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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한입 우리말
  • 이름 때문에 오해받는 큰 소, 황소

    나의 옛 이름은 한쇼다. 우리말에서 ‘한’은 크다 또는 많다를 뜻한다. 한쇼는 큰 소란 의미다. 어느 날 사람들이 나를 황소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멋진 누런 황금빛 털옷을 입은 건 사실이지만 겉모습만 보고 지레짐작으로 황소라고 부르는 것 같아 살짝 아쉽다. 누런색 털옷 때문에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으나 황은 한자 黃과는 다른 우리말에서 비롯되었다.‘한’은 참으로 신기한 글자다. 원형 그대로 활발히 활동하기도 하지만 나처럼 ‘황’ 또는 ‘할’로 다양하게 변주하며 우리말 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 한숨은 길게 몰아 크게 내쉬는 숨을 말한다. 슬프거나 답답할 때 자기도 모르게 큰 숨을 쉬게 된다. 그게 한숨이다. 한바탕, 한걸음, 한밭도 크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나와 ‘성’이 같은 황새도 마찬가지다. 황새를 보고 누런 새를 떠올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황새의 옛 이름은 한새이고, 이는 큰 새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새 중 하나가 황새 아닌가. 예나 지금이나 나와 성...

    2025.04.20 20:12

  • 엉겁결

    햇살이 따뜻하다. 산책하기에 딱 좋은 날이다. 간밤에 비가 조금 내려 땅이 촉촉이 젖어 있다. 신이 나서 뛰어다니는 강아지를 따라 망우산 둘레길을 걷던 중, 그만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밟아버렸다. 신발은 엿처럼 끈적끈적한 진흙으로 엉겁이 되었다. 야단났다. 또 ‘털팔이’처럼 뭘 묻히고 왔다고 아내에게 한 소리 듣게 생겼다.‘엉겁’은 엿처럼 끈끈한 물건이 범벅이 되어 달라붙은 상태를 가리킨다. 이 ‘엉겁’은 요즘 하는 일 없이 사전 깊숙한 곳에 쓸쓸히 앉아 있다. 단짝 ‘결’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 외에 딱히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결’이라는 발음 때문에 간혹 엉겁이 ‘엉겹’으로 잘못 불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결’을 만나면 즐겁다. 함께 뭉치면 ‘엉겁결’에 갑갑한 사전 속을 나와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다.엉겁의 친구인 ‘결’은 ‘때’ ‘지나가는 사이’ ‘도중’과 같은 시간적 의미를 더하는 말이다. 엉겁과 달리 ‘결’은 쉼 없이 수많은 단...

    2025.04.13 21:17

  • 알쏭달쏭 무지개?

    비가 그친 뒤 하늘에 무지개가 떴다. 무지개를 가까이서 만져보고 싶었다. 친구랑 무작정 집을 나서 무지개가 걸려 있는 동네로 향했다. 어린 마음에 조금 빨리 걸으면 쉽게 그 동네에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연신 동요 ‘무지개’를 불러 젖혔다. “알쏭달쏭 무지개 고운 무지개/ 선녀들이 건너간 오색 다린가~”무지개를 잡을 생각에 뜻도 모르면서 신나게 노래를 불렀다. 그저 선율을 타고 흐르는 노랫말이 부르기에도 듣기에도 좋았다. 무지개가 알쏭달쏭하다는 노랫말이 좀 어색하다고 느낀 건 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내가 알던 그 알쏭달쏭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여 얼른 분간이 안 될 때 쓰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노랫말 ‘알쏭달쏭 무지개’가 전혀 와닿지 않는다.본래 알쏭달쏭은 여러 가지 빛깔로 된 점이나 줄이 고르지 않게 뒤섞여 무늬를 이룬 모양을 말한다. 한 가지 색이 아니라 오색찬란한 무늬다. ‘알’이 본디 여러 가지 빛깔로 이루어진 점이나 줄...

    2025.04.06 20:44

  • 소대가리보다 소머리가 맛있을까

    얼큰한 국물에 밥 한 그릇 말아먹자고 했다. 바로 곤지암 소머리국밥 이야기가 나온다. 얼큰한 국물이 소머리국밥으로 나아갔다. 뜬금없이 소머리국밥은 곤지암이란다. 직장인들에겐 자기만 아는 맛집이 꼭 한두 곳은 있다. 곤지암 골목에 유명한 소머리국밥집이 있나 보다.어느 날 밥 먹다 친구가 말한다. 소머리국밥이 맞아? 소대가리국밥 아냐? 동물은 머리가 아니라 대가리가 맞지 않나. 별생각 없이 사는 나와는 달리 친구는 궁금한 게 많다. 국밥이 맛만 좋으면 되지 머리면 어떻고 대가리면 어떤가.이럴 때 참 난감하다. 명색이 교열기자인지라 어색한 우리말만 나오면 나에게 묻는다. 대가리와 머리를 구분하지 못해서 그런 게 아니다. 사전에 있는 말과 일상에서 쓰는 말이 다른 경우가 많아서다. 게다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는 말은 사전에 기대어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이제는 오히려 소대가리국밥이라고 하면 뭔가 어색하다. 머리는 사람의 신체 부위를 이르는 말이다. 대가리는 동물의 머리를...

    2025.03.30 20:48

  • ‘한입 우리말’인 이유

    평기자 시절 오피니언팀 팀장이 우리말 칼럼을 한번 써 보라고 했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그렇게 하겠다고 대뜸 대답하고 말았다. 당시에는 우리말 칼럼이 그리 많지 않았다. 큰 부담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열심히 풀어놓았다.어느 날 타 부서 후배가 페이스북에 우리말 칼럼을 올려 페친들한테 글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후배는 몇 가지 의견을 모아 조심스럽게 나에게 전했다. 그중 하나가 ‘기자가 독자를 가르치려고 든다’였다. ‘가르치다와 가리키다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가르치다는 어떤 사실을 알도록 하여 잘 쓰도록 하는 행동을 뜻하고, 가리키다는 어느 곳을 보도록 알려주는 손짓을 말한다. 두 말은 엄연히 다르다.’ 설명한다고 한 말이 독자들에게는 가르치려고 드는 모습으로 비친 것이다.세월이 지나 다시 우리말 칼럼을 써 보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 순간 떠오른 말이 ‘가르치려고 든다’였다. 망설이다 결국 쓰기로 했다. 마음을 정하니 ‘젊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읽을 만한 글...

    2025.03.23 20:40

  • 반려견과 개소리 사이에

    눈뜨면 제일 먼저 강아지랑 산책을 한다. 털이 길어지면 강아지 미용실을 찾고, 추울 땐 따뜻한 옷을 입힌다. 자기 전에는 치카치카 깨끗하게 이를 닦아준다. 강아지와 지내는 삶이 일상이 되었다. 어제도 오늘도 ‘강아지 집사’의 삶을 살아간다. 이쯤 되면 키우는 게 아니다. 함께 생활한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싶다.‘개’라고도 하지 않는다. 작고 어린 것을 뜻하는 ‘아지’를 붙여 강아지라고 부른다. 그래야 말하기도 편하고 듣기에도 좋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개가 아니라 강아지다. 강아지를 좋아할수록 일상에서 개와 강아지의 구분은 모호해진다.이제 강아지는 단순히 키우는 동물에 머무르지 않는다. 정서적으로 감정을 나누는 가족처럼 여겨진다. 그렇다 보니 개보다 강아지란 말이 더욱 정겹게 다가온다. 같이 삶을 누리니 견주(개 주인)도 아니다. 강아지 보호자가 된다. 애완견이라고는 더더욱 하지 않는다. 짝이 되는 동무를 뜻하는 ‘반려’를 덧붙여 반려견이라 한다. 반려견은 개가 아...

    2025.03.16 20:48

  • 재수가 없으니 땡전도 없다

    예능 방송에서 유명 연예인이 학생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땡전 한 푼 못 받아도 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연기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어느 날 연기를 하는 게 너무 싫어져 연예계를 떠난 뒤 복귀하면서 한 말이었다.지금껏 살면서 땡전 한 푼 못 받아도 하고 싶은 일이 있었을까. 일에 대한 그런 열정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일이 안 풀릴 땐 으레 ‘재수가 없어서’라는 말을 쉼 없이 내뱉으면서 그럭저럭 그 시간을 버틴 듯하다. 재수가 없으니 땡전이 한 푼도 없다. 땡전이 들어올 운수가 없는데 어찌 내 주머니에 돈이 많을 수 있겠는가.재수와 돈, 그리고 땡전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재수’는 본디 재물에 대한 운수를 가리켰다. ‘재수가 없다’는 재물이 들어올 운수가 없다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재물이 생기는 것은 사람들에게 좋은 일이었나 보다. 단지 재물이 들어올 운수가 자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운수를 통칭...

    2025.03.09 21:46

  • 영역을 넓히는 ‘맛집’

    어깨에 놓여 있던 무거운 짐이 사라진 날, 선배가 전화를 했다. 그동안 애썼다며 동네에 집밥보다는 못하지만 괜찮은 맛집이 있다며 오라고 한다. 게으른 나와 달리 요즘 사람들은 맛집을 찾아 먼 여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소장용 맛집 인증사진은 필수다. 빠듯하게 돌아가는 삶 속에서도 각자 방식대로 세상과 소통하며 여유를 즐긴다.맛집은 맛있기로 유명한 음식점을 이르는 말이었다. 예로부터 사람 사는 곳에는 먹거리가 빠지지 않는다. 먹거리가 있는 곳에 으레 맛집 한두 곳은 있다. 더욱이 독특한 먹거리를 찾아 맛집 기행을 떠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음식 맛도 개성이 넘쳐난다.어느 틈에 우리 생활 속으로 파고든 맛집은 단순한 먹거리 공간에만 머물지 않는 듯하다. 따라가기 힘들 만큼 수많은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새로운 곳으로 영역을 넓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제는 유명 음식점을 일컫던 맛집이 음식과 상관없는 곳에서도 널리 쓰인다. 예쁘거나 잘생긴 사람이 많으면 얼굴 맛집, 수록곡이 마...

    2025.03.02 20:34

  • 팔불출에 바보와 깡패라

    우리 시대 어른들은 감정 표현이 서툴렀다. 좋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는 특히나 쑥스러워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친구에게 ‘우리 아들 이번에 대학 가’라며 에둘러 아들 자랑을 했다. 겸연쩍은지 ‘내가 팔불출이 다 되었네’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땐 자식이 대학 가는 것도 자랑거리였다.예전엔 그랬다. 자식 자랑, 아내 자랑, 남편 자랑 하는 사람은 좀 덜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았다. 때로는 ‘팔불출’이라고 놀렸다. ‘팔불출’은 어리석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우리 정서상 자신이나 집안을 내세우지 않는 겸손의 미덕 때문일까. 아내, 자식 자랑 하려면 팔불출 소리는 들을 각오를 해야 하던 시절이었다.세월이 흐르면서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요즘 사람은 자신의 감정을 예쁘게 잘 드러낸다. 자랑이 과하지 않으면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맞장구치며 좋아한다. 그러다 보니 놀림조로 말하던 팔불출에도 살짝 친근감이 붙었다. 가까운 사이에 장난스레 호감을 표현하는 말로도 쓴다.스스럼...

    2025.02.23 21:01

  • 칠칠맞은 ‘칠 가이’

    처음 집에 온 날, 청바지 차림은 아니지만 예쁜 갈색 강아지였다. 첫 미용을 한 날 흰 강아지가 되었다. 그사이 털갈이를 한 모양이다. 그로부터 19년이 흘렀다. 여전히 ‘그’는 건강하게 내 곁을 지키고 있다. 그의 이름은 똘이.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강아지 캐릭터 ‘칠 가이(chil guy)’ 이야기를 들었다. 갈색 곰돌이 옷을 입고 있는 똘이와 칠 가이가 겹치며 슬며시 웃음이 났다.‘또 외래어야?’란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호기심에 이것저것 찾아봤다. ‘칠 가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여유롭고 느긋한 사람을 일컫는다고 한다. 똘이는 강아지일 때는 성격이 급하고 날카로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나와는 달리 똘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한결 느긋해졌다. 요즘 사람 말로 칠 가이가 된 것이다.이것저것 보던 중 ‘chil chil(칠 칠) 맞게 뭐야 이게’에 눈길이 멈추었다. 쓴웃음과 함께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언젠가 후배에게...

    2025.02.16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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