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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남은 이들의 기도···“더는 다치지 않게 하소서”
“제가 부름을 받을 때에는/ 신이시여/ 아무리 강렬한 화염 속에서도/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는 힘을 저에게 주소서/ 너무 늦기 전에 어린아이를 감싸 안을 수 있게 하시고/ 공포에 떠는 노인을 구하게 하소서.”강원도 강릉시 경포해변 한쪽에 들어선 ‘소방관 추모비’에는 이 구절로 시작하는 ‘소방관의 기도’가 적혀있다. 불길 속에서 시민의 생명을 구하려는 소방관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2017년 9월17일 불타 사라진 ‘석란정(石蘭亭)’ 자리에 세워졌다. 1956년 건축된 40㎡의 작은 목조건물 석란정은 화재로 붕괴하면서 두 소방관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영욱 소방위(당시 59세·순직 후 소방경 특진)와 이호현 소방사(당시 29세·순직 후 소방교 특진)다.당시 이 소방위는 정년을 1년 앞둔 노장이었고, 이 소방사는 소방관 8개월 차 새내기였다. 추모비는 두 소방관을 ‘영웅 소방관’으로 칭하며 기린다. 남겨진 가족들은 ‘사람도 없고 문화재... -
④32년차 베테랑도 “작전때마다 공포…현장 중심 조직 돼야”
‘현장대응’ 역량 부족한 지휘관들 “30년을 화재 현장에서 일했지만, 아직도 작전을 수행할 때는 공포심이 생깁니다.”32년차 베테랑 소방관 조상열 소방경(59)의 말이다. 30년 넘게 무수한 화재 현장을 누볐지만 지휘관으로 현장에 투입될 때의 압박감은 언제나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겁다고 했다.조 소방경은 “순직 사고의 일차적인 원인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위험요소에서 온다”면서 그러므로 지휘관들이 더 배우고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현재는 119안전센터의 팀장으로 일하고 있는 그는 평택·제주·문경 순직사고 조사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지휘관의 경험이 많고 지식이 풍부하면 불확실성에서 오는 위험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라며 “하지만 지휘관들은 현장을 잘 알지 못해 소방관 순직 사고가 날 때마다 지휘 문제가 불거진다”라고 지적했다.실제로 소방청이 그간 내놓은 ‘소방관 순직사고 조사 보고서’에는 ‘지휘관의 역량 부족’에 대한 지적이 반복적... -
③‘퍼스트 인 라스트 아웃’의 허상
지난해 12월28일 경기 용인의 경기도소방학교에서 제77기 신임 소방공무원 427명의 임용식이 열렸다. 김동연 경기도지사는 “‘퍼스트 인, 라스트 아웃’은 현장에 가장 먼저 출동해서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소방관의 모토라고 한다”면서 “마지막에 나오시더라도 여러분 자신의 안전과 건강도 함께 잘 지켜 주기를 바란다”라고 당부했다.퍼스트 인 라스트 아웃(First In Last Out·가장 먼저 들어가고 가장 늦게 나온다)은 한국 소방관들의 대표적인 구호로 꼽힌다. 소방청 공식 구호는 아니지만 곳곳에서 쓰인다. 남화영 소방청장도 지난달 17일 한 언론과 인터뷰하며 “소방관의 사명은 ‘퍼스트 인 라스트 아웃’”이라고 했다.이 구호는 소방관의 희생을 강조한다. 소방청도 이 구호의 위험성을 안다. 소방청은 2023년 김제 주택 화재 순직사고 보고서에서 안전 의식을 높이는 문구 대신 희생을 당연시하는 내용이 널리 퍼져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소방관의 정신 관련 ... -
③‘혹시 있을지 모를 생명’ 구하려…아무도 없는 화염 속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아쉽죠.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면 안 됩니다.”지난 6일 경북 문경시 신기동의 한 공장 앞에서 이지운 경남소방본부 조사위원이 종잇장처럼 구겨진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는 이 공장 화재 현장에 출동했던 구조대원 2명이 순직한 이후 소방청 합동조사단의 원인 조사에 참여했다.그는 “소방관이 ‘영웅’이 될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애초 공장 내부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는 뜻의 말이다. 공장 외부에서 화염이 분출되는 등 위험징후가 보였는데도 빠르게 철수 명령이 내려지지 않은 점도 지적했다.돈가스 등 냉동식품을 제조하는 공장에서 불이 났다는 신고가 접수된 것은 지난 1월31일 오후 7시47분이다. 문경소방서 119구조구급센터 소속 김수광 소방교(27·순직 후 소방장으로 특진)와 박수훈 소방사(35·순직 후 소방교로 특진)가 포함된 구조대는 신고 10분 만인 오후 7시57분 현장에 도착했다.... -
②빠른 진압에만 급급, 매뉴얼도 없이 투입…“만능 소방관 바라는 문화 안 돼”
2013년 2월 경기 포천의 한 플라스틱 공장에서 불이 났다. 진압대원들이 계속 물을 뿌렸지만 불길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화재진압에 인력이 더 필요해지자 현장에 출동했던 구급대원 윤모 소방관(당시 34세)도 소방호스를 들었다.불길이 잡힐 무렵 그는 공장 안까지 진입해 인명검색을 했다. 그 순간 콘크리트가 무너지며 윤 소방관을 덮쳤다.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순직했다. 구급대원이 화재 진압에 투입됐다가 목숨을 잃은 첫 사례다.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023년 12월 제주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19구급대원인 임성철 소방교가 감귤 창고 화재 현장에서 소방호스를 잡고 직접 불을 끄다 무너진 콘크리트 처마에 깔려 숨졌다.환자 이송 업무 등을 수행하는 구급대원이 직접 불을 끄는 상황은 일선 소방관들에게 낯선 일이 아니다. 소방청의 ‘제주 순직사고 보고서’를 보면 전국 19곳의 소방본부(경기·경남은 2곳) 중 15곳이 구급대원에게 ‘진압대원’ 임무를 부여한다.구... -
②소방호스 잡은 구급대원···9톤짜리 처마가 덮쳤다
80대 노부부가 사는 주택 창고에서 불이 났을 때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119구급대였다. 2023년 12월 첫날, 고향 제주로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임성철 소방교(당시 29세·순직 후 소방장으로 특진)도 제주동부소방서 표선구급대 구급대원으로 현장에 출동했다.제주의 한 대학 응급구조학과를 졸업한 임 소방교는 불을 끄는 진압대원이 아닌 ‘119구급대원’으로 소방관 일을 시작했다. 그는 2019년 5월 경남창원소방본부 소방관 채용해 합격해 구급대원으로 활약한 ‘경력직’이었다.소방공무원 중 구급 업무는 신속 정확한 응급환자 처치와 병원이송이 주요 임무다. 구급대원에 응시하려면 의사·간호사 면허증 또는 응급구조사 1급 자격증을 취득한 뒤 병원 등에서 응급의료업무를 2년 이상 수행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 필기시험 과목에도 응급처치학개론이 포함돼 있다. 의학적 전문지식이 필요한 모든 구급대원은 경력 채용으로 뽑는다.창원에서 2년간 일했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20... -
① 유명무실 ‘2인1조 원칙’…동료 대원도 소방호스도 없이 불길로
“시작부터가 잘못됐습니다. 그날 출동은 사고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성용묵씨(54)는 “아들이 불길에 들어갔고 안 들어갔고의 문제가 아니다”고 했다. ‘2인1조’ 원칙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던 만큼, 당시 출동했던 소방관이라면 누구라도 불길 속에서 돌아오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는 얘기다.성씨의 하나뿐인 아들 성공일 소방사(당시 30세·순직후 소방교로 특진)는 2023년 3월6일 전북 김제시 금산면 한 단독주택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에 출동했다. 70대 노부부가 사는 주택에서는 오후 8시33분쯤 불이 났다. 부부는 오후 6시44분쯤 집 소각장에서 깨를 수확하고 남은 줄기인 깻대와 쓰레기 등을 태웠다.2시간쯤 뒤 노부부는 ‘타닥타닥’ 하는 소리를 듣고 집 밖으로 나왔다. 인근 카페도 불이 난 것을 발견하고 119에 신고했다. 김제소방서 금산119안전센터가 가장 먼저 현장으로 출동했다.4.2㎞ 떨어진 화재 현장까지 구급차는 10분 만인 오후... -
① 채용 늘자 소방학교 교육기간 단축…“치명적 실수”
“현장경험 부족, 충분한 현장 실무교육을 받지 못함”(2021년 5월9일 경기 용인 순직사고)“신임교육 단축으로 실무능력이 부족한 채 현장에 투입됨”(2021년 6월29일 울산 중구 순직사고)“전문교육훈련 부족, 임용 후 신임교육만 이수”(2023년 3월6일 전북 김제 순직사고)“교육훈련 등 지식·경험 부족, 구조대원 전문교육 미이수”(2024년 1월31일 경북 문경 2명 순직사고)경향신문이 확보해 분석한 소방청 중앙사고합동조사단의 ‘순직사고 조사·분석결과’ 보고서에는 ‘교육훈련 부족’이 여러 사고에서 원인으로 반복 지적됐다. 소방청도 이미 젊은 소방관들의 죽음이 ‘어쩔 수 없었던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다.정부는 2017년부터 일선 현장의 소방관 부족을 해결하겠다며 ‘소방관 2만명 증원계획’을 시행했다. 2017년 4만5000여명 이었던 소방관은 지난해 말 기준 6만6797명으로 크게 늘었다. 짧은 기간 소방관 전체 인원은 2만1797... -
‘영웅’만 부각시킨 죽음: 소방관은 왜 돌아오지 못했나
소방관이 죽었다. 소방청 통계를 보면 2014년부터 2023년까지 10년간 화재진압과 인명구조 등 위험한 직무를 수행하다 순직한 소방관은 40명에 달한다. 화재 진압 도중 13명이 순직했고, 구조 현장에서 6명이 숨졌다. 소방헬기 추락 사고로도 10명이 목숨을 잃었다.소방관은 화재와 안전사고, 집중호우 등 뜻하지 않은 재난 현장 최일선에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킨다. 소방관은 전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직업으로 꼽힌다. 한국도 직무 중 순직한 소방관들에게 대부분 1계급 특진과 훈장을 추서한다. 순직 소방관들은 국립 대전현충원 소방공무원묘역에 안장된다. 숭고한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다.하지만 ‘영웅들의 죽음’ 뒤에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다. 일선 소방관들은 “비슷한 죽음이 반복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소방청은 순직사고 때마다 ‘중앙사고합동조사단’를 구성, 현장을 조사해 보고서를 낸다. 전문가들의 현장조사와 분석 등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