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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승리의 언제나 삶은 축제
  • [조승리의 언제나 삶은 축제]“우리 애기한테 붙지 마!”…엄마는 허공에 식칼을 던졌다
    “우리 애기한테 붙지 마!”…엄마는 허공에 식칼을 던졌다

    유년기의 나는 이유 없이 병이 나서 자리보전하는 일이 흔했다. 그날도 해열제를 먹고 겨울 솜이불 속에서 덜덜 떨어대다가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슬며시 눈을 뜨자 창호지 문으로 볕이 스며들었다. 벽에 걸린 괘종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부르튼 입술 사이로 더운 숨이 색색 소리를 내며 새어나왔다. 몸을 일으켜 머리맡을 살핀다. 작은 소반에 양은 대접 하나가 놓여 있다. 엄마가 들에 나가기 전에 타 놓은 흑설탕물이다. 대접을 들어 맛을 본다. 다디달다. 마른 입술이 그릇에 달라붙었다 떨어지며 찌릿한 통증을 일으켰다. 혀로 통증 부위를 핥다 다시 한번 따끔한 통증 때문에 깜짝 놀란다. 쇠 냄새가 혀끝에 달라붙는다. 대접을 소반 위에 내려놓고 이불로 파고들어 몸을 둘둘 말았다. 그러고는 눈을 대굴대굴 굴린다. 누렇게 빛바랜 천장과 파리똥이 덕지덕지 붙은 형광등이 보인다. 눈을 감고 한동안 있자 소음들이 날파리떼처럼 귓가로 날아든다. 마당 수도의 모터 돌아가는 소리....

    14시간 전

  • [조승리의 언제나 삶은 축제]서른아홉, 나의 재롱잔치 프로젝트…올레!!
    서른아홉, 나의 재롱잔치 프로젝트…올레!!

    플라멩코를 배운 지 6개월이 흘렀다. 강사님이 학원 원생들과 봄에 소극장 발표회를 열 거란 계획을 전했다. 나는 겨우 두 곡 진도를 나간 참이라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강사님이 말했다.“당신 두 곡 준비됐잖아요. 무대 올릴 거예요.”날벼락이었다.“제가요? 왜요? 정말요?”점점 목소리도, 내 눈도 커졌다. 강사님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말투로 춤을 배웠으니 당연히 무대에 서는 게 뭐 그리 놀랄 일이냐고 되물었다. 나는 한발 빼며 자신 없다고 사양했다. 속으로는 재밌을 것 같다고 여기며 숫기 없는 학생을 연기했다.“그런 얼굴로 마음에 없는 소리 할래요? 80석이니까 관객이나 모아봐요. 표는 무료로 뿌릴 테니 소극장 대관비나 보태요.”강사님은 관객석이 채워지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했다. 나는 30석은 내 손님이 올 거니 제일 좋은 자리를 내놓으라고 닦달했다.80석 소극장 무대에손은 차갑고 무릎은 ‘달달’관객석엔 내가 ...

    2025.04.26 12:00

  • [조승리의 언제나 삶은 축제]논 귀퉁이엔 분홍 꽃비 날리고 그렇게 나의 봄은 저물어갔다
    논 귀퉁이엔 분홍 꽃비 날리고 그렇게 나의 봄은 저물어갔다

    내 고향은 폭넓은 하천을 끼고 부락이 조성됐다. 수량이 풍부한 저수지가 곳곳에 있고, 들녘마다 작게 물을 가둬 놓는 방죽이 있었다. 지형이 밭농사보다는 벼를 심는 게 더 적합했다. 더욱이 농산물 중 값이 정해진 품목은 벼가 유일했다. 또 논농사만큼 사람 손을 덜 가게 하는 작물이 없었다. 지금은 거의 모든 작업이 기계화되었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적에만 하더라도 논농사 역시 사람 손이 여간 많이 가는 것이 아니었다.3월 개학을 해 학교에 가다 보면 집집마다 마당에 커다란 고무통을 내놓고 볍씨를 담가 놓는 광경이 흔했다. 빨간 소독약을 푼 물에서는 고약한 약 냄새가 났다. 엄마는 산비탈 밭에 문짝만 한 체를 비스듬히 세워 놓고 삽으로 흙을 퍼 체로 곱게 걸렀다. 모판에 담을 흙이었다. 모판은 직사각형의 납작한 플라스틱 판때기로 바닥에 촘촘히 구멍이 뚫려 있었다. 모판에 흙을 깔고 싹튼 볍씨를 뿌려 키우는데 이걸 육묘종이라 했다.나는 학교가 끝나면 외바퀴 ...

    2025.03.29 15:00

  • [조승리의 언제나 삶은 축제]좁고 얕은 물길, 누군가에겐 수천리…건널 수 없는 강으로 흘렀다
    좁고 얕은 물길, 누군가에겐 수천리…건널 수 없는 강으로 흘렀다

    아무리 강한 고통이라 해도 일상이 되어 버리면 무뎌지기 마련이고 어느 순간 통증을 인지하지 못한 채 현실을 살게 된다. 내겐 장애가 그러했다. 시각의 부재를 잊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현실을 자각하고 영원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음을 뼈저리게 실감하고 만다. 비단 내가 망각하고 사는 것이 장애만은 아니리라.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내가 분단국가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매해 통일과 분단의 아픔을 호소하는 웅변을 그토록 연습했음에도 말이다. 사실 텔레비전 속 이산가족 상봉이나 남북 정상회담 같은 일들은 모두 내 관심 밖이었고 내 삶에 와닿지 않는 먼 이야기였다.탈북 얽힌 험난한 세월 풀어내던 이가 문득 떠올랐던 그곳 내겐 관심 밖 분단이 다른 이에겐 사선…평화는 당연하지 않다, 잊었을 뿐그녀는 아주 작은 사람이었다. 뼈는 가늘었지만 온몸이 근육으로 꽉 차 있어 손이 들어가질 않았다. 마치 밧줄이 온몸을 칭...

    2025.03.01 12:00

  • [조승리의 언제나 삶은 축제]곰솥을 닦는다, 고향의 온기 나누려고
    곰솥을 닦는다, 고향의 온기 나누려고

    설이면 벼를 찧어달라 연통 넣고 만두 빚고 차례 음식 준비하던 엄마…그땐 이해가 안 됐지만이제는 내가 명절이면 모이는 동료들을 생각하며 기꺼이 떡국을 끓인다명절이 가까워지자 동료들로부터 이번 명절에는 무슨 음식을 준비해오면 되냐는 연락이 왔다. 나는 배달 음식을 시키면 되니 서로 부담 없이 가볍게 만나 한 끼 먹고 수다나 실컷 떨자 말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가 있는 곳이 중심이 되어 명절이면 으레 모이기 시작했다. 말로는 싫다 귀찮다 하면서 나도 모르게 명절 준비를 하고 있다. 창고에서 곰솥을 꺼내 놓고 시장을 봐 냉장고를 채운다. 이런 내 행동에 실없이 웃음이 났다.어린 시절 외가 동네에 더부살이하듯 살던 때는 명절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건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의 명절 준비는 보름 전부터 시작된다. 추석에는 솔잎을 따다 말리는 게 명절 시작이고 설날이 다가오면 지난해 농사지어 방앗간에 맡겨 놨던 벼를 방아...

    2025.01.29 09:00

  • [조승리의 언제나 삶은 축제]여름 나라 사람들의 마음, 날씨처럼 뜨거웠다
    여름 나라 사람들의 마음, 날씨처럼 뜨거웠다

    베트남 냐짱(나트랑)에 도착한 건 새벽 2시였다. 다섯 시간을 쓰러지듯 잠들었다가 기상해 호텔 로비에서 로컬가이드를 기다렸다. 11월 냐짱은 한창 우기였다. 아침 기온은 서늘했고 물기 먹은 공기가 묵직했다. 새벽부터 시끄럽던 오토바이 경적이 잠잠해졌다. 출근 시간이 지난 까닭이었다.호텔 리셉션 직원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대략 방의 컨디션을 묻는 것 같았다. 내가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하자 로비에 있던 어느 한국인이 다가와 통역해주었다. 짐작대로 그녀는 내게 호텔에서 불편한 사항은 없었는지 질문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최고의 가격, 훌륭한 룸 컨디션이었다고 답했다. 조금도 과장되지 않은 진심이었다. 불과 1만5000원짜리 방이라고는 상상치 못할 깨끗하고 정돈된 시설이었다. 직원이 무척 기뻐하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통역을 해준 한국인 남자는 내 옆에서 담배를 피웠다.멀리서 오토바이 한 대가 달려와 내 앞에 정차했다. 오늘 나와 여행을 함께할...

    2024.12.28 09:00

  • [조승리의 언제나 삶은 축제]고물차 터덜터덜…가이드 투덜투덜…멘털은 너덜너덜…어쨌든 웃겼으니깐, 그걸로 된 거야
    고물차 터덜터덜…가이드 투덜투덜…멘털은 너덜너덜…어쨌든 웃겼으니깐, 그걸로 된 거야

    지진 여파로 붕괴된 클라크국제공항, 리조트는 환불 불가…돈 아까워 울며 겨자먹기 출발 껄렁대는 가이드·툭하면 바뀐 일정에 여행 내내 실소가 터졌다, 그래도 이 정도면 해피엔딩 아닌가24시간 후 내가 도착할 공항이 사라져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사고가 멈췄다. 당혹스러운 마음을 추스르며 부랴부랴 항공사에 연락을 취했다. 상담원은 보상 따위는 없으며 항공료만 전액 환불 조치될 거라 통보하고 멋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이때라도 나는 이 여행을 멈췄어야 했다.필리핀 클라크국제공항은 지진의 여파로 건물이 붕괴되고 기능이 정지됐다. 리조트에 전화를 걸어 환불을 요구했지만 리조트 상담원은 공항만 지진 피해를 입었을 뿐, 리조트 시설은 아무 이상 없이 정상 영업 중이므로 환불은 불가능하다 말했다. 항의하자 그는 마닐라공항은 운영되니 그곳으로 입국하면 픽업 차량을 보내주겠다는 합의안을 내놨다. 물론 비용은 별도 청구였다. 클라크에서 마닐라까지는 자동차로 3시간 거...

    2024.11.30 09:00

  • [조승리의 언제나 삶은 축제]소리로 그린 천지, 어느새 내 안에 깃들었다
    소리로 그린 천지, 어느새 내 안에 깃들었다

    장애 이해하려는 사람들 덕에 용기 얻고 ‘한 걸음’동료들에게 전하리라, 이 멋진 풍광우리가 백두산 서파에 도착한 시각은 정오를 10분 남겨두었을 때였다. 오전 7시에 숙소를 출발해 백두산 입구까지 한 시간을 달려왔다. 점퍼 안에 옷을 두세 겹 겹쳐 입었어도 한기가 몸을 움츠리게 했다. 구름이 발밑에 있고 태양은 가까워진 만큼 강렬히 망막을 자극했다. 내 발 앞에는 1442개의 계단이 천지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었다. 연신 승합차들이 내국인, 외국인 상관없이 우르르 관광객을 쏟아놓고 돌아갔다.어머니의 칠순 기념으로 백두산 탐방여행을 신청했다는 아들은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 앞에서 도저히 안 될 것 같다며 포기했다. 그는 시각장애만 있는 게 아니라 워킹 보조기구를 사용해야 할 정도로 걷는 것이 불편했다. 애써 웃으며 어머니라도 천지를 보고 오시라, 자신은 밑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돌아서는 그의 목소리에서 아쉬움과 익숙한 체념이 느껴졌다. 그가 보조기구를 ...

    2024.11.02 12:00

  • [조승리의 언제나 삶은 축제]도쿄타워보다 눈부셨다, 용사님의 노래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도쿄타워보다 눈부셨다, 용사님의 노래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아라이 부부와 함께한 오모테산도·하라주쿠·점자도서관, ‘도상’과 간 다이보 커피점… 관광지의 기억은 희미해졌어도 ‘만찬의 밤’ 날 살려준 노랫가락은 여전히 생생20대의 나는 안마사 일을 하며 적금을 붓는 한편 남동생의 대학 등록금까지 모아야 했다. 소문난 수전노로서 내 유일한 취미는 책을 듣는 것이었다. 잠을 자거나 일하는 시간 외에는 이어폰을 항상 귀에 꽂고 있었다. 독서는 현실을 견디게 만드는 즐거움이었다. 일본 소설을 들으며 아기자기한 시모키타자와의 골목을 상상했고, 홀로 고고히 빛을 밝히는 도쿄타워가 궁금해졌다. 7년짜리 적금이 만기되는 날, 반드시 일본으로 떠나리라. 그 계획은 고된 노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인내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수백권의 책이 쌓여갔다.그리고 7년 후 일본은 내 첫 자유여행지가 되었다. 우선 절친한 동료로부터 한국과 일본 시각장애인들의 교류를 돕는 직업학교 교사분을 소개받았다. 그는 흔쾌히 일본 저시력...

    2024.10.05 12:00

  • [조승리의 언제나 삶은 축제]그런 애는 하염없이 기다렸다…이런 나였는데도
    그런 애는 하염없이 기다렸다…이런 나였는데도

    시력이 점점 사라져가던 시기…좋지 않은 소문에 휩싸인 친구 ‘윤’‘실패자’라는 동질감에 그에게서 도망쳤던 과거…나는 비겁했다, 그때도 지금도윤은 뭐든지 나보다 빨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미 좋아하는 남자애가 수시로 바뀌었다. 하굣길에 그 애는 연예인 이야기나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 내용을 쉬지 않고 떠들어댔다. 반면 나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내가 지루해하며 발길을 서두르면 그 애는 유행가를 소심하게 부르며 안무 동작을 흉내 냈다. 그깟 거 연습해 뭐에다 쓰냐 물으면 윤은 좋아하는 애에게 보여줄 거라며 얼굴을 빨갛게 붉혔다.“공부도 못하는데 이런 거로라도 뽐내야 나를 봐주지 않겠어?”유치하다 생각했지만 내버려 두었다. 춤 연습을 하느라 뒤처지는 윤을 신경 쓰지 않고 앞만 보고 타박타박 걸어갔다. 윤은 도로 위에서 춤을 추다 내가 저만치 앞서 걸어가면 기다리라 소리치고 달려와 숨을 쌕쌕 내쉬며 내 옆에서 걸음을 맞췄다. 그러다 다시 두 팔...

    2024.08.3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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