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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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언어의 업데이트]합의도 동의도 필요 없는 고유한 감각 ‘느좋’

    합의도 동의도 필요 없는 고유한 감각 ‘느좋’

    한 해를 마무리하며 올해 내가 무엇을 사랑하며 보냈는지 궁금해 소셜미디어에 남겨둔 하트들을 살펴본다. 김태리 배우, 육아 꿀팁, 예능 콘텐츠, 빈티지 유리 조명…. 그런 것들에 다 하트가 묻어 있다. 하트를 누르는 기준을 명확히 정의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느낌이 좋았다. ‘느낌이 좋다’. 줄여서 ‘느좋’은 올해 들어 유독 많이 보이는 신조어다. ‘지금 카페에서 나오는 노래 완전 느좋’ ‘무신사에서 느좋패딩 발견’과 같은 맥락으로 ‘느좋’의 순간과 대상들을 공유한다. 텍스트 기반의 소셜미디어 엑스(옛 트위터)에서도 ‘느좋’의 언급량이 ‘추구미’ 언급량을 역전했다. 내년을 전망하는 여러 트렌드에서 잘파세대를 이해하기 위한 언어로 꼽은 ‘추구미’보다 ‘느좋’이 더 많이 유통 중이다.줄임말이 한글을 파괴하고 세대 간 소통을 단절시킨다는 우려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사람들이 어떤 말을 줄여 쓴다는 건 자주 쓴다는 뜻...
  • [언어의 업데이트]나만의 관점으로 만들어내는 스타일 ‘코어’

    나만의 관점으로 만들어내는 스타일 ‘코어’

    바람막이 점퍼에 나일론 바지를 등산복이라 부르는 대신 ‘고프 코어’라 말하면 잘파세대(Z세대+알파세대)의 미감을 이해하는 사람이 된다. 축구 유니폼과 청바지를 함께 입는 조합을 ‘블록 코어’라 부르면 거리에서 마주친 대학생들의 낯선 착장들이 이제야 좀 이해된다. 야외 활동을 위한 아웃도어 의류를 일상에서 멋스럽게 입는 것을 고프 코어, 유니폼을 일상복과 어울리게 입는 것을 블록 코어라고 한다. 명명은 유행을 더 빠르게 확산시킨다. 단, 유행하는 이름엔 조건이 있다. 사람들의 귀에 그 이름이 꽂혀야 하며, 그리 어렵지 않게 많은 사람이 동참할 수 있어야 하고, 동시대와 연결되어야 한다.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패션 스타일도, 예술 사조도, 철학의 계보도 자신만의 이름을 찾고 알리면서 역사 속 목차를 만들었다. 다다이즘, 미니멀리즘, 브루탈리즘과 같은 수많은 ‘이즘(ism)’들을 생각해 보자. 역사 속 ‘이즘’들은 강력한 철학적 토대를 바탕으로 시대에 신선한 화두를 던졌고, 사...
  • [언어의 업데이트]숙련이 빚어낸 결론 ‘파인’

    숙련이 빚어낸 결론 ‘파인’

    나는 기분이 울적하면 모자 가게에 가곤 했다. 다양한 모자들이 늘어져 있는 가게에서 얼굴을 반쯤 가릴 법한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몇 개 쓰고 벗다 보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토록 나를 쉽게 바꿀 수 있다니. 가을이 오면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줄 털모자들을 하나씩 꺼내 썼다. 빨간색으로 염색하는 건 두렵지만, 빨간 털모자를 쓰는 일은 두렵지 않다. 파란색으로 염색하는 건 큰 결심이 필요하지만 보송보송한 파란 앙고라 모자를 쓰는 건 신이 난다. 모자 하나만 덮어쓰면 나는 금세 다른 분위기를 갖는다.언어도 모자를 쓰면 금세 다른 뜻을 지닌다. 본질은 놔두면서 말의 결을 바꾸는 단어의 힘 덕분이다. 성능의 시대에는 ‘울트라 화이트닝 크림’, ‘초강력 세제’처럼 성능의 강력함을 강조하는 언어를 주로 얹었다. 가치의 시대에는 ‘럭셔리 리조트’, ‘프리미엄 서비스’처럼 부가가치를 강조하는 언어가 흥했다. 오가닉, 에코, 그린 등 다양한 언어가 사회의 흐...
  • [언어의 업데이트]‘나락 감지 센서’ 끄기

    ‘나락 감지 센서’ 끄기

    어떤 농담은 슬프다. 나는 ‘나락감지센서’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유쾌하게 웃지 못한다. ‘나락감지센서’는 나락에 떨어질 수 있는 상황을 사전에 감지하고 피하려는 본능적인 능력을 뜻한다. 이 센서를 말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우리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뜻. 작은 실수도 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불안감과 실수 이후 회복이 어렵다는 안정감의 부재에 맞선 방어기제로 그 감각이 더 정교해지고 있으나 한편으론 계속 떠오르는 질문을 떨칠 수 없다. 실수가 나락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분위기는 얼마나 위험한가. ‘나락’이라 불렀던 실수는 과연 ‘회복할 수 없는 절망’을 감당해야 할 만큼의 실수일까? 이 센서를 꺼버릴 수는 없을까?실패도 실수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 시대다. 위험 감수보다 실수 없음이 우선이다. 어떤 플랫폼에서든 ‘실패 없는’을 검색하면 실패를 피할 방법을 제안한다. 실패 없는 레시피, 노후준비, 가성비템까지 실패와 실수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
  • [언어의 업데이트]‘낭만 치사량’ 초과의 순간들

    ‘낭만 치사량’ 초과의 순간들

    낭만은 저항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현실에 순응하는 것을, 대세를 따르는 것을, 적당히 타협하는 것을 거부하는 데서 낭만이 시작된다. 프로 스포츠의 ‘원팀맨’이 낭만인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이 아닌 신념을 택했기 때문이다. 자신만 알아보는 세부를 위해 혼신을 다하는 마음이 낭만인 이유는 효율성의 지배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대세를 따르는 대신 개성을 찾아가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지, 시류에 편승하기보다 자기만의 물길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 효율보다 마음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알기에 낭만이 깃든 것들은 늘 더 아름다워 보였고 낭만은 매번 나를 너무 쉽게 설득했다.눈 깜짝할 사이 너무 많은 게 변하는 세상에서는 현실에서 조금만 발을 떼어도 한참 뒤처지는 기분이다. 비효율적인 선택을 하기가 두렵다. 내가 책임져야 할 것이 나에서 우리로 확장되면 더 그렇다. 낭만은 돌연 낭비가 되고, 쉽게 무책임으로 변질된다. 세상으로부터 초연해질 수 있는 재...
  • [언어의 업데이트]‘행집욕부’ ‘어할즐하’…덕담, 나를 위한 ‘행복 주문’

    ‘행집욕부’ ‘어할즐하’…덕담, 나를 위한 ‘행복 주문’

    덕담의 말에 업데이트는 있는가?명절을 맞아 사거리마다 걸린 현수막을 유심히 들여다보니 현수막에 붙어 있는 얼굴들은 다 다른데 문구는 모두 같았다. 도지사도, 부지사도, 시의원도 입 모아 ‘행복하고 풍성한 한가위 보내세요’라고 인사를 건넨다. 나 역시 다르지 않다. 1년에 딱 한 번 쓰는 말이라서, 많은 사람에게 매번 새로운 말을 지을 여유가 없어서 고민을 유예하다 보니 결국 또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덕담은 그 시대와 사회가 중요시하는 가치를 담는다. ‘부자 되시라’, ‘건강하시라’, ‘평안하시라’ 말을 덧붙일 때도 있으나 언제나처럼 한가위에는 풍성함을, 크리스마스에는 축복을, 새해에는 복을 적는다. 말은 시대에 맞춰 진화하고 분화하는데, 덕담과 안부 인사가 나누고자 하는 ‘행복’과 ‘풍성’이 여전히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지향점일까? 명절 덕담은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완성형 문장일까?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행복을 바라는 그 자체로 충분히 귀하다고 생각을 게...
  • [언어의 업데이트]‘숏핑’의 시대, 삶의 질 ‘수직 상승템’의 유혹

    ‘숏핑’의 시대, 삶의 질 ‘수직 상승템’의 유혹

    숏폼 콘텐츠에서 추천한 아이템을 쇼핑하는 ‘숏(폼)+(쇼)핑’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사람들이 사용하기도 전에 업계에서 먼저 ‘트렌드 키워드’라 주장하는 말들이 있는데 ‘숏핑’도 그렇다. ‘숏핑’은 아직 아무도 사용하지 않지만, 이 개념의 흥행은 납득이 간다. ‘쿠팡 청소템 5’ ‘다이소 꿀템 7’이라는 썸네일의 숏폼에 영향받아 장바구니를 채우고, 영상을 캡처하며 꼭 사리라 다짐한 경험이 많다. 숏폼이 쇼핑을 위한 매체가 되자 썸네일에서 존재감을 발휘하는 관종력 충만한 단어들이 인기다. 언어에도 ‘관종력’이 있다면, ‘필수템’처럼 ‘템’으로 끝나는 이들은 평균 이상의 관종력으로 쇼핑을 부추긴다.아이템의 ‘템’을 활용한 ‘○○템’은 다양한 방식으로 조립되지만 크게 두 계의 파로 나뉘어 발전해왔다. 첫 번째 계보는 신뢰 호소용으로 ‘국민템’ ‘찐템’ ‘필수템’처럼 ‘템’의 필요성을 설득한다. 두 번째는 상황 해결용으로 ‘육아템’ ‘꾸안꾸템’ ‘러닝템’처럼 특정 상황에 도...
  • [언어의 업데이트]행복해지는 ‘이때 이곳 이것’, 고유명사로 지정해!

    행복해지는 ‘이때 이곳 이것’, 고유명사로 지정해!

    행복해지는 법 하나를 알고 있다. 세상에 뭘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내가 유일하게 이 방법만큼은 자신 있게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감히, 이 혼돈과 불안의 시대에 ‘행복해지는 법’을 안다고 적으니 일단 나 자신을 검열해보게 된다. 내가 진짜 행복해지는 법을 알고 있나? 다시 생각해도 역시 안다. 행복해지는 법은 바로 이거다. 고유명사를 외우는 것. 내 인생에서 행복이라 말할 수 있는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다양한 고유명사를 기쁘게 흡수하거나, 단 하나의 고유명사를 내 마음에 심고 그를 틔우고 키우기 위해 정성과 심혈을 기울이던 때다. 이건 너무나 확실한 방법이다.한 사람이 가장 많은 고유명사를 알고 있는 분야는 그가 가장 많이 사랑하는 영역이다. 식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겐 그냥 ‘들꽃’이 없다. 각기 다른 모양과 색을 지닌 식물 저마다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책 편집자의 이름을 기억하고, 좋아하는 외국 작가의 번역가 이름을 외운다. 이...
  • [언어의 업데이트]#오운완…매일 성실하게 ‘완료’하며 살고 있구나

    #오운완…매일 성실하게 ‘완료’하며 살고 있구나

    ‘인증’은 우리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새로운 방식이다. 디지털상에서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한 각종 인증서와 절차를 생각해보자. ‘공인 인증서가 없는 한국인처럼 슬퍼하고 있었다’라는 밈처럼 인증은 이 세계에 우리를 입증하는 수단이다. ‘인증 사진’은 우리가 스스로를 그리는 방식이다. 창작 권한이 내게 있기에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주는 것도 가능하다. 그렇지만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사진 기술의 발전으로 현실의 정확한 묘사보다 일시적 순간의 인상을 포착하는 인상주의가 유행하는 것처럼, 인증 사진의 맥락은 그 시대의 사회상과 시대적 감수성의 반영이다.미술사에 ‘사진 기술의 발명’이라는 사건이 있다면, 인증 사진엔 ‘코로나19’라는 사건이 있다. 소셜미디어의 발명 이후 ‘인증 사진’은 ‘허세’와 ‘나르시시즘’이라는 오해와 함께였지만, 코로나19를 맞아 비로소 인증 사진은 새로운 코드를 얻었다. ‘성실함’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외...
  • [언어의 업데이트]이성과 본능의 절묘한 화해…‘저당 마라 소스’의 비밀

    이성과 본능의 절묘한 화해…‘저당 마라 소스’의 비밀

    “나 요즘 그거 먹고 살 빠졌잖아.” 귀를 쫑긋하게 하는 친구의 발언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오트밀에 우유, 과일, 견과류를 넣고 냉장고에서 숙성시킨 후 먹으니 살이 빠졌다는 그의 간증에 이끌려 레시피를 몇개 찾아보니 카카오 가루를 넣으면 더 달콤하게 즐길 수 있다고 한다. 카카오를 먹고도 살이 빠질 수 있다고? 신이 나서 오트밀과 카카오를 주문하고 인증 사진을 친구에게 보내니 답이 바로 날아온다. “야! 카카오도 저당으로 사야 돼!” 저당 카카오라니. 그렇다. 지금은 분명 ‘저당’이 대세인 시대다.식품 앞에 ‘제로’와 ‘저당’이라는 키워드가 붙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 것처럼 뺄셈의 언어가 식품계를 장악 중이다. 혈당과 식습관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높아지면서 마트 양념 코너 주요 진열대에 놓인 제품들은 대부분 ‘저당’ ‘제로’ ‘프리’라는 키워드와 함께다. ‘양념’의 역할은 ‘입맛’을 돋우는 것. 그 엄청난 임무를 당도, 설탕도, 나트륨도 없이 해내겠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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