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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정신
민주당은 중도 보수정당이다. 가치나 신념을 중시해 선거 패배를 감수할 수 있는 이념 정당이 아니다. 민주당은 다른 종류의 정당이다. 정당 이론가 앤서니 다운스식으로 표현하면, 정책 실현을 목적으로 선거에 승리하려는 정당이 아니라 선거 승리를 위해 정책을 선택하는 정당이다. 가난한 시민들의 삶을 보살피는 일을 다른 무엇보다 중시하는 진보정당과 달리 중산층 감세와 기업 활력, 경제성장을 우선시하겠다는 정당이다.민주당은 중도 보수·실용주의의원들의 행동 양식도 흥미롭다. 당의 승리를 위해 의원직을 희생할 의원은 없다. 당은 패배해도 나는 의원이 되어야 한다. 당이 아니라 내가 주목받아야 한다. 경쟁하는 개인 의원들이 있을 뿐, 보통의 정당에서 보듯 이념적 가치나 지향에 따른 계파들의 구성체가 아닌 정당이 민주당이다. 친명과 비명은 있지만, 어느 쪽이 진보이고 개혁이고 보수인지 알 수 없다. 세계 최대 규모의 거대 정당 안에 성장과 분배, 평화와 동맹, 평등과 자유, 생태와 개... -
진보 없는 민주주의
거대 양당의 독과점 정치는 견디기 힘들다. 한쪽은 반국가로부터 국가를, 다른 쪽은 반민주로부터 민주를 지키자 한다. 사실 윤석열을 지키고, 이재명을 지키자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 양당제라고 하는데, 진보도 보수도 아닌 것 같다. 그들을 위해 세상이 있는 듯 행동하는데 진보니 보수니 하는 말에 의미가 실릴 리 없다.지금처럼 제3당의 독립적 기반이 약해진 때가 또 있었나 싶다. 4000여명의 지방의원 가운데 양당 소속이 98%나 되는데 자치나 분권, 다원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이 공허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당이 너무 많이 가져서 문제라는 것이 아니다. 마치 한 나라 안에 두 국가가 대립하는 것처럼 혐오와 적대로 양분된 사회를 만들었다는 게 문제다.같은 사람이 한쪽 편에서는 혐오의 대상이 되고 다른 편에서는 열광의 대상이 된다. 혐오가 곧 정체성이 된, 이상한 정당 정치다. 내란, 내전, 폭동도 이제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게 됐다. 8년 전 탄핵 때와 달리 이번에는 사태가... -
병든 민주주의
도종환 전 의원의 추천으로 오장환 시인의 ‘병든 서울’을 읽으며 병든 민주주의를 생각했다. “인민의 힘으로 되는 새 나라”를 꿈꿨던 시인은 ‘해방 정국’이 기대와 달라지는 것에 화가 났다. “짐승보다 더러운 심사에/ 눈깔에 불을 켜들고 날뛰는 장사치와/ 나다니는 사람에게/ 호기 있이 먼지를 씌워 주는 무슨 본부, 무슨 본부,/ 무슨 당, 무슨 당의 자동차”만 살판이 난 것처럼 보였다. 당과 본부들이 상대를 잡아먹을 듯하더니 결국 인민을 분열시키고 나라를 적대로 분단시켰다. 한국전쟁 이듬해, 시인은 “내 눈깔을 뽑아 버리랴, 내 씰개를 잡어떼어 길거리에 팽개치랴”며 개탄하듯 세상을 떠났다. 그때 못지않게 지금의 우리 민주주의도 병들었다고 말하면, 지나친 일이 될까.윤석열과 이재명이 맞붙었던 지난 대선을 당시 사람들은 “비호감 선거”라 불렀다. 신념과 대의는 고사하고 그럴듯한 정책 논쟁도 없이 서로의 범죄 요건만 거론하다 끝난 선거였다. 그때 이후 한국 정치는 도무지 정치 같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