도 거짓말을 한다. 그렇다고 사람 자체가, 그 본질이 거짓말인 것은 아니다. 그런데 와수는 본질 자체가 거짓말이다. 그래서 그 고기를 먹으면 먹은 존재도 거짓말 자체가 된다. 어쩌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무슨 말을 하든 온통 거짓말뿐인 그런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와수는 차원을 달리하는 바이러스였던 게... -
큰어른이 부재하는 대학
어른은 나이를 먹는다고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큰어른’은 더욱더 그렇다. 관건은 나이가 아니라 ‘나잇값’이다. 먹은 나이만큼 그 값을 해야지 어른도 되고 또 큰어른도 된다. 나잇값을 한다고 함은 그 나이답게 행한다는 뜻이다. 열다섯 살이 되면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이 되면 어른으로 우뚝 서며, 마흔이 되면 미혹되지 않고 쉰에는 천명을 깨닫는다는 공자의 통찰이 나이다움의 대표적 예다. 나이 예순에 마음의 평정을 이루고, 일흔에 마음먹은 모든 것이 천도, 다시 말해 하늘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음도 마찬가지다. 나이다움에 대한 오래됐지만 여전히 울림이 큰 가르침이다. 여기서 주목할 바는 공자가 나이다움을 성장 차원에서만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자의 나이다움에는 성숙이 두텁게 깔려 있다. 열다섯 살이 되면 지적 성장을 위한 발걸음을 본격적으로 내딛는다. 그런데 서른에 어른다운 어른으로 우뚝 서려면 성장만으로는 안 된다. 그것은 성숙이 뒷받침되어야 비로소 가능... -
땅강아지의 소의
제자백가의 하나인 묵자는 한 사람이 있으면 한 가지 정의가 있고, 열 사람이 있으면 열 가지 정의가 있다고 통찰했다. 부모자식 간이라도 정의관이 다르면 다툰다고도 했다. 나에게는 정의인데 내가 속한 공동체 차원에서는 정의가 아니고, 공동체 차원에서는 정의인데 나에게는 정의롭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는 사람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한 불가피한 일 중 하나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나와 사회 간의 이해 충돌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나에게는 이익인데 사회 차원에서는 불이익이고, 사회 차원에서는 이익인데 나에게는 불이익인 일이 곧잘 벌어진다. 그렇다고 사회를 떠나서 저 홀로 살 수도 없다. 개개인의 삶도 중요하지만 사회의 유지도 그만큼 중요한 이유다. 이때 늘 경계해야 할 바는 사회적 강자의 발호이다. 사회는 어느 힘센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의 것이다. 사회적 강자라고 하여 자신이 지닌 힘을 바탕으로 자기에게만 이익인 것을 마치 사회 전체의 이익인 양 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