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데이트]남자배구 현대 새사령탑 김호철

지난 17일 오후 3시 이탈리아의 베니스에서 20㎞ 떨어진 도시 프레비소. 한국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우리 현대 남자배구단의 히든카드는 김감독 당신뿐이오. 당신이 오지 않으면 팀을 해체할 생각이오.” 현대캐피탈 배구단 김상욱 단장의 협박 아닌 협박이 집에서 쉬고 있던 김호철 감독(48)의 귀를 때렸다. 벌써 3년째 들어온 구원요청. 더이상 외면하기 힘들었다.

“좋습니다. 가겠습니다.” 1970~80년대 배구계를 풍미했던 ‘코트의 마술사’ 김호철 감독의 현대캐피탈 감독 취임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16년 만에 약속을 지키러 왔습니다. 친정팀 현대가 어려울 땐 언제든 돌아와 돕기로 한 약조였지요.” 김감독은 “87년 현대배구단을 창단했던 정덕화 단장의 은혜를 입고 떠났다. 팀을 떠나면서 그와 했던 약속을 지키려고 16년 만에 돌아왔다”고 고백했다.

25일 용인에 있는 현대캐피탈 체육관에서 만난 김감독은 “시차적응도 아직 안됐지만 갈 길이 멀어 하루도 쉴수가 없다”며 코트를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인터뷰 도중에도 김감독은 수시로 선수들의 훈련상황을 체크하면서 코트를 팽팽한 긴장감으로 뜨겁게 달구었다.

지난 8월 이탈리아 청소년국가대표팀 감독으로 4년 계약을 했던 김감독은 계약위반에 따라 개인적으로 위약금을 물면서까지 이번에 한국행을 선택했다. 각각 16살, 20살 된 아들, 딸이 “아빠가 하시고 싶은 것을 택하세요”라며 후원했고, 전 배구국가대표팀 세터였던 부인 안경숙씨(45)도 “후배들에게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남겨주라”고 격려했다.

경남 밀양 밀주초등학교 6학년 때 배구와 인연을 맺은 그는 상대를 속이는 토스의 귀재로 이름을 날렸다. 머리 뒤에도 눈이 달려 있다고도 했다. 78년 한국배구를 세계 첫 4강에 올려놓은 로마세계선수권대회는 인생을 전환시킨 대회였다. 그의 경기를 지켜 본 현지 언론은 그를 “원숭이가 나무 위에서 재주를 부리듯 자유자재로 코트를 요리한다”고 극찬했다. “그로부터 3년 후 이탈리아팀 파르마 단장이 직접 러브콜을 해왔죠.”

81년 당시 이탈리아 대표선수들의 1년 연봉은 3천만원. 김호철감독은 처음 1년은 8만달러, 나머지 1년은 12만달러의 계약조건으로 스카우트됐다. 이후 3년간 36만달러에 재계약했다. “사실 선진배구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외국생활을 동경해서 나가고 싶었다.” 낭만적인 건물들과 영화에나 나오는 유적지 곁에서 사는 생활은 그야말로 영화가 아닐까 싶었다. 81년 결혼 직후 신혼여행을 자연스레 로마로 가게 된 김감독은 처음 1년간은 부인 안씨와 주말마다 발이 부르트도록 이탈리아 곳곳을 훑고 다녔다. 3년을 이탈리아 프로팀에서 뛰다 계약을 중도파기하고 84년 현대에 잠시 돌아온 김감독은 87년 다시 이탈리아행을 감행했다. 40살이던 95년이 돼서야 선수생활을 접고 김감독은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피는 못속인다. 그의 네 식구는 모두 스포츠에 인생을 걸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자란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은 이탈리아 주니어 골프계 랭킹 1위에 올라있고, 딸 역시 부모님의 유전자를 받아 이탈리아의 2부 리그 안코나에서 세터로서 활약중이다. 골프 싱글인 김감독은 틈만 나면 비거리가 300야드에 달하는 장타자 아들에게 레슨을 받는다고 했다.

“팀이 생각했던 수준보다 훨씬 낮다”는 김감독은 “유럽의 파워 배구를 접목시키기 위해 선수들의 체력을 최대한 끄집어 낼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화려한 기술에 힘을 곁들인다면 우수선수들로 구성된 현대캐피탈의 중흥은 시간문제라는 것이다. “현대에서 받은 것을 16년의 시간만큼 이자를 덧붙여 돌려줄 생각입니다.” 선수들에게 소리치는 그의 쉰 목소리에 현대의 장밋빛 미래가 실려 있었다.

〈심희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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