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꿈의 구장’을 상상해보면

이용균 기자
[이용균의 베이스볼 라운지]한국식 ‘꿈의 구장’을 상상해보면

2008년, 당시 <1박2일>을 담당하던 이명한 PD(현 tvN 본부장)를 인터뷰했다. 그는 항상 K가 새겨진 파란색 야구 대표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야구광’이자 사회인 야구 선수였다. “꿈이 있다”고 했고, “야구장을 짓고 싶다”고 했다. 이 PD가 가장 감명 깊게 본 야구 영화, <꿈의 구장> 때문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야구장’을 짓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한평생 야구하고 싶은 꿈.

<꿈의 구장>은 1989년 개봉했다. 옥수수 농사를 짓던 주인공(케빈 코스트너)은 어느날 옥수수밭에서 계시를 받는다. ‘당신이 (야구장을) 지으면, 그들이 온다(If you build it, he will come)’. 옥수수밭을 밀어 야구장을 만들자, 그곳에 메이저리그의 전설들이 찾아와 야구를 하는 이야기다.

이명한 PD를 비롯해 많은 야구광들을 벅차오르게 했던 <꿈의 구장>이 현실에서 재현됐다.

지난 13일, 영화의 배경이었던 아이오와주의 넓은 옥수수밭에 진짜 야구장이 지어졌고, 그 야구장에서 야구 경기가 열렸다. 외야 담장 너머 옥수숫대 사이로 베이지색 바지와 흰 셔츠를 입은, 초로의 배우 케빈 코스트너가 천천히 걸어나왔다. 심각한 듯하면서도 설렘이 섞인 표정으로 마운드에 서자, 옥수수 사이로 선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영화에서는 세상을 떠난 전설들이었지만, 현실에서는 뉴욕 양키스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진짜 선수들이 걸어나왔다.

경기 내용도 ‘꿈’ 같았다. 홈팀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대표타자 팀 앤더슨은 7-8로 뒤지던 9회말 양키스 잭 브리튼으로부터 끝내기 홈런을 때렸다.

메이저리그의 꿈의 구장 이벤트는 향수를 자극하는 레트로 마케팅 전략을 넘어선다. 야구가 꿈이 되고, 꿈이 현실이 되어 다시 꿈을 꾸게 하는 선순환. 승패를 넘어선 특별한 의미가 야구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든다는 선언에 가깝다.

한국 야구에서 ‘꿈의 구장’은 가능할까. 방역 수칙 위반 사실을 숨기고 감추는 야구, 승패를 의식해 아무렇지도 않게 리그 중단을 결정하는 야구. 여전히 ‘우리 팀에 어떤 게 유리할까’만 따지는 야구에서 승패를 넘어선 ‘꿈’을 꿀 수 있을까. 패배의 원인에 대해 ‘배에 기름이 찼기 때문’이라는 주장과 8회 4점차로 역전당한 경기에서 껌을 씹는 건 투지와 근성 부족이라는(혹은 싸가지가 없는 것이라는) 확신들이 지배하는 리그에서 꿈을 꾸는 것이 허용되기는 할까.

그래도 한국식 <꿈의 구장>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꿈을 꾼다. 야구 영화 자체가 많지 않은 데다 고릴라가 등장하는 야구 영화는 현실화가 불가능하다. 그래도 과거를 기념하는 특별한 매치업은 가능하지 않을까.

야구 영화 <퍼펙트 게임>은 1987년 5월16일 사직 롯데-해태전을 다뤘다. 그날 최동원과 선동열은 15회까지 완투했고,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그날, 사직구장에서 다시 한번 그들을 소환할 수 있다면.

35주년이 되는 2022년 5월16일 사직구장에서 롯데와 타이거즈가 다시 만나고, 35년 전 경기에 뛰었던 이들이 경기 전 그라운드에 서고, 지금 선수들이 그때의 유니폼을 입고, 배우 조승우와 양동근이 시구를 하고, 롯데 김진욱과 KIA 이의리가 선발 맞대결을 펼친다면. 야구는 승패가 전부가 아니라, 세대를 잇는 역사의 종목이라는 걸 보여줄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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