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군은 주민 2만6000명의 작은 고장이다. 위로부터 시계방향으로 임실, 남원, 곡성, 담양, 장성, 정읍에 둘둘 싸여 있어 지도에서 찾으려면 한참을 들여다봐야 한다. 보통 순창 하면 고추장 장독대가 먼저 떠오르는데, 사실은 기막히게 숙성된 여행이 숨어 있다. 순창군을 널리 탐험하기 위해 운동화 끈을 동여맬 필요도 없다. 푹신한 슬리퍼를 끌면서 읍내 골목만 누벼도 생각지 못한 여행을 만나게 된다.
순트럴파크를 품은 ‘금산여관’
기행문이 아닌 현실여행에서는 일단 숙소부터 정해야 마음이 홀가분하다. 주택가 한복판에 있는 금산여관은 희한한 곳이다. 고풍스러운데 무겁지 않고, 오히려 산만해서 편하다. 아마도 주인장 ‘홍대빵’으로 불리는 홍성순씨 때문인가보다. 그녀는 늘 부산스럽다. 여행자 숙소의 ‘대빵’답게 툭하면 짐 싸 들고 비행기를 타기 일쑤다. 최근에도 조지아와 튀르키예를 한 달간 다녀왔다. 그녀가 없는 동안에도 금산여관은 굴러간다. 여행으로 친해진 손님들의 자발적 참여 덕분이다.
금산여관은 1938년 지어진 구옥이다. 폐가가 된 여관건물을 홍성순씨가 매입 후, 11년째 게스트하우스로 운영 중이다. 물론 리모델링을 했다고 특별히 편리해진 것은 아니다. 객실의 첫 번째 덕목인 에어컨조차 없다. 손님들은 선풍기로 불편한 밤을 보내야 하지만, 행복한 얼굴로 아침을 맞이한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덥고 습했던 올여름에도 빈방이 거의 없었다고.
금산여관의 중정은 ‘순트럴파크’라 불린다. 재즈 페스티벌, 구들장 토크쇼, 북 콘서트 등이 열리는 나름의 스테이지다. 사람들은 툇마루에 자유롭게 걸터앉아 또 다른 여행 이야기에 빠져든다. 그리고 ‘떠남’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창림동두부마을’의 해맑은 한 끼
여행의 첫 끼니는 부담스럽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창림동두부마을’을 선택했다. 2대 대표 김평순씨(67)가 태어나기 전부터 두부를 만들었다니 대충 잡아도 70년은 족히 넘은 노포다. 순두부와 비지비빔밥 그리고 모두부를 주문했다. 먼저 콩나물, 깻잎, 6년 묵은지, 제주표 무생채가 어중간한 오와 열로 상 위에 놓였다. 물론 고추장 종지까지, 역시나 순창이다. 이윽고 본 메뉴가 등장했다. ‘아무렇지 않고 예쁠 것은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를 닮은 두부 덩어리, 김이 모락모락하니 상 위가 금세 순박해졌다. “파는 넣지 마쇼, 향이 세서 본디 맛이 없어져 버링께.” 파 종지까지 치우며 제대로 먹어 보라는 잔소리다. 순두부 국물을 한 모금 떠서 얌전히 삼키자 식도를 타고 흐르는 구수함이라니, 평양냉면 할아버지쯤 되는 심심한 국물로 속을 데우고 나니 오장이 편안해졌다.
비지비빔밥은 처음이었다. 주인장의 가르침대로 자박한 콩비지에 밥을 반쯤 말고 콩나물과 무생채를 얹고 이때만을 묵묵히 기다리던 고추장을 한 수저 떠 비볐다. 밥이 비지인지, 비지가 밥인지, 궁합이란 이런 건가 싶다. ‘창림동두부마을’은 아들 김상욱씨가 함께 운영 중이다. 말 그대로 3대째, 대를 이어가는 소중한 맛집이다.
남편을 위한 건강한 빵, 베르자르당
금산여관 홍대빵이 달랑 얼음물만 한 잔 내놓은 이유를 알았다. 커피는 카페 가서 마시라는 뜻이다.
베르자르당은 Verre(유리) Jardin(정원)의 합성어로 폐관된 예식장을 리모델링한 카페다. 2700평의 너른 부지에 호화로운 선룸과 유럽풍 건물, 거기에 분수 풀장과 잔디 정원까지 갖추고 있어 커피나 빵값만 내고 즐기기에는 조금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베르자르당 베이커리는 일명 ‘남편을 위한 빵’을 굽는다. 위암 환자였던 남편을 위해 무설탕, 무우유, 무버터, 무방부제에 천연발효종 저온 숙성으로 건강한 빵을 만든 것이 시작이다.
베르자르당은 문화예술 복합공간의 역할도 맡고 있다. 스몰웨딩뿐만 아니라 문화행사 및 예술전시, 공연도 꾸준히 개최한다.
먹물 소시지 빵, 갈릭 바게트 볼, 쌀 소금 빵을 각각 하나씩 사서 정원이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먹었다. 역시 ‘밥배’와 ‘빵배’는 따로 있는 것이다.
딸기 오마카세가 곧 화양연화
‘화양연화’는 한옥 카페다. 다소 클래식한 분위기임에도 고객은 의외로 젊은층이 많다. 바로 ‘딸기 오마카세’ 맛집이라서다. ‘화양연화’의 모든 메뉴는 비주얼로 압도한다.
음료와 디저트가 쟁반 가득 담겨 나오는 ‘딸기 오마카세’. ‘모찌 오마카세’, 그리고 ‘채계산 출렁다리 빙수’의 자태가 화려하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릴 사진 한 컷을 담기 위해 인근 도시에서 일부러 찾아올 정도다. 곳곳에 포토존이 마련돼 있는 것도 그들의 감성과 일치한다.
‘빵배’와 ‘커피배’도 분리하길 다행이다. 이제는 정말 커피를 음미할 시간. 교자상을 앞에 두고 양반 자세로 고쳐 앉았다. 오래된 창호 문 너머 사극에나 나올 법한 사랑방이 편안하게 다가왔다. 등을 벽에 기대고 한참을 앉아 있으니 졸음이 쏟아진다.
여유롭고 맑은 집, 한정당
한정당은 순창을 여행할 때마다 자주 찾는 한옥 카페다. ‘여유롭고 맑은 집’이라는 뜻의 격조 높은 가옥은 1946년에 지어졌다. 그러다 보니 한국전쟁을 비롯한 근현대사의 애환을 고스란히 겪어왔다.
한정당은 한옥 건축물의 구조미가 돋보이는 곳이다. 대청마루와 누마루 그리고 다락방으로 이어지는 공간마다 소소한 기발함이 숨어 있고, 실내에서조차 햇빛과 바람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개방적이다. 한정당의 시그니처는 쌀빵이다. 100% 국산 현미를 발효시켜 만든 건강한 빵이다.
참고로 한정당의 현 조종현 대표의 모친 문옥례 여사는 대한민국 식품명인 36호이자 순창고추장 제조명인이다. ‘순창고추장’이라는 고유명사 또한 평생을 고추장에 바쳐 온 그녀의 정성과 열정으로 만들어졌다. 물론 조 대표 역시 고추장 명인으로 가업을 잇고 있으니 예사롭지 않은 맛의 스토리에 커피 한 잔, 빵 한 조각조차 달리 보인다.
골목에서 만난 미술관, 영화관
순창의 옛 이름은 옥천(玉川)이다. 한자 뜻 그대로 물이 좋아 붙여진 이름이다. 읍내를 쏘다니다 보면 섬진강 줄기 경천과 자주 부딪치게 된다. 경천은 봄날의 벚꽃이 장관이라지만, 초록이 싱그러운 여름날의 풍경도 꽤 운치가 있다.
옥천골미술관은 유별나지 않은 문화공간이다. 80년대까지 농협창고로 사용했던 것을 리모델링한 시설이다. ‘문턱이 낮은 미술관, 지역과 소통하는 미술관’이란 캐치프레이즈를 가진 이곳은 누구에게나 개방된 자유로운 공간이다. 콘텐츠도 소소하다. 어린이, 주민 동호회부터 전문 아티스트들의 작품까지 평등하게 전시된다.
미술관 건너편에는 ‘천재의 공간 영화산책’이란 작은 영화관이 있다. 2개 상영관에 149석의 좌석이 마련된 개봉관이다. 문화에 소외된 지역민들을 위해 순창군에서 짓고 위탁 운영되는 시설이지만, 여행자에게도 자투리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낼 기회를 제공한다.
‘천재의 공간 영화산책’에서는 시중보다 훨씬 싼 7000원에 최신 영화 한 편을 감상할 수 있다.
>> 가족과 함께라면…복합문화공간 ‘순창발효테마파크’
순창발효테마파크는 순창의 전통 발효 문화를 다양한 전시, 체험, 놀이로 재구성한 시설이다.
12만9589㎡의 면적에 전시시설(발효소스토굴, 홍메관, 효모관, 팡이관, 다년생식물원, 고추식물원), 놀이시설(콩이관), 야외시설(천년광장, 팡이공원), 편의시설(카페, 식당, 기념품숍) 등을 갖추고 있다.
복합문화공간으로의 손색없는 구성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발효테마파크가 생긴 후 순창여행이 진일보했다고 평가한다. 더욱이 운영 주체가 ‘순창발효관광재단’(대표 선윤숙)으로 바뀐 이후에는 콘텐츠의 범위가 훨씬 넓어졌다.
대표적인 순창장류축제는 물론 계절별로도 활력 넘치는 이벤트와 다채로운 행사를 숨 가쁘게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지역의 자원까지 홍보하며 관광 허브의 역할까지 맡아 진행 중이다.
시설들을 둘러보니, 특히 아이를 동반한 가족여행이라면 힘들이지 않고도 사랑받는 아빠, 엄마가 될 수 있겠다. 온종일 머물러도 지루하지 않을 만큼 볼거리, 체험거리, 즐길거리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