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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도착하지 않은 편지
차를 타고 3월로 이동 중이다, 사월아. 나는 느리니까 사흘 일찍 출발했다. 그러니까 아마도 그보다 더 늦게 넌 이 편지를 읽게 된다. 느린 자들은 가장 먼저 움직이는 자들이기도 하다.어디로 움직이고 있니. 어제 나는 노래를 몇 곡 부르고 빨래하고 버섯을 씻고 말렸다. <고상하고 천박하게>가 출간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요즘 시대의 책이란 게 그렇잖아. 너무 빨리 낡잖아. 몇 해 동안 쓴 원고가 출간 몇 주 만에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울어진 세숫대야에 담긴 시간처럼 금세 잃어버린 기분이 들기도 한다.인쇄가 들어갈 즈음 알게 됐다. 앞으로 나의 편지는 어딘가 달라지겠구나. 어떤 편지는 너라는 수신인뿐 아니라 불특정 다수에게 가닿을 예정이다. 우리가 모르는 여러 편의 후속작이 도착할 거다. 파편적으로 이 책은 늘어날 거다. 구름이 길어지고 이름이 늘어나고 눈길이 불어나듯이.어떤 시절에는 아무것도 심지 못했다. 무엇도 자라... -
눈사람의 코
입을 벌리면 하늘에서 흩어지던 싸락눈이 혀에 닿는다. 닿자마자 사라진다. 하늘 조각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구나. 입술을 뗀 채로 미숙은 눈밭을 뛰어다닌다. 미숙은 여섯 살이다. 흘러내리는 콧물을 몇 방울 삼키며 그게 눈 맛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새빨간 모자를 쓰고 있어서 그렇지, 그의 귀는 홍시만큼 붉고 차다. 상관없다는 듯 눈사람의 코를 만들고 있다. 코가 계속 떨어져 나가는 게 속상하다.시간이 흘러 미숙은 잘 다린 옥스퍼드 셔츠 위에 코트 입은 친구와 걷고 있다. 코가 떨어질 듯 공기가 차다. 두 사람은 팔 하나만큼 적당히 먼 채로 캠퍼스를 걷고 있다. 하늘이 열린 것처럼 눈이 쏟아진다. 옆에 걷는 친구와 연애할 생각은 없지만, 미숙은 자기 우산을 펼쳐 나눠 쓰자고 한다. 우산이 작아 어깨와 어깨가 부딪친다. 사내의 체취가 조금 나는 것도 같다. 팔꿈치가 닿는 그 조그만 원에는 둘뿐이다. 걷는 동안 미숙은 24살이다. 우산을 나눠 쓴 사내는 어느 ... -
삶은 원래 곤란하다는 듯
“밤사이 내릴 강설로 인해 길이 미끄러울 예정이니 대중교통 이용, 눈길 미끄럼 등 주의 바랍니다.” 늦은 밤 안내문자를 받았다. 현관에 눈 삽과 장갑을 미리 챙겨놓고 잠에 들었다. 일어나면 복숭아뼈만큼의 눈이 소복이 쌓여 있을 것이다.사는 일이 버거웠던 시절에는 비슷한 문자를 받고 눈물이 핑 돈 적이 있다. 밤새 눈이 온다는, 하늘이 무겁고 땅이 아슬아슬하니 조심하라는 건조한 문구가 내 삶을 관통하는 무심한 은유처럼 느껴졌다. 누구의 삶에나 악천후로 가득 찬 절기가 찾아온다. 신이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면, 더 절절한 예보를 미리 발신할 만큼 막막한 시기 말이다.사는 일은 때때로 지나치게 미끄럽다. 하나를 잡으면 다른 손에 쥔 것을 놓쳤다. 나의 사정과 무관하게 폭설은 찾아왔다. 홀로 맞기도 하고 둘이 맞기도 했다. 두 사람이 함께 겪는 폭설은, 나누어갖기 때문에 줄어들기도 하지만 둘이 겪기 때문에 곱절로 무거워지기도 했다.눈이 자주 내리는 나라에 산 적 ... -
얼굴이 기억 안 나는 사람
목적지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는 사람을 알고 있다. 일하는 동안 대개 손님을 등지고 있는 자들.택시 기사는 근무시간 동안 가로 1.8m, 세로 1.6m의 몸을 갖게 된다. 1평이 조금 안 되는 면적이다. 하루 12시간 동안 그들은 호출받는다. 기사들은 동시에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자다. 택시를 기다렸던 누군가 올라탄다. 미터기가 돌아간다. 시민이 여기서 저기로 흐르는 동안 도시는 조금씩 재조립된다. 타지에서 온 부부, 익숙한 병원으로 향하는 노인, 광장으로 가는 젊은이가 택시에 올라탄다. 개인이 가진 소일거리와 그날 일정부터 그가 겪게 될 사회와 탑승객의 역사가 통째로 택시를 통해 운반된다.매일 이동하는 자들은 웬만하면 길을 아는 자들이다. 동시에 매번 모르기도 하는 자들이다. “이 길로 가면 2분 더 빠르긴 한데, 내비(게이션)대로 가드릴까요?”택시는 기사만큼이나 승객에게 속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어쩌면 다시 만나지 않을 타인이 기사들의 근무지를 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