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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이동
  • 전체 기사 17
  • [느린 이동]다시 시작하는 사람에게
    다시 시작하는 사람에게

    스스로가 의아한 날이 많아졌다. 다른 인간으로부터 내가 누구인지 끊임없이 확인받느라. 수정하고, 수정한 나로 얼마간 살아가다, 그 모든 시간을 깨고 결국 다시 원래 얼굴을 되찾아오느라.내가 아는 장면이 지나간다. 성취라고 부르기엔 작지만 나만 기억하는 결정들. 어디도 남지 않았지만 결정적이었던 골목과 질문들. 그런 건 쉽게 흘리고 세계로 돌아간다. 좋은 것만 빨리 잊어버리는 사람처럼. 어느새 혼날 준비를 마친 사람처럼.합격과 탈락이 분명한 세계에서 우리는 여러 차례 다시 시작된다. 너무 많이 다시 해서 어디부터 시작이라 부를지, 시작이 의미를 잃진 않았는지 의구해본다. 보이지 않고 잡히는 게 없어서, 쌓은 시간이 무색해져서 우리가 언제나 시작 중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벼랑에서 언덕을 넘는 순간만큼이나 벼랑에서 또 다른 벼랑으로 향하는 순간도 시작이다.잘 살고 싶은 마음이 잘 사는 일로 항상 이어지지는 않는다. 깨끗한 출발과 그렇지 않은 출발 또한 같은...

    2025.12.11 20:08

  • [느린 이동]먼 친구에게
    먼 친구에게

    지금 네 시계는 오전 5시 반을 가리킨다. 우리는 반나절만큼 떨어져 있다. 타국에서 너는 이제야 생일을 맞는다.그곳의 아침은 열일곱 시간 느리게 시작된다. 너는 두 나라를 오가느라 시계 두 개를 몸에 새겼다. 그러다 많은 게 고장 났지만 생일을 두 번씩 축하받게 되었다.집으로부터 충분히 멀어져 그것이 전생처럼 느껴질 즈음 생각한다. 집이라는 개념은 시간과 함께 움직여서 한곳에 머문 적 없었다. 어떤 집은 꿈쩍도 하지 않았기에 사라진다. 그럼 어디부터 바깥이라 부를까. 빗겨간 자리와 찾아오는 행운 사이로 새로운 자세를 찾고 있다. 사람으로부터, 말로부터, 싫어하는 표정으로부터, 좋아하는 식당으로부터 일부를 길어올린다.그럴수록 너는 다른 사람 말에 귀 기울이게 된다. 경계에 선 노인과 이주민, 부모를 모르는 아이들을 만난다. 국경을 넘는 또 다른 이주자의 밤을 알게 된다. 어쩌면 그들도 비슷할까 봐. 듣지 않으면 알 수 없어서. 우리 모두 다르게 생긴 미래를 기...

    2025.11.20 20:12

  • [느린 이동]과거와 미래를 교환하기
    과거와 미래를 교환하기

    얼마 전엔 다른 나라 무대에서 낭독회를 가졌다. 중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칭다오 국제학교 학생들에게 나의 한국어 시를 낭독하고, 그 시에 대해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였다. 한글로 읽은 문장은 자막을 통해 중국어로 화면에 보였다. 그들에게 물었다. “피곤하지 않나요? 계속 언어 사이에서 뛰어다니는 거.”나는 오랫동안 이민자로 살았고, 칭다오에는 이주 경험이 많은 시민이 다수다. 발 딛는 터전뿐 아니라 오가는 언어도 땅이다. 타국어든 방언이든 여러 땅을 오가야 하는 삶은 수고롭다는 이야기를 두 언어를 오가며 전했다. 오랜만에 영어로 이야기하는 나는 조금 긴장했고, 한국어와 영어에 서툰 청소년 관객들은 서로 속닥댔다. 객석에는 반짝이는 눈으로 무대를 보는 독자도 있었지만 그들을 충분히 설득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이민자는 여러 개의 이름을 발명하며 삽니다.”그게 사실이 아니라 하더라도, 강연자는 관객을 놓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다. 전해...

    2025.10.30 19:49

  • [느린 이동]섞이는 땀과 정신
    섞이는 땀과 정신

    한 사람은 폼 롤러 위에 누워 부지런히 위아래로 전신을 움직인다. 다른 한 사람은 일찌감치 침대에서 전자책을 읽다 눈이 감긴다. 그의 손에서 흘러내린 e북 리더기를 침대 맡에 두고 램프를 끈다. 잘 시간이다.파트너는 서로의 잠을 목격하는 자들이다. 몸을 맞대고 누워 각자가 짊어진 무의식을 헤매느라 분주한 날도 있지만, 육체를 나란히 두고 밤을 통과한다. 이불을 나누어 쓰는 타인은 대체로 신뢰하는 자다. 가장 취약한 나를 열어 둔 사이니까.어떤 새벽에는 혼자 깨어 있다. 소량의 수면제를 먹고 다시 눕는다. 누우면 잠든 사람의 굳게 닫힌 눈과 뺨, 말간 이마가 보인다. 침대 밑에는 배를 뒤집은 두 고양이가 몸을 붙이고 잔다. 보통 다시 잠든다. 그러다 어제 같은 날은, 네 식구가 한 집에 머무는 밤이 얼마큼 당연하지 않은지 생각한다. 갈비뼈 밑으로 무언가 일렁이며 지나간다.혼자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던 내가 1인 가구로 지냈던 시절을 기억한다. 그때 쌓은 시간...

    2025.10.09 20:53

  • [느린 이동]고지서
    고지서

    흰 슬라이딩 침대 위에 눕는다. 간호사 선생님이 굵고 딱딱한 바늘을 팔뚝에 꽂자 팔꿈치 근방부터 몸이 뜨거워진다. 조영제가 들어오는 중이다. 혈관 속 피를 야광 물질처럼 밝히는 약물이다. CT 장비실에 사전 녹음된 음성이 울려 퍼진다.“숨을 들이켜세요.”숨을 한가득 머금자 누워 있던 슬라이딩 침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숨을 참으세요.”보이지 않는 선이 몸 위를 지나간다. X선이라 부르는 엑스레이인데, 피부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보기 위해 보이지 않는 선을 몸에 덧입는다니. 한편, 보지 않으려 애쓸수록 더 선명히 보게 되는 장면도 있다. 움직이지 말라고 하자, 괜히 몸 위로 초록빛 물질이 느껴지는 것 같고 찌릿하다. 가끔은 세계가 타인의 말대로 감각된다. 나는 눈을 질끈 감는다. 광선은 빠르게 왔다가 몸을 떠난다. 인체 단면 곳곳이 여러 겹으로 기록된다.CT실을 나서자 진료를 기다리는 여러 노인이 눈에 들어온다. 휠체어에 힘겹게 앉은...

    2025.09.18 20:10

  • [느린 이동]도깨비불
    도깨비불

    어떤 이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엔 홀린 듯한 기분에 휩싸인다. 내가 여러 채의 세계로 뒤엉킨 불씨라는 걸 기억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깊숙이 들어와, 헤집고 지피고 비추는 존재들이. 그들을 도깨비라고 불러보자.도깨비들은 어딘가 툭 튀어나와 있다. 분명히 하나의 불빛이었는데 어느새 다른 색을 띠고 있다. 또렷하고 동시에 취약하다.도깨비 중 하나가 말한다. “나는 내가 내 이름대로 살지 않은 시간이 길어 수고스러웠어.”살기 위해 여러 이름을 발명해온 이들은 생각한다. 어쩌면 나도 도깨비겠구나. 목소리는 불씨와 닮아 퍼지는 성질을 가졌다. 불 앞에서 주위에 있던 자들은 자기 몸을 다시 확인한다.도깨비는 여러 얼굴을 하고 있다. 시 쓰는 도깨비, 노래하는 도깨비, 노동하는 도깨비, 소녀가 된 도깨비, 겁먹고 도망친 도깨비, 돌아온 도깨비…다르게 생겼지만 그들은 전부 자신을 의심해본 경험이 있다. 미미해져본 적 있다. 눈에 덜 띄거나 ...

    2025.08.28 21:05

  • [느린 이동]층이 다른 팬케이크
    층이 다른 팬케이크

    취향이라는 단어가 자주 유통되는 걸 본다. 어디까지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마음만 먹으면 모두가 모든 정보와 모두의 선택을 들여다볼 수 있는 이 시대에.자원이 너무 많아졌다. 정보를 다루는 도구도 계속 늘어나는 중이다. 다 읽지 않아도 인공지능(AI)이 나를 대신해 논문과 책의 내용을 요약해주고, 1시간이면 10여분짜리 몰아보기 영상으로 네다섯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다. 거의 모든 콘텐츠가 N차 창작물로 웹에 남는다. 웬만한 자원은 집에서 열람 가능한 ‘하이퍼 리소스’ 시대가 왔다.뭐든 직간접적으로 체험 가능하다면, 무엇이 나에게 중요한 성분으로 남을까?아이러니하게도, 모두가 모든 걸 가질 수 있어서 우리는 다르게 호명된다. 취할 수 있는 자원은 무한하고 시간이라는 자원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더더욱 선택에 신중해진다. 스쳐 가는 대상은 늘었지만 주목하는 시간이 줄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한 대상들의 집합으로서 존재한다. 선택의 ...

    2025.08.07 20:47

  • [느린 이동]공중 뿌리
    공중 뿌리

    “가족이라는 바깥” “팝업 행사와 닮았다” “취약한” “다시 지어지는” “공간이나 사물은 한동안 집이 된다” “무엇이 미래를 담보할 수 있나”.집을 떠올리자 산발적인 표현이 쏟아진다. 어떤 단어는 이어지고 몇 문장은 멀어서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 같다. 집이 내 안에 그렇게 남았구나. 여기저기 동시에. 찢어진 채로. 여러 번 허물어지고 다시 구축되며, 뼈와 살이 서로를 뒤덮은 채로.우리가 머무는 어떤 물성은 얼마간 집이 된다. 언어는 잠정적인 소파이고, 몸은 우리의 또 다른 거실이다. 오가는 사람들 사이로 의자가 계속 새로 생겨난다. 우리는 부지런히 수납되고 폐기된다.사흘만 존재하고 사라지는 거실을 만들었다. 전시 ‘공중 뿌리’는 2025년 7월11~13일 서울 성수동 베르탁에 존재했다.베르탁은 한때 누군가의 집이었으나 이제는 생활을 상상하기 어려운 공간이다. 벽지가 갈라지고 콘크리트가 드러나 있다. 전시를 위해 여기 다시 한번 집을 지었다. 물...

    2025.07.17 20:55

  • [느린 이동]시간의 목격자들
    시간의 목격자들

    한산한 도로에 가로등이 일제히 켜진다. 바다가 밀려가고 쓸려온다. 해협을 훑고 간 빛이 내 방 오래된 거울에 쏟아진다. 작년 여름 같은 거울에 조금 다른 빛이 걸려 넘어졌다. 그런 데서 시간을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는 어딘가로 흐르고 있다.어젯밤에도 같은 꿈을 꿨다. 그 문턱에서 나는 매번 고꾸라진다. 어떤 시간은 실패다. 나를 비집고 나와 밤을 팽창하는 실패들.시간을 다르게 감각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지난 몇 주를 보냈다.“나는 그림이 시간을 요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시에나에서의 한 달>을 쓴 히샴 마타르는 하루에 단 하나의 그림만 감상한다. 매일 같은 작품 앞에서 몇 시간씩 보낸다. 계속 처음 보는 사람처럼 히샴은 새 질문을 길어 올린다. 보이지 않는 곳까지 그의 눈길이 도착한다. 이제는 다른 그림으로 옮겨가기까지 서너 달은 기본이고 일 년이 걸리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말한다.시간만큼이나 풍경도 속도가 다르다. 뮤지션 ...

    2025.06.26 21:37

  • [느린 이동]미래로 사라지기
    미래로 사라지기

    몸도 마음도 쉽게 덜컹인다. 연이은 마감 탓에 비슷하게 느끼던 짝꿍에게 문자가 왔다. “분명한 건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있다는 거야.” 고갤 들어 두산아트센터 건너편에 자리한 층층나무를 본다. 서른 살 넘어 보이는 나무의 몸이 위아래로 천천히 휜다. 길고 얇은 외로움처럼. 배가 지나간 강물처럼.오월에는 적게 쓰고 많이 말했다. 연습실에서 매일 아홉 시간씩 보내는 동안 봄이 흘렀다. 연극이 올라갔다.<엔들링스>는 서울에서 열일곱 번의 공연이 예정돼 있었다. 이제 다섯 차례만 남았다. 어떤 날엔 잘하고 싶은데 도무지 방법을 모르겠어서 빨리 끝나길 바랐다. 닷새 후면 무대가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울대가 뜨거워진다. 수백 시간씩 쌓은 공연은 어디로 흩어질까. 밟지 못하는 공간에 어떻게 다시 들어설 수 있을까.작년쯤, 어쩌면 내가 반복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글을 쓰며 열 시간씩 보냈기 때문이다. 그날 쓴 문장은 종이나 웹에 다양한 물성으로...

    2025.06.05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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