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게 시각장애인 전문 지도자로 뛰어온 서울올림픽 마라톤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 안기형 감독
세계적 마라토너 이언 톰슨(미국)은 “나는 행복하기 때문에 달리고, 달리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했다. 안기형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 클럽 자원봉사 감독(50·현대모비스 차장). 그는 톰슨처럼 마라톤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이다.
안 감독이 마라톤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77년 성남 성일중학교 2학년 때. 그는 밤늦게까지 한 영어 숙제를 두고 학교에 가게 됐다. 수업시간이 다가올수록 초조해하던 그에게 ‘육상부를 모집한다’는 교내방송 코멘트는 비상구였다. 선생님에게 혼나는 것이 무서워 무작정 테스트를 받으러 갔다.
마라톤 인생의 서막을 알리는 스타트였다. 장거리인 2000m에서 1위로 ‘피니시 라인’을 끊으면서 재능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안 감독은 1985년 경부역전마라톤대회 신인상, 1986년 전국체전 5000m와 1만m에서 입상하면서 ‘될성부른 떡잎’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서울올림픽 국가대표 상비군에도 뽑혔다.
삼성전자와 현대에서 선수생활을 했지만 1987년 동아마라톤에서 기대 이상의 성적이 나오지 않자 은퇴를 선택했다. 그러나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뛰는 것이 좋고, 행복했기 때문이다.
각종 대회에 참가하며 녹슬지 않은 기량을 과시했던 안 감독의 달리기 사랑은 10년 넘게 시각장애인을 가르치는 지도자로 변신하게 했다. 국내 최초의 시각장애인 전문 지도자가 된 것은 외국에서 열린 마라톤대회에 참가한 것이 계기가 됐다.
2002년 모로코에서 열린 ‘사하라 사막 마라톤대회’에 참가했을 때 “정식으로 마라톤을 배우겠다”는 국내 시각장애인들의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고심 끝에 승낙한 안 감독은 주말이면 시각장애인들에게 마라톤이 아닌 ‘달리기’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마라톤이란 표현을 잘 쓰지 않는다. 힘들고 어렵고 ‘고통’이 연상된다는 이유에서다.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 감독(국민체육진흥공단)도 “풀코스를 완주할 때 차 속에 뛰어들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느낀다”고 했으니 말이다.
행복감도 없고 자신과 싸워 이겨야 하는 부담감이 있는 것이 마라톤. 그렇기에 그는 ‘달리기’라고 부르길 좋아한다. 안 감독은 “모두가 다 같이 달리면 즐겁고 기분이 좋아진다”며 “시각장애인에게 만화영화 <달려라 하니>를 연상하면서 즐겁게 뛰라고 강조한다”고 말했다.
■ 발목 돌리기부터 직접 몸을 더듬게 해서 가르쳐
그러나 시각장애인들에게 달리기를 가르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10년 전 서울 남산 산책로에서 제2의 마라톤 인생의 동반자를 만났다. 스트레칭을 목청 높여 가르쳐야 했지만, 대부분의 장애인들은 기초적인 체조 동작조차 하지 못했다. 달리기 기초인 발목 돌리기도 마찬가지였다.
이유는 하나. 한번도 그런 동작을 해보지도, 본 적도 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떻게 가르칠까’라고 고민, 지도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안 감독은 그들의 손 감각이 뛰어나고, 맹학교에서 안마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는 “여러분들이 돌아가면서 두 손으로 내 온몸을 더듬어서 발목 돌리기의 자세를 익히세요”라며 온몸을 장애인들에게 맡겼다.
시각장애인들은 안 감독의 뒤에 서서 온몸을 더듬었다. 그렇게 훈련한 지 3주가 지나서야 스트레칭 교육이 마무리됐다. 달리기 교육도 스트레칭과 똑같은 방법으로 실시했다. 시각장애인들이 일일이 만져 촉감으로 배우게 했다.
임원호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 클럽 홍보부장(44)은 “안 감독은 시각장애인들이 마라톤을 쉽게 배울 수 있게 고심하고 노력해왔다”며 “10년간 자원봉사는 한마디로 함께 달리고 사랑하는 헌신 속에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 장애인과 동반주자 잇는 끈도 직접 개발
그는 시각장애인과 동반주자를 잇는 끈도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발했다. 손을 잡고 뛰다 보면 땀이 나 손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그는 재봉기술을 가진 2급 시각장애인의 도움을 받아 끈을 완성했다. 이 끈은 장애인과 동반주자가 손에 들거나 팔에 묶고 편하게 달릴 수 있다.
그러나 안 감독의 이 같은 노력과 헌신에 편견을 가지는 이들도 있었다. 이들은 그에게 “앞을 못 보는 장애인들에게 왜 위험하게 마라톤을 지도하느냐”, “도대체 시각장애인들은 왜 달리느냐”며 따져 묻곤 했다.
그럴 때면 안 감독은 “장애인들이 스포츠를 매개로 사회로 나와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도록 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며 “장애인들이 사회와 단절된 벽을 넘어 밖으로 나오게 해야 ‘차별의 벽’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안 감독은 시각장애인들 사이에서는 스승이자 친구로 통한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달리기에 대한 열정과 사랑이 지금의 안 감독을 만들었다.
다만 그는 가족들에게는 “늘 미안하다”고 말한다. 간혹 부인인 장필주씨(48)가 “주말에 아이들과 놀아주고 집안일도 도와주면 좋겠다”고 투정을 부린다. 그러나 그는 부인이 가장 큰 후원자라고 치켜세웠다.
안 감독의 꿈은 더 큰 무대로 향하고 있다. 제자들과 장애인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출전하는 것. 그는 “현실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고 했다. 지난 1일 열린 제10회 충북 영동포도 마라톤대회에서 안 감독과 함께 달린 여성 시각장애인 배선애씨(42)가 하프코스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렸다. 배씨는 하프코스(21.09㎞) 출전 두 번 만에 데뷔 기록을 무려 1시간이나 단축하며 2시간1분에 골인했다.
안 감독은 11월 서울에서 열리는 중앙마라톤대회에서 배씨와 함께 풀코스에 도전한다. 배씨는 “열심히 뛰었는데 만족할 만한 기록이 나와 매우 기쁘다”며 “감독님이 큰 힘이 됐고, 다음 대회에는 더 좋은 기록과 풀코스 완주를 목표로 열심히 훈련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