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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이유는 달라도 ‘더 나은 미래’ 향한 노력은 같았다
늦은 봄부터 초여름까지, 죽음에서 배움을 얻는 현장을 찾았다. 극우 테러를 겪은 노르웨이, 군사독재 시기를 보낸 남미, 쓰나미에 휩쓸린 동남아시아, 최악의 산업재해를 입은 인도, 홀로코스트가 자행된 독일이었다. 그들은 추모하고 변화했다.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한국 사회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세월호, 5·18민주화운동, 각종 산업재해를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수도 한복판에 자리한 과거사 반성 시설…‘책임 회피·유족 폄훼…’ 한국 부끄러워독일·노르웨이2010년 ‘역사의 현장에서 미래를 묻다’라는 제목의 기획을 진행한 적이 있다. 사회학자와 역사학자가 현대사의 주요 사건이 벌어진 현장을 답사한 후 그 사건의 현재적 의미를 짚은 글을 보내오면, 취재기자들이 르포 형식의 관련 기사를 덧붙이는 방식이었다.기획 초반에 ‘날림’ 공사가 초래한 몇몇 대형 참사들의 흔적을 짚어볼 일이 있었다.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 참사, 1994년... -
집 앞에, 일터 옆에…박물관 아닌 일상서 추모와 반성
한때는 분단의 상징, 1989년 이후엔 통일의 상징인 독일 브란덴부르크 문은 수도 베를린을 대표하는 조형물이다. 2014년 두 번째 월드컵 우승 당시 독일 국민들은 이 문 앞 대로에 몰려나와 환호했다. 육중한 조형미를 자랑하는 독일 연방의회 건물, 그리고 황금빛 승리의 여신상으로 유명한 전승기념탑, 시민들의 드넓은 휴식처인 티어가르텐 공원,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주요국 대사관들도 근처에 몰려 있다.그리고 도시의 중심인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엔 검은 비석들이 거대한 무덤처럼 펼쳐져 있다. 지난 6월22일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홀로코스트 기념비)’를 찾았다. 가로(95㎝)와 세로(2.38m)가 같고 높이가 다른 2711개의 비석들이 1만9073㎡의 부지에 늘어선 채 파도가 일렁이는 듯한 굴곡을 만들어냈다. 이 공간은 중심부를 향해 들어갈수록 바닥이 낮아지면서 비석의 높이가 높아지는 구조로 돼 있다. 가장 깊숙한 곳에서는 비석의 높이가 4m를... -
‘20세기 최악 산재’에 최소의 보상…장애 대물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이었지만 죽음은 분명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가스는 소리 없이 퍼졌다. 운 좋게 잠에서 깨어난 이들은 필사적으로 뛰었다. 잠에서 깨지 못한 이들은 다시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가스는 발이 없어서 사람의 발을 앞질러 갔다.1984년 12월2일 밤 인도 중부 마디아프라데시주의 주도 보팔에 있는 다국적 화학기업 ‘유니언카바이드’ 공장에서 아이소사이안화메틸 가스가 대량 누출됐다. 이 가스는 인체가 잠시만 노출돼도 중상을 입는 맹독이다. 하필 사고가 한밤중에 일어나 속수무책으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가 많았다. 생존자 단체 모임 ‘보팔의 정의를 위한 국제운동(ICJB)’은 참사 당시에만 3700여명이 사망했고 이후 후유증으로 숨진 이들까지 더하면 1만6000여명이 세상을 떴다고 전했다. 이 사고 피해자는 최소 55만8000여명으로 추산된다. 이 사고로 유니언카바이드의 신뢰는 추락했고, 결국 2001년 다른 화학기업 ‘다우케미컬’에 인수됐다.... -
기억을 위한 싸움
칠레, 아르헨티나는 한국과 지구 반대편에 위치해 있지만, 역사의 궤적은 한국과 무척 닮았다. 칠레, 아르헨티나는 모두 쿠데타와 군부독재를 겪었다. 두 나라의 독재자들은 모두 수십년 전 추방됐지만, 독재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 있다.칠레는 1973년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선거로 집권한 사회주의자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를 끌어내린 후 17년 동안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아르헨티나는 1976~1983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를 비롯한 군인들이 번갈아 집권하며 공포정치를 했다. 이들은 ‘좌파 척결’을 명분으로 반정부 인사들을 납치해 고문하고 죽였다. ‘테러 분자’를 소탕한다고 했지만 피해자 중 상당수는 학생, 교사, 지식인, 성직자, 언론인 등 평범한 시민이었다. 칠레에선 공식 확인된 것만 3200명 이상이 살해당했다. ‘추악한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아르헨티나에서는 3만명 이상이 처형되거나 실종됐다. 고문 피해자는 두 나라 모두 수만명이고 해외로 추방되거나 망명한 사람도... -
재난은 총을 내려놓게도 하고, 분쟁을 만들기도 한다
“그때 죽은 아이 넷의 사진을 아직도 지갑에 넣고 다닙니다. 넷 다 시신조차 못 찾았어요. 다시 돌아올지 몰라 광고도 하고, TV에도 출연하고…. 아이들이 아직도 살아 있을 것만 같아요. 제가 계속 여기서 일을 한다면 언젠가 아이들이 저를 찾아올까요?” 2004년 12월26일 오전, 검은 파도가 인도네시아 반다아체를 덮쳤다. 마르주키 압둘라(61)는 이 파도에 어린 자녀 넷을 떠나보냈다. 여행차 타 지역에 있던 그가 황급히 반다아체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네 자녀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집과 병원 건물은 폐허가 된 후였다. 압둘라는 “모든 것을 잃었다”며 눈물을 내비쳤다. 그날 숩나 라니사 이차(23)는 아빠와 함께 바닷가에서 놀다 큰 지진을 느꼈다. 잠시 후 검은 물이 모래 틈새로 올라왔다. 이차는 “고개를 들어보니 바닷물이 점점 뒤로 빠지고 있었다. 그러다 파도가 산처럼 커졌다”고 회고했다. 이차는 아빠와 함께 산으로 대피해 파도를 피했지만, 바닷물이 ... -
단죄보다 관용···“그럼에도 좀 더 분노해야 했다”
참사 그 후, 진정한 추모는 변화다지난 5월 칠레 산티아고의 한 호텔 앞, 100여명의 시위대가 외쳤다. “콜바란, 살인자! 범죄자!” 호텔에선 1970~1980년대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 시절 비밀경찰 조직(국가정보센터)에서 일한 알바로 콜바란의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3000명 넘는 시민을 학살한 독재정부에서 고문·살인 범죄를 저지른 콜바란은 감옥에서도 특혜를 받아 편히 지내며 집필했다. 시위대는 다시 외쳤다. “수많은 악이 처벌받지 않은 채 어떤 민주주의도 작동할 수 없다.” 칠레의 시민 학살은 과거사가 아니라,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필요한 오늘의 문제였다.2004년 12월26일 인도네시아 반다아체에선 모두가 유가족이 됐다. 밀려들어오는 검은 파도를 피해 간신히, 운 좋게 살아남은 자는 12만명의 죽음을 마주했다. 반다아체는 거대한 추모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가족과 이웃을 떠나보내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에 삶의 터전을 다시 세운 이들은 매일 쓰나미를 되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