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나고, 역겹고, 무섭다” 텍사스주 임신중단 금지법 맞서는 여성들의 외침읽음

윤기은 기자
텍사스주에서 임신중절을 사실상 금지하는 일명 ‘심장박동법’이 발효된 지난 1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주의회 의사당 앞에 법안에 반대하는 여성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스틴|AP연합뉴스

텍사스주에서 임신중절을 사실상 금지하는 일명 ‘심장박동법’이 발효된 지난 1일(현지시간)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주의회 의사당 앞에 법안에 반대하는 여성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오스틴|AP연합뉴스

미국 연방대법원이 태아의 심장박동이 감지되는 시기 이후로는 임신중절을 할 수 없다고 규정한 텍사스주의 ‘SB8법’(심장박동법)의 효력을 정지시켜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지난 1일(현지시간) 기각하면서 파장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여성단체들은 물론, 기업과 유명 연예인까지 나서 법 반대 서명과 텍사스 보이콧에 나섰다. 하지만 공화당이 대다수인 다른 주에서는 임신중절을 사실상 금지하는 법안을 줄줄이 통과시키려 하는 등 찬반 논란 또한 거세지고 있다.

문제의 텍사스주 법은 임신 6주 이후 임신부에게 임신중절 수술을 시행하거나 도와준 것으로 의심되는 의료기관과 의료진, 기타 조력자에 대해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시민에게 1만달러(약 1160만원)를 제공한다고 규정했다. 태아가 자궁 밖에서 생존할 수 있는 시기인 임신 23∼24주 이전에는 임신중단이 가능하다고 한 1973년 1월 대법원의 ‘로 대(對) 웨이드’ 판례와 배치된다. 하지만 텍사스는 불법 임신중절 단속의 주체를 주 정부가 아닌 시민으로 규정해 이 판례의 적용을 교묘하게 피해갔다.

사실상 임신중단 금지법이 발효되자 이를 규탄하는 목소리는 텍사스주를 넘어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4일 미국 여성들이 “화나고 역겹고 무섭다”면서 해당 법안에 대해 분노와 비통을 토해냈다고 전했다. 뉴욕에 사는 60대 여성 발레리는 가디언에 “남성의 몸을 통제하는 법은 없다”며 “이 법은 노골적인 여성혐오적 법안”이라고 비판했다. 텍사스 의학협회도 의료진의 의료 행위가 시민들에 의해 지나치게 간섭될 수 있다며 지난 3일 해당 법안에 반대하는 성명을 냈다. 미국 90여개 여성단체 및 임신중단 관련 단체들은 심장박동법을 강력 규탄하며 다음달 대규모 시위를 예고했다.

미국 연예계 인사들도 임신중단 금지법 반대 서명 운동에 나서거나 텍사스 활동 보이콧을 제안하는 등 들고 일어났다. 미국 배우 케리 워싱턴은 자신의 트위터에 임신중단 금지법에 반대하는 서명 운동에 동참하자고 촉구했고 리스 위더스푼, 에바 롱고리아, 두아 리파, 세인트 빈센트, 핑크 등 100여명의 인기 배우와 팝스타들이 이에 호응했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경력의 배우 퍼트리샤 아켓은 텍사스 현지 촬영 및 활동을 중단하는 ‘텍사스 보이콧’ 운동까지 제안했다.

현재 텍사스주에서는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임신중절을 하기 위해 텍사스주 근처 뉴멕시코주 의료기관을 찾는 사람도 늘었다. 하지만 임신중단 관련 시민단체 ‘플랜드 페어런트후드’의 비키 코워트 회장은 “차를 가지고 있고, 휴가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이 임신중절 수술을 받을 수 있다”며 “(임신중단 금지법은) 이동 자금이 없거나 유색인종 여성, 젊은 여성, 지방에 사는 여성들에게 특히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텍사스트리뷴에 말했다.

일부 기업은 법안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고 나섰다. 차량 공유 서비스 업체 우버와 리프트는 지난 3일 임신중단 금지법이 여성 인권을 해치는 법이라며 임신중절 시술을 받으려는 여성을 실어 날라 피소 위기에 처한 소속 운전기사의 소송 비용을 지원겠다고 밝혔다. 텍사스주의 새 법에 따르면 병원 의료진, 시민단체 회원, 운전기사 등 임신중절을 도운 모든 사람이 손해배상 청구 소송 대상이 될 수 있다.

파장이 커지자 텍사스주 트래비스 카운티 지방법원은 지난 3일 “의료진과 임신중절 조력 단체들이 회복할 수 없고 즉각적인 피해에 직면했다”며 임신중단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의료진과 임신중절 조력 단체들을 대상으로 소송하는 것을 2주간 금지하도록 하는 명령을 내렸다. 임신중절을 도와온 단체들이 앞서 재판부에 소송 일시 금지를 요청한 데 따른 것이다.

정치권도 움직이고 있다. 법무부에 법안을 무효화하기 위한 대응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3일 임신중절을 막는 법안에 대해 “터무니없고 거의 비미국적”이라며 법안에 대한 반대의사를 거듭 밝혔다. 민주당은 텍사스주의 임신중단 금지법을 무력화하는 법안을 만들어 통과시키겠다고 공언했지만, 연방 상원 의석을 민주당과 공화당이 절반씩 차지하고 있어 현실화될지는 미지수다.

텍사스주의 입법 이후 공화당이 대다수인 다른 주에서도 임신중절을 사실상 금지하는 법안을 줄줄이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올해 들어 약 30개주에서 임신중단 금지 관련 법안이 도입됐고 아칸소, 플로리다, 사우스캐롤라이나 등 15개 주는 임신 6주 이후 중절 금지 법안을 추진중이다. 워싱턴포스트는 “텍사스주의 임신중단 금지법이 미국 정치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면서 “공화당은 임신중단 반대 의제를 현실화하려 하고 있고, 민주당은 그동안 지켜온 임신중단 권리를 잃을 위기에 처하면서 양당 모두 전략을 재조정하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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