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80주년 경향신문


경향신문

기획·연재

내일의 태도
  • 전체 기사 8
  • [내일의 태도]우리 모두의 카이로스를 위하여
    우리 모두의 카이로스를 위하여

    시간이 소재인 판타지 작품은 인간의 ‘후회’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작품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대부분 등장인물의 시계를 거꾸로 돌린 후 네가 갖고 싶은 게 정말 돈과 명예인지 좀 더 소중한 것은 없는지 묻는 시험의 반복이다. 답이 정해져 있는 이 문제들은 주인공이 물질적 욕망을 추구할수록 또 다른 비극을 발생시켜 끝내 주인공에게 인간적인 가치를 선택하게 만드는데, 그 까닭을 짐작하자면 이 작품들이 전제하는 ‘시간’이란 한 사람이 살고 있는 세상과 그 세상이 모여 만든 질서와 원칙을 뜻하기 때문일 것이다.그리스어로 ‘카이로스’는 ‘상대적인 시간’이자 ‘기회’란 뜻으로 물리적이며 연속적인 시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와 구분된다. 6년 전 방영된 드라마 <카이로스>는 제목처럼 시간을 되돌려 다시 기회를 얻고 싶은 한 남자의 이야기다. 딸을 유괴로 잃은 남자 김서진(신성록)은 절망에 빠진 채 범인을 쫓다 자신의 휴대폰이 한 달 전의 과거를 살고 있는 한애리(이세영)의 휴대폰과...

    2026.05.06 19:58

  • [내일의 태도]유령들의 사이퍼
    유령들의 사이퍼

    한 유튜버가 재일교포 래퍼 PM케노비의 노래에 한국어 자막을 달아 올린 영상이 최근 화제다. “할아버지 출신 제주도, 나는 가본 적 없지만” “아버지 출신 이쿠노, 빠져나왔지 환경”이라는 정직한 가족 소개로 시작한 랩은 재일교포라는 이유로 교제를 반대하던 여자친구의 아버지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어진다. 할아버지가 겪었던 차별의 역사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혼란을 고백하는 케노비의 손엔 ‘짜슐랭’과 ‘코코팜’이 쥐여 있다. 짜장라면은 한국화된 중국 음식, 코코넛은 한국 땅에서 자라지 않는 열대 과일. 한국 상표가 붙어 있지만 정작 한국의 것은 아닌 이 제품들은 “일본인도 한국인도 아닌 나는 도대체 어디 사람”이라고 묻는 케노비와 닮아 있다.케노비가 겪는 혼란은 재일교포 3세 유튜버 오오카와상이 제작한 영상 ‘촌파리’에도 잘 드러난다. 영상은 오오카와가 소설 <파친코>를 읽고 기획한 것으로, 제목인 ‘촌파리’는 일본 내 조선인 멸칭인 ‘춍’과 한국 내 일본인 멸칭...

    2026.03.11 20:09

  • [내일의 태도]환대의 서가
    환대의 서가

    지방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한 친구가 고민을 털어놨다. 카페 서가에 있는 책을 한 달에 한 번씩 교체하는데,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책의 내용을 검열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어느 날 자신을 공간 컨설턴트라 소개한 손님이 비치된 페미니즘 서적을 가리키며, 상업 공간에 이런 책을 두면 안 된다고 지적한 뒤부터 시작된 검열이었다.그 얘기를 들은 친구는 자신의 관심사인 환경, 여성, 지역에 관한 책들을 숨기고 모두가 좋아할 만한 음악과 사진에 관한 책을 가져다 놓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음악과 사진에 있는 정치적 함의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결국 모든 책을 외국 작가의 그림책으로 바꾸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지만, 가끔 그 책을 자세히 읽는 손님을 보면 그림 속에서 어떤 상징을 발견해 그 의도가 무엇인지 자신에게 따져 물을 것 같아 심장이 떨린다고 했다.친구의 말을 듣고 나는 몇해 전 우연히 방문했던 국도변 낡은 휴게소를 떠올렸다. ‘빨갱이 출입 금지’ 푯말이 간판보다 크게 붙어...

    2026.02.11 20:03

  • [내일의 태도]작별의 장면들
    작별의 장면들

    안성기를 생각할 때면 왜인지 늘 그의 뒷모습부터 떠오른다. 내가 기억하는 영화 속 그는 언제나 쓸쓸히 길을 걷는 모습이다. 눈 덮인 산속을 헤매던 빨치산(<남부군>)은 물론, 첫눈에 반한 여자에게 끝없는 구애를 퍼붓던 너드(<기쁜 우리 젊은 날>), 악연인 형사의 얼굴에 주먹을 꽂던 조폭 두목(<인정사정 볼 것 없다>), 한물간 록스타를 꾸준히 뒷바라지하며 재기를 성공시킨 매니저(<라디오스타>)까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독특한 인상임에도 그의 존재는 왜인지 모두 춥고 언 길을 묵묵히 걷는 뒷모습으로 남아 있다.몇년 전 봤던 만화 <룩 백(Look Back)>은 만화 그 자체를 사랑하는 두 소녀, 후지노와 ‘쿄모토’의 우정과 이별을 다룬다. 작품은 제목 그대로 인물의 ‘등’을 집요하게 그린다. 주인공 후지노는 쿄모토를 이기기 위해, 또 쿄모토의 격려로 포기했던 만화를 다시 그리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다. 창밖으...

    2026.01.14 20:07

  • [복길의 내일의 태도]점선을 따라 안쪽으로 접으세요
    점선을 따라 안쪽으로 접으세요

    이제 10대 시절의 이야기를 하기엔 제법 나이를 먹었지만, 내가 느끼는 고통의 기원을 찾다 보면 태연히 그때로 돌아가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무엇도 탓하지 않고 오직 나의 서사 안에서 싹트는 새파란 고통을 보기 위해서. 그러나 어린 내 모습을 마주하고 연민을 경계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 한동안은 그 연민을 이겨내지 못해, 어른이 된 내가 어린 시절의 나를 안아주는 신파적인 장면을 수없이 바라봐야 했다.어항에서 수족관으로어쩌면 고통의 원인을 과거에서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 신파가 끝나고 찾아온 냉혹한 자기혐오의 시간은 내게 더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었고, 그 고통에 무뎌지면 기억의 해상도가 점점 낮아지다, 복잡했던 과거는 결국 하나의 뭉툭한 단상이 된다. 잦은 회상으로 심각하게 마모된 기억. 겉면엔 ‘탈출’이란 글자가 희미하게 적혀 있다.내가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나는 당연히 더 크고 더 멋진 곳에 살아야...

    2025.12.14 19:56

  • [복길의 내일의 태도] 학교 밖의 동창회
    학교 밖의 동창회

    숫자 ‘1’ 옆에 마치 실수로 인쇄된 듯 보이는 또 다른 ‘1’. 손가락 열 개를 채우고도 하나가 남는, 인심 좋은 숫자 11. 실수를 저질러도 왠지 한 번 기회를 줄 것 같은 안도의 숫자 11. 아직 한 달이 더 남았으니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듯한 11월. 게으른 인간의 마지막 보루.스무 살 노동, 어떻게 위협받는가“12년의 입시가 종료되는 날이네요. 차분히 문제를 풀고, 끝나면 마음껏 기쁨을 누리세요.” 아침 라디오 DJ의 반복적인 응원과 격려를 듣고서야 11월에 수능이 있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수능, 인생엔 그보다 몇 곱절이나 힘든 고통이 있다는 걸 체험한 후, 내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고만 아주 사소한 이벤트. 음, 쓰고 보니 ‘인생 별거 아냐’ 하는 종류의 허세 가득한 소회인 것 같아 부끄럽다. 하지만 오늘은 지우지 않는다. 수능 당일 SNS에서 보았던, ‘제발 수능 못 쳐도 인생 망한 거 아니라고 해줘요’란 어느 청소년의 절박한 요청에 답을 보태고...

    2025.11.16 21:54

  • [복길의 내일의 태도]토끼풀 신문사
    토끼풀 신문사

    꽤 오랫동안 게임에 문외한이란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게임 속 세계관에 대한 해석이나 게임회사의 운영 방식을 두고 골치 아프게 싸워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는 게임을 잘 몰라서요. 가끔 스도쿠 정도 해요” 하며 얄밉게 빠져나가는 식으로 말이다.내가 자란 세계관에서 게임이란 학생이 해서는 안 될 불량한 활동이자, 단속의 대상이었다. 학교 선배 중 하나가 스타크래프트 게이머가 되었다는 것에 분노하다 급기야 그의 미래에 저주를 퍼붓고 말았던 교장 선생님의 담화는 그 세계관을 형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기억이다. 그렇게 축적된 편견들 때문에 서른이 넘어서까지 나의 유일한 게임 경력은 일곱 살에 했던 ‘슈퍼 마리오’뿐이었다. 그러니 2년 전 ‘젤다의 전설: 티어스 오브 킹덤’을 플레이하며 내가 흘린 뜨거운 눈물은, 게임을 모르고 살아온 지난 20여년의 한이자 설움이었다…!억압을 ‘백지’로 거부한 청소년들‘리토의 마을’은 이 게임의 배경인 ‘하이랄 왕국’에서 내가 가장 좋...

    2025.10.19 20:37

  • [복길의 내일의 태도]종로의 밤
    종로의 밤

    본관이 어디냐는 질문에 잠시 눈앞이 하얘졌다. 우물쭈물하니 친구의 아버지가 먼저 “요즘엔 성을 묻는 사람이 잘 없지” 하고 속을 헤아려줬다. 대체 어른들은 남의 집 족보가 왜 궁금한 걸까? “그게 어른들한텐 일종의 MBTI 같은 거지.” 친구는 자신의 아버지를 변호하듯 멋쩍게 말했다. 나는 친구 아버지가 준 배 한 상자를 트렁크에 실으며 호쾌하게 웃었다. 친구야, <범죄와의 전쟁>에서 최익현(최민식)은 ‘어디 최씹니까?’라는 질문 하나로 주먹 세계의 실세가 됐어. 한국 사회에서 뿌리를 안다는 건 그만큼 강력한 힘인 거야. 참… 난 경주 최씨도 아닌데 이렇게 좋은 배를 받아도 되는 건지…본관을 알려준 대가로 받은 배는 달고 시원했지만, 남의 족보를 묻는 게 거북하다는 내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경상도 집성촌에서 조선시대부터 대를 이어 살아온 나의 조부모는, 내가 겨우 말을 뗐을 때부터 가문의 큰 인물이 세운 업적들을 읊어주던 분들이었다. 400년 전 죽은 내 조상의 ...

    2025.09.14 21:24

연재 레터를 구독하시려면 뉴스레터 수신 동의가 필요합니다. 동의하시겠어요?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콘텐츠 서비스(연재, 이슈, 기자 신규 기사 알림 등)를 메일로 추천 및 안내 받을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레터 구독을 취소하시겠어요?

뉴스레터 수신 동의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안녕하세요.

연재 레터 등록을 위해 회원님의 이메일 주소 인증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시 등록한 이메일 주소입니다. 이메일 주소 변경은 마이페이지에서 가능합니다.
이메일 주소는 회원님 본인의 이메일 주소를 입력합니다. 이메일 주소를 잘못 입력하신 경우, 인증번호가 포함된 메일이 발송되지 않습니다.
뉴스레터 수신 동의
닫기

경향신문에서 제공하는 뉴스레터, 구독 서비스를 메일로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원하지 않는 경우 [마이페이지 > 개인정보수정] 에서 언제든 동의를 철회할 수 있습니다.

※ 동의를 거부하실 경우 경향신문의 뉴스레터 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지만 회원가입에는 지장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 1이메일 인증
  • 2인증메일 발송

로 인증메일을 발송했습니다. 아래 확인 버튼을 누르면 연재 레터 구독이 완료됩니다.

연재 레터 구독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경향신문 홈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