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 지상주의 넘고…같이의 가치 드높여

이용균 기자

스포츠가 있어 다행이었다

지고도 상대 선수의 손을 들어주며 패자의 품격을 보여준 유도의 조구함과 태권도의 이대훈, 김연경과 함께 마지막 경기까지 파이팅을 외치며 최선을 다한 여자배구팀(왼쪽부터)의 모습은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승리보다 더 값진 올림픽 정신을 보여줬다. 연합뉴스

지고도 상대 선수의 손을 들어주며 패자의 품격을 보여준 유도의 조구함과 태권도의 이대훈, 김연경과 함께 마지막 경기까지 파이팅을 외치며 최선을 다한 여자배구팀(왼쪽부터)의 모습은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승리보다 더 값진 올림픽 정신을 보여줬다. 연합뉴스

2021년은 좋았던 한 해로 기억될 수 있을까. 코로나19에 지칠 대로 지친 가운데 물리적 거리감이 심리적 거리로 확산되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라는 느낌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거기에 스포츠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새로운 가치가 환기됐고, 가치를 통한 감동이 많은 이들에게 기운을 불어넣었다. 뉴제너레이션의 자신감이 빛났고 승리가 아니라 승리를 향해 가는 길이, 함께 가는 길이 더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게 했다.

일본 매체 스포니치는 개막 직전 ‘어쩌면 저주받은 올림픽’이라고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1년 늦춰진 2020 도쿄 올림픽이 수많은 반대 속에서도 강행됐다. 100년 넘게 이어 온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라는 모토에 ‘다 함께’를 더했다. 이제 ‘Faster, Higher, Stronger - Together’가 올림픽 모토다.

‘다 함께’는 흔들리던 올림픽을 조금은 특별하게 만들었다. 여러 선수들이 ‘X’를 표시하며 인종 차별 반대 목소리를 냈다. 차별 반대는 ‘다 함께’를 향한 걸음이다.

올림픽에 나선 대표팀 선수들은 과거와 달랐다. ‘메달’이라는 결과에 집중하기보다 승리를 향한 과정에 더 큰 의미를 뒀다. 고단했던 준비에 대한 자신감이 넘쳤고, 그 자신감을 큰 무대에서 마음껏 뽐냈다.

2020 도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놓고 격돌한 뒤 끌어안고 웃었던 배드민턴 여자복식 팀과 양궁장을 ‘파이팅’ 소리로 가득 채웠던 김제덕, 목발을 짚은 선배 박경수를 끝까지 기다렸던 KT의 한국시리즈 우승 세리머니(왼쪽부터)는 ‘함께’하는 스포츠 정신을 보여줬다. 연합뉴스

2020 도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놓고 격돌한 뒤 끌어안고 웃었던 배드민턴 여자복식 팀과 양궁장을 ‘파이팅’ 소리로 가득 채웠던 김제덕, 목발을 짚은 선배 박경수를 끝까지 기다렸던 KT의 한국시리즈 우승 세리머니(왼쪽부터)는 ‘함께’하는 스포츠 정신을 보여줬다. 연합뉴스

안산은 양궁 여자개인 4강전과 결승에서 모두 슛오프로 이겼는데 혼잣말로 “쫄지 말고 대충 쏴”라고 말했다며 웃었다. 김제덕의 눈치 보지 않는 ‘빠이팅’ 역시 뉴제너레이션이 보여주는 자신감의 상징이었다. 양궁 남자 단체전에서 맏형 오진혁은 결승전 마지막 발을 날린 직후 “끝”이라고 나직이 뱉었다. 김우진은 개인 8강전에서 패한 뒤 “쏜 화살은 돌아오지 않는다. 어떻게 해피엔딩만 있겠나”라고 말했다.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 중요할 뿐, 결과는 그다음이라는 것을 보여줬다. 스포츠가 줄 수 있는 교훈 하나.

김우진.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김우진.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뉴제너레이션은 올림픽을 즐기는 방식이 조금 달랐다. 아버지 여홍철은 26년 전 착지 실수로 은메달을 따고도 고개를 숙였지만 딸 여서정은 비슷한 실수를 하고도 동메달을 따자 “너무 좋다”며 환하게 웃었다. 연거푸 신기록을 세우며 세계를 놀라게 한 황선우는 남자 자유형 200m 결승에서 150m 구간까지 1위를 달리다 오버페이스 때문에 7위로 골인했다. 예전 같으면 ‘전략 실수’라는 자책과 비난이 나왔겠지만 황선우는 “우와 첫 100m를 49초대에 들어왔다고요? 그걸로 만족할게요”라며 웃었다.

여서정이 일본 도쿄 아리아케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기계체조 여자 도마 결선에서 밝은 표정으로 연기를 마치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여서정이 일본 도쿄 아리아케 체조경기장에서 열린 2020 도쿄 올림픽 기계체조 여자 도마 결선에서 밝은 표정으로 연기를 마치고 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다 함께’하는 과정은 더욱 특별했다. 여자 배구 대표팀의 김연경이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해보자, 후회하지 말고”라고 외친 장면은 보는 이들을 울컥하게 했다. 다 함께, 마지막까지 쏟아부어 뭔가를 해본 게 언제였을까. 누군가와 함께 온 힘을 쏟아부어 이룬 성과는 어떤 기분일까. 여자 배구 대표팀을 향한 열광은 ‘함께’라는 가치에 대한 공감이었다.

여자 배드민턴 복식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우리끼리 맞붙었다. 경기 당일 드라마를 함께 보면서 아침밥을 먹고는 네트를 두고 섰다. 경기가 끝난 뒤 네트를 넘어가 함께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김소영·공희용은 “이겨서 미안했다”고 했고, 이소희·신승찬은 “이겼는데, 맘껏 좋아하지 못하는 것 같아 더 미안했다”고 했다. 그들의 ‘함께’는 승패를 넘어선 감동을 줬다.

패배가 더 이상 ‘죄’가 아니어서 더욱 다행이었다. 태권도 간판스타 이대훈은 동메달 결정전에서 자오솨이(중국)에게 패한 뒤 엄지를 들어보였다. 이다빈 역시 결승전에서 진 뒤 밀리차 만디치(세르비아)를 향해 엄지척을 했다. 유도 조구함은 울프 아론의 손을 번쩍 들어올려줬다. “오늘의 울프가 가장 강한 상대였다. 패배를 인정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멋진 패배를 보여줘서, 참 다행이었다.

옛날 올림픽의 승리 지상주의는 이제 성장과 노력, 성취에 대한 자신감 등이 대신했다. 이번 올림픽을 통해 선수들은 ‘너를 이기는 것’이 승리가 아니라 ‘나를 이기는 것’이 더 중요한 승리라는 걸 보여줬다. 스포츠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알려줬다. 편집(혹은 조작)을 통해 강요된 감동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날것이 보여주는 감동, 효율과 승리에 매몰돼 잊고 있던 가치가 살아나는 현장이 있었다. KT의 한국시리즈 우승 순간 박경수의 목발도 그런 장면 중 하나였다. 모두가 지치고 힘들었던 2021년, 스포츠가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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