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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돌아올 남편만 기다렸는데…한국에서 헛된 죽음 되지 않게 싸우겠다”
“오는 설에는 남편이 베트남에 오겠다고 했었다. 이번 명절은 같이 보낼 수 있을 줄만 알았다.”남편의 영정사진을 끌어안고 있던 레티화(33)가 휴대전화 속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말했다. 한국에서 일하던 남편 쿠안(사망 당시 36)이 고향 베트남에 잠깐 들어왔을 때 어린 두 자녀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남편이 숨진 충북 청주에서 지난 2일 기자와 만난 레티화는 “남편이 왜 죽어야만 했는지 알고 싶어 한국에 왔다”고 했다.레티화의 남편은 지난해 7월6일 충북 청주의 한 아파트 신축공사 현장에서 숨졌다. 갱폼이라고 불리는 대형 거푸집을 해체하다 아파트 25층 높이에서 떨어졌다. 갱폼을 타워크레인에 매달지 않은 채 작업하다가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레티화의 남편을 포함해 2명이 숨졌다. 모두 베트남 국적 노동자였다.남편이 숨진 지 7개월이 지났지만 레티화는 죽음에 풀리지 않는 의문이 많다고 했다. 그는 “남편이 이 작업이 무서워서 15분간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관리자의 ... -
상복 위 패딩을 입고 어머니는 거리에 남았다···“9번째 영정이 놓이지 않도록”
서울에 비바람이 불던 지난 16일, 서울 종로구 서대문역사거리 인근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을 맞아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최고기온 7도의 쌀쌀한 날씨에 시민들은 우산을 쓰고 외투를 동여맨 채 걸음을 재촉했다.분주한 발걸음 속, 이숙련씨(70)는 홑겹 검은 상복 차림으로 DL이앤씨(디엘이앤씨·옛 대림산업) 본사 앞에 우두커니 섰다. 군데군데 하얗게 튼 손에는 “e편한세상 DL그룹은 내 아들 살려내라!”고 적힌 피켓을 들었다. 그의 딸 강지선씨(33)가 비를 맞으며 모친의 옆을 지켰다.이날은 이씨의 아들이자 강씨의 동생인 고 강보경씨(29)가 세상을 떠난 지 97일, 또 이들이 서울에 올라와 보경씨가 죽은 건설현장의 원청 본사 앞에 분향소를 차린 지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대학원생이던 보경씨는 DL이앤씨의 하도급업체인 KCC 소속 일용직으로 한 달여 근무했다. 지난 8월11일 부산 연제구 신축아파트의 창호 교체작업 중 20m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다. 추락 방지 고리... -
“하루라도 빨리 떳떳이 아빠 보내드리고 싶다”···분신 택시기사 딸의 소원
지난 17일 오후 5시30분. 서울 영등포구 한강성심병원 앞에 차려진 아버지의 분향소를 찾은 방희원씨가 고인의 영정을 바라봤다. 2살 때 헤어져 얼굴조차 제대로 몰랐던 아버지 방영환씨는 하루아침에 고인이 되어 돌아왔다. 희원씨는 “원래도 얼굴을 모르고 살았지만 앞으로도 아빠를 사진으로밖에 못 본다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했다.택시 기사였던 희원씨의 아버지는 지난 6일 숨졌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달 26일 본인이 다니던 해성운수 앞에서 분신해 전신 70% 이상 3도 화상을 입은 지 열흘 만이었다.희원씨는 아버지가 분신한 당일 오전 경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부친이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아버지가 227일간 시위하던 회사 앞에서 분신해 화상을 입었다는 말은 없었다. 열흘 뒤 또 다른 경찰은 희원씨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시신을 찾아갈 것인지만 물었다.30년을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그리움으로 보내온 희원씨는 하나뿐인 딸로서 장례를 치러야겠다고 결심... -
“누구보다 ‘아버지의 역할’ 고민했을 동생···남긴 뜻 이어가고 싶다”
고 양회동 건설노조 강원지부 제3지대장의 형 양회선씨에게 지난 100일은 숨 가쁜 시간이었다. 자신을 되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지난 6월21일 동생의 노동시민사회장이 엄수되고 나서야 동생이 떠났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혼자 있을 때마다 “형으로서 해준 게 없는 것 같다”는 회한이 몰려왔다. 종교에 의지하기도, 동생의 명예회복은 긴 싸움이 될 것이라며 자신을 다독이기도 했다. 그렇게 100일이 흘렀다.양 지대장이 분신사망한 지 100일째인 지난 9일 회선씨를 경기 동두천의 한 성당에서 만났다. 회선씨는 “동생이 떠난지 3개월이 넘었지만 지금도 동생과 같이 지내던 때를 생각하면 슬픔이 멈추지를 않는다. 차분해져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감정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양 지대장은 강원 속초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채 100일도 되지 않아 아버지가 위암으로 사망했다. 양 지대장의 어머니는 일거리를 찾아 시장과 이웃집을 전전했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 -
“대 이어 비극 되풀이…슬퍼할 겨를도 없었죠”
아버지 추락 사망 20년 뒤 형도 작업 중 떨어져 숨져 업체의 책임 회피 모습에 고용노동부 앞 1인 시위 특별근로감독관 움직이자 그제야 유족에 합의 제안“회사들의 안전 관리 미흡 노동부 직접 나서 개선을”지난달 18일 오전 11시40분, 검은색 양복을 입은 박성남씨(41·가명)가 전남 목포시 고용노동부 목포지청 정문에 섰다. 한 손에 검은 우산을, 또 다른 손에는 ‘고용노동부 방관 속에 사망사고 계속된다. 고용노동부는 각성하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었다. 호우특보가 내려진 이날, 5일째 1인 시위를 이어온 박씨는 “사업장 측에서 반응이 없어서요. 처벌이 가볍게 나올까 걱정도 되고…”라고 기자에게 말했다.건설 미장공이었던 박씨의 부친은 2003년 작업 중 고층에서 추락해 숨졌다. 그로부터 20년 후, 형 박성도씨(43·가명)도 선박 해체 작업 중에 떨어져 지난 7월5일 사망했다.“마지막으로 형을 봤을 때가 지난 설 연휴... -
“애도할 시간조차 없었다”···산재로 형과 부친 잃은 박씨의 일상
지난달 18일 오전 11시40분, 검은색 양복을 입은 박성남씨(41·가명)가 전남 목포시 고용노동부 목포지청 정문에 섰다. 한 손에 검은 우산을, 한 손에는 ‘고용노동부 방관 속에 사망사고 계속된다. 고용노동부는 각성하라’고 적힌 손팻말을 들었다. 호우특보가 내려진 이 날, 5일째 1인시위를 이어온 박씨는 “사업장 측에서 반응이 없어서요. 처벌이 가볍게 나올까 걱정도 되고…”라고 기자에게 말했다.건설 미장공이었던 박씨의 부친은 2003년 작업 중 고층에서 추락해 숨졌다. 그로부터 20년 후, 형 박성도씨(43·가명)도 선박 해체 작업 중에 떨어져 지난 7월5일 사망했다.“마지막으로 형을 봤을 때가 지난 설 연휴 때. 얼굴이 퉁퉁 부어있는 거예요. 지난해 12월에 다쳐서 성형외과에 다닌다고 하더라고요. 집에 올 때마다 몸이 안 좋았어요. 안쓰럽고, 고생 많이 하는구나 싶었죠. 그 와중에 어머니와 제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은 매번 사 오고.”부친이 사망한 이듬해 형 성... -
“위험까지 떠넘긴 불법 재하청, 아버지 죽음 방치”
건설현장서 홀로 작업 도중 떨어진 리프트에 깔려 숨져 세 모녀 5일간 시위 벌이자 원청 한국건설 뒤늦게 사과 하청·재하청 업체 ‘묵묵부답’“업체들, 책임 회피에만 급급 예방 위한 태도 변화 필요”생전 좋아하시던 소주 한 잔을 올리며 아버지를 제대로 배웅하기까지 꼬박 37일이 걸렸다. 지난달 19일 오전 10시 광주 남구 한국아델리움더펜트 건설현장에서 마채진씨의 추모제가 열렸다. 아버지를 앗아간 화물용 승강기 앞에 차려진 제사상을 향해 마씨의 둘째 딸 혜진씨(28)가 네 번 절을 올렸다. 안전모를 쓴 건설노동자들과 검은 정장을 입은 시공사 한국건설 임원도 허리를 숙여 고인의 넋을 위로했다. 그 모습을 보던 첫째 혜운씨(32)는 양손으로 만삭의 배를 받친 채 눈물을 삼켰다.마씨는 지난 6월11일 건설현장 내 화물용 리프트 자동화 설비를 홀로 설치하다 떨어진 리프트에 깔려 숨졌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마씨는 리프트에... -
남은 내 아들 위해···코스트코 유족이 싸움 포기할 수 없는 이유
아들이 떠난 집은 고요했다. 김길성씨는 아들 김동호씨 영정사진 옆에 놓인 워커(보행 보조기구)에 기대 걸음을 옮긴 뒤 식탁에 앉아 숨을 골랐다. 가족의 고통을 대변하듯 식탁 위엔 약봉지와 약통이 줄 세워져 있었다. 깊은 침묵 뒤 김씨가 입을 열었다. “동호가 코스트코에 입사했을 때 가족들이 다 같이 기뻐했어요. 그게... 그게 참 후회되네요.” 적막한 집에서 웃고 있는 것은 사진 속 동호씨 뿐이었다.동호씨는 지난 6월19일 코스트코 하남점 주차장에서 일하다 쓰러져 사망했다. 이틀째 낮 최고기온이 33도를 기록해 폭염특보가 내려진 날이었다. 당시 주차장은 차들이 내뿜는 열기와 햇볕에 달궈진 시멘트 때문에 커다란 압력밥솥처럼 끓고 있었다. 동호씨는 이런 폭염 속에서 매시간 200대의 카트를 밀고 다니며 17㎞를 이동하다 쓰러졌다. 더위를 식혀줄 에어컨도, 목을 축일 물도 없었다.아들이 정신을 잃은 시간, 김씨는 병원에 입원해 고질적인 허리 병변 치료를 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