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지독하던 폭염이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그렇게 한 해의 절반이 훌쩍 지났고, 1년의 버팀목인 여름휴가철도 끝이 났다. 날씨는 좋고 몸은 근질근질한 계절, 괜히 캘린더에서 남은 휴일을 찾아본다. 길게 어딘가로 여행 가는 게 여의치 않다면 부담 없이 가볍게 카페로 가보자. 세월을 잔뜩 머금은 특별한 카페들을 타고 시간 여행을 떠나는 건 어떨까.
1908년
군산세관사의 프렌치 불도그 ‘먹방이’를 찾아서
군산 인문학창고 정담 & 먹방이와 친구들
군산 월명동과 장미동 일대는 ‘시간여행마을’이다. 일본인이 살던 집, 일본인이 운영하던 회사, 일본 소유의 은행은 시간이 흘러 박물관이 되고 상점이 되었다.
거대한 타임머신으로 들어서면 하늘색 문이 예쁜 구 군산세관 뒤편, 모르는 사람은 우연히라도 보기 힘든 곳에 카페가 있다. ‘먹방이와 친구들’은 군산세관 창고였던 건물을 재미있게 개조했다. 1908년 당시엔 여러 시설을 많이 지었다는데 남은 건 본관과 창고뿐이다. 박물관이 된 본관과 달리 창고는 한동안 본래 역할에 충실했었다. 2018년까지 세관 압수품 창고로 사용된 비공개 시설이었던 것. 이후 군산세관과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인문학창고 정담 & 먹방이와 친구들’이라는 긴 이름 간판을 올리고 북카페 겸 소통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창고를 개조한 카페는 많지만 1908년에 지어진 원형 그대로 남은 곳이라, 그 시간이 주는 무게감이 남다르다. 근대 이후 가장 오래된 트러스 구조의 건축물이라는 설명에 계속 천장을 올려다보게 된다. 그 시선을 가로채듯 사로잡는 건 여기저기 자리한 귀여운 캐릭터 ‘먹방이’다. 1900년대 초 군산세관사로 부임한 프랑스인 ‘라포트’의 애견이었던 프렌치 불도그에서 영감을 받았다. 눌린 듯한 코가 돼지를 닮고 먹성 좋게 생겨서, 당시 사람들이 먹방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 먹방이를 닮은 ‘먹빵’이 이곳 대표 메뉴다. 군산 찰보리로 만든 담백한 빵에 단팥빵으로 유명한 이성당의 팥앙금이 들어간다. 먹빵이 캐릭터와 군산 여행지를 그려 넣은 초콜릿 또한 군산 찰보리로 만들었다. 거기에 진한 황제 아메리카노를 한 잔 곁들여보자. 1899년 군산 개항을 결정한 고종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메뉴다. 강하고 풍부한 보디감은 고종 황제가 즐겨 마시던 커피 맛을 살린 것이다. 역사와 이야기, 사람과 공간을 잇는 세심한 노력으로 100년 전 군산과 오늘이 이어지는 중이다.
1946년
담뱃잎 보관창고, 문화를 품다
청주 동부창고 카페C
카페 여행자에게 청주는 욕심나는 도시다. 흥흥제과, 카페 후마니타스, 카페 목간 등 오래된 집과 건물을 개조하거나, 이색적인 메뉴로 눈과 입을 사로잡는 카페들이 하도 많아 종일 카페 투어만 해도 될 정도다. 그중에서도 조금 더 특별한 곳을 고르라면 동부창고다. 1946년에 문을 열어 연간 100억개비의 담배를 만들고 수출하던 청주연초제조창은 2004년까지 이곳에 남아 있었다. 담배를 떠올리는 높은 굴뚝이 그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동부창고는 1960년대 초반, 담뱃잎 보관창고로 지어진 건물이다. 현재 남은 건 7개 동. 각 동은 전시관이자 체험관으로 탈바꿈했다. ‘문화제조창’이라는 새 이름도 붙었다. 지역의 다양한 문화 행사가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 청주공예비엔날레가 대표적이다.
저마다 새로운 역할을 수행 중인 건물 중 하나가 ‘카페C’다. 천장의 철골 구조물과 투박한 벽도 이곳이 창고였음을 말해준다. 1960년대 창고 건물의 원형을 고집했지만, 밖이 잘 보이도록 한 면을 유리창으로 트고, 야외에 정원을 꾸며 전시도 할 수 있다. 동부창고의 세세한 옛 모습은 전시로 전하고 있다. 처음 창고로 쓰이던 때부터 문을 닫은 후의 모습과 새 단장을 하기 위해 여러 사람이 힘과 지혜를 모으던 시기까지, 그간의 변천사를 사진과 영상으로 모았다.
시간여행 끝에 돌아온 디저트 타임. 시그니처 음료와 디저트를 맛보는 것은 카페의 도시 청주를 찾아온 여행자의 숙명이다. 라테아트로 동부창고 모양의 로고를 그려 넣은 동부 크림라테는 쌀과 우유로 크림을 만들어 담백하다. 초콜릿으로 유명한 청주 카페 ‘본정’의 케이크도 이곳에서 맛볼 수 있다.
1952년
옛날 다방에선 역시 프림 커피
전주 삼양다방
고백하건대, 처음부터 알고 찾아간 건 아니었다. Since 1952. 창문에 붙은 커다란 숫자가 눈에 들어왔고 이끌리듯 들어갔다. 다방에 왔으니 다방 커피를 주문해 볼까. “프림 들어가는데 괜찮아요?” 사장님의 질문이 다정하다.
6·25전쟁 중에 문을 연 전주 삼양다방은 경남 진해의 흑백다방(1955), 서울 대학로의 학림다방(1957)과 함께 손꼽히는 오래된 다방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이자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운영 중인 전주시 미래유산 8호다. 다방계의 살아 있는 전설인 셈.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3년 세 들었던 건물이 리모델링을 하면서 다방도 폐업 위기에 처했지만, 새 건물주의 후원과 지역 예술가들의 노력으로 1년 만에 재개장할 수 있었다.
과거 다방은 지식인들의 교류 공간이었다. 그뿐일까. 담배 한 대에 향긋한 커피를 곁들이며 청춘을 만끽하던 대중적인 곳이기도 했다. 삼양다방 역시 예술인들의 아지트이자 시민들이 즐겨 찾는 만남의 장이었다. 전주MBC와 같은 건물이던 시절엔 방송인, 예능인들이 다 이곳으로 모였다고 한다.
마치 두 개의 시간을 잇댄 듯 카페는 크게 두 공간으로 구분되는데, 입구 쪽 넓은 홀은 새로 아늑하게 조성했고, 안쪽의 옛 공간에는 갈색의 소파와 빛바랜 소품으로 세월의 연륜을 안착시켰다. 공간은 과거에 멈춘 듯하지만, 삼양다방의 시간은 지금도 생생히 흐르고 있다. 인문학 강좌가 열리기도 하고, 판소리 한마당이 펼쳐지기도 한다. 덕분에 과거의 사랑방은 여전히 현재를 살아가는 문화공간이 됐다.
1963년
옛 한국은행 금고 속 ‘달콤한 금괴’
까사 부사노 부산근현대역사관점
2024년 1월, 부산에 새로운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국제시장과 보수동 책방 골목이 자리한 광복동. 빛바램이 매력인 그곳에 눈길을 사로잡는 근사한 건물이 바로 부산근현대역사관이다.
지난해 먼저 개관한 별관은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건물로 지금은 도서관이자 열람실이다. 부산의 역사가 전시된 본관은 옛 한국은행 부산본부였다. 1912년에 처음 세워졌고 1963년에 신청사가 지어졌다. 당시 건립한 신청사 건물이 고스란히 박물관이 되었다.
분위기가 꽤 근사하다. 카페 이름은 까사 부사노. 까사(casa)는 스페인어로 집이고, 부사노(busano)는 부산 사람이다. ‘부산의 문화를 만들고 알리는 부사노들의 집’을 지향한다는 의미다. 해운대, 광안리 등에도 지점이 있다.
부산근현대역사관 안에서 까사 부사노가 위치한 곳은 한국은행 시절, 고객 금융 업무를 지원하던 공간이다. 객장과 영업장을 구분하기 위해 만든 카운터며, 신청사 건물을 짓던 당시에 설치한 금고가 여전히 남아 있다. 카운터는 커피를 즐기는 테이블로, 금고는 디저트 판매장으로 활용 중이다.
은행이었던 곳이니 한껏 ‘은행스러운’ 메뉴를 먹어보는 것도 좋겠다. 은행원들에게도, 은행을 찾는 고객들에게도 친숙한 음료였던 인스턴트커피. 이 믹스커피에서 착안해 만든 ‘(구)한국은행 오리지날 라떼’에선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정겨움이 느껴진다. 금괴를 닮은 골드바 케이크는 ‘한 해의 금전운을 가득’ 드린다는 설명에 한 톨도 남김없이 싹싹 긁어먹게 된다. 옛 한국은행을 보며 먹는 골드바라니, 이곳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맛이니 꼭 드셔보시길.
>>>여행작가의 팁
공간 하나만 보고 여행을 떠난다지만 음료만 마시기에는 아쉬움이 남을 터. 각 카페들은 품어온 세월만큼이나 풍성하고 다채로운 경험을 선사한다. 군산 먹방이와 친구들, 청주 동부창고, 전주 삼양다방은 카페이자 동시에 문화예술공간이다. 인문학 강의와 북토크, 전시회,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다. 까사 부사노는 별도의 프로그램을 제공하진 않지만, 박물관 안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전시실 외에 지하에 위치한 금고 미술관에서도 기획전이 열리니 방문 전 전시·프로그램 일정을 확인하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