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렬로 늘어서 숫자로 불리는 집들…냉전이 만든 마을엔 이야기가 있다읽음

김종목 기자

DMZ 안보관광에서 평화관광으로

당신이 떠올릴 이런 흔한 ‘비무장지대’모습 말고 사람들의 삶이 있는 풍경…민북마을

당신이 떠올릴 이런 흔한 ‘비무장지대’모습 말고 사람들의 삶이 있는 풍경…민북마을

구글에서 알파벳으로 ‘DMZ(비무장지대)’를 이미지 검색하면, 대부분 판문점이 뜬다. 중국인 150명, 독일인 150명, 아일랜드인 150명 등 외국인을 대상으로 벌인 ‘DMZ 하면 떠오르는 키워드’ 조사(경기연구원)에서 ‘전쟁’이 지난해보다 증가(4.4%→6.7%)한 결과를 반영한다. 한글 ‘비무장지대’ 검색 결과는 주로 이 일대 자연 풍광이다. 지난 17일 문화체육관광부·한국관광공사 주최로 열린 ‘DMZ 평화관광 정책토론회’에 나온 박한솔 올어바웃 대표는 각각의 검색 결과인 ‘군사 안보’와 ‘자연’을 열쇳말로 이야기를 풀어갔다.

접근성 때문에 DMZ 자연을 감상하기란 쉽지 않다. 여러 통일전망대는 안보와 군사 대치 이미지가 여전히 강하다. ‘DMZ 접경지역 삶의 이야기와 평화관광’ 세션의 주제 발표자로 나온 박 대표는 “DMZ를 확장해서 보자”며 민간인출입통제구역에 형성된 ‘민북마을’을 ‘안보관광에서 평화관광으로’ 가는 길의 한 축으로 제시했다.

■생활문화 유산이 켜켜이 쌓인 곳

민북마을 집들은 비슷하다. 각 집은 ‘1호집’처럼 호수로 불린다. 사진은 이길리 마을. 사진 올어바웃 제공

민북마을 집들은 비슷하다. 각 집은 ‘1호집’처럼 호수로 불린다. 사진은 이길리 마을. 사진 올어바웃 제공

박 대표는 2016년 서울대 환경대학원에 다닐 때 연구실 ‘리얼 DMZ 프로젝트’를 위해 민북마을을 처음 찾았다. 이후 5년째 매달 한 번씩 민북마을을 오간다.

석사 논문도 ‘DMZ 접경지역’을 주제로 썼다. 2018년부터 지도교수인 조경진 교수와 함께 분단과 평화관광, 생태, 주민생활 같은 주제로 만든 작품을 여러 전시회에 출품했다.

건축사이기도 한 그는 이곳 건축문화가 우선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철원 민북마을은 허허벌판에 일직선으로 비슷한 집들이 들어섰어요. 이 집들은 주소가 아니라 호수로 불립니다. 초소를 지날 때 ‘이길리 37호 가요’라고 하죠.”

민북마을엔 군인과 민간인이 함께 산다. 군사독재 정권 때는 군인과 주민 관계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그것과 비슷했다. 지금은 수평적인 관계지만, 군사문화는 남아 있다. ‘○○호’는 그 문화의 하나다. 박 대표는 ‘개척 영농’과 결합한 이 문화를 근절해야 할 것으로 보진 않는다. 그는 “다른 안보관광지와 달리 민북마을은 한국전쟁 이후의 시간이 켜켜이 쌓이며 특유의 문화를 형성한 곳”이라고 말했다. 특유의 문화를 예로 들면, 철원 민북마을 주민들은 추수 뒤 낙곡을 내버려 둔다. 두루미가 이 낙곡을 먹으며 겨울을 난다. 인간과 동물의 공존이 자연스레 싹트며 이곳은 대표적인 두루미 서식지가 됐다.

이길리·유곡리의 마을공동체 경관과 주민 인터뷰를 담은 작품 ‘통제된 공동체’(박한솔·윤승용). 사진 올어바웃 제공

이길리·유곡리의 마을공동체 경관과 주민 인터뷰를 담은 작품 ‘통제된 공동체’(박한솔·윤승용). 사진 올어바웃 제공

올어바웃은 로컬(Local·지역) 공간 콘텐츠를 개발하는 스타트업이다. 냉전이 녹아든 정치적 경관을 지금의 공간과 시간으로 풀어내 재구성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페이스북(facebook.com/aboutdmz.page)과 인스타그램(@aboutdmz)에 ‘주간 디엠지’ 소식을 싣는다. 지난해엔 <어바웃 디엠지, 액티브 철원>을 냈다. 마을 풍경과 민북마을 소재 예술을 다뤘다. 주민 인터뷰와 취재진 체험이 콘텐츠 근간이다. 1세대 거주자인 신현녀씨와 2세대 주민인 김일남씨에게서 과즐(한과의 다른 이름) 유래와 만들기 비법을 들어 소개했다.

‘로컬 공간 콘텐츠’의 핵심은 건축물과 시설을 새로 짓는 게 아니라 기존 것에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이다. 박 대표는 ‘금강산선’을 예로 들었다. 철원군의 철원역과 금강산 내금강역을 연결하던 전기철도다. 한국 지역 금강산선 철로는 농로나 다리 형태로 남아 있다. “일제강점기 경성역에서 철원역까지 와 갈아탄 뒤 금강산으로 갔어요. 민북마을인 양지리, 이길리, 정연리, 유곡리를 다 잇죠. 어르신 중엔 일제강점기에 이 철도를 타고 금강산에 여행 갔다는 분도 있어요. 정부가 ‘DMZ 평화의 길’을 조성 중인데, 이 길도 평화의 길로 활용하면 좋을 것 같아요.”

유곡리 무기고는 농촌 활성화 사업 때 공원으로 바뀌며 헐렸다. “유곡리를 단지 농촌으로, 무기고를 그저 창고로 여겼기 때문에 헐었죠.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 이야기가 무성한데도요. 도시 재생이니 농촌 뉴딜이니 하는 정책은 마을 특징이나 서사에 대한 이해 없이 그냥 빨리 진행되곤 했어요.”

박 대표는 지금의 안보관광이나 평화관광을 거시 역사 중심이라고 본다. “역사는 힘 있는 사람 중심으로 쓰인 것이잖아요. 큰 틀에서만 바라보고요. ‘기억의 역사’란 말에 동의하는데, 독일 베를린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당시 사람들의 일기나 편지, 사진 같은 것이었죠. 제 가족과 제 일상에 대입하니 충격적이고 슬프더라고요.” 그는 전쟁을 경험 못한 젊은층에겐 민북지역 주민 개인 사연과 일상에 기반한 이야기가 내면의 울림과 평화관광에 대한 응원을 끌어내리라고 본다.

민북지역은 통념과 달리 민박이 가능하다. 숙박시설을 갖춘 곳도 있다. 서울시는 유곡리에 폐교된 유곡분교를 리모델링해 캠핑장을 운영한다. 박 대표는 이 캠핑장이나 숙박시설을 주민의 삶과 이야기와 연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했다.

■불안한 삶들, 지속 가능한 공간 될까

소이산 전망대에선 철원평야와 DMZ, 북한 땅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 올어바웃 제공

소이산 전망대에선 철원평야와 DMZ, 북한 땅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진 올어바웃 제공

토론회에선 ‘공간 스토리텔링 기반 평화관광 활성화 전략’ ‘관광 콘텐츠의 신기술 적용과 발전방안’ ‘오감으로 즐기는 DMZ: DMZ 평화관광 실감미디어 체험관 조성사례’ 같은 주제 발표가 이어졌다.

문체부와 관광공사는 지난해부터 DMZ 접경 주민들의 삶과 이야기를 발굴해 관광자원화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정태경 문체부 국내관광진흥과장은 토론회에서 “삶과 스토리를 입힌 관광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고 있다. 고령화가 진행되는 만큼 주민 이야기를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 올해는 구술 채록을 시작한다. 수집한 자료로 ‘DMZ 기억의 박물관’을 만드는 것도 구상 중”이라고 말했다. ‘민북마을 살아보기’ 같은 아이디어도 나왔다고 전했다.

민북마을의 지역 특수성과 주민의 ‘기억’을 현재 ‘지속 가능한 삶’과 어떻게 연계할지가 숙제다. ‘관광자원화’ 같은 말엔 지역민들을 대상화하는 문제도 들어간다.

이길리는 지난여름 수해를 당했다. 1996년과 1999년에 이어 세 번째로 마을이 물에 잠겼다. 주민들은 지난 21일 청와대 앞에서 집단이주 지원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전략촌 조성 당시 주민들은 들녘이 내려다보이는 아늑한 곳에 터를 잡으려 했으나 군당국이 마을 부지를 북한에서 잘 보이는 한탄강변으로 옮기도록 해 수해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정부와 도·군은 ‘이주택지 조성사업’에 146억8000만원의 예산을 책정했는데, 대부분 도로 같은 기반시설 건설비용이다. 가구당 보조금은 1600만원이다. 주민들은 주택 신축에 턱없이 부족한 액수라고 말한다.

민북마을은 남북관계에 요동친다. 북한이 도발하면 모내기를 하다 중단하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코로나19와 아프리카돼지열병 때문에 여행객도 끊겼다. 고령화 때문에 60대만 해도 ‘젊은이’로 여겨진다. 주민들은 ‘거시적인 평화관광의 미래’를 고민하기보단 그날그날의 생존과 마을의 미래를 걱정하며 산다. ‘삶터’이기 때문이다. 박 대표는 “민북마을 중에서도 북쪽에 가까운 지역 분들은 (사망한 뒤) ‘자식들도 떠나는데, 누가 여기 와서 살겠는가. 마을이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들 하신다”고 말했다.

올어바웃은 이길리의 쌀을 크라우딩 펀딩으로 팔려고 한다. 박 대표는 “지역 특산물에 주민 삶과 스토리를 담으려고 한다. 소량이나마 어려움에 빠진 주민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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