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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수백년 파내고 들어엎기를 반복한 청계천, 민초들의 운명과도 닮아있다
정월대보름의 꽉 찬 달이 떠오르는 저녁, 집집마다 등불이 걸렸다. 솥에 찐 찰밥으로 배를 채운 아이들이 어둑해진 하늘에서 연을 거둬들이면, 공터에서 마른 짚단을 태운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풍물패의 공연이 벌어지자 벌써부터 탁주에 취한 취객들이 불 주변을 돌며 춤을 췄다. 주민들은 귀천을 가리지 않고 강가로 쏟아져 나와 섞였다. 대나무 자루에 걸린 초롱에서 새어나온 은은한 불빛이 반딧불 무리처럼 긴 행렬을 이뤘다. 어른들은 광통교를 시작으로 청계천의 열두 다리를 밤새도록 밟아 돌아다녔고, 쌀가루를 하얗게 얼굴에 뒤집어쓴 아이들이 멋모르고 대열의 꼬리에 따라붙었다. 다리로 다리를 밟아 액을 막는다는 뜻의 풍속이라는데, 그 의미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사람은 먼 옛날에도 거의 없었을 것 같다. 그저 도시 전체가 낭만에 흠뻑 젖은 밤이 지나가는 게 다들 아쉬워서 밤을 배회하지 않았을까. 마굿간에서 태어났다는 예수의 생일을 떠올리지 않고도, 현대인들 역시 한파가 덮친 거리로 끌... -
(14)좌 소양강·우 북한강, 상 일터·하 거주지의 경계에 선 ‘사랑의 다리’
“춘천 가는 기차는/ 나를 데리고 가네/ 오월의 내 사랑이/ 숨쉬는 곳”(‘춘천 가는 기차’, 김현철)기차를 혼자 타는 건 너무 쓸쓸한 일이다. 특히 경춘선처럼 역사적인 데이트 철로라면. 이 노선 위로 새로 도입된 고속열차는 아예 ‘청춘열차’로 명명되었을 정도니까. 가수 김현철이 ‘춘천 가는 기차’에서 떠올린 추억은 내 부모님의 추억이자 그 추억의 소산인 나의 추억이며, 적어도 수십만의 커플이 공유하는 추억이기도 하다. 지금도 경춘선 종착지인 춘천역에는 풋풋하게 사랑을 시작하는 젊은 연인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을 것이다. 미래의 추억은 도처에 널려 있다. 그들은 주택가 골목 사이마다 숨어있는 아늑한 카페들을 찾거나, 의외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한약방에서 새어나오는 생강차 향기에 붙들리거나, 재래시장의 베트남 상인이 말아 내놓는 쌀국수 국물에 마음을 빼앗길 준비를 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 도시의 분위기를 결정하는 물가를 향해 걷게 된다. 물의 기운은 일년 내내... -
(13)동작대로 모양뿐 아니라 역사의 방향까지 구부러뜨린, 복잡한 운명
국립서울현충원은 동작대교 남쪽 입구를 마주보는 곳에 자리한다. 서울에서 가을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공원이다. 표면을 매끈하게 연마한 화강암 묘비가 끝없이 늘어선 잔디밭 사이로 조용한 오솔길들이 가지처럼 뻗어나 나있고, 우거진 단풍나무 숲에 놓인 벤치에 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사색에 잠기게 된다. 이곳은 원래 한국전쟁 전사자들을 위한 국군묘지였고, 국립묘지로 승격된 지 한참이 지난 지금도 안장자의 대부분은 한국전쟁 전사자이다. 묘지를 산책로 삼아 돌아다니는 행동이 경건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인지 파리 외곽의 몽마르트르 묘지를 거닐던 활기찬 여행객의 모습을 서울 한복판의 현충원에서는 보기 어렵다. 국가행사가 없는 평일이면 드넓은 현충원 부지에는 묘지의 숙연함에 어울리는 외로운 침묵만이 감돈다.현충원 안에는 네 명의 전직 대통령 무덤이 있다. 무덤 앞에 세워진 넓다란 석판 위에는 깨알 같은 글자로 대통령들의 지난 삶이 기록되어 있다. 장엄하기 이... -
(12)붕괴의 기억, 대형 참사는 ‘사회적 구성물’이 와해돼 일어난다
영화 <벌새>의 배경은 1990년대 초반이다. 대한민국은 벌새의 근면성실이 절대규범인 개발도상국 시대를 지나는 중이고, 중학생 은희는 이 사회적 정상성의 규범 앞에 끊임없이 순종을 요구받는다. 그런 어느날 갑자기 성수대교가 무너진다. 아무도 그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왜냐면 애초부터 아무것도 정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개발도상국 지위를 공식적으로 벗어난 ‘선진국’ 시대의 눈으로 보아도 25년 전의 영화 속 이야기는 그리 낯설지 않다. 영화와 현실 사이의 시간 간격은 1990년대를 묘사하기 위해 쓰인 소품들이 아니라, 무너진 다리를 담아낸 화면을 볼 때 느껴지는 차분한 마음의 거리로 다가왔다. 나는 영화 속 은희와 동년배다.모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일은 그 자체로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도 충격적인 재난 실화를 용기있게 끄집어내는 이야기는 얼마나 드문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놀랄 수밖에 없다. 고통을 직시하거나 비평의 단서로 삼을 수 있기까지는 아주 ... -
(11)낡아서 바스러져 가는 것들 사이…이곳도 언젠가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취미로 책상을 만들곤 한다. 먼저 목재 수입 업체에서 두꺼운 집성목을 구입한다. 무늬가 아름답고 단단해서 잘 휘어지지 않는 아카시아나 멀바우 목재를 선호하는 편이다. 원하는 크기로 자르려면 재단비가 든다. 배송받으려면 용달 트럭을 빌려야 해서 또 추가비용이 든다. 책상의 완성도는 사포질이 좌우한다. 이 정도면 됐겠지, 라는 생각이 세번쯤 들 때까지 거친 사포로 표면을 연마한다. 고운 사포로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오일을 스펀지로 곱게 펴바른다. 귀찮지만 시간을 단축하려면 무거운 판재를 들고 옥상에 올라가 햇볕에 잘 말려야 한다. 마르면 다시 거친 면을 사포로 연마한다. 다시 오일을 먹인다. 다시 옥상으로 들고 가서 말린다. 마지막 사포질로 마무리한다. 단단한 목재 표면에 드릴로 작은 구멍을 뚫는다. 철제 주물 다리를 나사로 연결한다.다 만든 책상을 지인들에게 보내기 전에 인두로 지져 서명을 남긴다. 겉보기로는 특별할 게 없는 책상은, 오로지 마지막 5분 동안 남긴 ... -
(10)국토개발의 상징, 다리 위에선 ‘한남동 달동네’도 아름다워 보이는 곳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에는 다리가 놓이겠지. 길 가는 데 땅이 있고 땅은 돈이 된다. 이게 부동산 투자의 첫번째 원리야.” 황석영의 소설 <강남몽>에 등장하는 박기섭은 공무원 출신의 부동산업자다. 그는 경부고속도로와 한남대교가 놓이면 천정부지로 값이 뛸 강남 땅을 청와대의 정치 비자금으로 미리 매입하고, 스스로도 부동산 차익을 얻어 건설업으로 뛰어든다. 훗날 강남의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그는 과도한 투자를 감당하지 못하고 부도를 맞는다.강남·북을 잇는 서울의 중추며아시안 하이웨이 기점 예정지다리 북쪽 남산 자락의 언덕엔아직 손을 덜 탄 주거지가 있다한남대교는 국토개발사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지닌다. 이 다리는 강남과 강북을 잇는 서울의 척추로서 서울 남부 개발의 신호탄이 되었고, 지금도 전국 최대의 일일 통행량 기록을 해마다 갈아치우고 있다. 한남대교 남단은 다리와 비슷한 시기에 개통한 경부고속도로의 기점이다. 한반도의 척추인 ... -
(9)‘4대강 아픔’ 되풀이하지 말라며…두려운 기억이 일깨우는 ‘미래’
서울고등법원 583호 법정. 공판이 막 개시된 참이다. 원고는 회색 두루마기를 입은 작은 체구의 승려이며 피고1번의 이름은 대한민국이다. 그러나 피고1번은 형상을 가진 존재가 아니므로, 피고석에는 곤색 정장을 갖춰입은 정부법무공단의 변호사들이 대리인 자격으로 앉아있다. 법원의 사려 깊은 배려에 따라 공판 법정 앞 재판일정표에 적힌 피고의 이름은 머릿글자만 남긴 채 숨겨졌다. 피고: 대○○○.본래 이 소송은 영주댐 건설의 중지를 구하는 것이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댐이 완공되었기에 원고의 주장은 더욱 완강해졌다. 그는 이제 댐의 철거를 주장했다. 법정의 더딘 시간과 달리 바깥 세상은 빠르게 바뀌었다.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피고석에 불려왔던 정권의 주체가 바뀌었다. 일련의 사건들로 사법부의 평판이 추락했고, 희박한 확률을 뚫어내고 국가소송 사건의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졌다. 재판장은 권위를 숨기고 친근한 말투를 썼다. 아이를 어르는 태도였다. 5년간 각급 법원을 거쳐 ... -
(8)사람 몰아내고 또 사람이 지켜낸…밤섬의 어제와 오늘을 ‘횡단’
영화 <괴물>의 첫 장면. 음침하기 그지없는 지하 실험실에서 미국인 박사가 독극물을 한강에 방류하라고 명령한다. 그는 망설이는 한국인 조수를 다그친다. “한강은 무척 큽니다, 김씨.” 곧 오염수를 먹고 돌연변이 괴물이 자란다. 한강시민공원으로 올라와 소녀 한 명을 납치한 이 괴물은 강 건너편의 수풀이 무성하게 자란 섬으로 헤엄쳐 달아난다. 눈썰미가 좋은 관객은 알아챘겠지만, 그곳은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밤섬이다. 환경오염이 낳은 재앙이 인간을 꿀꺽 집어삼킬 때, 하늘 위로는 야생동물보호법의 비호를 받는 철새들이 유유히 날고 있다. 영화 <김씨 표류기>의 주인공은 또 다른 김씨다. 그 역시 인간을 피해 밤섬에 들어갔다. 경제적 어려움을 비관하여 한강에 몸을 던졌다가 떠내려간 것이다. 사회로부터 단절된 무인도의 삶은 좌절의 연속이지만 혼자 힘으로 극복하지 못할 난관은 없다. 김씨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희망의 감각을 되찾아 나간다. 하지만 그를 섬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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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몰개성의 남쪽과 이국적인 북쪽 잇는, 세계 최장의 ‘교량 분수’
380개의 노즐이 분당 60t의 물을 끌어올려 허공에 뿜어낸다. 물줄기는 음악에 맞춰 각기 다른 포물선 궤적을 그리며 춤추고, 200개의 LED 조명에서 쏘아낸 알록달록한 광선이 물보라 사이로 부서져 흩어진다. 반포대교는 무지개 외벽에 둘러싸인다. 무려 1140m에 이르는 이 분수 구간의 규모로 인해 이 다리는 ‘가장 긴 교량 분수’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분수 분야의 기네스 세계 기록으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가장 높은 초콜릿 분수’는 12.27m로 오스트리아의 초콜릿 회사가 차지했고, 소다 음료를 터뜨려 만들어낸 분수로는 멕시코의 축제 참가자들이 합심해 달성한 4334개가 최다이다. 입으로 공중에 물을 뿜어 만든 ‘인간 분수’ 중 가장 오래 지속된 기록은 무려 56.36초나 된다. 기네스협회에서 경이롭다는 찬사까지 써서 추켜세운 이 기록의 보유자는 22세의 앳된 에티오피아 청년이다.오로지 서울의 랜드마크 되기 위해 탄생한 ‘인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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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계급의 격리구역에 환멸 느낀 욕망, 취향 만족을 위해 옮겨가는 통로
데뷔곡 ‘비 내리는 영동교’와 대표곡 ‘신사동 그사람’에서 주현미는 강남의 지명을 구체적으로 지목했다. 노랫말 안에는 강남 어딘가에서 만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여성이 있지만, 남성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은 없다. 1980년대 후반 강남의 밤거리를 불러내는 것만으로 이 남성의 사회적 형상은 충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 내리는 영동교’의 여성 화자는 밤비 내리는 영동대교를 “비에 젖어 슬픔에 젖어 눈물에 젖어” 걷는다. 애인과 헤어진 뒤 강남을 등지고 강 건너 북쪽으로 무력하게 되돌아가는 상황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영동대교는 강남구와 성동구를 지리적으로 잇는 다리지만 경제적으로는 장벽과 같은 상징을 가진 건축물이었다. 영동대교 착공 직전인 1969년에 쓴 글에서 법정 스님은 강남과 마주한 뚝섬나루 일대를 이렇게 묘사했다.“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 성동구 무슨무슨 동임에는 틀림없는데, 거기는 전기도 전화도 수도시설도 없는 태고의 성역이다. 교통수단이라고는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